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고(假面考) 반칙왕, 2000

by.장병원(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2023-12-11조회 1,907

'스포츠 엔터테인먼트'라고 일컬어지는 프로레슬링은 독특한 형태의 공연 예술이며, 로마의 검투사 대결에 비견할만한 남성성의 신화를 과시하는 이벤트이다. 연행자와 청중이 합의한 사이비 스포츠이자 대중문화의 한 갈래로서 프로레슬링을 통해 전달되는 전언은 ‘남자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확실한 암시를 준다. 영화 <반칙왕>(2000)은 이 같은 프로레슬링의 함의 안에 IMF 경제위기가 야기한 여파를 깔아두고 직업인으로서 이중생활을 하며 평범한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소심한 은행원을 소재로 한 이야기이다. <조용한 가족>(1998)으로 한국 장르 영화의 지형에 변화를 몰고 온 김지운 감독이 얼마나 창의적인 이야기꾼이었는가를 입증하는 색다른 블랙코미디였다.
 
  

주인공 임대호(송강호)는 위기의 남자이다. 일상생활의 굴욕과 권태로부터의 안도와 더 큰 굴욕을 겪을 기회를 동시에 찾는 이 사내는 직장에서의 전망이 그리 밝지 않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의욕도 없다. 실적을 쌓아서 연명해야 하는 직업적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은행의 부지점장(송영창)은 저조한 실적을 빌미로 그를 괴롭히며, 여자들은 그를 무시하고, 아버지는 그가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엉뚱하고 유치한 이 남자의 성격이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반칙왕>의 핵심 서사는 자존감을 가진 어른이 되기 위한 대호의 여정에 동행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현대적이고, 고도로 엄격하며, 궁극적으로 온유한 금융의 세계에 견주었을 때 프로레슬링은 저급하고 극단적인 천박함으로 가득 차 있다. 마스크를 쓰고 레슬링을 하는 대호가 추구하는 남성다움의 시뮬라크르는 내러티브 안에서 양극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으로 그는 은행 고객들의 비위를 맞추는 복종적인 감성의 소유자이나 마스크를 쓰고 링에 올랐을 때에는 약속과 규율을 위반하는 반칙 레슬러이다. 대민 봉사 및 사무 조력에 익숙한 일상의 대호는 자신의 옛 영웅인 울트라 타이거 마스크 가면을 쓰고 반칙왕이 됨으로써 내성적인 패배자에서 폭력적인 무법자로 변신한다. 새로운 페르소나의 가면을 쓴 그가 열광적인 대중들의 반응을 끌어내는 과정에서 그 자신도 알지 못했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다. 평소에는 소심하고 싸움을 기피하는 성격인 반면 반칙왕으로써 대호는 호전적인 싸움의 신이 된다. 헤드락을 걸고, 손가락으로 눈을 찌르면서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는 대호의 이중생활은 한 장면에서 엘비스 프레슬리 코스프레를 하며 링 위에 선 모습으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반칙왕>의 흥미로운 지점은 이 완벽한 시뮬라르크의 세계에서 프로레슬러들이 배우가 하는 일과 비슷한 과업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끊임없는 경쟁의 과정에 본래 정체성으로부터 빠져나와 자신의 이미지를 철저하게 가꾸고 가상의 시나리오에 따라 연기를 해야 한다. 이는 허구의 드라마 안에서 배우가 자신의 캐릭터를 발전시키는 과정에 비견할만하다. 마스크 퍼포먼스가 대호의 성격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묘사하는 김지운의 서술은 흥미롭다. 그의 나약하고 무기력하며 굴욕적인 일상과 비교했을 때 반칙 레슬러로의 변신은 자존심과 자존감을 향상시킨다. 따라서 개인은 현실 안에서의 열성 페르소나보다 영향력이 있는 수행적 페르소나를 선호하게 된다. 이러한 요소는 <반칙왕>의 코미디 코드에서 핵심이 된다. 가면이나 변장이 왜소한 자아를 방어하는 심리적 보호막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정립된 심리학의 가설이지만, 일상에서 자신감이 떨어지는 대호는 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마스크를 쓰고 코치의 딸 민영(장진영)과 데이트할 때조차도 마스크의 힘을 빌린다. 이야기의 밑그림을 제공하는 시나리오에서 은행 부지점장은 비열한 수단을 통해 관객에게 두려움과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려는 악한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는 노골적으로 규칙을 위반하고, 경기 범위 밖에서 상대를 공격하고, 의도적인 부상을 입히고, 때로는 청중을 위협하기도 한다. 부지점장은 이 모든 악행, 내지는 그 이상의 악행을 저지르는데, 김지운은 이를 ‘공포의 헤드락’으로 묘사하며 악한의 시그니처 동작을 서사의 메타포로 만든다. 