주인공들이 너무 가여워요 - 봉준호, 임권택을 생각하(면서 자기 영화들을 돌아보)다 ②

by.정성일(영화평론가,영화감독) 2014-09-30조회 30237
봉준호 감독 사진

정성일_ 작년 부산영화제 회고전에서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선택한 이유는 심금을 울렸습니다. 아직도 첫사랑을 생각하다니!! (웃음)

봉준호_ 첫사랑은 아니고 두 번째 여자죠. 석 달 만나고 헤어진, 그런데 지금은 어디서 뭘 하려나.(웃음)

정성일_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떠올리면 조건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은 무엇입니까?
봉준호_ 두 개가 있어요. 강수연 선배가 (비구니가 되었다가 환속하면서 머물던 산사를 떠나서 속세로 향하다가) 버스에서 내려서 산을 향해 우는 장면과 한지일 선배와 처음 섹스 할 때 (아직 삭발한 채로 드러나는 머리를 가리기 위해 쓴 모자가 떨어지려고 하자 그) 모자 쓰려고 할 때 카메라가 올라가는 장면. 저걸 어떻게 찍었을까. 강수연 선배님과 술을 한잔 하면서 물어볼 수 있어 영광이었는데 한 테이크 만에 찍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수평에서 시작해서 직부감까지 올라가는. 그 두 개가 생각이 나네요.

정성일_ 그 장면이 왜 그렇게 자신을 잡아 끈 거 같으세요? 이를테면 두 번째 장면은 여러 가지 기술적 효과나 강수연 씨의 연기도 있기 때문에 많은 비평가들이 주목하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제가 궁금한 것은 첫 번째 예로 든 장면입니다. 그 장면은 기술적으로 특별한 점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본 사람들 중에서도 그 장면을 기억해내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봉준호_ 보면서 되게 울컥 하더라구요. <러브레터>를 보면 산을 향해, 오겡끼데스까? 라고 부르는 데, 그거랑 많이 다르죠.(웃음)

정성일_ 임 감독님을 지지하는 비평가들을 만나면 비슷한 질문을 합니다. 최고(Best)가 아니라 가장 좋아하는(favorite) 영화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어떤 장면이 즉각적으로 떠오릅니까.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선택한 사람은 토니 레인즈였는데 뒤이은 질문에 바로 그 장면을 얘기했어요. 그러면서 임 감독님의 모든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씬일 뿐만 아니라 한국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다, 고 말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토니 레인즈는 한국 영화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서방세계 비평가이지 않습니까.
봉준호_ 저는 감성적으로 울컥했을 뿐더러 제가 울컥했다는 게 굉장히 신기했어요. 강수연 언니 얼굴이 안 나오고 음악도 안 나오고, 카메라가 다가가지도 않아요. 탁 주저앉고 산이 있는데 그걸 길게 끌지도 않으셨을 거예요. 저는 슬프기도 하면서 찌릿했어요. 그리고 대처로 나가는 거잖아요. 그래서 부산에서 다시 볼 때도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걸 89년에 서울에서 봤을 때와 24년 만에 (부산영화제에서) 다시 보면서, 그 사이 24년 동안 저한테 굉장히 많은 일들이 있었잖아요. 두 번째 여자 친구는 얼굴도 가물가물하고 영화감독도 되었고 결혼도 했고 애도 낳았는데. 같은 장면인데 다른 감정이 느껴지더라구요. 제가 저 장면을 찍었다면 어땠을까. 카메라를 강수연 선배 앞으로 갖고 가고 싶어 하는 유혹을 끝내 못 이겨내지 않았을까. 그게 아까 처음에 말씀드렸던 임권택 감독님 영화에서 묘한 감정의 소용돌이 선선함, 감정이 침전되는 그런 예일 수도 있을 거 같아요. 봤을 때는 굉장히 찌릿했었어요. <길소뜸>에서 한지일 선생께서 죽은 개를 들고 가는 장면도 강렬하지만. 그건 누가 봐도 강렬하게 잔상이 남을 수밖에 없는데, 그리고 저는 뒷모습이 많이 생각이 나네요. 마지막 장면에서 강수연 언니가 걸어가는... 전형적인 라스트 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절과 속세에 대해 끌고 왔던 그 영화 전체의 내러티브가 있는 탓도 있겠지만 사람들 틈으로 가는 강수연 씨의 남다른 뒷모습의 느낌이 있었다는 거 같아요. 뒷모습을 잘 찍는 다는 게 뭘까. 내가 영화에서 봤던 가장 인상작인 뒷모습이 뭘까, 가끔 생각해봐요

정성일_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에드워드 양도 뒷모습을 잘 찍는 감독입니다.
봉준호_ <태양은 없다>에서도 정우성 씨의 뒷모습을 굉장히 잘 찍었습니다. 거기서 굉장히 외로워 보였습니다.

정성일_ 정우성 씨를 카메라 앞에 세우면 다들 앞을 찍고 싶어 하죠.

봉준호_ 저는 김성수 감독님 영화중에는 <태양은 없다>를 제일 좋아해요

정성일_ 부산에서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선택하기는 했지만 102편이나 되는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중에서 딱 한 장만 티켓을 준다면 어떤 영화를 선택하시겠어요? 만약 저라면 봉준호 감독의 한 편은 <괴물>을 선택할 것입니다. <살인의 추억>으로 미워졌던 제 마음을 호의로 돌아서게 해준 작품이니까요. (웃음)

봉준호_ 중간에 한 단계를 거치면 조금 쉬워지지 않을까요? <짝코>, <티켓>, <아제아제 바라아제>일 거 같아요. <티켓>은 제게 잔상이 많은 영화였어요. <길소뜸>도 물론 아름다웠고, <개벽>도 있었고, (잠시 생각) <축제>는, ... <>은, ... 아마 그 세 편인 거 같습니다. 간발의 차로 <길소뜸>. (웃음)

정성일_ 바보 같은 질문을 하나 드립니다. 봉준호 감독님께 좋은 영화란 무엇입니까?

봉준호_ 아,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정성일_ 똑같은 질문을 저 자신도 대중강의 때 많이 받았습니다. 수차례 모르겠다고 대답을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 영화에 시네마틱한 모멘트가 있으면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고 대답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주제와 아무리 감동적인 얘기를 한다고 해도 좋은 영화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뜻으로 봉준호 감독께 이 순간이 오면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는 그런 게 있습니까?
봉준호_ 좋은 영화가 뭔지 아직 모르겠지만 그런 의견에는 100퍼센트 공감합니다. 저도 그런 모멘트를 만들고 싶어 영화를 만들거든요. 영화든 만화든. 소설에는 불가능한. 여지껏 본적이 없는 영화적인 모멘트를 만들고 싶어 저도 영화를 하는 거 같아요. 그걸 아편삼아 영화를 하는 거 같아요. <마더> 때는 허벅지에 침을 놓고 태양을 (향해서) 일어섰을 때가 그런 거였고, 그것을 아편 삼아 영화를 찍었고, <설국열차>에는 기차가 암흑 속에 빠졌을 때 기차 맨 뒤의 꼬마가 성냥불을 켜서 올림픽 성화 봉송처럼 그걸 들고 뛰어갈 때, 착각이고 환상인데 그걸 아편삼아 버텨나가는 거 같아요. 사실 그게 참 힘들잖아요, 이미 영화감독이 되셨는데, 게다가 3시간 대작을 찍으셨는데 정인선 양이 햄버거를 먹는 강렬한 긴 롱 테이크로 시작하는, (그런 선택들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영화일이 굉장히 힘들잖아요. 일 년에 한 편 씩 찍는 우디 앨런도 그렇게 말할 거예요. 데이빗 린치도 정신적으로 단련한다, 그런 얘기를 하잖아요. 개기고 버티는 게 그런 모멘트 인거 같아요. 사람들이 비난하면 비난 들어야 하고 돈을 투자한 사람한테 손해를 끼치기도 하고 되게 이상한 직업이지만 그래도 계속 버티고 하고 싶은 거는 그런 모멘트를 만들고 싶어서, 이건 이제까지 아무도 한 적이 없어, 그걸 아편삼아 영화를 하는 거 같아요. 그런 모멘트가 있으니 이건 좋은 영화다, 라고 사람들 앞에서 그런 이유를 들이밀면서 우기지는 못하겠지만 이번 영화는 완전히 망했고 트위터에 사람들이 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장면은 죽여, 그렇게 나 스스로 인정할 수 있다면 그런 자기만족을 얻으면서 버티는 거 같아요. 근데 임 감독님 영화에는 항상 그런 게 있다는 거죠.

정성일_ 평론가 입장에선 그런 순간이 있으면 영화를 필사적으로 방어해주고 싶어져요.

봉준호_ 임 감독님 영화에는 그런 게 항상 있었던 거 같아요. 히치콕도 그렇고 이마무라 쇼헤이도 그렇고, 김기영 감독님 영화는 그런 게 되게 많은 거 같아요. 편애!! (웃음)

정성일_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보면서 저는 항상 그 영화를 끄는 힘에 대해 항상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힘으로 난 끌고 갈 거야, 하는 그런 힘. 연출자로써 임권택 감독님영화를 보면서 가장 강렬한 힘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아까 매직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는데, 전 그게 있는 영화만이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봉준호 감독님의 영화를 볼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모든 걸 포기해도 좋으니 이것은 놓칠 수 없다 는 느낌. 그래서 이 힘을 모으려고 모든 것을 버린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화에서의 매직은 저에게 미학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의 문제입니다. 저는 그걸 같은 연출자로서 봉준호 감독이 임 감독님의 영화를 바라보면서 보는 특별한 순간이 있을 것 같습니다.

봉준호_ 시네마틱하거나 유니크한 대답은 못되겠지만 저는 임권택 감독님이 주인공이건 다른 사람이건 되게 가여워하시는 거 같아요. 오늘 본 <짝코>에서도 김희라 씨나 최윤석 씨를 가여워하시는 것 같고. 그렇다고 신파로 관객들을 눈물바다로 만든 적은 거의 없지만 <티켓>에서는 김지미 여사를, <아제아제 바라아제>에서는 강수연 뿐 아니라 (산사에서 머물면서 반대의 자리에 서서 강수연의 행동에 비판적이었던) 진영미조차도, (그리고) <서편제>에서는 오정해 뿐만 아니라 눈을 멀게 한 김명곤조차도 가여워하시는 것을 우리도 약간씩 느끼는 거 같아요. 안됐다, 불쌍하다, 이런 마음의 기둥이 이렇게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거기에 매혹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방금 들었어요. 어떤 시대건 인물이건 특히 주인공을 가여워하신다. 거기 본인의 처지가 투사되실 수도 있겠죠. 어쨌든 가여워하시는 거 같아요. 그 느낌이 계속 유지되니까 영화가 추동되어 나가는 거 같고.

정성일_ 당연히 두 사람 사이에서 영화 편수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지만 봉준호 감독도 이제 연출 경력에서 올해로 14년이 되는 프로페셔널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아 ,여기서 나와 임권택 감독님이 갈라지는구나, 우리는 서로 다른 연출자구나, 이런 걸 느껴본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이건 존경하는 것과 다른 차원이죠. 충분히 훌륭하지만 당신과 나는 이 지점에서 갈라지는 구나하는 지점이랄까.

