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의 <
마더>(2009)는 한적한 들판에 나타난 노년의 여인(김혜자)으로 열린다. 프레임의 뒤에서 가운데로 걸어 들어온 그녀는 배경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기 시작한다. 태어나서 처음 춤을 추는 사람처럼 흐느적거리는 모양이 기괴하다. 마더의 캐릭터 안에는 이 춤과 같은 히스테릭한 제스처가 있고 그 내면에는 우유부단함이 있지만 이와 같은 미장센의 톤을 파악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흘러야 한다. 한국의 어머니를 형상화한 상투적인 겉모습 외에는 마더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첫 장면에서 그녀가 춤을 추는 동기는 불분명하다.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카메라에 대고 직접적으로 말하려는 듯한, 마더의 불안정하고 원시적인 춤사위이다. 여하튼 최초의 등장은 영화 전체에 이름이 나오지 않는 캐릭터에 이입하여 내러티브가 진행될 것임을 예고한다. 여기에 이 영화를 대하는 관객들의 곤경, 즉 어떤 역사나 성격, 뒷배경도 헤아리기 힘든 이상한 여인에게 마음을 주어야 하는 난감함이 있다. 이야기의 경계를 초월한 것처럼 보이는 오프닝 쇼트는 캐릭터와의 동일시를 방해하는 대신 재현된 현실과 자연의 법칙 뒤에 숨겨진 무언가 다른 영역이 있음을 암시한다. 메마른 들판 한가운데서 히스테리적이거나 어쩌면 황홀한 상태로 카메라를 향하고 있는 마더의 춤이 이 드러나지 않은 영역의 존재를 말하고 있다.
봉준호의 화자들은 가능과 불가능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제한된 관점을 가져와 그들이 재현하는 현실에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신뢰할 수 없는 화자(마더)는 현실의 본질을 감지하는 면에서 결함이 있다. 살인에 대한 재현은 마더에 대한 신뢰성을 단기적으로 중단시키고 그녀의 인식에서 벗어난 범죄 공간으로 미끄러지듯 흘러가며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각기 다른 관점으로 기술한다. 그렇다면 마더는 어떤 사람인가? 그녀는 약초사이자 침술사이며 정신장애를 앓고 있는 아들에게 집착하는 어머니이다. 모자(母子) 간에는 구체적으로 말해지지 않은 과거가 있고, 그 외의 비밀들에 겹겹이 감싸져 있는 마더는 기억을 떨치고 과거를 버리려 한다. 과거 회상에 대한 기억 편향을 보여주는 짧은 회상체 대화에서 우리는 마더가 약을 먹여 도준을 죽이려 했고, 그로 인해 도준이 정신장애를 갖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마더는 아들에게 자신의 원죄를 잊도록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망각하기 위해 다리를 침으로 찌른다.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관점에서 도준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틈새에 놓인다. 그는 과거를 망각하고 거의 기억하지 못할 뿐 아니라 현재에도 속하지 않고 현재에 부적합한 사람으로 동요한다. 침술 치료의 영향인지 도준은 과거와 현재의 가치를 지배하는 데 있어서 연속성이나 일관성을 결여한 상태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것이 도준이 살인을 저지르는 폐가 장면을 마더가 목격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시간의 흐름에 굴복하여 마더는 과거를 잊기로 결심하지만 도준이 건넨 침통은 트라우마를 소환한다. 이런 사정을 고려했을 때 오프닝 시퀀스에서 마더의 춤은 의미를 갖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허벅지 한 지점에 침을 꽂는다. 나이든 여성들이 가득 찬 관광버스 안에서, 다른 승객들이 춤을 추며 마을을 떠나는 동안 마더는 이 광란에서 배제되어 침술에 의지한 채 암울한 과거를 잊으려 한다. 그러나 끝까지 그녀가 자신만 알고 있는 나쁜 기억과 상처를 잊었는지는 불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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