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Im Kwon-taek / 林權澤 / 1934  ~ 
대표분야
감독, 시나리오
데뷔작품
두만강아 잘 있거라 1962
활동년대
1960, 1970, 1980, 1990, 2000, 20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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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모그래피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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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화장 (임권택, 2014)
달빛 길어올리기 (임권택, 2010)
천년학 (임권택, 2006)
하류인생 (임권택, 2004)
취화선 (임권택, 2002)
춘향뎐 (임권택, 2000)
창(노는계집 창) (임권택, 1997)
축제 (임권택, 1996)
태백산맥 (임권택, 1994)
서편제 (임권택, 1993)

주요경력

1989년 문화훈장 보관장
1991년 프랑스 예술문학 기사훈장
1994년 제11회 금호예술상
1994년 동아일보 선정 '93올해의 인물'
1994년 광복5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위원
1996년 한국영화연구소 자문위원
1996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객원교수
1996년 6월 한국영화연구소 초대 이사장
1997년 후쿠오까 아시아 문화상 예술부문 수상
1997년 CINEMA NOMO 영화제 임권택 감독 주간 '축제'등 10편
1998년 동국대학교 연극영상학부 겸임교수
1998년 제3회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
1998년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
1999년 영화진흥위원회 위원
2002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2002년 7월 2일 가톨릭대학 명예문학박사
2002년 금관문화훈장
2002년 유네스코 펠리니 황금메달
2002년 제3회 올해를 빛낸 한국인상
2003년 제13회 호암상 예술상
2003년 (사)전남영상위원회 명예위원장
2004년 제8회 만해대상
2005년 자랑스런 전남인상
2005년 국립공원관리공단 국립공원 명예대사
2007년 프랑스 레지옹도뇌르 훈장
2007년 제3회 앙드레김 베스트스타어워드 특별상
2008년 2월~ 동서대학교 임권택영화예술대학 명예학장
2008년 7월 제10회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심사위원장
2009년 6월 제12회 상하이 국제 영화제 아시아신인상 부문 심사위원장
2010년 10월 G20 정상회의 개최 성공기원 스타 서포터즈
2011년 사단법인 한국상록회 제19회 인간상록수 추대
2011년 5월 26일 전남대학교 명예문학박사학위 수여
2011년 6월 제10회 미장센 단편영화제 '장르의 상상력전' 특별심사위원
2011년 8월 서울드라마어워즈 본심심사 위원장
2015년 전남문화예술재단 명예대사(2015.12.16)

기타정보

영화계 입문배경
1955년 정창화 감독님의 <장화 홍련전> 촬영때 일 거들어 주던게 시작점이 되었다. 그리고, 1956년 <풍운의 궁전>때는 소품조수로 일해왔고, 그 다음은 조명조수로 전전하다가 1957년 비련의 섬으로 비로서 정창화 감독 연출부에 입문했다. 1958년 <후라이 박사 소동>으로부터 1961년 <장희빈>을 끝으로 스물여섯 비교적 이른 나이에 감독에 데뷔하게 되었다.
애착작품 및 사유
나 자신은 꼽을 만한 대표작이 없고, 타인들이 꼽고 있는 작품은 <만다라>, <길소뜸>, <서편제> 인것 같다고 대답하면 대부분이 의아해 한다. 나는 완성된 영화를 몇 번 보지 않는다. 내 영화를 내가 본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더 잘해낼수 있는 장면을 못해낸 아쉬움과 도처에 복병처럼 박혀있다. 불쑥 얼굴을 들이미는 잘못찍힌 장면과의 만남은 그대로 고통이기 때문이다. '항상 나 자신이 결함없는 영화가 찍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라는 생각으로 영화에 혼신을 다해 찍어가고 있다.
하고싶은 말
'내가 영화 속에 담아내고자 하는것은 人本이다. 사람이 사람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체제 어떤 이데올로기든 그것을 관철하기 위해 인간을 희생시키는 것은 안된다는 생각이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즐거움이면서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지금도 할 수 있고, 앞으로도 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하다.'정말 나의 영화 인생은 행복이 있다.'