봉준호_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동경의 대상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그런 뜻입니다. 어느 지점에서 비슷하다가, 그래서 같은 줄 알았다가 결국에는 다르구나, 해야 갈라진다고 느낄 텐데, 처음부터 임 감독님은 강 건너편에 계신 분, 강 건너 아주 아름다운 배경으로 계시고, 저는 반대편 둑(embankment)에 있는 거죠. 어느 편이 좋고 나쁘고 가 아니라 강 건너편에 계신 데, 물살을 거슬러 도달할 수 없는, 세월의 두께를 표현한다거나 선선한 느낌 같은 거는 도저히 제가 흉내 낼 수 없는, 항상 제 뚝방의 영화만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요. 건너편이라고 해서 꼭 차갑고 낯선 거리를 느끼는 건 아니잖아요.

정성일_ 국적을 불문하고 이 사람은 나랑 영화적 피가 똑같다는 사람은 누군가요?


알프레드 히치콕 Alfred Hitchcock

봉준호_ 똑같다고 평가하는 게 아니라 똑같고 싶다, 똑같다면 좋지 않을까 혈액형이. 그런 감독은 많이 있죠. 기요시. 대착각으로(웃음) 말한다면 히치콕. 넓은 의미에서 히치코키안. 물론 히치콕의 발톱의 때만도 못하지만 넓은 의미의 히치코키안이 되고 싶어요. <설국열차> 때 존 허트 할아버지와 술 먹다가 그 분이 마이클 치미노, 리들리 스콧, 데이빗 린치랑도 찍었고, 엄청나잖아요. 술 먹으면서 우리 영화 얘기를 해야 하는데, 가끔 눈치를 보면서 <천국의 문> 때 현장에서 어땠어요, 그런 질문을 하고 싶잖아요. 저도 씨네필이니까. (웃음) 그런 얘기를 하다가 존 허트 할아버지가 미스터 봉! 너는 히치코키언 인거 같애. 너의 스토리보드와 찍는 방식을 보면 그런 거 같애, 그러면 되게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오! 녹음할 걸! 조잡한 조잡심이 발동하면서, 그런 대화가 즐겁고 이분이 찍었던 감독들 리스트에 내가 끼었다는 게 기쁘고. (웃음) 하지만 냉정해야지. 영화를 찍어야 하니까. 거대한 히치코키언의 혈통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으로! 거기에 샤브롤도 있고 드 팔마도 있는 거잖아요. 드 팔마는 대놓고 내가 외아들이야 서자들 다 꺼져, 너무 그러니까 안쓰럽기도 한데, 샤브롤 님은 저 위에서 웃고 계시고, 나도 그 혈통에 끼면 좋지 않을까. 원래 형제들끼리 많이 싸우잖아요. 조상님만 보는 거죠. 임권택 감독님의 <족보>도 있는데, 영화는 시원찮고 체형만 닮아가고 있죠. 안타깝습니다. (웃음)

정성일_ 뚝방의 이쪽으로 와 보지요. (웃음) 봉준호 감독님의 영화는 제작을 한 <해무>까지를 포함해서 연극이나 만화에는 이끌렸지만 문학에 이끌렸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뭐랄까, 영화를 보고 있으면 종종 문학적 대사에 대한 경멸을 느껴봅니다.

봉준호_ 경멸까지는 아니지만 문어체 대사가 정말 싫습니다.

정성일_ 영화를 보고 있으면 문학의 무언가가 봉준호 감독님의 영화에 끼어드는 걸 불편하게 여긴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문학을 가능한 한 영화에서 밀쳐내는 것이 영화를 영화답게 만든다고 생각 한달까요, 이 지점이 서로 갈라서는 지점 중의 하나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임 감독님은 끊임없이 긴 시간동안 문학을 영화에 끌어오고 아예 나중에는 이청준 작가님을 영화 현장에 모셔 옆에 앉혀놓고 함께 대화를 나누고 대사를 물어보곤 하셨죠. 이번 새 영화 <화장>도 김훈 작가의 소설입니다만, 김훈 작가의 소설을 영화로 찍고 싶어하는 마음은 아주 오래된 것이었습니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봉준호_ 문학을 적대적으로까지 생각하지는 않았고 문학적인 뭔가가 침투되어 온다고 해서 이건 시네마틱 하지 않아, 라고 경계심과 적대심을 가질 정도는 아니고 그럴 계제도 못됩니다. 제가 문학을 잘 모릅니다. 형도 영문학을 전공하셨고, 외할아버지도 소설가셨는데, (외할아버지는 몽보(夢甫) 박태원 작가이다) 아직 외할아버지 소설도 다 읽지 못했습니다. 책보다는 DVD에 가까운 인간형이다 보니, 문학을 많이 접하지 못한 게 부끄러운데. 소설을 영화화한 적도 없었고, <살인의 추억>은 실제 사건과 김광림 선생의 「날 보러 와요」 희곡작품으로 했고, <설국열차>는 그래픽 노블이구요, <괴물>, <마더>, <플란다스의 개>는 저의 오리지널 스토리고요. 앞으로도 계속 그럴지는 모르겠는데, 소설 원작을 제안 받아본 적은 많이 있어요. 미야베 미유키 여사도 「모방범」을 일본에서 이미 영화화되기는 했었지만 꼭 영화화 해달라고 제안을 하셔서 오래 고민한 적도 있습니다. 테드 창의 「스토리 오브 유어 라이프」라고 작년에 700억 규모의 세트 영화로 제안을 받았어요. (이 소설은 한국에 「당신 인생의 이야기」라고 번역된 단편집 안에 세 번째 이야기 ‘네 인생의 이야기’로 번역되어 있다) 스토리가 굉장히 아름답고 좋더라구요. 언어학적이라 골치가 아프긴 한데, 「스토리 오브 유어 라이프」를 이미 각색한 걸로 저에게 제안을 했어요. 근데 테드 창의 원작이 저는 훨씬 좋았어요. 독창적이고 깊이 있는 좋은 소설인데 각색은 조디 포스터의 <콘택트>처럼 하향평준화 해놨어요. 저는 원작 단편이 훨씬 좋았습니다. 시나리오를 무시하고 원작 소설을 내가 다시 각색하고 싶다고 했더니, 각색한 분이 또 프로듀서 중의 한 분이고 이미 그것을 기다리는 배우가 있고 그래서 결렬되었어요. 미안하다 디렉터 봉. 네가 시나리오를 잘 쓸 수 있다고 믿는데 우리가 스튜디오랑 스케줄이 있다. 저게 첫 번째 문학 텍스트였을 뻔 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저걸 <프리즈너스>와 <그을린 사랑>의 드니 빌뇌브 감독이 하게 되었더라구요. 제가 문학 원작을 의도적으로 배척할 경지는 못되었고 사건이나 인물이 흥미로우면 저는 본능적으로 끌렸습니다. 하지만 대신 문예영화에는 경계가 있었어요. 문예영화라는 딱지를 붙었을 때 대종상을 더 받을 수 있는 영화고 점잖고 아름다운 영화. 소설을 바탕으로 한 문예영화가 아니면 그것을 장르영화로 폄하하는 카운터 관계로서 자리매김하는 건 너무 싫거든요. 장르라는 건 더 아름답고 영화적이다. 저는 장르는 존경받아야 한다. 저나 김지운 감독의 마음속에는. 김지운 감독도 굉장히 노력해왔다고 생각해요. 저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장르를 선포하시잖아요. 이번에는 만주 웨스턴이요. 호러요. 저는 그런 건 좋은 관점 내지 태도라고 존중했거든요. 그런 면에서 장르를 폄하하지 말라는 뜻에서 문예영화라는 타이틀에 대한 적개심이 있었던 거지, 문학이나 소설을 제가 딱히 경계할 위치는 못되었고 많이 읽지 못한 것을 개인적으로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죠.

정성일_ 비평 커뮤니티에서는 봉준호 감독이 다섯 편을 연출하면서 문학과의 거리를 계속 유지하는 건 외할아버지와의 거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얘기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 자체가 워낙 큰 작가이고 그런 것이 자기 세계에 얽혀 들어가는 것과 긴장을 유지한다고 할까.

봉준호_ 처음 생각해보는 부분인 거 같습니다. 외할아버지를 포함해서 문학 전체에 대해 경계심을 갖지 못했던 거 같구요. 독서량이나 독서 습관이 잘 형성이 안 되서 이렇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려서 만화와 TV를 너무 끼고 살아서(웃음) 장편 소설을 읽을 수 있는 지구력과 맷집의 부족, 대학 때 「태백산맥」을 읽으면서 영화화하고 싶어서 배우를 대입시켜서 생각해본 적은 있는데, 염상진은 이 사람이야, 하대치는 허벅지가 굵어야해. (웃음) 이미 임권택 감독님이 영화를 만드셨고. 문학에 대한 자의식과 디스턴스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송길한, 송능한 형제님들이 있는데 영화를 찍고 있을 때 <넘버 3>의 시나리오를 구해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굉장히 쇼킹한 적이 있습니다. 시나리오를 사람이 이렇게 잘 쓸 수 있구나. 정말 훌륭하다. 이창동 감독님의 시나리오도 영화화되기 전에 구해서 읽어본 적이 있는데 굉장히 아름답고 잘 쓰시고. 임상수 감독님도 참 대사도 잘 쓰시고 그렇지만 송능한 감독님의 시나리오 <넘버 3>를 봤을 때는 진짜 훌륭했습니다. 지금은 영화를 안 하시지만 그분의 형님이신 송길한 선생님이 임권택 감독님과 함께 하신 작품들을 보면 <짝코>, <길소뜸>, <만다라>, <티켓>, 많네요. 소설 원작이 있었다고 해도 송길한 선생님은 제가 좋아하는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많이 하셨고, 송길한 선생님의 시나리오는 문학의 영역같이 느껴져요. 신춘문예 당선작의 희곡과 시나리오를 보는 것처럼. 영화를 안 본 상태에서 송길한 선생님의 시나리오만 읽어봤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송길한 선생님 같은 경우는 정말 대단한 분이 아니신가. 문학과 영화를 나누지 않는다면, 그 분은 시나리오 작가이면서 정말 위대한 문학가이지 않으신가.

설국열차 스틸
설국열차 스틸
 
정성일_ 봉준호 감독님은 콘티를 정말 잘 그리는 걸로 충무로 넘버원이잖아요. 시나리오도 직접 쓰고 콘티 작업도 직접 하는데 끝난 콘티하고 완성된 영화하고 오차 범위가 얼마나 되세요?

봉준호_ 상당히 비슷합니다.

정성일_ 이를테면 박찬욱 감독은 거의 콘티대로 찍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봉준호_ 저도 콘티대로 찍고 편집에서 약간 응용하거나 변화를 많이 주기도 하지만, 저는 샷 컨스트럭션 하는 게 감독의 가장 큰 업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리 늦어도 당일 날 아침에는 콘티를 복사해서 나눠주고, 콘티 배열대로 찍습니다. 다만 배우에게 있어서는 방금 물에서 잡은 물고기처럼 라이브하게 가야하니까, 현장에서만 시도해볼 수 있는 거라든가 숨통을 트일 수 있는 뭐가 있는 지 막 얘기하고 하는데 그렇게 찍는 장면도 설계된 카메라였구요, 그게 감독의 일이고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흔히 영화를 보면서 시나리오가 좋았어, 라고 생각하는 것도 시나리오를 인쇄해서 극장에서 나눠주는 게 아니잖아요. 영화 속에 배열된 장면을 보고 거기서 추출 되서 시나리오가 머릿속에 오게 되는 건데, 물론 시나리오도 제가 직접 씁니다만 영화가 완성되는 순간 시나리오는 증발된다고 생각해요. 결국 장면과 사운드가 남게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2시간 동안 연이어 보여지는 커트 수가 1,000개 이하거든요. <설국열차>때 처음 1,000개를 넘어갔는데, <괴물>도 약 800컷, <마더>도 약 600컷. 장면들의 연속이 물질적으로 영화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설계하는 게 감독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정성일_ 현장에서의 우연이라는 건 배우 이외에는 허용하지 않나요?

