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이해룡 - 배우

by.김승경(영화사연구소) 2015-11-02조회 2,601
이해룡

배우 이해룡은 1936년 서울 성수동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만주로 간 아버지가 행방불명되는 바람에 그는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서 자랐다. 그는 손이 귀했던 외가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개구쟁이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광복이 되었고, 성동중학교 2학년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6.25전쟁기에는 피난과 귀경의 반복이었고, 이러한 불안정한 삶은 호기심 많던 그를 공부보다는 다른 길로 이끌었다. 휴전 후인 1954년 대동상고를 중퇴하고, 마도로스가 되어 새로운 세상과 만나기를 꿈꾸며 부산으로 향했다. 하지만 선장이 되기 위해서는 대학교육을 마쳐야 했으니 다시 공부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무렵 김명제 촬영감독을 만나 윤봉춘 감독을 소개받게 된다.

호기심 많고 놀기 좋아하는 구술자에게 많은 문학예술인들이 모이는 명동은 매력적인 공간이었고, 늘 새로운 상황을 만나야 하는 영화 일은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주기에 충분했다. 1955년 <처녀별>(윤봉춘, 1956)과 <피아골>(이강천, 1955)의 단역 겸 제작부로 영화계에 첫발을 내디뎠고, 싹싹하고 붙임성 있는 성격으로 김승호, 양일민, 조항, 성소민 등의 선배들과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논개>(윤봉춘, 1956)에서 장군의 비서인 사동 역할을 맡게 되는데, 장군의 부인이 운명했다는 비보를 알리는 장면을 촬영했다. 이때 윤봉춘 감독은 이해룡에게 눈물을 흘리며 들어오라는 연기를 주문했고, 배우로서 재능이 있었는지 눈물 연기를 무난하게 소화해냈다. 이후 <유관순>(윤봉춘, 1959)에서의 유관순 오빠 관옥 역할 등을 하면서 본격적인 연기자의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만희 감독과의 인연과 ‘17클럽’으로 만난 영화 동반자들 이해룡을 배우의 길에 들어서게 한 사람이 윤봉춘 감독이라면 배우와 스태프들과의 관계, 동료애를 통해 영화 현장의 참맛을 알게 한 사람은 이만희 감독이다. 5.16 직후인 1961년 말 구술자는 해병대에 자원입대하고, 해병연예대에 소속되어 군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전쟁물이 많이제작되었는데 연예대 소속이었던 구술자는 군 생활 내내 수많은 전쟁영화에 출연했다. 특히 <살아있는 그날까지>(이만희, 1962)에 출연한 구술자를 눈여겨본 이만희 감독은 이후 대부분의 영화에 그를 캐스팅했다. 이때 이만희 감독을 중심으로 장동휘, 최무룡, 허장강, 박노식, 문정숙, 태현실, 이대엽, 독고성, 장혁, 김운하, 최성, 구봉서 등의 배우들과 서정민 촬영감독, 전정근 음악감독, 시나리오작가 백결한우정, 그리고 구술자 등으로 조직한 ‘17클럽’은 ‘이만희 사단’이라 불리며 이만희 감독이 연출한 대부분의 영화를 함께 했을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을 공유하며 영화에 대한 견해를 나누고, 영화에 대한 꿈을 함께 꾸었다. 이 시간을 통해 동료애를 돈독히 하고, 당대 최고의 배우들을 옆에서 지켜보게 되면서 배우라는 직업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어 만날 수 없는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해룡의 구술은 이 작업을 통해 얻은 또 하나의 재산이 되었다.

영화계 안팎으로 보여준 끊임없는 영화 열정
1960년대 홍콩과의 합작영화 붐이 일던 시기 신필름의 전속배우가 되어 1969년 홍콩으로 건너가 2년 동안 쇼브라더스와의 합작영화에 출연하게 된다. <13인의 무사>(장철, 1970), <철낭자>(고버슈, 1971) 등의 합작영화에 출연했고, 다시 대만으로 가 <5천리 대도망>(강대선, 유가창, 1974), <금강혈인>(김진태, 1981) 등의 합작영화에 출연하게 된다. 이 시기의 구술을 통해 홍콩 쇼브라더스의 촬영 환경과 합작영화, 위장 합작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당시 합작영화가 만들어지는 풍경을 어렴풋하게나마 가늠해볼 수 있었다.

한국영화의 불황기라 하는 1970~80년대 이해룡은 한국과 홍콩, 대만을 오가며 촬영을 했다. 점점 어려워지는 한국영화계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지만 그럴수록 더 열심히 작품 활동을 했고, 임권택, 이두용, 김호선 감독 등 비평과 흥행 모두에서 인정받는 감독들과 작품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2001년 배창호 감독의 <흑수선>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영화에 출연하지는 않고 있지만 대신 현재는 1957년부터 몸담았던 영화배우협회 내 복지회 활동을 통해 원로 배우들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한국에서 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한 1920년대부터 지금까지 수천 편의 영화가 제작되었고 수많은 사람이 스태프, 배우로 영화에 참여했다. 그중에서 몇몇 사람은 이름을 날리기도 하고, 후대에까지 기억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크레딧에만 존재한 채 잊혀갔다. 한국영상자료원은 구술 사업을 통해 한국영화 전면에서 목소리를 낸 영화인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함께 영화를 만들어갔던 스태프들, 조연들의 목소리를 통해 지금까지 주도적인 몇 명의 목소리만으로 이루어진 한국영화사의 빈틈을 메우고, 새로운 시각을 형성해 다양한 차원에서 한국영화를 바라보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배우 이해룡은 낯설지만 친숙한 배우로서, 한국영화를 만들어간 한 명의 구성원으로서, 따뜻한 시선으로 배우의 삶 전체를 바라보고 스스로 살아가는 영화인으로서, 후대 연구자들에게 한국영화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한국영화의 중요한 지점들을 미시사적으로 포착해낼 수 있는 단초를 제시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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