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선
Kim Ho-sun / 金鎬善 / 1941  ~ 
대표분야
감독, 제작/기획, 시나리오
데뷔작품
환녀 1974
활동년대
1950, 1960, 1970, 1980, 199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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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모그래피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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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애니깽 (김호선, 1996)
아담이 눈뜰때 (김호선, 1993)
사의 찬미 (김호선, 1991)
미친 사랑의 노래 (김호선, 1990)
서울무지개 (김호선, 1989)
수렁에서 건진 내딸 2 (김호선, 1986)
열애 (김호선, 1982)
겨울여자(2부) (김호선, 1982)
세번은 짧게 세번은 길게 (김호선, 1981)
밤의 찬가 (김호선, 1979)

주요경력

1974년 김수용, 백호빈 감독 등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
1981년 영화인협회 기획실 기획위원
1989~1996년 UIP 직배반대 투쟁위원회 위원장
1989~96년 한국영화감독협회 회장 역임
1989~94년 사단법인 한국영화인협회 수석 부이사장 역임
1992~93년 사단법인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대행
1990년~1997년 한국저작권협회 이사
1993년~ 한국민족문제연구소 이사
1990년~2001년 춘사기념사업회 회장, 춘사영화예술상 집행위원회 위원장
1990년~ (주)한백영화사 대표
1993~1997년 한국민족문제연구소 이사
2006년 전국영상문화인협의회 이사
2007년 한국영화감독협회 상임고문