봉준호_ 우연을 줄이려고 최대한 노력합니다. 콘티 자체가 로케이션 헌팅을 하고 공간을 확정지은 후에 콘티를 수정하거나 만듭니다. 또는 세트의 설계도가 나온 후에 다시 수정하거나 합니다. 쇼트를 컨스트럭션 해야 하니까요. 반대로 쇼트를 설계하면서 공간도 설계하게 되니까, 이런 공간을 만들어달라고 미술 감독에게 주문하죠. 취조실이 보일러실이고 이 창에서 김상경이 들여다보아야 하니까 이런 계단을 해주시오. 이 계단의 폭은 매우 좁아야합니다. 그 주문에 맞춰 류성희 미술감독이 세트를 만들어 줍니다. 만들어진 세트를 보고 또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다시 공간을 설계하고 그렇게 가면 큰 문제가 없이 그대로 찍게 됩니다. 미친 듯이 준비하고 오차를 없애려고 하고. 원래 성격이 소심하고 불안한 게 많아서 그렇게 준비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겁이 나니까. 엑스트라 50명 왔는데 못 찍으면 어떡하지. 그렇게 해서 콘티를 그리고 카피해서 나눠줍니다. 몇 달 전에 나오는 콘티도 있고, 그전 날 나눠주는 콘티도 있고 당일 날 나눠주는 콘티도 있지만. 콘티 없이 현장에 스태프가 모이는 일은 없었어요. 이렇게 하면 마음이 놓이니까 그렇게 하죠. 그렇게 콘티를 스태프들이 다 쥐고 있으면 그때부터는 청개구리 심리가 발동하죠. 콘티대로 하면 찍을 수는 있으니까 일단은 기본적인 안심은 됐고, 내가 만든 콘티지만 어떻게 반항할까, 거역할까. 어떤 걸 뭘 더 추가할까. 저 배우가 저 표정이 재밌으니까 옆에서 한번 찍어볼까. 현장에 몰랐는데 알고 보니 누가 버려둔 자전거가 있더라. <흔들리는 도쿄>때는 그걸 확 잡아 빼는 장면을 넣기도 했고. 그게 저를 흥분시키거나 현장에 나가고 싶게 만드는 요소죠. 하지만 그건 다 준비한 후구요. 콘티 없이 현장에 나가는 게 싫습니다.

정성일_ 어떤 점에서는 시나리오가 끝났을 때 이미 영화가 머릿속에서 끝난 거네요.

봉준호_ 다는 아닌데 시나리오를 쓸 때 이미 사운드랑 이미지로 생각했는데 그걸 그려 주기에는 (시나리오라는 것이) 낯선 단계이기 때문에 그걸 지문이랑 대사로 전환시켜서 인더스트리에서는 시나리오를 필요로 하잖아요. 그걸 가지고 스태프들을 구성하고 하니까. 구청에 갈 때는 민원서류를 들고 가듯이 사실은 이미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서류를 통해서 업무를 할 수 있는 것인 것처럼 영화 일을 위해 시나리오를 쓴다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많은 감독님들이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사운드와 이미지가 먼저 있는 거고 그래서 제가 다른 사람이 쓴 시나리오를 받아서 연출하는 걸 잘 못하는 거 같아요. 결국 제가 쓰게 되잖아요. 미국 영화 시스템에서는 에이전시에서 뿌리는 시나리오들. 시나리오와 감독과 배우가 짝짓기 하잖아요. 한국 같은 경우는 연애 결혼하는 거잖아요. 미국은 시스템 자체가 중매결혼 하고. 중매쟁이가 에이젠트들이죠. 미국에서도 타란티노같은 감독들은 연애 결혼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영화 사이의) 텀이 3, 4년 정도 걸리고. 직업적으로 더 많은 영화를 만들려면 때로 중매 결혼해야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은 거 같아요.

정성일_ 봉준호 감독의 위치를 생각하면 그렇게 준비를 해서 현장 진행을 할 때 실용적 관점에서 찍으세요, 아니면 영화를 시나리오 순서대로 찍으세요?

봉준호_ 순서대로 찍은 적은 없고요, 시나리오 순서대로 찍으려고 생각도 해본 적이 없어요. 켄 로치가 <랜드 앤드 프리덤>을 찍을 때 그렇게 했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한 효과가 클라이맥스에서 드러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마이크 리는 연극 공연처럼 접근한다고 들었어요. 몇 달간 모여서 연습하고 크랭크 인하는 시점이 대학로 무대 공연 올리는 시점처럼 한다고 하더라구요. 그건 그 양반들의 접근법이다, 라고 생각하고 저는 물리적입니다. <설국열차>도 첫날 라스트 씬을 찍었구요, 촬영 조건 때문에. 고아성과 그 흑인 아이가 기차 밖으로 나가서, (그 설경 장면이) 실제 오스트리아의 산악지대에서 찍은 것이거든요. 이 라스트 씬 만큼은 실제 눈이어야 하지 않나. 두 시간 동안 기차 세트 안에서 찍고 창밖은 (스튜디오 안에서) 내내 그린 스크린인데, 이제 마침내 기차를 벗어나 이게 메시지인데, 그래서 마침내 기차 바깥을 나와서 차가운 실제 공기를 마시고 실제 곰이 있는 건데 이것까지 그린 스크린을 해야 되냐. 미국 라인 피디가 엄청 반대하는데 저랑 홍경표 촬영 감독이 우겨서 찍었어요. 영화를 4월, 5월, 6월에 찍은 건데 눈 녹기 전에 그 라스트 씬만 (먼저) 찍고 온 거죠. 3월이 지나면 눈이 녹으니까 스태프들이 모여서 영화 라스트 씬부터 찍은 거죠. 우리는 프로잖아?! 이러면서 찍은 거죠. 고아성 양이 감독님 어떻게 해야 되요? (현장 표정을 지으면서) 많은 일을 겪었잖아, 시나리오 읽었잖아? 이러면서 찍었죠. (웃음) 와 너무 좋아, 좋아, 잘했어!! 불안해하지 마! 이러고 찍었죠. <살인의 추억>에서도 라스트 씬에서 송강호 씨가 황금벌판 보는 장면을 촬영 초에 찍었어요. 벼가 누렇게 익어서 출렁출렁할 때 찍어야하니까. <살인의 추억> 크랭크 인이 전남 장성에서 2002년 8월 21일, 8월 말이었는데 황금벌판, 추수 직전에 찍고 싶었어요. 그게 논 주인들과 다 협상하고 얘기를 한 건데 벼 베기 직전에 우리에게 알려 달라, 논마다 벼 베는 시점이 다 달라요. 벼 베는 시점을 제작부장이 미리 다 체크를 하고 벼 베기 직전에 그것을 찍었기 때문에 전체 영화의 25퍼센트 지점에 (찍었어요). 그건 프로로써 당연히... (잠시 생각) 감독이나 배우로써 난감할 수 잇겠지만, 세트 가면 세트로 몰아서 찍는 거구요. 특히 <설국열차>에선 정말 촬영순서가 복잡했는데 왜냐면, 설명을 하자면, ABCD 이렇게 4개의 세트를 짓고 해체하면서 돌아가면서 찍는 거거든요. 식물 칸에서 찍고 있을 때 꼬리 칸을 한 쪽에서 만들고 있고, 완성되면 넘어가고. 이쪽에서는 또 해체하고, 뼈대만 남기고, 뼈대 가격이 정말 비쌌기 때문에, 전체 스케줄을 지배하는 게 미술팀인거에요. 기차 세트가 엄청난 예산이 들어가는 건데 기차도 실제 크기이고. 총 26개 서로 다른 기차 칸을 짓는데 기차 예산을 가장 ‘코스트 이펙티브’ 하게 짓고 해체하는 데에 맞춰서 배우와 스태프 전체가 움직이는 거예요. 미술팀이 스케줄을 지배할 수밖에 없죠. 그렇게 했으니 간신히 400억에 만든 거예요. 그렇게 뒤죽박죽해서 찍는 와중에 길을 잃지 않으려면 더 계획해야하고 스토리보드 대로 찍어야 하는 거죠.

정성일_ 이건 비평가라기보다는 씨네필로서의 관심인데, 완전히 반대로 찍는 사람은 홍상수 감독이잖아요. 두 분이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이라는 건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봉준호 감독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항상 재밌게 본다는 이야기를 여러 인터뷰에서 읽었습니다. 완전히 다르게 찍는 이 감독의 영화에서 무엇이 재미있으세요?

봉준호_ 다 요, 매직. 임권택 감독님 영화에도 매직이 많지만, 홍상수 감독님 영화에도 매직이 정말 많은 거 같아요.

정성일_ 그 매직이 가장 많은 영화는 어떤 영화였나요?
봉준호_ <북촌방향>. 최근에 흑백영화였죠. 술 먹고 아침에 길에 나와서 택시 잡는데 모여서, 그 장면이 정말 압권인거 같아요. 홍상수 감독님과 술을 몇 차례 먹어본 적은 있고, 섹시하시고 (웃음) 촬영현장에 가본 거는 딱 한 번뿐이에요. 김형구 감독님이 촬영하셨던 <극장전> 현장에 제가 갔었더랬어요. <살인의 추억>을 찍은 직후였고 김상경도 볼 겸. 그 씬은 영화에서 편집 때 결국 잘려나갔는데 김상경이 술자리에서 여자들과 술 마시는 장면이었는데 정말 세세하게 디렉팅하시더라구요. 여기 소주잔을 이렇게 잡고, 소주잔을 깨물어서 이렇게 하란 말이야! 단역배우에게도 굉장히 엄격하고 세세하게 얘기하더라구요. 존 카사베츠 스타일과 아주 다르지 않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여전히 가장 매혹적인 영화를 만드시는 거 같아요. <밤과 낮>도 미국판 DVD를 얼마 전에 아마존에서 구했기 때문에 빼고는 다 갖고 있는데 모든 DVD를 늘어놓고 보면 몇 개씩 건너뛰어서 연결하면 한 영화 같기도 하고 이번 주 <자유의 언덕>도 보지만. 포스터를 보면 문소리가 비굴하게 해맑은 얼굴로 카세 료에게 수작을 걸잖아요. (웃음) 카세 료는 왜 이렇게 말랐을까, 감독님이 주문을 했나. 포스터부터 매혹됩니다.

정성일_ 원래 질문으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2000년부터 <플란다스의 개>로 시작을 해서 영화 작업 기간이 14년이나 겹치는데 봉준호 감독과 임 감독님의 배우가 서로 안 겹칩니다. 한국영화는 의외로 매우 좁기 때문에 서로 배우를 피해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배우에 대한 기준이 다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는 시나리오 작업을 제외하면 감독이 배우와 보내는 시간이 제일 긴데, 이를테면 많은 감독들이 다른 감독 영화를 볼 때 그 감독이 배우를 어떻게 다룰까 유심히 보는 거 같습니다.

봉준호_ 드디어 겹쳤습니다. 김호정 씨. 저의 첫 작품과 임 감독님이 최근 작품이! (웃음) 그런데 정말 안 겹치나요?

