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한국영상자료원에 소장 중인 <
Archives Korea 1930-1940>은 여러 가지 의미로 어마어마한 기록영상 필름이다. 이 영상은 이미 2021년에
기록영상 컬렉션의 일부로서 심층 해제와 함께 공개됐고
VOD 기획전에서도 짧게 다룬 바 있지만, 1928년부터 1941년경까지의 방대한 시기를 촬영하고 두서없이 묶어놓은 꽤 불친절한 영상인 탓에 전체적인 맥락을 한 번 더 소개해 보려 한다.
캐나다에서 태어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 제임스 헨리 모리스(J. H. Morris)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곳에서 트램 회사 ‘Market Street Railway’의 부매니저로 일하던 모리스는 28세가 되던 1899년에 서울로 건너와 한성전기회사가 부설한 전차 운행 관련 업무를 맡게 된다. 그의 여권(1910.2, 1918.4.)에 기재된 바대로 애초에 조선에 온 것은 '사업 목적의 임시거주'였지만, 근대적 시간 및 경제 개념이 부족했던 조선인들과 함께 아웅다웅하면서 정이 들기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캐나다 출생의 미국인 여성과 결혼(1902)도 하고 딸도 낳아(1905) 가정을 꾸리게 되면서 생각이 바뀐 듯하다. 결국 그는 서울 정동의 외국인 공동체 속에서 정확히 40년을 종횡무진 활약하다가 1938년에 돌아가게 된다. 조선에 올 때는 중간 경유지인 일본 고베에서 제물포까지 이동하는 데만 해도 11일이 걸렸지만, 고국에 돌아갈 때 즈음엔 23시간 정도면 가능해졌을 정도로 세상이 많이 변했다.
"1899년에 조선에 온 J. H. 모리스씨는 40년간 서울에서 사업을 하다가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현재 주소는 캘리포니아주 밀브래 하이랜드의 엘더 애비뉴 30번가입니다.
모리스 부부는 한국에 거주하는 모두에게 변함없는 친절과 배려로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 “Contributor's Column”, The Korea Mission Field 36, no.2 (1940년 2월호)
그는 긴 조선 체류기간 동안 광산업, 자동차 수입 및 정비업, 램프 등 생필품 수입 판매업 등을 하며 미국, 일본, 중국 등을 수시로 오갔다. 한편으로는 서울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재정 임원을 역임했고 왕립아시아학회 조선지부(RASKB)의 회원(회보 속 회원록 기준으로 1915년부터 1940년까지)이기도 했으며, 그가 1924년에 마련한 강당 공간을 외국인 대상의 초교파 연합 교회인 서울유니온교회(Seoul Union Church) 및 서울외국인학교(Seoul Foreign School)의 각종 예배 및 행사 용도로 제공하는 등 정동의 선교사 모임들과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서울외국인학교협회는 작년에 매입한 건물 2층에 새로운 강당을 완공했다. 이 강당은 300명의 청중을 편히 수용할 수 있으며,
협회는 건립위원회 위원장 J. H. 모리스 씨의 봉사와 관대함을 기려 환호 속에 이 새로운 강당을 "모리스 홀"로 명명하기로 의결했다.
서울유니온교회는 준비되는 대로 이 강당에서 정기 주일 예배를 거행하기로 했다.”
- “Notes and Personals”, The Korea Mission Field 20, no.4 (1924년 4월호), p.80
<정동 21번지, 모리스 상회(J. H. Morris & Co. Seoul) 전경>*주1
모리스 상회가 취급하던 물품은 자동차 및 부속들, 타이어, 모터사이클, 램프, 화재보험 등 다양했다.
(좌) 광고지면, The Korea Mission Field vol.20 no.2 (1924년 2월호), (우) 광고지면, The Korea Mission Field vol.13 no.8 (1917년 8월호)
무엇보다도 사진광이었던 그는 유니버설 필름의 조선 내 수입 배급업을 하면서 필름 촬영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1920년대 후반부터 조선을 떠나는 순간까지의 왕성한 활동들을 필름 길이 기준으로 3시간 30분 가량(16mm 필름 7권), 적정 속도로 영사했을 때의 기준으로 5시간 15분 가량의 방대한 촬영본으로 남기게 된다. 그가 샌프란시스코에 돌아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42년 2월에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되니, 거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영상으로 기록했던 셈이다.
4일 월요일. 구름. 쌀쌀함.
서울 집. 하디(Hardie) 박사의 집에서 케른(Kern) 및 그 일행들과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 후 모리스(Morris)씨가 자신이 직접 찍은 영상을 보여줬는데,
동쪽 궐 내, 금강산, 필리핀, 백두산의 모습들이었다. 아내와 나는 9시 반 경에 귀가했다.
