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그때 그사람들, 2004

by.장병원(영화평론가) 2022-04-06조회 1,715

<그때 그사람들>(2004)은 남자들의 이야기이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의 밤을 소재로 한 이 가상 역사극은 절대권력을 구가하던 늙은 독재자와 그의 충직한 수족들, 저들의 카르텔에서 배제된 험악한 야수들의 쟁투를 블랙코미디의 작풍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남자들의 아귀다툼을 흥미로운 풍자극으로 전환하는 것은 저들의 틈새에 끼어있던 여성들의 몫이다. 이 영화의 여성 캐릭터들은 VIP를 위해 일신(一身)을 단장하고 순번을 기다리는 비키니 걸들이거나 거간꾼 노릇을 하는 마담 뚜, 중앙정보부 비밀 연회의 악사로 흥을 돋우는 가수 등 주변적인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사소한 배역과는 별개로 그들의 진가는 텍스트를 운위하는 또 다른 기능에서 찾을 수 있다.

<그때 그사람들>의 플롯은 10.26의 시작과 끝을 나레이터(화자)의 목소리에 실어 전달한다. 문학적인 개념으로 치자면 3인칭 화자의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으로 볼 수 있는 간접 전술이 스토리를 주재한다고 볼 수 있다.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은 이 영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는 형식적 장치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보이스오버의 통념적인 용례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영화적 담화에서 보이스오버는 일반적으로 친밀감을 주거나 대화나 이미지를 통해 나타낼 수 없는 정보들을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다른 한편으로 보이스오버는 언어 코드와 시각적 코드의 결합을 통해 복잡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보이스오버는 언어적 의사소통 수준과 시각적 의사소통 수준 사이의 인터페이스를 제공함으로써 시청각 기호들에 대한 더 풍부한 이해를 돕는다. <그때 그사람들>에서 임상수는 스토리의 여러 측면들을 해설함으로써 그 흐름과 전개를 조력하는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의 일반적인 함의에 도전한다. 이 도전의 토대는 내러티브 안에서 주변부에 머무는 여성들이 서사의 바깥에서 화자 역할을 하도록 함으로써 가능해진다. 한편으로 스토리로부터 여성의 관점을 분리(나레이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표현 전략을 통해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 잠재해있는 이 정치적 사변의 직, 간접적 가담자들의 정체성을 투영(작중인물)하는 중첩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이러한 보이스오버의 활용은 내러티브의 주체와 내레이션의 주체를 이중화한다. 전자는 스토리 사건에 참여하여 그것을 조정하는 반면, 후자는 내러티브를 자율적으로 통제하고 주관하는 더 강력한 저자, 더 큰 주체를 표시한다.

비(非) 동기화된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은 화면 밖의 스토리텔러에게 내러티브 권위를 부여한다. 그것은 창조주로서 신뢰를 가진 의인화된 영화의 목소리가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보이스오버는 <그때 그사람들>의 의미 맥락을 결정하는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된다. 임상수가 설계한 내러티브에 프레임을 설정하고, 윤리적인 기준을 제공하며, 특유의 씁쓰레한 풍자를 담당하는 목소리는 전적으로 여성들의 것이다. 이렇게 계산된 플로팅 컨셉트에 따라 나레이터의 역할을 떠맡은 것은 김윤아와 윤여정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두 나레이터는 화자이자 작중 인물로 이중적으로 기능한다. 이중적으로 기능한다고 함은, 임상수의 서술 전략이 관객들로 하여금 캐릭터와 스토리텔러라는 양자의 기능을 견주어보도록 부추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밴드 자우림의 보컬이기도 한 김윤아는 프롤로그의 나레이터이자 궁정동 안가 만찬에 초청되어 엔카를 부르는 가수로 등장한다.

프롤로그에 나오는 김윤아의 보이스오버를 들어보자. “박정희, 그가 군사 쿠데타 이후 18년째 정권을 유지해오던 1979년 가을, 부산과 마산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의 뜻밖에 대규모 시위가 있었습니다. 폭압적인 정권에 저항하며 민주화를 요구했지만, 박정희 정권은 군대를 동원해 이를 간단히 진압해 버렸습니다. 질식할 것만 같은 거짓 평온이 흐르고, 시민들은 한껏 웅크리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뜬금없게도, 박정희는 총에 맞습니다.” 김윤아의 음성 해설은 스토리의 배경을 소개한다. 그는 이후 에피소드들에서 자신이 등장한 것을 예고하는 류의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 나레이션 행위를 통해 스토리의 서막을 연다. 구연동화의 도입부를 암송하는 것 같은 어조는 이 이야기의 역사적 지위, 박정희의 생애를 먼 옛날의 신화적 서사로 기억하고 있는 한국인들의 의식을 반영한다. 따라서 김윤아가 화자이자 등장인물로서 스토리의 안과 바깥의 경계에 있는 특권적인 나레이터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디제시스 안의 사건에 참여하기 때문에 다른 등장인물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권위에 있어서 제약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 즉, 김윤아는 사태의 전말에 대해 초월적인 지위를 갖지 않는다.