정성일_ 양쪽 모두 자기에게 탑을 썼는데도 불구하고 겹치지 않았어요. 그렇게 사랑하는 강수연 씨도 안 쓰셨잖아요? (웃음) 말하자면 배우가 아니라 그 배우가 만들어내는 인물과의 친화성이랄까, 연출이란 결국 사람을 다루는 기술이기도 하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멀어지면서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지게 된다고 느껴집니다. 연기지도라는 점에서 봉준호 감독도 매우 특별한 자기 방법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 자리에서 바라보면서 이것이 임권택 연기 디렉션 메소드라고 느끼는 순간이 언제인지요?

<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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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_ 많은 명배우들이 나오셨잖아요, 임 감독님 영화에. 그래서 약간 외람되지만, 예를 들어 김갑수, 강수연 선배님처럼 그런 명배우 말고 우리가 흔히 명배우라고 생각하지 않는 배우를 보면 임 감독님의 메소드가 느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를 들어 한지일 씨. 제가 연출부에서 그분을 잠시 모신 적이 있어요.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일곱 가지 이유>에서 슬레이트를 치고 첫 연출부를 했었는데(박종원 감독의 연출부를 했다) 거기에 한지일 선배님이 나오시죠. 그때도 물어 봤죠 <아제아제 바라아제>랑 <길소뜸>에서 어떻게 하셨나. 그 분이 <아제아제 바라아제>에서 보면 소주병을 들고 (같이 자기와 살지 않으면) 자기가 죽으려고 한다고 냇가에서 빨래를 하는 (비구니인) 강수연에게 이상한 대사들을 하는데, 그때 영화 아카데미에서 친한 누나인 김명화 선배가 임권택 감독님 연출부를 몇 작품 하셨는데 한지일 선배님이 영화를 찍을 때 상황을 얘기 하시더라구요. 밤 새워 뭔가를 찍는 장면이 있었는데 계속 그 대사를 틀리셔서 결국에는 한지일 선배를 제외한 모든 스태프들이 그 대사를 외웠다는. (웃음) 임 감독님이 그것을 다 인내하시고 참아내시면서 결국 오케이를 하신다. 아까 말한 제 얕은 추측이지만 영화 속 인물들을, (잠시 생각) 시대를 가여워 하시는 거 같습니다. 배우들에게도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춘향뎐> 예고편을 보면 배우들을 다그치고 윽박지르는 것도 나오지만 그런 건 표면적 메소드가 아닐까 합니다. 배우들을 되게 아끼고 좋아하지 않으실까, 가여워하지 않으실까. 그런 마음이 있을 때 감독이 사실은 기다릴 수 있게 되거든요. 그 분이 이 인터뷰를 읽지 않을 거라는 추측에 이런 말을 하는데요. 김진구 할머니라는 분이 계세요. <플란다스의 개>에서 침 뱉는 할머니, 치와와 주인. <마더>에서 죽은 여고생 쌀떡 소녀의 할머니, 맨날 막걸리 드시는. 이창동 감독님 영화에도 몇 번 나오시고. 나이가 많으신 할머니 배우신데. 여균동의 <죽이는 이야기>에도 나오시고. 저는 김진구 여사님 되게 좋아하거든요. <마더>에서 김혜자 선생님과 연기 대결하는 순간이 있어요. 김혜자 선생님이 플래시 들고 갔을 때 쌀통 속에서 핸드폰을 좌악 꺼내며 굉장히 그로테스크한 대사를 빅 클로즈업에 하는 장면이 있어요. 나정이 핸드폰 여기 있어요? 그러니까, (김진구 여사가) 벌써 술 바꿔 먹었는데~~ 이러는 이상한 괴연(怪演)을 하는 게 있는데 그걸 제가 35 테이크 까지 갔어요. 그걸 가고 싶어서 간 게 아니라 제가 원하는 컨셉이 있었는데. 고걸 제가 (그 앞에서 직접) 여러 번 해드렸어요. (그런데) 막상 하면 자꾸 딴 걸 하세요. 그 분이 정신이 약간 오락가락하세요. 나중에는 옆에서 김혜자 선생님이 지치셔서, 아유 이렇게 찍으면 벙어리도 입이 열리겠네, 그러시는 거예요. (웃음) 그래도 제가 그 분을 좋아하기 때문에 기다릴 수 있었거든요. 홍경표 감독님이 핸드 헬드니 얼마나 어깨가 힘들었겠어요. 그래도 다 기다려주시고. 임 감독님이 때로는 되게 배우들에게 무섭게 하신다고 하더라구요. 하지만 영화처럼 현장에서 모든 스태프와 배우들을 가여워하신다고 추측해요. <취화선> 때 현장에 되게 오래 계셨잖아요?
 
정성일_ <취화선> 때 손예진 양이 죽다 살아났죠. 똑같이 상황이 벌어졌어요. 그 영화도 필름으로 찍었는데 장승업이 손을 다치자 어쩌나, 그 귀한 손을, 하는 장면을 17 테이크를 갔죠. 약간 동선이 복잡해서 오후 내내 찍었어요. (웃음) 봉준호 감독님의 영화에서도 배우들의 앙상블이 종종 모든 걸 거는 장면들과 만나게 됩니다. 이를테면 저는 <살인의 추억>에서 한꺼번에 룸살롱에 형사들이 몰려가서 얘기하는 장면의 앙상블이 정말 좋아요. 그게 희생자가 발견된 논두렁을 오가는 송강호를 따라 롱 테이크로 쫓아가는 그 유명한 장면보다 훨씬 좋았어요.

봉준호_ 거의 안무죠.

정성일_ 정말 앙상블의 안무죠. 저로서는 <플란다스의 개>가 사랑스럽긴 하지만 여기서 이 사람이 연출자로 확 커져버렸구나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킨 건 그런 장면이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좁은 공간으로 밀어 넣었는데 <설국열차>에는 왜 그런 순간이 없을까 아쉬웠어요. 좀 밋밋하게 느껴졌달까, 오히려 폐쇄 공간에 모든 배우들을 집어넣고 나면 저는 그런 순간이 계속 나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봉준호_ 미세한 연기적 뉘앙스를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세밀한 터치를 하기가 <설국열차> 때 그게 쉽지가 않았어요. 영어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적으로 2개월 4주 만에 그걸 다 찍는다는 게 쉽지 않았어요. 하루하루 찍는 분량이 제가 보통 찍는 분량보다 훨씬 많았죠. <살인의 추억>이 한 5개월 찍었고, <괴물>도 6개월, <마더>는 4개월. 제가 찍었던 영화 중 <설국열차>가 테이크 수가 제일 적었어요. 투박하고 거친 느낌으로 계속 밀어붙이지 않으면 제 일정 안에 끝내기 힘들,. 그런 계산이 첫 주 둘째 주부터 들더라구요. 그런 상황이었던 거 같아요.

정성일_ 봉준호 감독이 인터뷰 때 자주 쓰시는 말 중 하나가 상상력입니다. 실제로 봉준호 감독님 영화를 보면 상상력의 어떤 순간들이 진행되는 이야기를 압도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괴물>에 괴물이 나왔다는 차원이 아니라, <살인의 추억>의 경우 실제 사건을 쫓아가는 중에 어떤 장면을 연출할 때 사실을 과잉해버린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장식 과잉이 아니라 어떤 순간으로 밀어붙여 버린달까? 구태여 보일러실로 갈 필요가 없었는데 상식적으로 경찰서로 가면 되는데 보일러실로 내려가서 사실 공간으로부터 상상력의 공간으로 끌고 간달까,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봉준호 터치야, 라고 말하는. 구태여 시체를 전시한 <마더>의 장면에서도 그렇고, 봉준호 감독님의 대답을 흉내 내자면 빨래처럼 시체를 걸어놔야만 한다는 어떤 변태적인 증후들. (웃음) 이건 명백히 이야기를 압도한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이야기가 순조롭게 가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는 연출자가 그 상상력의 흔적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순간들이 있달까요. <괴물>의 경우에도 그 출발이 서울 시민 2천만이 다 보는 한강에 괴물을 구태여 끌어내서 실재와의 불가능성을 동거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그 과잉하는 상상력. 많은 사람들이 있는 백주 대낮의 한강에서 마주쳐야만 하는 괴물. 이 괴물은 처음부터 은밀하게 나타날 생각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그런 상상력의 허구 안에서 필사적으로 리얼리티를 끌어내려고 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상상력의 허구 안에서 필사적으로 리얼리티를 부여하려는, 그런 의미에서 상상력과 리얼리티의 긴장, 공존의 긴장.
봉준호_ 말씀하신 대로인거 같아요. 그런 걸 할 때 가장 즐겁습니다. 최대한 뻔뻔스러워지려고 하고. 영화라는 매체가 주는 중요한 흥분이라고 느껴져요. 말이 안 되는 건데 괴물이라는 생명체가 맨날 왔다 갔다 하는 한강 고수 부지 백주대낮에 가는 거잖아요. 그거에 대한 송강호의 리액션은 또 너무나 사실적이잖아요. 분위기도 리얼하고 SF적인 포장이 전혀 없고. 거기서 오는 생경하면서 어색하기도 한, 표피가 리얼하면 보는 사람은 믿을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너무 황당하고 어이없는데 믿을 수밖에 없도록 표피를 만들고. 그런 상황이 저는 되게 좋아요 재밌고. 실제로 2001년인가 태국 무슨 서커스단이 한국에 와서 코끼리 다섯 마리가 장안동 광진구 쪽 일대를 돌아다니는 뉴스 클립이 유튜브에 있어요. MBC 뉴스데스크에 나오는데, 어떤 식당에 코끼리가 들어가서 가게 주인이 망연자실하게 보는데 코끼리가 김치 통을 까고 있고, (웃음) 실제로 뉴스 클립인데 초현실적이거든요. 그런 느낌을 좋아하니까 <괴물>같은 걸 한 거고, <괴물>처럼 극단적인 케이스가 아니어도, <살인의 추억>에서도 보일러실 얘기를 하셨지만 최소한의 저 자신을 정당화 시킬 수 있는 핑계거리만 있다면 밀어붙이려고 하거든요. 실제 화성연쇄 사건 기록을 봐도 미국처럼 근사한 취조실이 없어요. 라이트가 쫙 들어오고 밖에서만 안이 보이고, 80년대는 그런 게 절대 없어요. 취조를 근처 여관방에서 하고 그래요. 여인숙에 데려가서 앞에 순경 세워놓고 안에서 쥐어박으면서. 그런 증언이나 기록이 되게 많아요. <살인의 추억> 전체적으로 보면 야매에 대한 맥락이 있어요. 나이키와 나이스. 전미선 씨가 야매 주사를 놓고 경찰 자체가 FBI와 시골형사로 나눠놓고 증거자료가 오가고. 취조실도 제대로 된 취조실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보일러실 취조, 그래 좋다. 뻔뻔스럽게 스태프들을 먼저 설득을 하고요. (모두 모아놓고) 실제 이랬어요, 그러는 거죠. 김뢰하 씨가 워커 군화를 신고 용의자를 구타할 때 거기에 덧버선을 씌웠습니다. 사실 이건 제 머릿속에서 나왔는데 스태프에게는 항상 테스트 삼아 거짓말을 해봐요. 이건 내가 형사 인터뷰에서 들은 거라고, 그럼 다들 아, 진짜 리얼하네요, (웃음) 그래요. 보여주면, 설득하면 믿는 거 같아요. 항상 스태프가 첫 번째 관객이라고 생각하는데,그래서 (스태프들에게) 실제 형사를 취재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디테일이에요, (라고 시침 뚝 떼고) 말하는 거죠. 그냥 시나리오 쓰면서 생각한 거거든요. 그런 게 점점 심해지면 <괴물>까지 나오는 거예요. 점점 뻔뻔스러워지죠. <마더>도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허벅지 어디다 침을 놓으면 기억을 상실하고, (그런데도) 동의보감에 그런 게 있다는 둥, (웃음) 우리가 보면 말이 안 되지만 동의보감이나 실제 고증해보면 있다. 이런 게.(웃음) 진정한 망각까지는 안 되겠지만 여기다 침을 놓으면 몸이 풀리면서 좋아진다고 해요. 그러면 김혜자 선생님도, 어. 그렇군요, 그러시죠. 누구를 속이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그게 기본이 아닌가요. <화니와 알렉산더>에서도 나오지만 남자애가 거짓말을 하잖아요. 그게 사실 창작의 근원처럼 영화가 설명되고 있는데. 신부의 집에서 애가 모진 일들을 겪으면서, 마지막에 할머니가 재우면서 읽어주는 시도 그렇고 창작의 거미줄을 짓는 것. 그런 것을 상상력이라고 표현해주셨는데, 나쁘게 말하면 거짓말. 이거 취재에서 나온 건데? 그렇게 믿게 만드는 거. 그럴수록 재밌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정성일_ 한국영화의 가장 큰 짐 중 하나는 리얼리즘이라는 말이잖아요. 누군가에게 인과관계로 다가오고, 누군가에게 사실주의로 다가오는 데, 이 사회가 끊임없이 예술가들에게 요구를 하고 있는 것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리얼리즘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마법적 리얼리즘에 이르기까지. 봉준호 감독에게 리얼리즘이란 무엇입니까?

