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촬영장소의 컷장면 칼럼 '영화주의자' 데이비드 보드웰을 추모하며 by.오영숙(성공회대 동아시아 연구소 HK연구교수) 사진: "REMEMBERING DAVID BORDWELL"(Rataj-Berard 촬영), NYU Tish School of the Arts
지난 2월 29일에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David Bordwell)이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76세였다. 영화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보드웰이라는 이름이 낯설 수는 없다. 이론과 비평 및 영화사를 넘나들며 공저를 포함한 20여 권이 넘는 책을 출간했으며 한국에도 여러 권이 번역되어 있다. “영화 연구의 아리스토텔레스”라는 별명에 걸맞게 그는 영화의 내적 구조와 위상을 밝히는 일에 중요한 이론적 거점 노릇을 해왔다. 

영화학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을 강조하는 것은 새삼스럽겠지만, 내게는 좀 더 각별한 편이다. 그의 책을 번역했다는 인연 말고도 여러 면에서 빚을 졌기 때문이다. 현대소설에서 영화로 전공을 바꾸면서 ‘문학적’ 틀이라는 자기 한계와 맞닥뜨려야 했던 내게 그의 책들은 영화형식의 독자성을 알려준 요긴한 길잡이였다. 최고의 영화 교과서라 일컬어지는 『영화예술(Film Art: An Introduction)』(1979)은 영화가 예술로서 갖는 위상에 눈 뜨게 했고, 이야기를 구성하는 규범과 다양한 스토리텔링 패러다임을 논한 『영화의 내레이션(Narration in the Fiction Film)』(1985)은 영화적 서사가 작동하는 내적 논리와 양식들을 이해하게 해주었다. 『영화 스타일의 역사(On the History of Film Style)』(1997)는 제작 관행 및 기술과 긴밀한 관련을 맺으며 변화해 온 영화 스타일의 다양한 양상들을 접하게 했으며 『포스트-이론: 영화학의 재구성(Post-Theory: Reconstructing Film Theories)』(1996)을 통해 영화가 관객을 끌어들이고 감정을 유도하는 구체적인 과정들을 알려주었다. 그 외에도 할리우드와 유럽, 아시아의 중요 감독들에 관한 그의 저작은 시대와 지역이라는 조건에 따라 다르게 현현하는 영화 스타일의 세계로 안내했다.
          
데이비드 보드웰의 저서 중 일부(개정판 포함) / 사진: "Books", David Bordwell's website on cinema
 
다루는 대상이 무엇이건 간에 그의 작업에서 공유되는 것은 영화의 예술성에 대한 옹호이다. 그에게 있어 영화는 자기만의 형식과 원리를 지닌 예술이며 영화의 예술성은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 속에 존재한다. 그는 영화의 세부를 형성하는 규범과 원칙을 밝혀내어 영화가 예술형식으로 자리할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적 스펙터클을 예술적 표현의 형태로 읽어내었다. 이러한 작업들의 지층에, 영화연구는 텍스트를 통한 사유가 우선되어야 하고 텍스트의 역사를 통해 정신의 역사를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이 놓여 있음은 물론이다.

책을 보면 그것을 쓴 사람이 보인다. 그는 어려운 이론적 용어로 독자를 현혹하거나 현란한 지식을 과시하지 않는다. 거대한 이론적 틀에 의지하여 영화현상을 통합적으로 설명하는 경향에 매 순간 저항했다. 그의 논의는 텍스트를 직접 분석하여 얻은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지식에 의거한다. 스스로 형식주의자이기를 고집하며 고전적 정전을 찾는 일에 전념할 때에도 우선시한 것은 실제 분석이었다. 수많은 텍스트에 대한 정밀한 검토에 기반하여 영화의 내적 질서를 벼리어내고, 그것과 관계하며 구성되는 지역적이고 역사적인 다양한 나이테들을 일일이 확인하는 일에 몰두해왔다. 