추구하는 스타일/배역
작품 경향은 미국영화와 '차별화'되지 않으면 살길이 없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한국 사람만이 만들수 있는 영화, 그런 문화적 개성과 전통을 담고자 한다. 또한 영화 속에 '人本'을 담고자 한다. 싫던 좋던 더불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오늘의 지구촌을 황폐하고 거친 꽃밭에 비유해 본다. 그런 지구촌을 아름다운 꽃밭으로 가꾸는데 영화라는 매채도 한 몫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시아의 극동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영화감독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곳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개성을 필름에 담아서 세계라는 큰 꽃밭을 아름답게 가꾸는데 작은 꽃으로서 작은 부분이나마 일조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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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34년에 전라남도 장성에서 태어났다. 일본 유학시절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삼촌의 영향으로 아버지 역시 한국전쟁 전후로 좌익 활동을 했으며, 그 때문에 급속히 기울어버린 가세와 빨치산 가족이라는 낙인이 지겨워, 중학교 3년 재학 중이던 18세에 집을 나와 부산으로 떠난다. 그렇게 도착한 부산에서 군화를 떼어다 팔며 생활했는데, 휴전이 되자 군화사업을 하던 사람들이 서울로 기반을 옮겨 영화제작에 나선다. 그렇게 제작한 영화가 정창화 감독의 <장화홍련전>(1956)이었다. 한편, 부산에 남아 군화장사를 하던 임권택에게 서울로 올라와 제작부 막내 일을 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듣고, 1955년 <장화홍련전>의 스탭으로 영화에 입문하게 된다. 이후 소품부, 연출부를 거쳐 1960년 <햇빛 쏟아지는 벌판>에서 조감독으로 일하기 시작한다(정성일). 그러던 중,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 <지평선>(1961) 등 대작 액션물들을 제작하던 한흥영화사의 최관두 사장이 조감독 임권택이 만든 예고편을 보고 연출제의를 한다. 그렇게 연출한 데뷔작이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이며, 이후 10년 남짓한 기간 동안 50여 편을 감독한다(인터뷰365). 그 10년 남짓한 기간 동안 멜로드라마, 뮤지컬, 액션, 무협, 스릴러, 코미디 등 거의 모든 장르의 영화들을 할리우드, 홍콩의 영화를 모사해가며, 또 그들을 뛰어넘기 위한 시도들을 경주한다. 그러던 중, '솔직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 지방업자들을 직접 만나고, 빚져가며 제작한 영화가 나한봉 작가와 준비한 <잡초>(1973)였다(인터뷰365). <잡초>(1973)는 흥행에 실패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충무로 제작자들에게 장르물에 능한 다작의 임권택이 아닌, 진지한 영화도 만들 수 있는 감독 임권택으로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다. 1972년 유신체계에 돌입하며 영화사들이 14개로 정리되고, 우수영화에 대한 외화 쿼터 보상 제도가 시작되는 시점에 <잡초>를 감독한 임권택 감독은 제작자들에게 좋은 선택이 된다. 이 시기 <연화>(1974), <아내>(1976), <족보>(1978), <상록수>(1979), <깃발 없는 기수>(1979) 등의 작품들을 연출하고서, 1980년대로 접어든다. 1980년대는 <짝코>(1980)로부터 시작해 <만다라>(1981), <안개마을>(1982), <길소뜸>(1985), <씨받이>(1986), <티켓>(1986), <아다다>(1987), <연산일기>(1987),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 등 임권택 개인의 필모그래피뿐만 아니라, 1980년대 한국영화사를 대표하는 작품들로 채워지고, 1990년대 <장군의 아들> 시리즈를 시작으로, <개벽>(1991), <서편제>(1993), <태백산맥>(1994), <축제>(1996), <창>(1997) 등으로 이어진다. 2000년대 들어와 <춘향뎐>(2000)을 거쳐 <취화선>(2002)으로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다. 이후 자신이 통과해 온 1970년대에 대한 매우 개인적인 고백인 <하류인생>(2004)을 거쳐, <서편제>의 송화의 후일담 같아 보이는 100번째 연출작 <천년학>(2006)을 연출한다.

