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넘버3, 1997

by.장병원(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2023-10-05조회 3,422

배우 송강호는 <넘버3>(1997)에서 뜻대로 상황이 전개되지 않았을 때 말을 더듬는 청부살인자 캐릭터 조필을 연기하였다. 그가 이 희대의 캐릭터를 창조하는 과정은 <넘버3>의 서사와 다른 등장인물 간의 상관관계에 있어 심대한 의미가 있다. <넘버3>의 진짜 주인공은 자신만의 개성으로 표현되는 주변부 인물들 속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조필의 동기와 등. 퇴장 방식, 출연 분량, 플롯 안에서의 배치를 분석해 보면 이 인물이 이야기의 핵심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며 내러티브를 이끌어가는 견인차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다. 몇 개의 장면에서 이런 중요성이 확인된다.
 
  

영화의 첫 2분 동안 등장하는 몽타주 시퀀스에서 검은 옷을 입은 조필이 처음 나온다. 버드와이저 맥주 캔을 일그러뜨리고 위악적인 표정을 거울에 비추는 건달 태주(한석규), 샌드백을 두드리는 폭력적인 검사 동팔(최민식)에 이어 소개되는 조필은 주차장에서 피투성이가 된 시체 두 구를 수평으로 패닝하는 카메라 무빙의 끝 지점에서 손에 위협적인 회칼을 들고 나타난다. 첫 등장만으로 그가 사람을 도륙하는 지저분한 일에 자부심을 느끼는 무자비한 암살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조필은 피에 젖은 손으로 바퀴벌레를 잡아 입 속에 넣는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한다. 채 10초가 되지 않는 이 장면에서 영화의 어둡고 코믹한 톤이 확립된다. 짧고 역동적인 쇼트들의 편집으로 순식간에 지나가는 오프닝은 캐릭터 묘사를 통한 ‘초두효과’를 완성한다. 초두효과라 함은 플롯의 초기 단계에 텍스트의 의미와 맥락, 기조, 주제, 스타일을 암시할 수 있는 세팅을 통해 이후에 올 것들에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스토리 설정의 전략을 말한다. <넘버3>에서 확립된 송강호의 스크린 페르소나는 이 초기 설정을 통해 영화 속 다른 배우들과 차별화되는 특징들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송강호는 조필 캐릭터를 통해 <넘버3>의 두 가지 성격을 확립한다. 하나는 폭력적인 킬러이다. 다른 하나는 어설프고 실없는 농담꾼 또는 의도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았을 때 평정심을 잃어버리는 우스꽝스러운 미숙아이다. 조필의 등장과 첫 번째 행위는 불길함과 코믹함이 머릿속에서 계속 부딪히게 하는 궤적을 만들어낸다.

‘조필’이라는 이름에서조차 비하와 실패의 운명이 감지된다. 무엇 하나 온전히 해내지 못하는 하찮은 존재를 비하하는 말로 당대에 쓰였던 은어 ‘조삐리’로 발음하기 쉬운 이 이름에는 존엄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작명과 연결된 그의 됨됨이는 블랙 코미디의 양면성을 첫 장면에서부터 짐작하도록 만든다. 송강호는 무시무시한 킬러의 뒤에 드러나는 미숙아의 모습을 완벽에 가깝게 구현한다. 이런 페르소나와 관련하여 뇌리에 남는 것은 병원에서의 청부 살인 장면이다. 병원 화장실의 조필은 인근 병실에 든 조직 보스 강도식(안석환)을 살해하기 위한 채비를 하고 있다. 그는 이미 표적을 잘못 설정하여 암살에 실패한 적 있으며 이 미수에 그친 시도 때문에 한층 더 비장한 마음으로 미션을 완수하려 한다. 조필의 검은색 옷은 병원의 흰색 무균 벽과 대조를 이룬다. 조필이 들고 다니는 007 가방에는 라이터, 참치 통조림, 휴지, 생라면, 각종 알약 등 잡동사니 등이 너저분하게 들어 있다. 잡다한 물건들 사이의 밑바닥에서 위협적인 사냥용 칼과 회칼을 꺼내어 든 조필은 사냥용 칼을 집어 들고 가죽 허리띠에 갈아댄다. 질병과 죽음의 기운이 지배하는 병원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이 폭력적인 남자는 살인을 앞두고 있지만 그 전에 거울을 보며 자신을 단장할 필요성을 느낀다. 거룩한 의식이라도 되는 듯 또는 만화의 한 장면처럼, 조필은 눈을 가리는 짙은 선글라스를 얼굴에 쓴다. 이어서 그는 구순포진이 난 입가, 영양부족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이는 갈라진 귓불에 연고를 바른다. 누군가를 죽이기 전에 결점을 감추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킬러의 모습을 형상화한 이 장면은 조필의 캐릭터를 캐리커쳐를 보는 것처럼 기술함으로써 오프닝의 초두효과로부터 누적되어 온 무드를 확고히 한다. 몇 차례에 걸쳐 묘사되는 청부살인의 수행, 그리고 어김없는 실패의 과정은 미숙아의 이미지를 반복, 강화한다. 미션을 수행할 때 항상 입고 있는, 신비롭게 보이는 검은 옷의 이면에는 송강호의 역사를 아는 현재의 관객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어수룩함이 서려 있다.
 
