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무룡
Choi Moo-ryong / 崔戊龍
출생·사망
1928 ~ 1999
대표분야
배우, 감독, 제작/기획, 시나리오
데뷔작품
탁류(이만흥감독) 1952
활동년대
1950, 1960, 1970, 1980

필모그래피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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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본 :
(최무룡, 1987)   
감독 :
(최무룡, 1987)   
이 한몸 돌이 되어 (최무룡, 1983)   
지하여자대학 (최무룡, 1970)   
흑점(속 제3지대) (최무룡, 1969)   
상처 (최무룡, 1969)   
어느 하늘아래서 (최무룡, 1968)   
제삼지대 (최무룡, 1968)   
정두고 가지마 (최무룡, 1968)   
북한 (최무룡, 1968)   

주요경력

영화인협회 제 16,17,18,19,21,22대 부위원장
영화인협회 제23대 위원장
영화인협회 명예위원장(1986), 영화인협회 이사, 한국 영상자료원 제2대 이사장 역임
1961 제1회 부일상 남우주연상
1965 제5회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
1971제10회 대종상 영화제 남우주연상
1976 제22회 아시아 영화제 남우주연상
1987 제11회 예총 문화 예술상 수상

기타정보

영화계 입문배경
대학때 연극을 하면서 데뷔하게 되었다. 전공은 법학이었지만 연극은 인간은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법률보다 더 재미있었다. 그러던 중 영화 "탁류"(52)의 감독께서 앞으로는 연극을 한 연기자가 영화에도 출연해야 한다며 영화 출연 제의를 해와서 그 이후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다.
주요 영화작품
탁류(1954,이만흥감독)
주검의 상자(1955,김기영감독)
젊은 그들(1955,신상옥감독)
잃어버린 청춘(1957,유현목감독)
비극은 없다(1959,홍성기감독)
오발탄(1961,유현목감독)
5인의 해병(1961,김기덕감독)
불효자(1961,이만희감독)
하늘과 땅사이에(1962,이성구감독)
손오공(1962,김수용감독)
울며 헤어진 부산항(1963,강대진감독)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이만희감독)
외아들(1963,정진우감독)
검은 상처의 부르스(1964,노 필감독)
빨간 마후라(1964,신상옥감독)
남과 북(1965,김기덕감독)
선과 악(1965,장일호감독)
나운규의 일생(1966,최무룡감독)
밤하늘의 부르스(1966,노 필감독)
그래도 못잊어(1967,김효천감독)
제삼지대(1968,최무룡감독)
정두고 가지마(1968,최무룡감독)
임그리워(1970,고영남감독)
방에 불을 꺼주오(1970,이형표감독)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1970,정진우감독)
위험한 관계(1970,고영남감독)
동춘(1970,정진우감독)
초원의 빛(1971,이경윤감독)
약한자여(1972,곽정환감독)
쥐띠부인(1972,곽정환감독)
동반자(1973,이일수감독)
격동(1975,박호태감독)
보통여자(1976,변장호감독)
자유부인 `81(1981,박호태감독)
자유부인 2(1986,박호태감독)
애착작품 및 사유
출연한 모든 작품마다 정열을 기울였고 소홀히 한 작품은 하나도 없다. 어떤 장르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열심히 했기 때문에 모든 작품에 애착이 간다.
하고싶은 말
죽는 날까지 연기를 하고 싶다. 그것이 소원이다.
중앙대 연극부에서 활동할 때 당시 문학박사였던 정인섭 교수의 '세익스피어 햄릿 광증'이란 학위논문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햄릿'을 공연하기 시작했다. 학생극이긴 했지만 너무나 큰 작품을 만난 인연으로 그 후의 연기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촬영 에피소드-군대영화를 찍을 때 군비행기를 직접 타 보았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 당시에는 촬영기법상의 트릭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모두 직접 연기를 해야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 쓰고 했던 촬영이 많았다.
영화속 명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해외로케를 하던 시절부터 연기 생활을 했기 때문에 해외로케로 촬영했던 곳인 홍콩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추구하는 스타일/배역
자연주의 연기를 추구하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 자연주의 는 연극에서 당연히 무대가 생명이고 영화도 역시 그것의 연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자연주의 연기를 얼마나 완벽하게 해낼 수 있을까가 과제로 남아있다.
자기소개 및 취미
취미-바다낚시 특기:축구,외국어(일본어)
수상내역(영화)
빨간 마후라-청룡상(2회)남우조연상/남과 북-청룡상(3회)남우주연상/방에 불을 꺼주오-한국연극영화예술상(7회)/연기상/보통여자-아시아영화제(21회)남우주연상/대종상 영화제(1999) 공로상/