봉준호_ 예전에도 얘기했지만 저는 리얼리즘에 대한 관심이 없고 리스펙트도 없어요, 만화를 좋아하고 그리면서 컸기 때문인지 모르겠어요.

정성일_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고 있으면 디테일적인 리얼리즘이랄까요. 보는 쪽에서는 강박적일만큼.

봉준호_ 그런 걸 집착하고 즐기는데 모든 게 연출이라는 걸 다 알잖아요. 특히 <괴물>에서 간호사 다리만 나오는 뉴스 인터뷰 장면에서 TV 뉴스 따라한 거 저 정말 좋아하거든요. 진짜 최일구 앵커 나오고 자막도 뉴스 자막처럼 들어가고 실제 공중파 앵커들을 데려다가 한강에서 괴물이 나왔다고 찍는 게, 다 큰 어른들이 그러는 게 얼마나 한심하고 웃긴 상황이에요. 찍으면서도 너무 웃기죠. 그걸 뻔뻔스럽게 찍는 건데 말투부터 토씨까지 앵커처럼 바꿔서. 그게 강박적으로 리얼한 거 같지만 이 사건과 영화 전체가 너무나 황당한 거잖아요. 한강에서 포름알데히드를 부었다는 이유로 괴물이 나왔다. 과학자가 제대로 설명도 안 해주고 초반 13분에 그냥 다 나와 버리니까. 괴물이 나올수록 오히려 저는 더 리얼하고 싶은 거예요. <설국열차>는 기차 안에 다 우겨넣으면서 오롯이 더 SF적인 세계인 건데, 이질적인 건데 다 뻔뻔스럽게 한 프레임에 우겨넣어버리거나 도저히 리얼할 수 없는 건데 그걸 기를 쓰고 리얼하게 표현하는 것이 부질없어 하면서도 재밌는 거죠. <괴물> 때 그게 극대화되었던 건데. 그게 영화 전체가 아니라 신이나 쇼트에서, 적은 단위에서도 그런 짓을 하는 걸 좋아하고, 리얼리즘과 판타지의 경계가 없어지는 게 즐거워요. <마더> 개봉하고 실제 4개월 후에 대구에서 어떤 여고생이 살해되었는데 나무에 여고생을 걸어놨었어요. 그런 사건도 실제 벌어지거든요. 실제 세계에서 벌어진 일이 영화를 압도할 때가 있잖아요. 논픽션이 픽션을 압도하는 경우. 너무 기괴하고 이상해서 기구한. 마치 <매그놀리아> 도입부에서 그랬던 것처럼 전혀 개연성이 없는 일인데 실제로 벌어진. 실제 다큐멘터리라고 하니까 더 믿을 수밖에 없는. 제 영화에서 가장 이상하고 괴상한 것을 반복해 놓은 게 <괴물>이었는데 사람들이 세월호 사건과 연결시켜서 정리해놓은 게 있더라구요. 실제에서도 오히려 경계가 없지 않나 생각해요.

정성일_ 디테일의 리얼리즘이 보는 쪽에게는 어떤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 같아요. 봉준호 감독님 영화는 기본적으로 코미디잖아요. 근데 그걸 굉장히 냉소적으로 만드는 효과를 만들어내는 거죠. 정치적 연상도 일으키고 한편에서는 아까 쓴 표현을 빌리자면 서늘한 거죠. 왜냐하면 내가 사는 세상을 향해 웃고 있는 거니까. 냉소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게 한편으로는 봉준호 감독님께서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한 건가요?

봉준호_ 제 성격이 좀 그런 거 같아요. 임 감독님 영화에 대해 얘기할 때 특유의 선선함이나 가여워하는 것. 저도 그런 마음이 있거든요. 아무리 영화 속 악인이라도 가엽고, <살인의 추억>의 범인도 그렇겠지만. 가여움에 대한 관점이 있는데, 다만 성격적으로 제가 단일한 하나의 감정에 편하게 몰입을 못하는 성격이라. 사람들이랑 즐겁게 술을 먹다가도, 실제 생활에도 그런 면이 있어요. 제가 끼면 아마 사람들이 불편할 거예요.

마더, 시 포스터
 
정성일_ <마더>를 이야기하고 싶어요. 이 영화는 한국영화에서 거의 금기처럼 방어선을 쳐 놓은 모성이라는 안전한 세계를 광기처럼 만들어놓았습니다. 이 영화가 이창동 감독의 <>와 같은 해에 개봉했는데, 감독 자신은 전혀 원치 않겠지만, 마치 <마더>는 우연히도 <시>에 대한 메타 비평처럼 보입니다. 둘 다 결국은 모성애에 대한 이야기잖습니까. <시>는 모성이 자식의 죄에 대해 가져야 할 도덕적 태도가 무엇인지 물어본 다음 전체의 질서 안으로 다시 편입시킵니다. <마더>는 그 사랑의 선택을 윤리적으로 바라본 다음 광기에로 밀어 넣습니다. 저는 여기서 모성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마더>를 보면서 한국 사회에서의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해 마치 보호해야할 무언가를 지키려는 듯한 암묵적인 전제에 대해 훨씬 성숙한 질문과 마주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건 한국 사회에서 거의 절대적으로 건드리지 못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시종일관 산산조각 내버리는 것을 바라보는 기분이었어요.
 
봉준호_ <>가 개봉했을 때 지금 말씀하시는 내용과 정확히 반대되는 의견을 말하는 평을 블로그에서 본 적이 있어요. <마더>에서는 모든 것을 덮고 종팔이라는 다운증후군 애가 감방에 남고 원빈을 끌고 나오는 내용인데, <시>에서는 할머니가 아이를 형사에게 보내잖아요. <시>가 더 성숙한 영화고, 봉준호의 <마더>에 대한 이창동 감독의 응답이다. <시>가 더 윤리적으로 성숙하고 올바른 영화가 아니겠는가,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잠시 생각) 저는 그렇게 엄중하게 생각을 못했고 그게 영화의 출발이었어요. 왜냐면 김혜자 선생님과 일하고 싶어서 기획한 거니까요. 그 시나리오를 써놓고 배우를 선택한 게 아니었어요. 나는 김혜자 선생님이 정말 싸이코 같아, 미친 여자야, 나쁘게 말하면 미친년이야, 광고에서, 그래 이 맛이야, 하는 걸 볼 때마다 국민 엄마지만 저분은 무슨 광기가 있다, 무슨 토크쇼에서 제가 그것을 봤거든요. 연기표현이 아니라 어, 미친 분인 가봐. 그런 느낌을 받아가지고, 그게 출발이란 말이에요. 위대한 배우지만 동시에 국민엄마 아이콘이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미친 사람이고, 그 분을 영화 찍기 위해 시나리오를 써야겠는데 엄마가 미친년이다, 그렇게 해서 쓴 스토리였습니다. 김혜자 선생님이 거절하면 그 영화를 엎었을 거예요. 김혜자 선생님이 안 하신다고 하면 나문희 선생님, 고두심, 윤여정, 이렇게 (주연을 바꿔가면서 제안을 할 수 있는) 그게 아니었어요. 우리나라는 특히 모성을 숭배하잖아요. 우정의 무대에도 엄마가 커튼 뒤에 서 있으면 엄마, 하고 울고, 사실 엄마와 관계가 안 좋은 아들들도 엄청 많은데, 그런데 그건 다 무시되잖아요. 엄마 하면 무조건 울어야 된다고 우리나라는 강요되는데, 그런 엄마의 아이콘이 김혜자 선생님이었고, 출발이 그랬던 거예요. 그래서 김혜자 선생님이랑 하는 것이다, 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영화였습니다. 다행히 김혜자 선생님께 시나리오 드렸을 때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아, 좋아요. 나도 이런 거 하고 싶어요. 봉 감독, (아들의 비밀을 알고 있는 걸인을 죽이는 장면에서) 피 좀 더 뿌려주세요. 머리를 깰까요? 그동안 수십 년간 MBC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전원일기>를 하면서) 최불암 님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그렇게 분출했을 수도 있어서 저도 좋았죠. (웃음) 사람들은 불편한 면이 있었겠죠. 그런데 마케팅 팀에서는 그것도 극한의 모성이다. 그것조차도 큰 사랑의 범위 내에 우겨넣으려고 한 거고. 저도 그게 이해되기도 하고. (웃음)

마더 스틸
<마더>
 
정성일_ 한국영화에서는 쎈 척 하는 영화가 많아도 일단 상업영화라고 부르는 경계 안으로 넘어오면 절대 못 넘는 금기가 몇 개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더>는 그 중 하나를 돌파해버려서, 참 이것을 다시 넘어서기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설국열차>는 영어권 배우들과 함께 찍으면서 <마더>를 순화시키는 해독제 같은 느낌이 있어요. 만약에 <마더> 다음에 한국영화를 바로 찍었으면 어떤 얘기를 갖다 붙여도 힘이 없어지는 느낌?

봉준호_ 그 반대도 성립하고요. <괴물>과 <설국 열차> 사이에 <마더>를 찍을 수 있었습니다.

정성일_ <괴물>도 선을 넘었죠. 딸을 죽인 거니까.

봉준호_ 그거 같은 거는 저는 딜레마가 없었어요. 저는 시나리오부터 그렇게 쓴 거니까 아무 고민이 없었어요. 딸은 죽었고 다른 아이가 온다, 가 전제로 출발한 거여서. 일본사람들은 딸이 죽는 거에 대해 되게 당황하더라구요. <괴물>을 별로 안 좋아하더라구요. <마더>와 <살인의 추억>을 좋아하고.