기타정보

영화계 입문배경
일제시대에 저항연극활동을 했던 희곡작가이자 연출가였던 작은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중학교 때부터 연극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작은아버지의 제자들이 활동하던 극단을 따라다니면서 잔심부름 같은 일들을 하면서 무대공간이라는 연극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었고, 점차적으로 연극에서 영화로 옮겨가게 되었다. 한때 오페라연출가인 최현민의 영향으로 김자겸오페라단에서 조연출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연극은 거의가 신파극이나 번역극위주였으며, 연극이 가지고 있는 한정적인 무대공간의 한계등이 자신의 성격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영화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학업을 도중하차하고 여러 감독들과 조감독 수련을 쌓으면서 유현목 감독의 조감독으로 일하면서 본격적으로 영화계에 뛰어들게 되었다.
주요 영화작품
환녀(1974,김호선)
영자의 전성시대(1975,김호선)
여자들만 사는 거리(1976,김호선)
겨울여자(1977,김호선)
죽음보다 깊은 잠(1979,김호선)
밤의 찬가(1979,김호선)
세번은 짭게 세번은 길게(1981,김호선)
열애(1982,김호선)
겨울여자 제2부(1982,김호선)
수렁에서 건진 내딸 2(1986,김호선)
서울무지개(1989,김호선)
미친 사라의 노래(1990,김호선)
사의 찬미(1991,김호선)
아담이 눈뜰 때(1993.김호선)
사랑하고 싶은 여자 결혼하고 싶은 여자(1993,김호선)
애니깽(1996,김호선)
애착작품 및 사유
"영자의 전성시대"는 전쟁과 산업화로 인한 인간의 피폐화된 모습을 다룸으로서, 영화관을 구축하게 된 작품이다. 영화 속의 인물에 대한 애정어린 시각을 갖고 있었으며, 휴머니즘 차원에서 다루려고 했었다. "세번은 짧게 세번은 길게"는 당시의 정치논리에 의한 왜곡된 구조를 비판하고자 했다. 개인의 진실과 사회적 모순을 대비시켜 사회와 개인이 맞물려있는 현실을 깊은 애정을 가지고 우의적 표현이나 넌센스적인 사고로 그리려고 했다. 당시의 대중성에 맞추지 않고 자신의 의도를 고집한 것이 좋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사의 찬미"는 개인적으로도 심혈을 기울였던 작품으로 우리만의 정서와 시각만으로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었다.일제시대라는 잃어버린 시대와 사랑에 대한 향수를 재현하려고 했었다. 천재 예술가의 삶과 사랑, 죽음, 시대등을 그리는 데에는 당시 1920-30년대의 시대적 배경묘사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상황묘사나 촬영조건등 제일 어렵게 만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겨울여자"는 성의 논의조차 당시의 도덕적 통념으로는 타락시하는 환경아래서 성문화에 대한 새로운 가치와 경직된 사회의 성문화를 표현하려 하였다. 육체와 정신의 갈등을 "이화"라는 인물을 통해서 조용히 드러냄으로서, 당시 많은 논쟁을 일으켰다.
영화속 명소
영화라는 작업이 단계적으로 하나씩 쌓아 가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로 촬영한 후 필름을 편집해내는 짜집기식인 작업이라서 일의 특성상 많은 명소가 떠오르지는 않는다. 또한 카메라에 찍힌 모습과 실제 모습은 차이가 있어서 의견차이가 많은 편이다. "서울무지개"의 라스트신에서 나왔던 굴곡진 길이 후에 그곳이 어디냐는 문의가 많이 왔다. 그곳은 양평에서 춘천으로 가는 2차선으로 된 소로길이였는데 풍경이 몹시 아름다웠던 곳이었다.
추구하는 스타일/배역
초기에는 전쟁직후의 사회환경이나 정치적 구조 등의 사회성이 강한 작품을 추구하였다. 70년대라는 사회적, 정치적 상황아래서 산업화의 문제점이나 정치성이 강한 주제를 다루기는 힘든 일이었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당시의 정치풍토에서 영화는 단지 몇가지 장르에 국한된 국가정권 유지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우회적 표현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대적 상황 등이 변하면서 점차적으로 개인이나 역사성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즉 인생에 대한 깊은 관조나 삶에 대한 고찰등, 새로운 시각에서 인생이야기를 다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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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김호선은 일제시기 저항 연극 활동을 했던 희곡작가이자 연출가였던 작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중학생 시절부터 연극에 관심을 가졌다. 연극에서 영화로 관심이 옮겨가면서 유현목 감독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했다(한국영상자료원). 유현목 감독 밑에서 10여 년간 조감독으로 일한 뒤 이영일 각본의 <환녀>(1974)로 감독 데뷔했다(동아일보). 김호선 연출, 조선작 원작, 김승옥 각색의 <영자의 전성시대>(1975)가 서울기준 39만 8천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크게 흥행하자 김호선은 충무로 최고의 흥행감독으로 급부상했다(동아일보a, 경향신문a, 한국영화감독사전).
그는 1975년 하길종, 이장호, 이원세, 홍파 감독과 영화평론가 변인식, 안병섭 그리고 소설가 최인호, 김승옥 등과 함께 영상동인 '영상시대'을 결성하여 한국영화의 부흥을 모색하며, 1977~1978년에 동인지 『영상시대』를 발간하기도 했는데, 이 책은 당시에 본격비평지로 평가받았다(동아일보c, 경향신문d, 한국영화감독사전).
그는 1977년 조해일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겨울여자>(1977)를 연출했다. 각색은 <영자의 전성시대>와 마찬가지로 김승옥이 맡았다(경향신문b). <겨울여자>는 입장권 전회 매진을 기록하면서 크게 흥행했다(경향신문c). 이 영화는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1974)이 세웠던 46만 명의 흥행기록을 깨고, 6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당시 최고 흥행기록을 세웠다(동아일보e, 한국영화감독사전). 이 영화의 기록적인 흥행으로 김호선은 예술성과 상업성을 모두 갖춘, 70년대에 가장 뛰어난 영화작가 중 한명으로 추앙받았다(경향신문c).
1980년 김호선은 김수형, 정인엽, 정지영, 홍파, 장미희, 정윤희, 변인식, 최인호 등과 함께 ‘제3영상그룹’이란 모임을 만들었다. ‘제3영상그룹’은 낙후된 한국영화의 회생을 위해 영화법 개정, 프로듀서 시스템 확립 등을 주장하는 한편, 신인배우양성을 위해 신인배우를 공동으로 모집하기도 했다(경향신문e).
1979년에 <죽음보다 깊은 잠>과 <밤의 찬가>를 만들었고, 1981년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로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는 1981년 영화평론가협회 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동아일보d). 그러나 이후 연이은 흥행실패로 슬럼프를 겪다가 1989년 작 <서울 무지개>가 흥행하면서 재기에 성공했다. <서울 무지개>는 권력층의 섹스 스캔들을 소재로 하여 장안의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한국영화감독사전).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74년 8월 24일자 5면.
동아일보b 1974년 10월 12일자 5면.
동아일보c 1975년 8월 4일자 5면.
동아일보d 1981년 12월 10일자 12면.
동아일보e 1982년 3울 4일자 12면.
경향신문a 1975년 10월 1일자 7면.
경향신문b 1977년 10월 3일자 6면.
경향신문c 1977년 10월 22일자 7면.
경향신문d 1978년 7월 25일자 7면.
경향신문e 1980년 5월 2일자 5면.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설문조사, 2001.
한국영화감독사전
(http://www.kmdb.or.kr/actor/mm_basic.asp?person_id=00001436&keyword=김호선)

* 주요경력, 수상내역(영화)-KMDB, 네이버 인물검색
* 1981년 영화인협회 기획실 기획위원-경향신문 1981년 6월 3일자 12면.