1961 제1회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
1963년 제1회 청룡영화상 특별상(집단연기상)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4년 제2회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 (<빨간 마후라>)/
1965년 제5회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
1971년 제10회 대종상 영화제 남우조연상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제7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연기상 (<방에 불을 꺼주오>), 제8회 청룡영화상남우주연상 (<30년만의 대결>)/
1972년 제9회 청룡영화상남자인기상/
1973년 제9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애독자인기상, 제10회 청룡영화상남자인기상/
1974년 제10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애독자인기상/
1976년 제22회 아시아 영화제/
1987년 제11회 예총 문화 예술상 수상/
1999년 제36회 대종상 영화제 영화발전공로상(연기)/
1999년 11월 보관문화훈장/
2000년 제4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평생공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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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28년 경기도 파주에서 출생했다. 개성상고를 졸업한 최무룡은 1949년 중앙방송 전속 성우를 거쳐 1952년 중앙대 법대를 졸업했다(한국영화감독사전). 중앙대 법대 재학 중 연극 <햄릿>의 주역을 맡아 배우 생활을 시작했고(경향신문b), 이만홍 감독의 <탁류>(1954)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이후 <오발탄>, <양산도>(1961),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빨간 마후라>(1964),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1970), <아름다운 팔도강산>, <30년만의 대결>(1971) 등 개성 있는 연기와 목소리로 강한 인상을 남기며 1960년대 주요 전성기를 구가한 대표배우 중 한명이다. 또한 스타 여배우였던 강효실, 김지미와의 결혼과 이혼 등의 화제로 세간에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배우이기도 했다(경향신문a). 한편 그는 1965년 <피어린 구월산>이라는 작품을 통해 감독으로도 데뷔했다. 그 후 <나운규 일생>(1966), <서울은 만원이다>(1967), <흑점>(1969), <지하여자대학>(1970), <이 한몸 돌이 되어>(1983), <덫>(1987) 등 16편의 작품을 연출하기도 했다. 영화계 원로로서 각종 영화단체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한국영화인협회 부위원장 및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1993~94년 한국영상자료원 이사장, 1995년 우리영상사업단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88년 김종필 공화당 총재의 천거로 13대 총선 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며 정계에 진출하기도 했었다. 1999년 11월 12일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했다(경향신문b). 영화배우 최민수가 그와 강효실 사이에서 난 아들이다.

* 참고문헌
경향신문a 1962년 10월 31일자 7면
경향신문b 1999년 11월 12일자 27면
김종원 외, 『한국영화감독사전』, 국학자료원, 2004.

[작성: 김한상]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28년 2월 25일 경기 파주 출생. 김진규, 신영균과 더불어 1960년대 정상을 다툰 인기배우로서 제작과 감독을 겸했다. 개성상고를 졸업한 최무룡은 1949년 중앙방송 전속 성우를 거쳐 1952년 중앙대 법대를 졸업했다. 법대 재학 당시 그는 세익스피어의 <햄릿>을 시공관 무대에 올렸으며, 제1회 전국대학연극경연대회에 번역극 <비오는 산골>을 들고 참가해 인기상을 받기도 했다. 이후 극단 단원으로 연극 무대에 서다가 이만홍 감독의 <탁류>(1954)로 영화계에 데뷔했고, <주검의 상자>(김기영, 1955)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하면서 자신을 알리기 시작했다. 두루 알려진 것처럼 이어진 1960년대는 배우 최무룡의 절정기를 구가했다. 총 출연작이 약 800여 편이나 된다.
그의 제작 연륜은 생각보다 길다. 유현목 감독의 <잃어버린 청춘>(1957)의 제작을 시작으로 자신이 연출한 15편의 영화를 모두 제작했다. 감독 데뷔작은 전쟁 영화 <피 어린 구월산>(1965)이었다. 신영균, 장동휘, 김지미, 박노식, 이대엽, 추석양, 독고성 최남현, 박 암, 주선태, 최지희 등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총출동한 이 영화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북한군의 학살을 피해 구월산에 피해있던 우익 인사들이 전투조직을 편성해 북한군의 후방을 교란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군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병력을 투입하게 되고, 투입된 대위와 우익 인사인 여대장 사이에 사랑이 싹트게 되며, 결국 그들은 무사히 구월산에서 빠져 나온다. 그러나 이 영화는 좋은 평을 받지는 못했다. “감독역량이 부족한 실패작”이라는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이듬해 최무룡은 한국 영화의 선구자 나운규의 일생을 다룬 전기 영화 <나운규의 일생>(1966), 양공주로 전락한 여자의 비극을 그린 통속극 <한 많은 석이 엄마>(1966)를 연출한 후 풍자물 <서울은 만원이다>(1967)를 연출했다. 서울로 떠난 애인을 찾아 서울에 올라온 시골 청년의 눈에 비친 부조리한 서울의 모습을 그린 코미디로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서서히 병 들어가는 서울의 모습을 풍자하고 있다. 이 영화 외에도 최무룡은 그해 3편을 더 연출했고, 1968년에는 3편, 1969년에도 3편을 연출하는 왕성한 창작욕을 보인다.
1970년에 연출한 <지하여자대학>는 통속물로서, 학비마련을 위해 밤에 바에 나가야 했고, 그것 때문에 학칙위반으로 퇴학당한 여대생의 인생 시련을 담고 있다. 이 영화 이후 무려 13년이나 연출을 하지 않았던 최무룡은 사회물 <이 한 몸 돌이 되어>(1983)로 감독으로 다시 돌아왔다. 가난과 전쟁 때문에 한 곳에 모여 행복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가족의 고통스런 삶을 그리고 있는 이 영화는 최무룡의 마지막 연출작이 되었다. 그는 사회 활동도 많이 했다. 영화인협회 제23대 위원장, 영화인협회 이사, 한국영상자료원 제2대 이사장, 영화배우협회장을 역임했으며, 제13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제11회 예총문화예술상을 수상했고, 심장마비로 별세한 1999년에는 대종상 공로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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