정성일_ <괴물>에서는 두 번 당황했는데, 하나는 괴물 장르의 영화가 갖는 규칙은 처음에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 놓여 다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모이는 데 한 시간, 그래서 힘을 합해 괴물과 싸우는 데 한 시간의 법칙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영화는 다 모여 있던 사람들을 55분이 되었을 때 갑자기 다 찢어놓았습니다.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미친 거 아니야? 이렇게 되면 영화가 도리 없이 이 사람들을 다 찾아다니면서 동분서주해야 하는데, 그런데 정말 그러면서 그냥 계속 가더라구요. (웃음) 그러다가 하여튼 한 자리에 모으더니 괴물과 싸워 물리치긴 하지만 이번에는 딸이 죽더라구요. 다시 한 번 중얼거렸죠. 그럼 이제까지 이 사람들이 뭐한 거야? (웃음)

봉준호_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제가 그런 개념이 없어요. 아버지가 죽었으니 애들이 다 찢어질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정성일_ 우리가 장르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여기서 보는 것은 단지 이야기를 찢고 주인공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법칙을 찢고 컨벤션을 죽이는 것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그 안에서 리얼리티가 갑자기 귀환하면서 그 안에서 냉소적인 이성이 작동하기 시작한다는 인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봉준호_ 제가 존경할만한 리얼리즘의 형태는 아니죠. 표피적인 리얼리티이기 때문에 보이는 순간을 믿도록 관객이 강요당하는 거죠. 사실은 한 발 짝 더 다가가서 그 상황을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완전 말이 안 되는 거죠. 애가 그렇게 죽었건, 허벅지에 침을 놓건, 말이 안 되는 건데, 표면적으로 그걸 믿게 만들고 심지어 디테일하다, 리얼하다고 착시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죠.

정성일_ 그건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자신의 영화에서 말도 안 되는 거라고 설명하는 바로 그 불가능성을 성립시키는 게 봉준호 감독 영화의 매직이라고 생각해요. 영화는 성립의 문제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영화가 성립시키는 순간을 보면 그때 영화가 반짝반짝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들이 힘이 되는 거죠.

봉준호_ 일부러 그런 것을 계산해서 포석을 까는 것은 아닙니다만, 저는 성격상 불안해서 준비를 많이 하지만 포석을 잘 까는 타입은 아닙니다. 큐브릭은 항상 배우들과 현장에서 체스를 두잖아요. 하지만 저는 체스를 잘 못 두고, 바둑은 너무 어려워서 못 배웠어요. 성립되게 하는 것에 있어서도 약간의 뻔뻔함과 약간 곁다리로 빠지면서 오히려 그런 게 더 많은 거 같아요. 예를 들면 그런 거죠. <괴물>에서 박해일이 이통사에서 근무하는 선배 임필성을 찾아가잖아요. 알고 보면 형사들이 그 옆방에 숨어 있잖아요. 거기서 임필성이 갑자기 쓸데없는 얘기를 하거든요. 이 수배 현상금 세금이 어떻게 됩니까? 그건 비과세 기타 소득이기 때문에 그건 세금을 안 때린다! 그걸 세무사들이 들으면 웃는 장면인데 (웃음) 사실은 리얼리즘은커녕 리얼리티와도 안 맞는 장면인데, 그때 그 상황 자체가 약간 의도적으로 너저분해지면서 받아들이게 되잖아요. 현실이 원래 너저분하잖아요. 일목요연하게 진행이 안 돼 있고, 우리가 택시 기사와 싸울 때도 그렇고, 그런 걸 제가 막 깊게 계산해서 놓는 건 아니에요. 임필성은 결국 돈을 노린 거다. 왜냐? 카드빚이 많다 잖아? (웃음) 저는 굉장히 단순한 논리로 쓰는 거거든요. 거기 뭐, 후배를 꼰지르는 존재론적 고뇌를 하고 그런 거 전혀 없잖아요. 사실 우리가 살면서 고뇌를 그렇게 많이 하나요? 아주 작고 너저분한 것에 유혹되어서 많은 결정을 하잖아요.

정성일_ <해무>를 보면, 심성보 감독이 봉준호 감독의 연출부를 했었으니까, 이게 스승으로부터 전염되었구나, 뭐랄까 봉준호의 터치라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 있었어요. 한예리가 배 안에서 숨어서 뭔가 뒤집어쓰고 있는데 박유천과 이야기를 나누다말고 문득 깨달았다는 듯이 슬그머니 오른쪽으로 돌아앉으면서 이희준이 그것을 벗길 때였어요. 제가 봉준호의 터치라고 느낀 순간은 영화를 보아온 이제까지의 관습으로는 여기서 커트를 나눠야 하는데 이 쇼트는 어떻게 해서든지 한 쇼트에 해결을 해야만 해, 아니 차라리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은데 한 쇼트에 우겨 넣어야 해, 하는 장면이었어요. 이게 무리하다는 판단이 되는 지점에서조차 밀고 나아가서 성립될 때 그게 유머로 전환되죠. 그때 여기에는 무언가 쇼트를 나누지 말고 하나의 쇼트로 성립을 시켜야한다는 터치의 느낌이 있었습니다. 봉준호 감독님에게 쇼트는 무엇입니까?

봉준호 감독 사진

봉준호_ 정확히 짚어주신 것 같은데. 임권택 감독님 영화에도 항상 매혹되는 순간은 쇼트를 나누지 않았을 때, 너무나 자연스러운 미장센 속에서도 누군가 굉장히 자연스럽게 등장하고 교차하고 퇴장하고, 연극적인 스테이징은 아니지만, <짝코>에서도 카메라가 공간 밖에 있는데 마치 안에서 찍는 것처럼 보여졌을 때도, 이 인물이 나와서 골목으로 꺾어져도 마치 물 흐르는 것처럼 찍은 것처럼 느껴지는 장면이 있었지만, 제 자신의 영화를 찍을 때도 본능적으로 어떡하면 쇼트를 덜 쪼갤 수 있을까, 전체 영화의 커트 수가 어떻게 하면 더 적어질 수 있을까 본능적으로 그걸 느껴요. 그렇지만 타르코프스키가 촛불 들고 온천 이동하는 그런 데는 전혀 관심이 없거든요. 분할되지 않고 이어졌을 때 오는 이상한 쾌감. 이어짐으로 오는 어색함으로 오는 웃김. 저는 그런 게 되게 좋죠. 분할하면서 쾌감을 느끼고 흥분되는 감독님들도 많이 있는 거 같구요. 김성수 감독님도 그렇고. 저는 쪼갤 수 있는데 쪼개지 않거나 쪼개야 마땅한데 그것을 억지로 거스르는 게 재미있는 거 같아요.

정성일_ 반대로 질문하겠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임 감독님 영화를 보다가 이건 임권택 터치구나, 라고 느끼는 순간이 어떤 것인가요?

봉준호_ 단역배우나 엑스트라가 되게 뻔뻔스럽게 뭔가를 설명할 때. (웃음) “아니 그래 저 놈이 누구 대감댁 둘째 아들인데 누구 애를 배게 해가지고 곤장을 맞았다지 뭐야?” 전혀 중요한 인물이 아닌데 거침없이 설명을 해버리잖아요. 그건 임 감독님 영화뿐 아니라 옛날 충무로 영화에는 그런 게 많았어요. “어 그런 게 말이야. 그래서 결국은 사또가 뭔가 했는데 결국 그게 둘째 딸이지 아마” (웃음) 저는 그게 굉장히 흥겹거든요. <서편제>에서도 김명곤이 창할 때도 누군가 막 얘기하는데 후시녹음으로 생경한 앰비언스와 전혀 분리된 센 대사로 막 오잖아요. 거창하게 미학적으로 뭘 부여하고 싶지는 않지만 판소리로 치면 창을 하는 중에 얘기하잖아요. 서양식 연극에서도, <마이티 아프로디테>에서 하듯이, 무대 뒤에서 진행상황을 설명해주는 것처럼, 그걸 그냥 잠깐 나오는 보조 출연자가 등장해서 굉장히 중요한 세팅 같은 걸 거침없이 얘기해버리고 하는 거 보면 반가워요, 흥겹고.

정성일_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느닷없이 등장하는 수평 트래킹에 페티시즘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웃음) 그런 특별한 카메라 운동에 대해 영화적 흥분이 있으세요?

봉준호_ <살인의 추억>도 그렇고, <설국열차>도 기차 자체가 트랙이죠. <마더>도 버스 자체가 트래킹이라고 할 수 있죠. 인물을 향해 다가가거나 멀어질 때도 있지만 수평 트래킹을 하면서 줌이 결합된다거나 그런 걸 제가 봐도 매우 좋아하는 거 같아요. 원인은 모르겠지만.

정성일_ 거기서 진행하던 이야기나 혹은 인물로부터 갑자기 어떤 특별한 거리(distance)를 만들고 싶은 그런 게 있나요?

봉준호_ (잠시 생각) 글쎄 모르겠어요. 저 스스로 미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모르겠지만 쾌감이 있는 거 같아요. 다른 사람의 영화를 봤을 때,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의 도입부에 보면 그 여자애가 합창단이고 비 맞고 뛰어갈 때, 수평 트래킹하면서 그 여자의 종아리로 줌 할 때 이상한 흥분을 느꼈던 경험이 있어요. 그래서 <마더>에서 그걸 시도해본 장면이 있어요. 찍을 때 의식이 되더라구요. 진구김혜자 선생님께 돈 받고 본드 먹은 고등학생을 발로 까는 장면이 있어요. 돈을 받고 애들을 깔 때까지가 한 테이크인데, 먼저 돈의 두께를 보죠. 그걸 가슴에 넣고 아이들을 까러 가는 장면을 트래킹하면서 발로 줌이 들어가요. 발에 줌이 들어가면서 속도가 확 붙어요. 달리(dolly)는 그대로지만 줌이 들어가서 가속도가 붙는 것처럼 보이죠. 그때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장면이 생각났어요. 그런 장면을 찍을 때 흥분되는 거 같아요. 수평 트래킹뿐 아니라 트래킹 할 때 굉장히 흥분되는 거 같아요. 영화에서만 가능하고. 연극은 객석의 한 의자에 그냥 앉아 있는 거잖아요. 연극, 사진, 만화에서는 있을 수 없는 얘기고.

마더 스틸
마더 스틸
마더 스틸
마더 스틸
마더 스틸
마더 스틸
마더 스틸

정성일_ 영화적인 테크닉에 대해서 좀 더 질문하고 싶습니다. 남들도 다 사용하는 것이 봉준호 영화 안으로 들어오면 참 희한하구나, 라는 순간들을 만들고 내고 계시니까요. (웃음) 슬로 모션에 대해 몹시 특별한 견해가 있는 거 같아요. 영화에서 대부분의 슬로 모션을 볼 때, 그건 어떤 쾌감의 운동인데, 봉준호 감독이 슬로 모션을 쓰면 보는 사람을 답답하게 만드는 게 있어요. 이를 테면 (<괴물>에서) 현서가 괴물로부터 빨리 도망가야 되는데, 구태여 속도를 늦게 만들어서 허우적거리게 만든다거나, <설국열차>에서 예카테리나 브리지를 지나 터널로 빠져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밸러 클로버를 뒤집어쓴 용병들의 도끼와 싸울 때 갑작스러운 슬로 모션은 뭔가 싸운다기보다 이들을 허우적거리는 몸짓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이 순간 결정적인 삑사리의 장면이 등장하죠. (웃음) 표준적인 판본으로 만나는 슬로 모션과 다른 감각의 슬로 모션의 감각을 원하는 것 같아요.

