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철의 꿈, 2013

by.장병원(영화평론가) 2022-06-16조회 1,202

<철의 꿈>(2013)의 다공성 내러티브는 완전한 가상의 영역에 있다. 그곳은 구획된 세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예술 형식과 재료들이 웅성거리며 대화하는 장소이다. 영화감독이자 미디어 아티스트인 박경근의 실험적 다큐멘터리 영화는 설화와 역사, 과거와 현재, 개인과 공동체의 서사를 겹겹이 엮어 뒤죽박죽된 연대기 속에서 근대성이 지워버린 사람, 의식, 과정을 되살리기 위한 혼란스러운 여정을 그린다. 다큐멘터리, 픽션, 아방가르드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이 영화의 변칙성은 도시 지형의 변화 과정을 조명하고 근대 국가의 성립에 관한 반성적 인식 위에서 구축되었다.

<철의 꿈>의 서사는 영화 내내 반복되는 네 가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감독 자신의 목소리로 기술되는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을 배음으로 불교 의식 또는 무속 의식을 제시하는 계열의 영상이다. 보이스오버가 이 계열에만 속하는 것은 아니나 신을 찾겠다며 떠나간 연인에게 보내는 구어체 나레이션은 신과 사랑(열망)을 하나의 줄기로 엮는다. 두 번째는 내러티브 안에서 아카이브 푸티지의 재사용이다. 포크레인과 기중기로 이룬 경제개발, 한강의 기적, 산업화를 견인한 철강, 조선 산업의 자취, 생존과 인권을 요청하는 노동자 시위, 성장과 번영의 흔적들이 뉴스릴의 형식으로 드문드문 끼어든다. 아카이브 푸티지는 여러 계열들 간 관계에 대한 증언이 되고 가차 없이 진행된 한국의 근대화 과정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세 번째는 철의 위용 또는 공포를 보여주기 위해 울산 현대중공업과 포스코의 안과 바깥을 여러 각도에서 조망한 이미지들이다. 웅장하고 단단한 기계와 철로 만든 배, 철근과 철판 더미들, 쇳물 따위는 위엄이 넘치는 물질에 대한 경외감 또는 괴물의 형상을 닮은 이미지에 대한 공포를 동시에 자아낸다. 그러나 철에 관한 이야기는 영화의 절반에 불과하다. 다른 하나는 네 번째 요소에 해당하는, 다소간 허구가 가미되어 상상적 기술로 해석되는 고래에 관한 이미지들이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암각화가 물속에 가라앉아 있다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의 내력과 함께 그 위에 새겨진 고래의 전설이 소환된다. 고래와 짐승들, 고래잡이, 사냥하는 사람들, 그들이 쓰는 도구들이 새겨져 있다는 암각화를 보며 먼 옛날 사람들은 부족의 화합을 다지고 고래 신을 숭배하는 재래의식을 치렀을 것이라고 화자의 목소리는 말한다. 그런즉 <철의 꿈>의 질문을 요약하면, 태곳적 고래는 어떻게 철의 신으로 거듭났는가? 쯤이 될 것이다.
 
  

