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풍경, 2013

by.장병원(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2022-07-14조회 4,103

장률은 새로운 척도로 국경의 의미를 재창조하여 인간의 정체성 형성 과정에서 장소의 중요성을 형상화해 온 초국적 영화작가이다. 그의 작품 중 상당수가 특정 지명과 관련 있다는 것(<중경>(2007), <이리>(2008), <두만강>(2011), <경주>(2014),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2018), <후쿠오카>(2020))은 그냥 우연이 아니다. 중국의 독립영화와 한국의 디아스포라 영화를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는 장률의 작품 목록 안에서 첫 번째에 해당하는 다큐멘터리이자 한꺼번에 여러 장소들이 등장하는 희귀한 사례가 <풍경>(2013)이다. 전주국제영화제의 지원을 받아 단편영화로 기획되었다가 장편으로 확장된 이 영화는 아시아 전역에서 한국으로 와 이주노동자의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는 외국인들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이다. 아시아 지역 출신으로 한국으로 이주하였다는 것 외에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그들은 모두 다른 나라에서 하눆으로 이주하였고,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으며,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을 선호한다. 이런 이유로 영화에는 중국어, 타갈로그어, 베트남어 등 다양한 언어가 등장한다. 장률 그 자신도 조선족 출신으로 한국에서 영화감독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주 예술가’의 처지라는 점에서 저들과 상통한다.

<풍경>은 이 노동자들의 개인사, 처한 상황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소재로부터 연상되는 르포르타주적인 접근법 대신 장률이 선택한 것은 저들의 꾸는 꿈의 내용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다. 꿈은 다큐멘터리 서사의 통례들을 초월한 독특한 서사의 영역으로 이 영화를 데려간다. 영화의 도입부는 꿈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야심한 밤 영종대교를 달려 우리가 당도하는 곳은 인천공항이다. 사람들이 떠나고 떠나오는 장소인 공항에서 질문은 시작된다. 한국에서 꾼, 가장 기억에 남는 꿈은 무엇입니까? 건강상의 이유로 한국을 떠나 동티모르로 돌아가게 된 아우구스티노 씨는 한국에서 밤마다 어머니의 얼굴이 나오는 꿈을 꾸었노라고 고백한다. 장면은 전환되어 꿈을 꿀 때 하얗게 꺼져 가는 의식 마냥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개의 숲을 이룬 영종대교 위를 미끄러져 가는 초현실적 광경이 펼쳐진다. 시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풍경>의 오프닝은 꿈의 입구를 지나 꿈의 세계로 깊어져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후부터 혼몽(昏懜)의 세계를 거니는 것 같은 로드무비가 시작된다. 무의식의 극장으로 해석되는 꿈은 희망(길몽)과 공포(흉몽)의 상반된 양태를 띄고 우리 앞에 나타나곤 한다. 대부분은 사라지지만 기억에 남는 꿈에는 현실과의 특별한 연결이 존재한다. 기억하는 꿈에 대해 물었을 때 누군가는 사장님, 사모님, 직장 동료와 함께 고향 스리랑카의 아름다운 사원을 여행하는 광경을 떠올리고, 다른 누군가는 아내와 제주도에 가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한국에서 로또에 맞을 날을 상상한다. 반면 20년 동안 시름시름 앓은 아버지에게 회초리로 맞는 꿈을 꾸었다는 베트남 여인, 떨쳐지지 않는 유령의 악몽에 시달리는 태국 남자, 자신을 악독하게 다루었던 한국인 사장에 대한 끔찍한 기억을 반추하는 가구 기술자도 있다. 간질 치료를 위해 한국에 온 조선족 소녀는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이라고 포교를 일삼는 사진사 앞에서 여자 경찰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풍경>은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매개된 관점을 배제한 채 인간과 풍경을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것에 몰두하는 관찰 다큐멘터리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장률은 객관적인 자리에 카메라를 두는 것을 초월하여 자신이 듣고 보았던 이미지를 흐릿한 기억에 의존하여 주관적으로 서술할 수밖에 없는 꿈의 서사라는 접근을 취한다. 이 영화를 끌고 가는 동력은 실향과 선회, 유랑, 귀향의 경험, 간단치 않은 삶의 역정을 살아온 자들 앞에서 느껴지는 숙연함, 말과 이미지의 이율배반적 표현이다. 꿈에 관한 질문에 화답하는 이주민들의 실존적 억류상태는 철 대문 옆에 방치된 개나 골목 모퉁이에 버려진 쓰레기 봉지, 도살장에 뒹구는 잘린 소의 머리, 쓸쓸한 여공 모집 광고, 공터에 방치된 그네로 형상화되고 있다. 스리랑카, 필리핀, 태국, 방글라데시, 네팔, 타슈켄트에 두고 온 이주민들의 꿈은 먼 거리에서 물끄러미 응시된다. 사전 정보가 존재하지 않는 이주민들의 꿈은 행복에 대한 인간의 보편 의식으로부터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장률은 <풍경>에서 꿈이 삶이 놓친 시간과 그 흔적의 축적이며, 소망충족의 욕망이 남루한 현실과 교차하는 풍경의 집적물이라는 생각을 보여준다.