봉준호_ 말씀하신 걸 들어보니 정말 대부분 빨리 벗어나고 싶은 상황을 슬로하게 (만들고 있는데, 그게) 삐뚤어진 성격 때문인 거 같아요(웃음) <설국열차>에서도 크리스 에반스가 얼마나 이 싸움이 지치고 고독하고 외로울까. 기차가 좁으니까 어디 숨을 데도 없는데. 피하고 싶은 상황들이잖아요. <살인의 추억>의 논에서 가장 망신스럽고 ‘카오스’스러운 것도 현장 검증할 때잖아요. 오우삼 감독님 슬로 모션 하는 거랑 너무 다르니까. 슬로 모션을 쓰지 않았던 영화가 <마더>였던 거 같아요. 유일하게 비가 안 나왔던 게 <설국열차>였고, 슬로 모션 없는 게 <마더>다운 거 같아요. 그래서 더 잔인한 면이 있는 거 같고. 아, <플란다스의 개>도 있었구나. 저의 시그너처, 인장(印章)이라 할 만한 영역은 아닌 거 같아요. 샘 폐킨파의 뭐, 웨스 앤더슨의 뭐, 이렇게 부를만한 게 저는 없는 거 같아요. 약간의 습성들은 있습니다만 스타일이다, 시그너처다, 라고 말할 건 일, 이십 년 뒤에야 가능한 거 같습니다.

정성일_ 그런데 영화에서의 상황은 말씀과 정반대이지요. 시그너처가 없는 게 아니라 점점 더 많아지고 있어요. <괴물>부터 새로운 봉준호 서사의 특징 중의 하나는, 이건 터치와도 또 다른데, 가족이 부서져야 얘기가 끝난다는 것입니다. <괴물>에서 딸이 죽었을 때는 무심코 그런가, 했는데 <마더>와 <설국열차>를 보고 났을 때, <마더>는 완전히 파괴죠. 가족을 부수기 전에는 이야기를 안 끝낸다, 라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마더>가 영화 한편으로 한국영화가 결계처럼 쳐 놓은 금기중의 하나를 벗어난 건데, 이를테면 근친상간을 하고 똑같이 기억을 잃어도 <올드 보이>는 필사적으로 복원에 대한 갈망을 얘기하잖아요. 는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끝장내면서도 가족을 복원하려는 안간힘이 있어요. 그게 가엽죠. 유일하게 한국에서 단 한 명, 봉준호 감독에게서 가족을 끝장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맹렬한 전투를 수행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가족주의라고 부르는, 말 그대로 혈연을 넘어서서 감정적인 공동체에 대한 이 냉소적인 이성이라는 것. 사실상 가족주의가 점점 확대되고 상상적으로 비유의 프레임을 만들어내서 환상의 형식으로 거짓 공동체를 발명해내서 결속시킬 때 그것이 한국 사회의 지나친 파토스의 시작이기도 하잖습니까. 이 파토스 안에서 보면 가족은 전혀 이상하지 않지만 이성 안에서 보면 정말 이상한 거니까요.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인지는 제 설명 바깥에 있지만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가족이라는 파토스에 대한 어떤 혐오와 마주하게 됩니다.

봉준호_ 저는 표면상 큰 문제없는 가족에서 자랐고. 저도 95년에 장가를 가서 20년 정도 가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만 (웃음) <괴물>, <마더>, <설국열차>, 지금 보니 그런 식의 파국을 맞은 건 사실인데, 지금 쓰고 있는 여섯 번째 영화에서도 가족이 있긴 있는데 그다지 파괴될 거 같지는 않습니다만, 아직 시나리오를 완성하지 못했으니까 말씀드릴 건 아니지만, 일곱 번째 영화도 같이 쓰고 있습니다. 아주 강력하게 가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일곱 번째 영화를 개봉시키려면 사, 오년이 더 있어야겠지만. (잠시 생각) 섣불리 경망스럽게 얘기할 주제는 아직 못되는 거 같고 가족을 박살내야겠다고 의식해본 적은 없는 거 같아요. 사실 가족에 대한 스트레스는 누구나 다 있지 않을까요. 월트 디즈니 영화를 봤을 때 치밀어오는 짜증 같은 것. (웃음)

정성일_ 산만하게 진행한다고 했으니 다시 원래의 우리 컨셉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웃음) 김기영 감독님과 임권택 감독님 얘기를 나눴습니다만, 봉준호 감독에게서 한 번도 듣지 못한 얘기는 이만희 감독입니다. 이만희 감독님의 영화는 봉준호 감독에게 어떻습니까?

봉준호_ 일단 작품을 많이 못 봤습니다. EBS에서 <돌아오지 않는 해병>을 봤고, <마의 계단>도 재미있었고, 영상자료원에서 나온 스릴러 비슷한 <암살자>도 봤고, (잠시 생각) 사실 그렇게 많이 못 봤습니다. 엄청난 명성은 많이 들었지만.

정성일_ 이토록 열심인 씨네필이 많이 보지 못했다는 건 끌리지 못했다는 이야기인 것이기도 하네요. (웃음)

봉준호_ 아니, 보고 싶어요. 쿠엔틴 타란티노가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리만희”를 꼭 보고 싶다고 작년 부산에서 지랄을 하는 거예요. (웃음) 그래서 제가 한국영상자료원에 부탁해서 DVD를 보내줬어요. 한국의 장르마스터라고 들었는데 그렇게 보고 싶다고. 그 보답으로 제가 어렸을 때 좋아했던 <게리슨 유격대>라고 그게 희귀작인데 보내줬어요. 저는 박스 세트를 보냈는데 정작 그 박스 세트의 영화를 (저는) 다 못 본 거 같아요. 흥미로운 거는 최근에 자주 뵈는 이장호 감독님이 저를 항상 이만희 감독님과 연결시켜서 말씀하세요. 봉, 너는 이만희 감독과 비슷해. 나는 (너를) 이만희의 후예라고 생각한다. 저 스스로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장르영화에 대한 관점이 있어서 이장호 감독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자꾸 이만희 감독님을 얘기 하시더라구요. 김기영 감독님 얘기는 안 하시고. (웃음)

정성일_ 혹시 이만희 감독님의 <검은 머리>를 보셨어요? 아주 좋아하실 거 같은데, 오히려 세간에 알려진 <쇠사슬을 끊어라> 이런 영화는 안 좋아할 거 같지만...

봉준호_ 현존하는 <삼포 가는 길>도 제가 좋아하는 영화인데 이만희 감독님 영화라기보다는 한국영화에서 시골에서 눈밭을 (걸어)가는 그런 장면들을 매우 좋아해요. 어렸을 때 MBC 베스트셀러나 KBS TV 문학관에 그런 장면들이 꼭 나와요. 겨울에 한 남자가 적막한 눈밭 속을 가다가 거기 주막이 있고 거기에 또 딸이 있어요. 거기서 겁탈이 일어나기도 하고, 남자가 가면 딸이 보따리를 들고 따라오기도 하고 그러다 바닷가에 가잖아요. 속초에 가기도 하고 대관령도 가고. 그것의 본령. 원조 같은 느낌.

정성일_ 봉준호 감독 자신은 전혀 원치 않겠지만, 원컨 원치 않건, 봉준호의 영화를 과도하게 정치적으로 읽으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죠. <플란다스의 개>만이 중산층을 다루었고 그런 다음 갑자기 방향전환을 해서 사회적 약자, 밑바닥 계급으로 내려왔습니다. 봉준호 감독처럼 끊임없이 사회적 약자를 찍는 감독도 없죠, 한국영화에서. 그러면서 <괴물>의 첫 장면에서 우리와 미국과의 관계를 읽을 수밖에 없고, <마더>도 정치적 함의를 끌어내게 싶게 만들고, <설국 열차>도 계급으로 단순화시키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해석을 단순화시키면 안심이 되니까. <설국열차>는 너무 단순해져서 한편으로 여기서는 봉준호 감독이 거는 게임이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절반은 게임이고 절반은 의도라는 생각이 들어요. 문제는 게임과 의도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다는 거죠. 정치, 그 자체가 아니라 정치적이라는 것, 에 대한 견해를 물어보고 싶습니다.

봉준호_ 게임을 걸만큼의 성격이나 지적인 승부를 걸 깜냥은 안 되구요. 영화에서 보여지는 것은 제가 그렇게 느껴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어떤 정치적인 맥락이나 정치적인 서브 플롯이건, 서브 텍스트건, 상징이건, 뭐건 간에 보는 이를 교란시키기 위해서 떡밥, 밑밥을 던진 적은 없어요. 보여지는 것만큼 정말 저도 그렇게 느껴서. (주한미군 영안소 부책임자인 민간부 군무원 앨버트 L) 맥팔랜드가 실제 독극물을 방뇨했고, 실제 2000년도에 그랬죠. 미국이 한국에서 어떤 정치적 맥락인지 이 사건만큼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건도 없구요. 그게 또 되게 SF 영화의 도입부 같잖아요. 이걸로 해서 보는 사람들이 호도되거나 게임을 걸고, 그렇게 해볼까? 그런 건 아니고 미국이 정말 우리나라에서 그래.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군대가 있어. 실제 이런 걸 방뇨해. 이걸 한국 공무원에게 시키는 게 더 재밌는 지점이야. 고도의 게임을 걸거나, 클로드 샤브롤은 실제로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구요. 자신도 평론을 했었기 때문에 자기가 쓴 시나리오를 평론가처럼 보고, 이런 식으로 자극하면 재밌지. 저는 그런 건 아니구요. 정말 그렇게 느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설국열차>나 <괴물>은 특히 직설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하고 저의 정치적인 관점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던 영화구요. <살인의 추억>은 실제 80년대, 제가 살았던 시대, 개별 살인 사건보다 더 어두운 시대라는 80년대에 대한 제 관점을 정리한 영화구요. <마더>만 약간 달라요. 어찌 보면 정치적 맥락에서 분석되지 않는 데까지 다가가 보고 싶었어요. 어린 시절 본 사진첩처럼 김혜자의 눈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어요. <마더>는 하층계급 사람들끼리 서로 할퀴는 그런 이야기잖아요. 상층 계급에 반란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괴물>처럼 하층 계급끼리 연대하는 것도 아니고, ‘로어 뎁스(lower depth, 밑바닥보다 더 밑바닥)에서 그쪽에 처박혀 있는 애들끼리 원빈을 빼내고 다운 증후군 아이를 거기에 밀어 넣는 굉장히 끔찍한 얘기죠.

정성일_ 그런데 <괴물>에서 정치적 학습을 한 다음 <마더>를 보게 되면 골프장이 그런 효과를 만들어 내는 거죠. 한국에서 골프장이라는 장소의 도상적 이데올로기라고나 할까요. 할 일 없는 부르주아들의 판타지의 공간에서 뭔가 벌어진 다음에 프롤레타리아의 정치학으로 옮겨오지만 가난한 자들의 세계가 상대적으로 건강하기는커녕 더 음습해지고 음산하고 무시무시해질 때 어둠이 더 어두워진다고 할까요. 그때 그 안에서 괴상한 방식으로 냉소적인 이성이 더 빛나게 보이는 거죠. 거기까지 오면 이제 견디는 것은 미치는 거야, 라는 결론에로 이끌릴 때는 보는 쪽도 미치는 지경이 되는 거죠.

봉준호_ 냉소적 이성이라고 이름 붙여 주시면 저는 감사한데, <마더>는 <괴물>의 반대말로써 하고 싶었던 거 같아요. 또 밑바닥 사람들이 연대하는 영화고, <마더>는 서로 할퀴는 영화고 아빠에 관한 영화, 또 이거는 순도 100퍼센트 엄마에 대한 영화고, 모든 면에서 반작용이었습니다.