  

<넘버3>에서 송강호의 캐릭터 묘사는 한국영화의 스타일을 하나의 방향으로 이끌었다. 한 배우의 페르소나의 출발점이자 정수로서 이 영화는 조형적인 언어구사력과 증폭된 제스처, 인물의 단면을 드러내는 신체 언어를 개발하여 이 대배우의 수많은 스크린 페르소나에 반(反) 영웅주의적인 페이소스를 심었다. 이 영화를 통해 송강호가 확립한 것은 신체 훈련, 신체 조작, 대사 애드리브를 통해 캐릭터를 효과적으로 구축하는 능력이다. 무언의 신체 언어에 대한 송강호의 재능은 무성영화 형식으로 연출된 한 챕터 ‘쌈마이(들)’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과장된 슬랩스틱 액션 장면들의 몽타주로 구성된 이 신은 표정과 몸짓으로 전달되는 색다른 퍼포먼스를 시전한다. 조필은 조직의 명예와 규범을 가진 사람으로 자신을 묘사하려는 신경증적인 노력과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조잡한 현실 사이의 간극에서 유머를 이끌어낸다. 송강호의 조필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히스테릭하게 행동하지만, 말을 더듬는 등 과도하고 놀란 반응은 그들의 불안과 취약성을 증명할 뿐이다. 그는 인간의 우스꽝스러운 실수를 구현한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심오한 성찰을 몸으로 표현하는 이 배우가 <넘버3>를 통해 창조한 개성은 다양한 장르에서 확장되며 생생함을 더하게 되었다. 그의 레퍼토리 전반에 걸쳐 송강호는 힘과 권위를 추구하지만 그 본성이 목표에 닿지 못하는 인물들을 거쳤다. <반칙왕>(2000)의 대호, <살인의 추억>(2003)의 박두만, <괴물>(2006)의 강두, <우아한 세계>(2007)의 강인구,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의 이상한 놈, <기생충>(2019)의 기택에 이르기까지 송강호의 말투와 신체, 분리된 행동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가 지휘하는 집단으로부터 자신을 분리되어 가는 인물들을 묘사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넘버3>에는 이와 같은 페르소나의 맹아가 있다. 보스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부하들과 겸상하는 것을 거부하는 대사,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고 협객 최영의의 무용담을 과장하는 말과 신체의 제스처는 위계와 권위를 보호하고 유지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들이 필연적으로 실패로 귀결되는 캐릭터의 파토스를 구축하는데 기여한다.

송강호가 권위과 자존심, 권력이라는 아우라를 유지할 깜냥이 못 되어 조롱거리가 되는 남자들의 대표주자가 된 발단의 지점에 <넘버3>가 있다. <넘버3>의 오프닝에서 조필의 등장 방식과 함께 분석해야 할 것은 그의 퇴장인데 조필의 마지막 모습은 검은 군화의 클로즈업 쇼트로 형상화된다. 자신들이 섬기는 보스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세 제자들은 참담한 실패 끝에 해체된 조직 ’불사파‘를 상징하는 아이콘을 내세운 포장마차를 운영하고 있다. 고수부지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포장마차에 조필이 나타났을 때 제자들은 마치 유령이라도 만난 것처럼 예전의 보스를 응시한다. 그들은 경외감 또는 공포에 사로잡힌 것 같다. 카메라는 또 다른 청부살인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하는 것처럼 보이는 조필의 군화 뒤꿈치를 클로즈업한다. 주변의 속도와 달리 슬로 모션으로 움직이는 이 남자가 불사의 아이콘을 향해 팔자걸음으로 당당하게 걷는 동작에서 이미지는 얼어붙고 배우 송강호의 커리어도 하나의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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