당연히, 다루는 영화들의 방대함에서 보드웰의 저작들은 가히 압도적이다. 더구나 그가 주요 저서를 썼을 때는 지금처럼 손쉽게 영상 자료를 얻을 수 없던 상황이었다. 스캔 기술은 물론이고 홈 비디오도 없던 시절에, 영화의 이미지들을 선명한 상태로 책에 담기 위해 어두운 극장이나 편집실에서 실제 필름을 스틸 카메라로 직접 촬영하고 보정하는 데 쏟았던 엄청난 노고에 관한 목격담도 전해진다. 영화형식의 비밀을 푸는 작업에 그가 기울인 노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이다. 막대한 시간을 투자하여 영화들을 분석하고 그 결과물을 명징한 언어로 전달함으로써, 직접 보고 확인한 것만이 지식으로 쌓일 수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 학자라 할 수 있다.
 
사진: "A Celestial Cinémathèque? or, Film Archives and Me: A Semi-Personal History", David Bordwell's website on cinema

2002년 11월에 지근거리에서 그를 볼 기회가 있었다. 한국영화학회의 초청으로 방한하여 강연을 했던 그는 엄정한 이론가나 날카로운 비평가라기보다는 영화를 향한 애정으로 가득 찬 시네필에 가까워 보였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엄밀한 분석을 펼쳐내었지만 그러한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게 들떠 있는 소년마냥 열정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자신이 알아차린 ‘놀라운’ 영화형식의 세계를 어떻게든 전달하고 싶다는 에너지로 가득한 그의 모습을 보며 느낀 것은, 그의 책들이 보여주는 정확성과 치밀함이 개인의 성격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간의 작업들이 지적 관심을 넘어서 영화에 바치는 우회적인 방식의 애정 고백임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시네필적인 열렬함을 잃지 않으면서 영화를 진지하게 논의할 수 있는 균형을 갖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뜨거운 열정과 차가운 이론이 조화롭게 만날 수 있음을 보여준 꽤 예외적인 영화학자로 그는 내게 기억되어 있다.

영화를 향한 그의 사랑의 농도는 마지막 순간까지 변함없었던 듯하다. 1973년부터 2004년까지 일하던 대학 강단을 떠난 이후에 오히려 블로그나 비디오 에세이, DVD 컬렉션 등으로 반경을 넓히며 더욱 생산적으로 활동했다. 디지털 기술의 고속 성장으로 영화의 존재 방식이 더욱 복잡해지는 상황에서도 보드웰은 영화형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누락시키지 않으면서 영화 매체의 변화 가능성을 꾸준히 탐문해 왔다. 

뛰어난 통찰력으로 영화를 논한 학자들은 많다. 그러나 한순간도 한눈팔지 않고 오랜 기간 영화를 향해 열정과 수고로움을 쏟은 정도와 깊이에 있어서는 보드웰을 능가할 자가 없어 보인다. 눈을 감기 며칠 전에도 자신의 블로그(davidbordwell.net)에 글을 썼을 만큼,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영화와 함께 있었다. 영화가 당면했던 사회현실적인 조건과 문화적 위상에 주된 관심을 두게 되면서 한동안 그의 책들을 열어보지 않고 있던 차에 그의 부고를 접하게 되었다. 그처럼 독보적인 ‘영화주의자’를 다시는 만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에 허전함을 지울 길 없다. 늦었지만 그에게 존경과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1976년, 전 덴마크영화박물관 본부 앞에서, 데이비드 보드웰.
사진: "A Celestial Cinémathèque? or, Film Archives and Me: A Semi-Personal History", David Bordwell's website on cinema

마지막으로, 만약 우리가 현재의 우리를 사로잡는 영화들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면, 그 호기심은 역사적 사고를 통해 충족될 수 있다.
오늘 일어난 일은 어제 일어난 일로부터 야기된다. 영화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영화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Finally, if we have any curiosity about the films that captivate us now, we can start to satisfy it by thinking historically.
What happens today springs from what happened yesterday.
By trying to understand film history, we better understand the movies of our moment.


- 데이비드 보드웰(David Bordwell), " Doing Film History", David Bordwell's website on cinema




오영숙(성공회대 동아시아 연구소 HK연구교수) l
영화가 공동체의 심리적 현실과 맺는 유의미한 관계에 관심을 두고 글을 쓰고 있다.
『1950년대, 한국영화와 문화 담론』(2007), 『탈북의 경험과 영화 표상』(2013) 등 집필.
『진짜 눈물의 공포(The Fright of Real Tears)』(슬라보예 지젝, 2004), 『영화의 내레이션(Narration in the Fiction Film)』(데이비드 보드웰, 2007) 번역.
2024-04-25조회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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