[작성: 김성희]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41년 3월9일 함경북도 북청 출생. 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유현목 감독 밑에서 조연출을 거친 후 1974년 <환녀>로 데뷔했다. 그러나 감독의 이름 석자를 충무로에 확실하게 각인시킨 영화는 두 번째 작품인 <영자의 전성시대>(1975년)라는 멜로드라마였다. 개봉당시 87일만에 36만 여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감독은 충무로 최고의 흥행감독으로 급부상했다. 이듬해 1976년 <여자들만 사는 거리>로 잠시 숨고르기를 한 그는 1977년 이전까지 한국영화의 흥행기록을 일거에 갈아치운 흥행대작 <겨울여자>를 세상에 내놓게 된다. 종전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1974년)이 세웠던 46만 명의 기록을 깨고, 58만 5천 여명을 넘어서는 관객을 동원한 것이다. 이 기록은 1993년 관객 100만 명을 돌파한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의 출현이전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후 그는 1979년에 <죽음보다 깊은 잠>과 <밤의 찬가>를 만들었고, 80년대 들어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1981년)라는 영화로 다시 한번 감독의 존재의미를 세상에 알리게 된다. 이듬해 그는 <열애>(1982년)와 <겨울여자> 속편을 만들었으나 크게 어필하지는 못했다. 그는 계속해서 <수렁에서 건진 내 딸> 속편(1986년), <서울 무지개>(1989년) <미친 사랑의 노래>(1990년) 1991년 <사의 찬미> 그리고 1993년 <아담이 눈뜰 때>와 <사랑하고 싶은 여자 결혼하고 싶은 여자>를 만들었다. 그는 1996년에 <애니깽>을 만들어 그 해 대종상 작품상까지 수상했으나, 평단의 반응은 냉담했고 흥행에서도 참패하고 말았다.
그의 대표작은 당연히 <영자의 전성시대>이다. 순박한 시골 처녀 영자(염복순)가 무작정 상경한 끝에 결국 창녀로 전락하지만, 자신을 이해해주는 때밀이 청년 창수(송재호)와의 사랑을 통해 삶에의 의지를 불태워 간다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더욱이 70년대 월남파병 등과 같은 사회문제를 비록 소박한 형태로나마 저변에 깔고 있다는 점도 작품의 격을 높이는데 한몫을 했다. 즉 감독은 현실을 냉철하게 파악하는 관찰자의 시선과 절제력으로 자칫 눈요기 거리로 빠질 수 있는 창녀의 이야기를 사회드라마로 한 차원 높일 수 있었다는 것이 평단의 반응이었다. 영자 역을 맡은 염복순의 개성 있는 연기도 주목을 받았다. 한동안 최고흥행작으로 남아있었던 <겨울여자>도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빠질 수 없는 작품이다. 조해일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이 작품은 사춘기의 소녀 이화가 성숙한 여자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거치게되는 네 명의 남자들과의 애정편력을 그리고 있는 영화다. 이 작품을 계기로 장미희는 한국여배우의 전성시대를 이끌 새로운 트로이카로 떠오르게 된다.
이어령 원작의 동명희곡을 각색한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는 그 해 개봉된 문제작들 가운데 하나였다. 방송국의 음향효과 담당기사(송창식)가 어느 날 우연히 고급 콜걸(장미희)의 아파트에 함께 머물게 되면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해프닝을 코믹터치로 그려 호평을 받은 이 영화는 흥행에서도 역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제한된 아파트 공간을 통해 현대인의 실상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수작이라는 것이다.
1989년 작인 <서울 무지개>는 권력층의 섹스 스캔들을 소재로 하여 장안의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영화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 풍토에서 금기처럼 여겨져 온 정치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점말고도 수년 동안 침체기에 빠졌던 감독의 회심의 역작이라는 점에서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부도덕한 정치현실의 폭로보다는 스캔들 자체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는 일부 비판도 제기되었으나 흥행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사의 찬미>는 불꽃처럼 살다간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의 짧은 생애를 담고 있는 전기적 영화다. 관비장학생으로 동경대학에 입학하여 성악을 전공한 윤심덕은 김우진, 홍난파 등과 교류하면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펼치지만 염문설에 휘말려 크나큰 정신적 고초를 겪기도 한다. 결국 윤심덕은 자신의 죽음을 예고라도 한 듯 ‘사의 찬미’라는 명곡을 남기고 한 많은 세상을 떠난다는 얘기다. 그는 데뷔작 <환녀>이래 각박한 현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젊은 여성상을 묘사하는데 주력해왔다. 그는 1975년 소설가 김승옥, 최인호, 하길종 감독, 영화평론가 안병섭, 변인식 등과 함께 영상동인 '영상시대'을 결성하여 새로운 한국영화의 부흥을 모색했으며, 그 이론적 결실로 77년과 78년 2년 동안 동인지 『영상시대』를 발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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