서사와 주제, 스타일의 관점에서 텍스트의 핵심 줄기를 이루는 것은 세 번째와 네 번째 요소이다. 조선과 제철 산업의 이모저모가 고래의 이미지와 디졸브되는 조형적 연상효과의 기저에는 무엇이 있는가? 고래와 철의 공통점은 여럿이다. 저들은 거대한 몸집을 한 거인이고, 길흉화복을 주재하는 신성의 대상이며, 시기를 달리하여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한 이데올로기이다. 연인에게 버림받은 트라우마를 구체성 있는 신을 찾는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은 화자는 바다의 고래, 조선소, 제철소에서 광대하고, 숭고하고, 영적인 신을 찾는다. 울산의 지정학적 역사는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쇠퇴한 장소성과 그것을 대체한 산업 유산의 번성을 변화하는 운명에 대한 투사로 규정된다. 도시의 유산은 산업화 이후 새로운 신을 찾는 사람들의 갈망과 비교되는데 이러한 서사의 줄기는 신성을 찾아 떠난 연인에 대한 진술에도 해당이 된다. 현대성과 숭고함에 대한 묵상에서 실패한 사랑에 대한 사념으로, 해양 공업 도시 울산의 제철소 및 조선소의 이미지에서 고대 고래 신의 형상으로, 사랑의 트라우마에서 신비로운 주술의식으로, 서사의 의제는 두서없이 떠돈다. 아카이브 영상은 천천히 움직이는 팬과 정지된 카메라 쇼트를 기반으로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국가 산업을 재건하려는 이상적 낙관주의와 근대화를 맹종하는 와중에 이 사회가 도달하지 못했던 결핍의 흔적들을 대조한다. 고래의 상실은 철강 조선 산업의 뒤안에 인간 노동의 효용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중공업의 첨단 작업 프로세스와 나란히 놓인다. 인간과 자연의 이 고뇌에는 무엇이 뒤따를 것인가? 질문에 답을 구하는 경로를 하나의 몽타주로부터 유추해볼 수 있다. 국립현충원에서 치러진 포스코의 창립자인 고(故) 박태준 회장의 영결식을 찍은 푸티지 위로 비탄조의 조사(弔詞)가 흐른다. “우리는 지금 믿을 것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아”라는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을 타고 하늘로 치솟는 불과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연기, 기하학적으로 교차하는 철근 구조물들의 몽타주가 제시되고 푸른 바닷물 속에 잠긴 고래의 이미지가 프레임을 가득 채운다. 이미지의 논리는 철의 신에 의해 추방당한 고래를 추억한다. 고래를 파묻고 세워진 철의 성채, 근대의 영화(榮華)를 좇았던 우리들의 공동체에 탈(脫) 산업화 시대의 신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이상의 맥락에서 <철의 꿈>은 현상이나 사태에 대한 주관적 생각을 특별한 형식의 구애 없이 기술하는 에세이적인 특질보다 정연한 질서와 체계를 갖춘 몽타주의 구성적 미학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몽타주의 본질은 프레임을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분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표현의 핵심 요소들이 상호 작용하도록 하는 과정에 있다. 형상화의 특질(옛 연인에 보내는 편지의 형식)로 보아 <철의 꿈>은 현실과 세상에 대한 주관적 관점을 넘어 창작자의 역사적 체험과 기억, 정황을 텍스트의 재료로 한 사적 다큐멘터리의 지류로 볼 수 있겠으나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전지적 화자의 목소리에 해당하는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은 반드시 담화자의 실 체험에 기반한 사실이라고 단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쩌면 고백조의 나레이션은 텍스트의 요구에 따라 문맥화된 진술일 수 있으며, 따라서 사적 체험의 전용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이 영화는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에 의존하여 그것을 새로운 서사 담론에 도입하고 구성 요소 간의 형식적 연관성을 통해 의미를 재구성할 수 있도록 만든다. 화자이자 연출자인 박경근의 목표는 한국의 근대화 과정을 압축한 울산이 철의 도시로 번성하면서 사라진 것들, 새로운 신들이 나타나면서 대체한 주술의 서사를 더 크고 더 넓은 캔버스 안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고도로 양식화된 연출 및 편집은 궁극적으로 다큐멘터리 또는 이중 픽션으로서 결정 불가능한 특징을 보여준다. 이러한 특성은 아카이브, 픽션,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소스의 혼합을 활용하여 형식적, 실재적 차원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철의 꿈>이 구사하는 하이브리드 내러티브는 다큐멘터리와 아방가르드 형식을 오가며 작업할 수 있는 통합된 미학적 범주이다. 이런 유형의 영화에서 이야기의 형식을 결정하는 것은 현실이지만 눈앞에 있는 재료와의 관계를 재정의하는 텍스트의 수행적 측면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아카이브 푸티지의 배열은 새로운 문맥 안에 놓이게 되면서부터 구성적 행위가 된다. 구성적 행위는 관습을 뒤엎고 미개간의 영역으로 비상함으로써 본래 의도를 뛰어넘는다. 상이한 요소들이 병치되고 결합하는 비선형 내러티브는 기억을 자극하고, 이미지와 소리가 충돌하여 독립적인 표현 요소들 간의 신비하고 종종 뒤늦은 연결을 활성화한다. 세계와 그 기록을 내려다보는 영화의 광대한 영역에서 레퍼토리의 분해와 재조립이 다양한 표현 채널을 통합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발굴된 영상과 음향의 파편들, 현재에 포착된 다른 시간의 흔적들, 관찰과 상상을 결합하여 <철의 꿈>은 역사의 잔재가 여전히 편재하여 모든 이미지 아래에 숨어 있고 그들 사이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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