대다수의 장면에서 장률은 정적이고 긴 쇼트를 용의주도하게 배치한다. 이주노동자들의 일상은 꿈의 맥락에서 분리되면서 그들이 거주하는 장소, 노동의 시간과 나란히 놓인다. 사람이 전혀 없는 동네의 무작위적인 스냅 쇼트는 기이한 인상을 만들어낸다. 스스로 움직이다가 멈추는 세발자전거, 지하철 역사(驛舍) 벤치에 앉았다가 열차가 지나간 뒤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두 명의 남자, 코끼리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 이 장면들은 어떤 이유로 그곳에 들어가 있는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현실 세계에 뚫린 구멍, 세계의 내부로부터 열린 미스터리한 출구로 표현할 수 있는 이 장면들에서 장률의 복화술사적인 능력은 발휘되고 있다. 이웃에 산다는 것은 그 이웃에 있는 물건을 지속적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풍경>의 카메라는 너무나 정적이고 자의적인 사물들에 집중함으로써 관객들이 서사와의 연결을 추정하기 힘든 사물과 순간들을 실제로 경험하도록 강요한다. 동질적 요소들을 나란하게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특성을 함축한 쇼트의 충돌(몽타주)이 우세한데, 이를 위해 동원된 것은 말과 이미지 사이의 패러독스이다. 거대한 기중기의 운동, 염색 천을 뽑아내는 지루한 과정, 가구를 만들고 운반하는 일련의 행위들이 카메라에 기록된다. 꿈속의 장소들은 온기가 충만한 선량의 천국으로 기술되지만 그들이 놓인 장소는 냉혹한 현실이다. 제주도를 환상의 섬쯤으로 상상하는 남자의 이야기에 이어 우리는 황량한 제주의 풍경을 보게 되고, 아버지의 폭력을 두려워하는 여인의 이미지 뒤에는 단란한 가족의 저녁식사가 배치된다. 이쯤 되면 꿈은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소망충족의 대리 기제라는 의미로 쓰이거나 현실의 평화를 위협하는 공포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풍경>은 삶과 꿈의 아름다운 공생을 상상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동시에 그 공생의 사회적, 정치적 조건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장률은 꿈과 현실이 조화롭게 합치되는 삶이 이 땅에서 불가능한 소망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영화에는 안과 바깥, 이산과 귀향, 방랑과 정주(定住) 같은 극단적 풍경이 기록되어 있다. 이주민들이 꾸는 미몽과 현실, 실재와 상상 사이의 부조화, 균열의 찢김은 한국 사회의 패배이고 무능의 자인이다. 한 맥락에서 영화의 오프닝과 클로징은 공명한다. 서두에 이야기했듯이 오프닝은 떠나려는 자의 이미지로 열리고, 클로징은 무언가를 맹렬하게 좇다가 하늘을 응시하는 익명의 시선으로 닫힌다. 헐떡거리는 카메라의 격렬한 움직임 위에 비행기의 굉음이 입혀진다. 그러니까 떠나는 장소(공항)에서 시작하여 떠나는 행위(비행기 소리)로 끝이 나는 셈이다. 아마도 향수병에 시달리던 동티모르인 아우구스티노 씨는 한국을 떠났을 것이다. 꿈에 그리던 어머님을 만나게 될 아우구스티노 씨에게 그것은 떠남이 아닌 귀향이다. 그러나 떠나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몸이 놓인 장소와 정신이 열망하는 장소의 괴리는 자본주의적인 체제가 만들어낸 소외의 풍경이기도 하다. <풍경>에는 다시 꿰어맞추기에는 희미해진 삶의 흔적과 이방인들의 꿈, 그 소망을 배신하는 풍경이 한 프레임 안에 응축되어 있다. 이 충돌은 어느 곳에도 머무를 수 없는 영혼의 쓸쓸한 표류의 과정을 압축적으로 스케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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