김윤아보다 높은 자리에서 이야기의 핵심을 관통하면서 그 위상을 결정하는 인물은 윤여정이다. 윤여정은 김윤아와 마찬가지로 1인 2역을 맡았다. 그는 모든 사태를 관망하는 자이다. 프롤로그에서 윤여정은 여성 편력이 극심한 어르신(박정희)에게 자신의 딸을 맡겼으나 단물만 빨리고 용도폐기당한 상황에 항의하는 어느 연예인의 모친을 연기한다. 색정광 권력자의 방탕을 은근히 조롱하는 이 철없는 엄마는 중앙정보부의 채홍사 노릇을 하는 주 과장(한석규)에게 육두문자를 섞은 모욕을 당하고 12차선 도로 한복판에 나뒹군다. 뇌리에서 사라진 윤여정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되는 것은 영화가 끝나기 10여 분 전이다. 국가 원수 암살이라는 중대한 사건이 우스꽝스러운 소동극으로 마무리된 뒤 이 계획에 가담한 사람들의 후일담을 소개하는 서술 화자로 윤여정의 목소리가 나온다. 절대권력의 서슬 앞에서 입을 놀리다 굴욕을 당한 프롤로그의 철없는 엄마와 다르게 에필로그의 나레이터에게서는 이 모든 사태를 관장하는 전지적 화자의 위엄이 있다. 서사와 주제, 태도, 세계관을 아우르는 그녀의 초월적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관객들은 비로소 심수봉의 노래에서 빌어 온 ‘그때 그사람들’이라는 표제의 뉘앙스를 분명히 짐작할 수 있다. 그 일부를 옮겨보자. 검은색 가림 유리막이 처진 중앙정보부의 밀실 너머에서 김 부장(백윤식)이 치도곤을 당하는 꼴을 바라보면서 검은 선글라스의 국군 장교(전두환으로 추정된다)가 내뱉는 대사에 이어 윤여정의 나레이션이 갑자기 끼어든다. “어때요, 저 사람. 혁명적 민주투사로 보입니까? 아니면 과대망상에 빠진 돈키호테였을까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담은 저 사내의 법정 최후진술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는 설이 있습니다. 글쎄, 관심 있으신 분은 찾아서 읽어보시도록.” 이 나레이션에서 화자의 존재와 시각은 분명해진다. 어리석은 사내들의 난장극을 목격하고 종국적으로 살아남아 이를 증거하는 것은 여성들의 몫이다. 저개발 시대의 국가주의를 논평하는 화자로서 윤여정은 권력의 무망함과 덧없음을 조롱하는 자의 위치로 이동한다.

<그때 그사람들>은 암살자의 심리를 파고드는 드라마가 아니요, 독재자의 죽음을 묵상하는 성찰극은 더더욱 아니다. 1979년 10월 26일의 궁정동 스토리에는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일갈한 용자(勇者)도 있었으나 도대체 무슨 일이 진행되는지도 알지 못한 채 상사의 지시에 따라 좌표를 잃고 우왕좌왕하였던 경호원들, 권력투쟁의 뒤안길에서 소모품처럼 쓰인 필부들, 역사의 현장을 목격한 뒤 기나긴 침묵에 빠진 커튼 뒤의 사람들, 그리고 이 모든 사정에 눈이 멀었던 다수의 대중도 있었다. 여성들의 보이스오버는 대사 외적 수준에 대한 그녀들의 관점을 중심으로 쓰였다. 그들은 말하는 사람이며 하나의 사태 주변에 모인 여러 개의 역사적 관점들을 나레이션 아래로 통합하는 초월적 자아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말의 스타일이다. 저들은 경어체를 쓰고, 보이지 않는 청중들을 앞에 두고 이야기하듯이 말한다. 여성의 목소리는 회심의 거사라는 계획이 무색하리만치 밤의 만찬장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남자들의 딱한 처지를 조소하는 주체의 위치를 설정하고 있다. 동시에 나레이션의 요구에 따라 역사를 재구성해야 하는 상상적 관객으로서 우리들이 있어야 할 자리도 바로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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