- 『윤치호 일기』(尹致昊日記) 10권 중 12월 4일 일기
J. H. 모리스의 일대기와 그를 둘러싼 정동의 선교사, 외교관, 사업가 공동체를 이해하는 것은 이 뜬금없는 푸티지 모음집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된다. 1930년대 초중반 전주와 함흥 일대의 선교 활동 모습, 뜬금없이 중국에서 촬영된 푸티지들(1920년대 중후반부터 선교공동체가 모색했던 중국 선교와의 관련성 등), 1936년 5월 28일 이화학당 개원 50주년 행사 등이 촬영됐던 이유,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1940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진행됐던 “Bowl of Rice" 퍼레이드를 비롯한 캘리포니아 인근의 풍경들이 1940년에서 1941년 즈음에 촬영됐던 동기 등 대략적인 맥락은 이제 그의 생애와 그가 속했던 공동체와의 관계를 통해 어느 정도까지는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Archives Korea 1930-1940> 중, 1940~1941년에 촬영된 푸티지들
(좌) 캘리포니아 레드우드(Redwood) 공원, (우) 샌프란시스코 “Bowl of Rice” 퍼레이드
특히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영상 속 인물들 사이에 흐르는 정서이다. 외국인의 입장에서 기본적인 생필품조차 쉽게 구하기 어려운 극동의 한 나라에 자리를 잡고 서로 의지하고 갈등하며 3세대에 걸쳐 함께 했던 60여 년의 시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들은 마냥 착한 사람들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선교지의 발전과 그 국민들에 대해 함께 공부하고 고민했던 흔적들이 기록 여기저기에 남아 있으며, 어려움 속에서 하나의 목표를 위해 움직였던 공동체로서 서로 간의 유대감도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정동에서 태어난 2세, 3세들은 서로를 ‘Korea Kids’라고 칭했고, 1940년대 초 일제의 압박에 밀려 각자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최소 50여 년 이상 조선에서의 추억담과 서로의 근황을 Korea Klipper라는 이름의 월간 소식지로 엮어 구독했으니 말이다.
<J. H. 모리스의 사위(딸 Marion의 남편)인 스테판(C. H. Stephan)이 최근에 사망했다는 셔우드 홀(Sherwood Hall)의 전언>
사진: The Korea Klipper vol.39, no.2 (1980년 2월호), 첫번째 소식.
모리스의 영상을 보면 이렇듯 서로에 대한 신뢰와 친밀감이 언뜻 비춰지는 장면들이 있다. 중일전쟁 직전의 긴장감과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등으로 인한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영국 영사관에서 열린 1937년 5월 24일 대영제국 기념일(Empire Day) 행사 중의 아이들은 해맑기만 하고 공동체 친구들은 서로를 향해, 그리고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짓는다. 1935년 3월에 경복궁 후원이 특별 개방되면서 열렸던 야외 연회장에서는 붐비는 방문객들 사이로 다른 장면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나타난다. 이때 카메라와 이들의 정서적 거리는 매우 가까워 보인다.
<Archives Korea 1930-1940> : 모리스를 보고 활짝 웃어 보이는 사람들
(상) 1935년 경복궁 후원 (3:48:24), (중) 같은 장면, 구세군 모자를 쓴 새뮤얼 모팻 선교사? (3:48:05),
(하) 1937년 영국 영사관, 대영제국의 날 행사 (4:46:32)
[참고] 이하 제시되는 타임코드(시:분:초)는 적정 속도로 조정한 KMDb VOD 버전 기준의 시간입니다.
모리스의 이 방대한 기록영상 필름은 모리스 사후 그의 딸 매리언(Marion)이 간직하고 있다가 친분이 있던 로스 H. 맥도널드(Ross H. Macdonald) 토론토 대학 교수에게 전달했고, 그의 사망 후 아내 리스(Leith Macdonald)가 캐나다 연합 교회(United Church of Canada)에 기증했다. 그리고 2020년 1월, 모리스의 손녀와 친분이 있던 다큐멘터리 영화작가 마티 그로스(Marty Gross)의 도움을 통해 <Archives Korea 1930-1940>는 드디어 어언 80여 년 만에 한국영상자료원에 도착했다. 진면목이 드러난 모리스 필름의 이모저모를 짧은 글 하나에 모두 설명하기란 무리가 있다.
덧붙이자면 이 영상에 등장하는 장소, 건물, 인물, 상황에 대한 식별은 이제 걸음마 단계이다. 16mm 필름 품질 상의 한계도 있지만, 기록영상 속 정보를 새롭게 하나 식별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정작 우리의 주인공 모리스 씨의 얼굴을 식별하는 데에만 해도 여러 근거자료를 교차 검증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이마저도 100%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추정은 다음과 같다. (이외에도
미 감리교 디지털 컬렉션의 자료를 함께 참고해 볼 수 있다.)
(좌) J. H. 모리스의 여권(1918.8.21.) 속 가족사진 : 순서대로 모리스(47세), 딸 매리언(14세), 아내 마벨(45세)
(우) 마벨(Mabel Clair Perkins)의 여권(1923.11.5.) 속 사진
<서울유니온 50주년(1939년) 기념사진 속 모리스(68세)>
사진: The Korea Mission Field vol.36, no.2. (1940년 2월호)
<위 사진 중 모리스 부분 확대>
<Archives Korea 1930-1940> 속 모리스 추정 인물 - (상) 3:21:18 (하) 3:16:17
<Archives Korea 1930-1940> 속 모리스의 가족들
(상) 모리스의 딸 매리언 부부로 추정되는 인물들 (3:14:08), (하) 맨 오른쪽은 모리스의 아내로 추정 (3:17:36)
※ 참고 문헌
Morris, J. H. “Early Experience with the Seoul Street Railway”, The Korea Mission Field vol.36 no.2 (1940년 2월호), Seoul: 26-27.
Macdonald, Leith, “Rare Film Footage Captures: Korea in the '30s”, Korean Culture, vol.8, no.2. (Summer 1987). 33-37.
Underwood, H. G. “An American Boy in Yesterday's Seoul - 'Golden Days' Fondly Recalled”, KOREANA vol.5, no.1, (Spring 1991), 19-26
Clark, Donald N. “Impermanent Residents: The Seoul Foreign Community in 1937”, TRANSACTIONS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 vol.64, (1989)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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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사진: Cameron, W. H. Morton. Present Day Impressions of Japan; the History, People, Commerce, Industries and Resources of Japan and Japan’s Colonial Empire, Kwantung, Chosen, Taiwan, Karafuto. Edited by W. Feldwick. Chicago: Globe Encyclopedia Co., (1919) p.8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