정성일_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씨네마틱 모멘트로서의 인서트를 물어보고 싶습니다. 제가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게 생각하는 장면은, 그게 아마 의외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두 장면입니다. 하나는 <괴물>에서 처음 괴물이 나타났을 때, 한강에 놀러온 사람들을 괴물이 쫓아가고 있는데, 그때 서강대교를 지나가는 버스에서, 그저 책을 읽던 할머니가 무심하고 한가롭게 내려다보는 장면입니다. 마치 영화의 동선과 세계의 동선, 두 개가 이상한 방식으로 공존할 때의 느낌이랄까. 다른 하나는 김혜자씨가 버스를 타고 가면서 그냥 무심하게 나무를 쳐다보는데, 거기 어떤 감정도 없는데, 그 나무의 쇼트가 굉장히 아름답고 시적이 있었어요. 차라리 시선이 아름답다고 할까요. 그때 문득 든 생각은 문득 봉준호 영화에는 가끔 영화를 멈춰 세우고 이미지에 우선권을 준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이미지에 우선권을 준다는 것은 공백의 인서트, 약간 재미없게 말하면 잉여의 이미지를 이야기의 동선 안으로 밀어 넣는 건데, 그게 어떤 시적인 이미지의 순간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를테면 바람이나 햇빛은 우연의 산물일 수 있지만, 편집은 절대 우연이 아니지 않습니까?

<괴물>
<괴물>
<괴물>
<괴물>
<괴물>
<괴물>
 
봉준호_ 말씀하신 것에 정확히 부합하는 게 (<마더>에서의) 그 나무 인서트였던 거 같습니다. (<괴물>에서의) 버스 시퀀스는 좀 다릅니다. 그 씬 자체를 굉장히 버라이어티한 시점으로 의도적으로 분산시키고 싶었어요. (그 장면 전에 한 소녀가) 손톱 밑의 때를 빼면서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있는데 괴물이 확 낚아채고, 서강대교에서 57분 교통정보가 깔리면서, <이어도>에 출연하신 할머니가 그것을 보고 있는 건데 시퀀스 맥락에 철저히 부합되는 거였습니다. 되게 산만하게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오고,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오고, 현서도 맥주 캔을 발로 뻥 찼는데, 아버지가 그것을 낚아채고, 그것은 시퀀스 내의 패턴이었던 거 같습니다. 되게 일상적인데 낯선 느낌. <마더>의 나무 같은 게 말씀하신데 철저히 더 부합하는 장면입니다. 그건 시나리오에는 없었던 디테일인데 운이 좋았어요. 거기가 장흥 교도소 주변인데, <마더>는 특히 로케이션을 되게 열심히 다녔어요. 저랑 홍경표 감독님이랑 스태프들이 미니버스를 대여해서 다 같이 타고 장소 헌팅을 다녔어요. 장흥 교도소를 시찰하고, 다음 장소 이동하는데 점심을 먹고 나서 다들 졸았어요. 운전기사만 운전하고 저만 깼어요. 그때 촬영한 나무를 봤어요. 주변에 숲이나 나무가 없잖아요. 길이 원형 트래킹 하듯이 그렇게 되었어요. 실제 영화의 김혜자 선생님 같은 시점으로 그 나무를 봤는데 굉장히 아름답더라구요. 프리 프로덕션 중에 이걸 봤기 때문에 이걸 꼭 어딘가 넣고 싶다. 그럼 어디에 넣으면 좋을까. 저 나무가 김혜자만큼 참 외롭게 느껴지기도 하고, 묘하게 찍을 수 있는 조건도 되고, 영화 중후반에 엄마가 나한테 다섯 살 때 농약 먹였잖아, 약(藥이 든)박카스. 김혜자 선생님이 경기(驚氣) 일으키고 울고, 그리고 나올 때 그 나무를 보게 되거든요. 거기서 나무를 넣으면 엄마의 감정이나 그런 게 논리적으로 설명은 안 되지만, 왠지 거기다! 거기 밖에 없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홍경표 감독님도 그 제안을 좋아하셨고 또 거기에 깔리는 스트링 음악이 있어요. 이병우 감독님도 그 모멘트를 좋아하셔서 특별히 신경 쓰셨다고 하시더라구요.

마더 스틸
마더 스틸
마더 스틸

정성일_ 콘티와 시나리오를 정확히 짜내서 진행하는 봉준호 감독 영화에 이제 시적인 우연의 장면들이 끼어드는 징조를 뭐라고 봐야 할까요? 여유가 생겼다고 할까,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 것 같아요. <살인의 추억>에도 날아가는 새의 인서트 장면이 나왔지만 <마더>의 김혜자 씨 정도의 장면은 아니었어요. 이건 대화를 건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한 가지 더 질문하자면 봉준호 감독이 즐기는 것 중의 하나가 엔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엔딩을 볼 때마다 엔딩 다음 장면을 보는 느낌이랄까요. 엔딩을 살짝 지나쳐가는 듯한 느낌. 이를테면 그런 다음에 이제까지 내가 봐온 영화가 이제 그 영화를 보는 나를 본다는 느낌이 있어요. 너무나 노골적인 <살인의 추억>이 아니더라도 영화를 보는 극장 안과 영화의 화면 자체가 동일해질 때, 고속도로에서 달리는 버스 안의 미친 엄마를 봤을 때, 혹은 <설국열차>의 마지막 장면의 북극곰이 고아성을 본다기보다 우리를 본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시선도 차라리 고아성을 본다기보다는 우리를 보는 위치에 가 있었어요. 엔딩에 대해 이건 매우 특별한 감각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봉준호_ 편수가 많지 않아서 어떻게 일반화해서 설명해야할 지 모르겠지만, (잠시 생각)<설국열차>와 <마더>는 명확한 끝점이 있었구요. (<설국열차>에서) 마지막 장면은 카메라와 컨택하는 곰이다, <마더>도 2004년 처음 스토리 구성할 때부터 고속도로에서 달리는 버스 안 춤추는 엄마들로 끝낼 거야, 라고 생각했어요. <괴물>은 달랐어요. 시나리오 드래프트들 마다 달랐어요. TV를 발로 끄는 것까지는 똑같았는데 매점 벽에 걸린 멧돼지 대가리에서 남자아이의 생일 선물을 꺼내는 장면도 있었고. 몇 가지 버전이 있었어요. 갈팡질팡하다가 얼굴이 아주 조그맣게 보이는, 이들 세계가 얼마나 작은가. 그 안에 아버지와 아들이 있는데 어둠 속에선 뭐가 나올지 모르고, 그건 찍을 때 임박해서 결정했습니다. 멧돼지 대가리에서 생일 선물 꺼내는 장면도 찍었고, 그 장면은 DVD 부록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보면 되게 이상해요 (웃음) 뻘쭘 하고. 찍고 편집하며 결정하고 뺀 장면이에요. <살인의 추억>에서도 송강호가 카메라를 보고 끝났는데 원래 한 장면이 더 있었습니다. 연쇄살인범으로 추측할 수 있는 사람의 뒤통수가 명동의 인파 속으로 들어가는, 누군지 알 수 없지만 뒤통수가 보여지면서 현대의 2003년 서울 거리를 보여주는, 김형구 감독님과 실제 명동에 나가서 찍었어요. 송강호가 카메라 보면서 끝내는 게 적합하다, 하면서도 그걸 찍으러 나가면서, 그래서 찍으면서도 긴가민가, 했어요, 왠지 안 쓰게 될 거 같은데, 저는 그걸 DOA 쇼트라고 부르는데, (웃음) 도착 즉시 사망(Dead on Arrival). 이미 찍고 있는데 안 쓰게 될 걸 아는 장면. 그걸 (이미 촬영현장에 나왔기 때문에) 차마 스태프들에게 말은 못하고, 오히려 실례니까. 그런 걸 개인적으로 DOA 쇼트라고 해요. 하여튼 끝까지 고민되는 부분인 거 같아요. <마더>는 너무나 확고했어요. 오히려 그 앞의 두 시간이 그 마지막 고속버스 춤추는 장면에 가기 위한 과정처럼 생각될 만큼 확고했고, 2004년부터 개봉할 때까지 한 번도 생각이 바뀌어본 적이 없어요. <설국열차>도 기차를 나와서 곰과 마주본다는 설정은 맞는데 제가 생각한 각도와 사이즈는 아니었어요. 실제 곰을 오스트리아에 갖고 가서 찍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곰은 CG가 아니에요. ‘내셔널 지오그래피’ 라이브러리에서 실제 곰 HD 영상을 찾아서 가져와 갖다 붙였어요. 곰의 CG를 만들기에는 예산이 없었고, 조악하게 나올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제가 진정 원하는 각도와 사이즈는 아니에요. 지금 생각해보면 미국 프로모션 때 여러 번 질문을 받고 느낀 건데.. 그게 곰이 아니라 사슴이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자꾸 곰한테 잡아먹힐 거라는 얘기를 들어서. 아, 왜 곰이었지? 사슴이 탁 나오면 훨씬 좋았을 텐데... (웃음)

괴물 스틸
괴물 스틸

정성일_ 개인 소장 라이브러리가 궁금합니다. 영화사 속에서 존경받는 감독이긴 하지만 이 감독에게는 정말 동의가 안 된다. 다른 사람이 존경하는 만큼 동의가 안 되는 감독은 누군가요? 이를테면 훌륭한 감독이라는 것도 알고 충분히 존경도 하지만 이상하게 제가 보지 않게 되는 건 펠리니의 영화들과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그렇습니다. 훌륭한데 마음이 동하지 않고 안 보게 되는 명단이랄까.

봉준호_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웃으면서) 안토니오니. 세계영화사 어느 챕터를 차지한다는 걸 납득은 가는데 그 분의 DVD는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아요. 더 이상 설명할 수가 없네요. 취향이니까. 어렸을 때 EBS에서 세계의 명화에서 연달아 상영도 했고, <블로우 업>은 재밌게 봤어요. 그거는 공원에서 촤악, 나뭇잎 흩날리면서 뼛속까지 스산해지는 느낌과, 그런데 그 외는 많이들 존경하겠죠, 저는 잘 모르겠지만. (웃음)

정성일_ 마지막 질문입니다. 그러니 바보 같은 가정, 바보 같은 질문을 하겠습니다. 만약 연못에서 산신령이 나타나셔서 봉준호 감독! 임권택 감독님에게 아무거나 하나 가져가도 되니까 그거 하나 가져가게! 한다면 어떤 재능을 훔쳐가고 싶은 가요?

봉준호_ (다시 한 번, 정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카메라 여기다 놔. 여기, 여기 놔” 촬영 감독님과 상의를 할 수도 있고 먼저 촬영 감독님이 제안을 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

정성일_ 아아, 무슨 말씀인지 느낌이 정말 꽂히듯이 오네요. 감사합니다. 여섯 번째 영화를 열심히 기다리겠습니다.

봉준호감독 사진

(註)_ 인터뷰 중의 대화는 가능하면 오가던 이야기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일부 어휘들이 영어 단어가 사용되는 경우에도 옮기지 않고 그냥 고스란히 남겨 놓았다. 그 까닭은 의미는 옮길 수 있으나 대화의 문맥에서 그 단어가 가지는 ‘뉘앙스’를 상실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대화중의 일부가 두 사람 사이에서 서로 충분히 다시 설명해야 할 필요가 없어서 마치 점프 컷처럼 진행될 때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괄호를 치고 보충설명을 덧붙였다. 일부독자들에게는 필요치 않을 수 있지만 이 점 이해를 바란다. 또한 서로에게 약간의 어색한 표현들도 대화의 ‘라이브’한 무드를 돕기 위해 수정하지 않았다.

2014년 8월 28일, 날씨 하루 전날 큰 비가 온 뒤에 몹시 화창하고 무더웠음.
진행_ 장광헌, 유성관
녹취, 사진_ 이지영
장소_ 카페 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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