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휘
Jang Dong-hee / 張東輝 / 1920  ~  2005
본명
장갑순 (Jang Gab-sun)
대표분야
배우, 제작/기획
데뷔작품
아리랑 1957
활동년대
1950, 1960, 1970, 1980,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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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정진우, 1995) 우정출연
만무방 (엄종선, 1994) 노인
말미잘 (엄마와별과말미잘) (유현목, 1994) 할아버지
전국구 (권일수, 1991) 특별출연
잡초들의 봄 (문여송, 1989) 권동석
원한의 도전장 (이혁수, 1982)
우산속의 세 여자 (이두용, 1980) 황회장
깃발없는 기수 (임권택, 1979) 회장
선배 (이두용, 1979) 동수
꿈나무 (최훈, 1978) 방근성(도석 부)

주요경력

1971년 한국영화인협회 부이사장
1974년 한국영화인협회 연기분과위원장
1978년 한국영화인협회 연기분과위원장
1981년 한국영화인협회 연기분과위원장

기타정보

영화계 입문배경
전 중국에 있을 당시 연극단 "칠성좌"에서 데뷔하였다. 그때 나이 20세였다. 그 뒤 한국에 돌아와 악극단에서 활동하던중 6.25전쟁이 일어나 국군에 입대하여 일선위문대에서 활동하고 2차 수복후 "코리아" 악극단을 운영하였다. 그 후 연극단에서 활동하다가 김서동 감독의 권유로 '아리랑'이란 작품에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애착작품 및 사유
아리랑: 저의 첫 데뷔작으로 가장 많은 애착이 간다. 그러나 현재 필름이 현존 하지 않아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꼭 이작품의 필름이 발굴되었으면 한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 제가 어려운 시기에 여러 가지 열악한 환경속에서 촬영된 작품으로 기술, 연기력, 재정, 인적으로 모든면이 부족한 것이 너무도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모두가 혼연일체가 되어 최선을 다한 작품으로 기억에 남으며 전쟁영화여서 인지 약간의 사고도 있어 인명이 부상을 입기도 하고 많은 에피소드가 있던 작품이었다.
하고싶은 말
요즈음 전 영화계가 스크린쿼터제로 시끄러운 듯하다. 영화인으로 누구나 겪어야 하는 과정을 너무나 쉽게 생각하면 아니된다고 믿는다. 많은 후배 영화인들이 삭발과 단식으로 강한의지로 우리 영화를 지켜나가야 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어 가슴이 뿌듯하다. 과거의 우리영화는 사실 주먹구구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모든 것이 열악한 상황속에서 작품활동이 이루어졌다. 현재는 우리영화계가 많이 발전하였고 여러가지면에서도 좋은 상황이라 생각된다. 반드시 우리 영화가 세계속에서 인정받으며 한국의 영화가 진정한 면을 보여줄 수 있음을 믿는다.
영화속 명소
장소: 제주도, 경포대. 설명: 육지쪽보다는 바다를 낀 풍광이 아름다운 것 같다. 우리나라는 사실 감춰진 비경이 많이 있는 것 같다.
추구하는 스타일/배역
추구하는 연기스타일: 많은 부분의 작품이 액션물이였다. 선이 굵고 호방스러운 남성의 역할을 많이 하였으며 멜로 영화에서도 나름대로의 연기를 한 것같다. 각 연기마다 카리스마가 몸에서 배어나오는 진정한 성격배우로서 연기 해온것 같다.
하고 싶은 배역: 전 나이가 들면서 여러 가지로 어려운 것 같다. 그러나 나의 나이에 걸맞는 배역이 주어진다면 혼신의 힘을 다햐여 임하고 싶다. '만무방'같은 영화에서 연기했던 것처럼 그 시대의 조류에 상응하는 배우로 남고 싶다.
자기소개 및 취미
요즈음 시간이 나면 주로 음악감상을 많이 하는 편이다. 요즈음은 참전영화협회에 자주 나가 옛일을 더듬어 보고 아직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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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20년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극장에서 본 악극에 매료되어 1939년 악극단 컬럼비아에 입단했고(씨네21), 그 해 소속을 옮겨 만주의 악극단 칠성좌에서 무대 데뷔한다(영화백과). 한국 전쟁 시, 입대하여 일선위문대 활동을 했고, 전쟁 이후에는 연극단에서 활동하다 김소동 감독의 권유로 <아리랑>(1957)에 출연하며 영화 배우로 입문하게 된다. 나운규의 동명 영화를 리메이크한 영화로 양복을 입은 사람만 보면 달려드는 미친 영진의 역할을 연기했으며, 이 데뷔작에서 이미 '뛰어나게 좋'은 연기(한국일보), '금년 영화계의 중요한 소득 중 하나'(조선일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후 <노다지>(1961),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검은 머리>(1964) 등의 액션, 전쟁 영화에서의 선 굵은 남성이지만, 그 이면에 감추어진 상처 받은 모습이 공존하는 1960~1970년대 한국 영화의 대표적인 액션 배우였다. 1980년대의 긴 휴식을 마치고 돌아온 <만무방>(1994)에서의 호연으로 아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2005년 4월 2일 세상을 떠난다.

* 참고문헌
한국일보 1957년 4월 5일 4면
조선일보 1957년 4월 26일 석간 4면
『씨네21』, 2005년 4월 14일 (498호)
영화백과 제작위원회 편, 『영화백과』, 정치평론사, 1975, 134쪽

[작성: 황미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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