* 참고문헌
정성일 대담,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한다』, 현실문화연구, 2003년
‘나는 아직 대표작이 없는 감독, 임권택‘, 인터뷰365, 2007년 12월 4일
(http://www.interview365.com/news/332)

[작성: 황미요조]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36년 5월 2일 전라남도 장성군 남면 삼태리 568번지에서 출생하였다. 주민등록상의 본적은 남면 삼태리이지만 실제 태어난 곳은 읍내 단광리이다. 집안은 지주인 조부와 인텔리인 부친의 영향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었으나 해방전후에 부친과 삼촌의 좌익활동으로 집안의 가세가 많이 기울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던 유년시기와 학창시절을 지냈다.
이 시기는 <태백산맥>(1994)을 통해 영화적으로 재현된다. 사토오 다다오와 인터뷰에서 ‘인민군의 태도가 상당히 고압적인 것을 보고 남한의 좌익을 그들의 동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고 술회하였다. <태백산맥>(1994)에서 인민군 부대가 자신들을 환영하는 빨치산 생존자들에게 고압적인 태도로써 실망시키는 장면은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재현하여 감독의 체험이 직간접적으로 반영되었다.
좌우익 이데올로기의 갈등으로 집안의 파산과 가족의 직접적인 피해는 이념에 대한 공포감을 가져왔으며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은 인본주의를 잉태시키는 모태가 되었다. 그의 작품세계는 제도나 역사보다 인간이 무엇보다 우선하고 소중하다는 인본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태백산맥>과 <길소뜸>과 <짝코>는 이념의 대결 대신 인간의 화해를 모색하는 것도 인본주의의 영화적 발현으로 볼 수 있다.
학교는 장성의 월평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 숭일 중학교를 다녔으며 재학시절 가출하여 부산으로 가서 어려운 경제활동을 하였다. 가출과 떠돌이 인생은 <서편제>(1993), <만다라>(1981),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 <길소뜸>(1985), <짝코>(1980)를 통해 길 위를 떠도는 자의 이미지를 통해 영화적으로 재현되었다.
또한 해방공간에 찬탁과 반탁으로 국론이 분열되는 것을 직접 목격하면서 이 경험을 <깃발 없는 기수>(1979)를 통해 좌익운동의 지도자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드러난다.
1953년 가출하여 목포에서 부산으로 향했으며 이후 이규환의 <춘향전>의 흥행성공으로 영세자본이 영화판에 유입될 때 상경하여 영화 일에 뛰어든다. 영화의 길은 예술가의 길을 선택하는 개인적 결단보다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에 무게중심이 있었다. 처음으로 작업에 참여한 작품은 1956년 정창화 감독의 <장화홍련전>이었다. 조감독으로 참여했던 작품은 <슬픔은 강물처럼>(1960) 과 <지평선>(1961), <노다지>, <장희빈>이었다.
감독으로서 출발은 영화현장에 투입된 지 5 년이 지난 26 세 때인 1961 크랭크 인하여 1962년에 개봉된 <두만강아 잘 있거라>이다. 1960년대는 한국영화사에서 양적인 풍요를 구가하던 시절이었다. 1960년대 한국영화의 제작 열기 고조에 힘입어 임권택 감독의 영화제작 편수도 1963년에 3편에서 1964년에 6편, 1969년에 6편씩 제작하는 다작의 시기였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의 다작의 시기를 거쳐서 1973년 스스로 ‘내 영화라고 부르고 싶은 첫 작품인 잡초’를 연출한다. 잡초는 기구한 한 여성의 일생을 내용으로 한 영화로서 감독의 모성에 대한 투사가 강하게 들어간 영화다. 스스로도 ’<잡초>는 엄청난 주제는 아닙니다. 그저 ‘여인 수난사’라고 규정한다.
1970년대에 <왕십리>(1976), <낙동강은 흐르는가>(1976), <상록수>(1978), <깃발없는 기수>(1979)를 통해 작가적 역량을 축적하여 1980년대로 접어든다. 1980년대는 감독 스스로 다시 제작하고 싶은 영화라고 부를 정도로 애정을 지닌 <짝코>(1980)를 연출하면서 전성기를 열어간다. 1981년에는 한국 불교영화의 세계를 확장시켜놓은 <만다라>를 연출하였다.
