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소름, 2001

by.장병원(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2023-11-07조회 2,056

2000년대 초반 한국을 포함한 세계 영화계에서 10대 난도질 영화가 호러 장르의 트렌드 세터 역할을 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하얀 소복에 검은 머리를 늘어뜨리고 느린 속도로 기어오는 아시아 산(産) 처녀 귀신 스토리가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즈음 한국에서는 이런 유행 경향을 의식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공포영화가 등장했다. 윤종찬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 <소름>(2001)은 영적인 요소와 잊히지 않는 서프라이즈의 순간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외로움과 비극적인 과거로 고군분투하는 인간의 불안을 성찰하는 공포영화였다. 이 영화는 낡은 아파트 주민들을 둘러싼 잔인한 고통과 불행을 다루면서 한국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쟁점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장소에 깃든 역사, 공포의 기원으로서 공간의 의미 맥락을 환기하는 신실한 드라마였다.

<소름>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어두운 심연에 대한 음울한 이야기이다. 그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연기를 보여준 김명민이 서사의 주동 인물인 택시 운전사 용현을 연기한다. 용현은 돈을 아끼고 직주근접을 실현하기 위해 허물어지기 직전의 낡은 아파트로 이사한다. 겨울의 초입쯤으로 짐작되는 어느 날, 이 을씨년스러운 아파트에 당도하자마자 그는 자신이 빌려 사는 504호에 깃든 비극적인 스토리에 대해 알게 된다. 전 세입자가 의문의 화재로 사망했을 뿐만 아니라 30년 전에도 같은 방에서 한 여성이 살해당했고 그때도 화재가 발생했다는 것. 아파트의 내력을 소상하게 알려준 이는 미스터리 소설을 집필 중인 505호 소설가 이 씨(기주봉)이다. 용현은 편의점 점원으로 만난 선영(장진영)이 아래층에 사는 동네 주민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어느 날 밤, 퇴근길에 선영을 태워다 준 뒤 도박 중독에 걸린 남편에게 그녀가 학대당하는 소리를 듣는다. 이후 피투성이가 된 선영은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용현은 남편의 시체처리를 도와준다. 내밀한 비밀을 공유한 두 사람은 가까워 지지만 과거의 무게가 그들을 짓누르고 아파트 곳곳엔 불길한 기운이 감돌면서 30년 전의 미스터리가 새롭게 조명된다.

유령의 집은 수많은 호러 영화들에서 단골 무대를 제공하는 세팅이다. <소름>은 가장 많은 한국인들이 거주하는 집인 아파트를 미스터리와 악몽의 공간으로 형상화한다. 한국에서 아파트는 부(富)와 편의, 효율, 안전, 청결 따위의 현대적 가치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거주를 목적으로 한 ‘집’이기에 앞서 근대화의 표상이다. 경제성장의 물질적, 이데올로기적 기제로서 아파트 단지는 빠르게 성장해 온 이 국가의 발전을 상징해 왔다. 아파트 시세의 등락이 선거의 결과를 좌우한다는 말이 정설로 받아들여질 만큼 아파트는 한국인들의 물질적, 정신적 삶을 지배해왔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서울의 아파트 개발은 도시 계획의 핵심을 관통하였고 경제성장의 양적, 질적 성과를 보여주는 국가의 전략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소름>의 무대가 되는 미금아파트 장면들은 1969년 준공되었으나 지금은 역사적 기념비 또는 폐허가 되어버린 서울시 서대문구에 소재한 금화시민아파트에서 촬영하였다. 중산층의 신화와 대조적으로 <소름>의 아파트가 소외된 방외자들이 사는 낡고 퇴락한 거주 공간으로 형상화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용현과 이 씨의 첫 번째 대화 장면에서 이 씨는 이 아파트가 곧 재개발에 들어갈 것이라고 알려주는데, 이 씨는 미금아파트의 역사에 기초한 허구의 이야기를 창작하고 있으며 그의 소설에 중심이 되는 것은 용현이 사는 504호이다.
 
  