그의 독재적인 행동과 타인을 괴롭히는 신체적 억압은 비즈니스에 대한 냉혹한 통찰력. 자유로운 개인에 대한 잔인하고 굴욕적인 처벌을 특징으로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의 반칙은 합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 대호에 대한 부지점장의 억압적인 처우는 스토리에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이는 <반칙왕>이 세기 전환기 한국의 경제위기를 바탕으로 한 우화적인 코미디임을 일깨워준다. 주지하다시피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가장 큰 위기에 봉착한 업종 중 하나는 금융 업계이며, 이 환란의 시기 동안 은행 직원들은 실적과 과업에 과도하게 집착했을 뿐 아니라 오래되고 부패한 규칙들을 군말없이 따라야 했다. 현대화로 인해 국가는 새롭고 대안적인 문화적 이상을 환영할 수 있지만 은행과 같은 해묵은 기관은 여전히 검증된 계층적 비즈니스 문화 형태를 고수해 왔다. 이러한 코드 하에서 개인이 경영진의 억압에 저항하기 시작할 만큼 자아가 충분히 발달하면 조직에 역효과를 낳고 따라서 조직의 기능에 해를 끼치게 된다. 부지점장으로 특정된 악한의 성격화는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여 대호와 부지점장의 갈등 구도를 TV 레슬링 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웅 vs 악당의 구도로 치환한다. 대호는 적어도 승리하기 위해 세상의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적인 약자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반칙왕>의 파괴적 에너지는 반칙의 황제가 가장 위대한 싸움을 위해 링으로 향하는 종결부에서 절정에 오른다. 사각의 진혼곡’으로 이름 붙여진 영화의 마지막 챕터로 진입하기 전, 우리는 어어부밴드가 부르는 노래 ‘사각의 진혼곡’을 듣는다. “저기 왼쪽 구석에 주전자 바라보다, 일그러진 자신을 보네, 샌드백 흔들리고 흩날리는 먼지를, 혀에다 듬뿍 바르네 ... (중략)... 오버 액션 구경꾼 오버 액션 레슬러, 울트라 썬더 파워 붐 그의 이름은 레슬링 스타”로 이어지는 가사는 초라하고 내성적인 한 남자가 울트라 썬더 파워를 뿜어내는 레슬링 스타로 변신하는 과정을 예찬한다.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20분 동안 김지운은 스파게티 웨스턴에 등장할법한 상투적인 음악과 함께 대호와 유비호(김수로)의 긴장된 대결을 연출한다. 상황을 기술하는 쇼트의 기능에 관련하여 이 시퀀스는 다양한 옵션을 구사하는 연출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 탈의실과 복도를 가로지르는 화려한 스윕 쇼트, 신체 연기를 통해 슬랩스틱의 터치를 부여한 배우 송강호의 경이적인 육체 액션은 프로레슬링의 운동성을 인상적으로 묘사하면서 대미를 장식한다. 대호는 주먹을 치켜들고 앞으로 돌진하여 오랜 시간 수련한 백 드롭 기술을 시전하면서 링 너머에 사뿐히 착지한다. 이 비장한 순간조차 슬랩스틱을 유지했다면 영화의 진성성이 의심받았을 수 있었지만 여기엔 참된 레슬링 기술이 전시되어 있다. 텔레비전에서 보는 레슬링은 증폭된 신체 타격과 현란한 카메라 워크로 감각적 과부하를 제공하지만 여기서는 좀 더 절제되고 위엄 있는 안무를 선호한다. 이 신의 하이라이트는 유비호에 의해 대호가 쓴 가면이 찢기고 두 대결자가 링 바깥으로 굴러떨어져 계획하지 않은 난투극을 벌이는 장면이다. 합을 맞추지 않은 마구잡이 싸움이 끝난 뒤 대호의 얼굴 위로 다시 한번 어어부밴드의 ‘슬픈 대호’가 흐른다. 가는 선율이 고통을 가르고 우울의 가면이 벗겨진 대호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자신만의 공간으로 만들고자 한 링 위에서 사력을 다하는 대호의 페르소나는 무참스런 모양으로 벌거벗겨진다.

익살과 페이소스가 가득한 <반칙왕>은 진실된 삶 혹은 자신이 바라는 모습대로 살지 못하는 삶을 전제로 한 만큼 표층과 심층의 합일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원적 열망을 다룬다. 마스크를 쓰는 행위를 통한 자아의 완성에 관한 이야기에서 가면은 그 안에 진짜 얼굴을 감춘 은폐의 도구이지만 숨겨진 야성을 되찾는 데 도움을 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대호는 말끔한 정장을 입고 은행으로 출근하는 길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고, 이제 막 만개한 이중생활에 만족하며,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그의 카타르시스적인 여정은 직업적 세계의 속박을 초월하려는 소시민의 헛된 시도와 규율의 지배로부터 탈주하는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 안에서 울트라 썬더 파워의 가능성을 찾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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