이후 1980년대에 이문열의 <익명의 섬>을 영화화한 <안개마을>(1983)과 무교적 세계를 다룬 <불의 딸>(1983), 이산가족의 재회의 어려움과 후유증을 다룬 <길소뜸>(1985) 자손의 대를 잇기 위한 유교적 가부장적 사회의 문제점을 파헤친 <씨받이>(1986), 두 가지 구도의 길을 보여준 <아제아제바라아제>(1989)등 임권택 영화세계의 정점을 이루는 작품들이 이 시기에 생산되었다.
이 시기에 특징적인 변화는 1981년 <만다라> 작업부터 정일성 촬영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 송길한과 공동작업을 수행하면서 작품이 개화한다. 뛰어난 작품의 탄생배경은 언제나 뛰어난 작가와 탁월한 스텝들이 공조체제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임권택 감독의 경우도 영화이력을 통해 입증하였다. 정일성 촬영감독과 송길한 작가가 참여하여 공동 작업하였던 1980년대 대표작들은 <우상의 눈물>(1981), <만다라>(1981),<안개마을>(1983), <불의 딸>(1983), <길소뜸>(1985) 등을 들 수 있다.
송길한과 작업은 1980년 <짝코>에서 출발하여 <우상의 눈물>, <만다라>, <나비 품에서 울었다>, <안개마을>, <불의 딸>, <길소뜸>, < 티켓>, < 씨받이>로 이어진다. <우상의 눈물>, <만다라>, <안개마을>, <불의 딸>은 원작 소설을 각색하였으나 나머지 작품은 창작 시나리오였다는 점에서 임권택 감독과 송길한의 공동작업은 감독의 영화세계를 구축하는데 기여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제작 측면에서 여러 제작사와 작업을 진행해왔지만 1980년대는 화천공사에서 1978년 임권택 감독의 <상록수>를 제작한 이래 1980년대 접어들면서 <만다라>,<오염된 자식들>(1982),<안개마을>(1983),<길소뜸>,<아다다>(1988)를 제작하였다. 1990년대 그의 영화는 태흥영화사의 산물이었다. 1989년 <아제아제 바라아제>에서 시작하여 춘우영화사에서 제작한 <개벽>을 제외한 90년대 전 작품은 태흥영화사에서 제작되었다. 영화의 주제는 이용관에 의하면 휴머니즘에 입각한 영화정신을 갖고 있으며 몇 가지 특징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그의 작품은 장르구분이 모호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인과 모성애가 주요인자로 기능하고 있으며, 둘째로 동심이나 사춘기를 다루는 작품에서 난맥을 노정시킨다. 셋째 모든 등장인물의 상호관련성이 반드시 휴머니즘에 입각하며, 넷째 전쟁영화나 반공영화의 일부는 예외없이 극적 내러티브에서 실패하고 있다. 다섯째, 사극영화의 경우 그는 현실도피적 제재의 함몰이라는 취약성을 드러낸다. 여섯째, 민족적 애국적 등등의 이데올로기를 극화하는데 취약하다. 일곱째,그의 인물이나 상황묘사에 있어 몽타주적 시간감각보다는 포토제닉한 공간감각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여덟째, 그는 흥행성으로 대변되는 이른바 '벗기는 장면'에 비교적 인색하다. 아홉째, 따라서 그의 영화스타일은 현대적인 것, 성인에 대한 것, 모성애 경향, 사회적 리얼리즘과 휴머니즘, 또는 공간적,시간적인 것, 길을 떠나는 엔드 마크 취향 등을 가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표작은 1981년 <만다라>,<아제아제바라아제>(1989)가 있으며 1993년 한국영화 관객동원 100만을 돌파한 기념비적인 작품인 <서편제>와 2000년 칸 영화제 경쟁부분에 초청된 <춘향뎐>등 100여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는 99번째 작품인 <취화선>(2002)으로 제 55회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감독의 반열에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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