<소름>은 모더니티의 표상으로서 아파트를 공포의 기원으로 재설정하려는 프로젝트였다. 이상의 아이디어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다가서는 장면이 있다. 용현이 미금아파트에 도착하는 시간으로 열리는 오프닝은 정교한 카메라 프레이밍과 강렬한 콘트라스트로 설정의 기능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용현의 뒤통수를 잡은 바스트 쇼트로 시작하는 도입은 일군의 아이들이 프레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달려가는 방향과 속도를 따라 고개를 돌리면서 초코바를 물어뜯는 용현의 기이한 제스쳐를 보여준 뒤 먼 거리에서 촬영한 미금아파트의 쇼트로 이행한다. 근경과 원경을 왕래하는 인상적인 편집은 낡은 아파트 건물을 비추는 햇살, 기우뚱하게 선 아파트에 짓눌린 용현의 왜소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 쇼트의 프레이밍과 구도는 이어지는 쇼트에서 컴컴한 아파트 계단을 힘겹게 오르는 용현의 뒷모습과 극단적으로 대조를 이룬다. 다음 쇼트에서 자신이 머물 504호가 있는 층의 복도에 다다른 용현은 어둡고 긴 복도의 끄트머리에 있다. 용현이 끌고 다니는 기묘한 가방을 강조하던 카메라는 서사의 비밀에 대한 힌트를 주는 사물(천장에 매달린 3구 조명)에 오래 머무른다. 외부에서 내부로, 밝음에서 어둠으로, 평평함에서 깊이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쇼트의 구성과 편집은 서사의 초입에서 관객들이 낯선 공간과 인물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 완벽한 설정이다. 시종일관 으스스한 아파트 건물은 의식을 가진 존재처럼 묘사되는데, 복도의 조명이 켜졌다 꺼지면서 가쁜 숨소리가 들리고, 창문은 분노한 얼굴처럼 기묘한 패턴을 형성한다. 인격화된 아파트는 소외된 캐릭터들과 교감한다. 인물의 배후 스토리를 둘러싼 미스터리가 제자리를 찾은 후에도 용현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예측불허의 느낌을 준다. 조용한 방에서 그가 이소룡 흉내를 내거나, 거울을 보며 의문의 상처를 살필 때 또는 아파트 복도의 심연 같은 어둠을 응시할 때에도 신경세포를 긁는 것같은 느낌이 전달된다. 헤어스타일부터 줄담배에 이르는 모든 것이 수년간의 학대 끝에 형성된 냉담한 사고방식의 결과인 것으로 추정되는 선영의 언행도 한 맥락 안에 있다.

<소름>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공포를 일종의 연쇄적인 사건들의 네트워크로 제시한다는 점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기능 장애가 있거나 가난하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운이 좋지 않지만 모두 연결되어 있다. 저들은 세대를 이어가는 끝없는 공포의 순환에 갇혀 있다. 여기엔 오랜 시간 최고의 선으로 추구되었던, 개발 이데올로기가 초래한 비극의 연쇄고리가 놓여 있다. 인생에서 겪은 불행의 이유에 대해 생각하는 인물들에게 공포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의 한 측면처럼 느껴진다. 세밀하게 디자인된 악몽 같은 설정, 귀기 서린 음악, 놀라서 뛰어오르게 만드는 설정(jump scare)이 등장하는 살인 스토리 등 고전적인 공포영화의 요소도 있지만, <소름>은 공포라기보다는 미스터리 드라마에 더 가깝다. 504호의 비밀, 몰살된 가족, 과거의 귀환은 이 공간의 억압적인 분위기에 녹아있으며 장소의 인격화는 모든 장면에 스며들어 아파트가 하나의 캐릭터로 느껴질 정도로 팽창한다. 어두운 복도와 벗겨진 페인트, 철골을 드러낸 건물의 표면, 눅눅한 계단, 휘갈겨진 낙서 따위를 시각화하는 장면들에서 아파트는 괴물과 살인자, 유령을 대신한다. 스토리는 매우 느리게 진행되고, 느린 템포는 불안감을 증폭하며, 프레임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만큼이나 지나가는 말과 그에 대한 반응이 극의 진행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피가 끓고, 머리카락이 솟고, 오싹한 장면들로 압도하는, 뉘앙스에 기초한 공포지만 아파트 주민의 삶에 깊이 빠져들게 하여 그들의 소용돌이치는 운명에 유대감을 형성하는 윤종찬의 연출은 점진적으로 감정의 온도를 비등점으로 향하게 한다.
 
  

무엇이 한국의 공포영화를 한국적인 것으로 만드는가? 모더니티의 유령들, 근대의 뒤안길에 대한 회고적 성찰, 변화하는 젠더 정치학이 멜로드라마적인 과잉의 수사와 연계되어 어두운 과거를 불러내는 플래시백 구조 따위를 거론할 수 있다. 장르의 스테레오타입에 부정의 자세로 선 <소름>은 여러 등장인물의 절망적인 삶에 깊이 관여하는 어둡고 실존주의적인 작품이다. 복수심에 불타는 유령 소녀가 눈에 머리카락을 달고 관절을 꺾어대는 호러 영화와는 완전히 차별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한국적 맥락에서 아파트라는 공간의 사회학적 함의와 공명하면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자신의 안전을 추구하기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암울하게 묘사한다. 무엇보다 비극의 원인을 초자연적인 공포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맥락 안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가볍지 않다. 괴담의 꼴을 한 이야기지만 1995년 6월 29일 발발하여 사망 502명, 5명 실종, 부상 937명의 참사로 기록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아내를 잃은 윤종찬 감독에게는 지극히 현실적인 프로젝트였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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