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들의 초상 클레버 멘도사 필루, 2023

by.강소원(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2023-12-29조회 2,119

1.
“헤시피 거리를 좋아한다. 헤시피 거리를 좋아한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클레버 멘도사 필루는 주문처럼, 다짐처럼 같은 문장을 두 번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이 대사를 넣을까 말까 편집하면서 망설였다. 같은 말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은 강조해야 한다.” 

친근하고도 나른한 목소리의 보이스 오버에 담긴 이 간명한 말, 좋아하는 건 강조해야 한다는 이 마음을 알 것 같다. <아쿠아리우스>(2016)와 <바쿠라우>(2019)의 감독 클레버 멘도사 필루의 두 번째 장편 다큐멘터리 <유령들의 초상>은 오로지 좋아하는 걸 강조하려는 마음으로 만든 영화다. 말할 것도 없이 그는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관을 좋아하고, 그리고 브라질 북동부에 위치한 고향 헤시피를 좋아한다. 그 좋아하는 것을 한 편의 영화에 온전히 다 끌어 담기 위해, 계획이나 의도는 일단 접어두고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30년 전부터 이 영화를 준비했다. 지금 찍고 있는 게 무엇이 될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헤시피의 거리와 영화관을 카메라에 담았던 1990년대 초, 저널리즘을 공부하는 대학생이었던 클레버 멘도사 필루는 이제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브라질을 대표하는 거장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문득 지난 시절 틈틈이 기록해둔 개인적인 아카이브들을 들여다본 게 이 영화의 출발점이다.

<바쿠라우>를 찍기 전인 2017년의 일이니 7년이 소요된 프로젝트다. 영화는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헤시피를 담은 신문기사와 사진, 영상 등 온갖 아카이브 자료 위에 여러 단편영화부터 <아쿠아리우스>까지의 영화 클립을 이음매 없이 끼어 넣고 그 자신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얹어 사적인 에세이 영화로 완성되었다. 여기에 35mm부터 슈퍼 8mm, 16mm, VHS, 베타캠 SP, 미니 DV, HD, 아이폰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에 걸친 카메라의 변천사가 담기고, 다양한 질감과 제 각각의 톤을 지닌 이미지 위에 두 세기에 걸친 도시와 극장의 변천사가 쓸쓸하게 또 애틋하게 담긴다. 이쯤에서 예비 관객들은 <유령들의 초상>이 대략 어떤 영화인지 알겠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기엔 이르다.

클레버 멘도사 필루는 “연구방법론을 다루려는 게 아니다. 이건 사랑 이야기다”라고 말한다. 영화에서 역사학자인 어머니의 인터뷰 영상을 보고 한 말이지만 이 영화에 관한 코멘트이기도 하다. 그는 영화 후반부에 “영화는 멜로드라마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도 했다. 멜로드라마로 기우는 게 영화 매체 본연의 속성이라는 듯, <유령들의 초상>에는 이제 더 이상 여기 없는 것들이 안기는 아득한 그리움이 멜로의 기운으로 배어있다. 또 이런 장면도 있다. 1970년, 더 없이 화려했던 어느 극장의 개관식 장면 다음에 텅 비어버린 극장의 공중전화가 신경 곤두서는 쇳소리를 내며 오래도록 울려댄다. 아무도 받지 않는 전화. “인생의 많은 시간을 이 극장에서 보낸 탓에 감정적이고 혼란스러운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감독의 보이스 오버가 들리고, 그가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불가능한 시공간을 연결한 탓에 멈칫하게 되지만, 이 기묘한 매치 컷의 의미는 단순명료하다. 이제 영화관은 그의 전화에 응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모두 기억하고 있다. 영화 포스터로 가득했던 거리, 극장 앞의 긴 줄, 매표소 티켓 기계에서 나던 딸깍대던 소리, 꽉 찬 객석이 뿜어내던 흥분과 열기, 극장 문을 나서는 즐거운 얼굴들. 여기서 클레버 멘도사 필루는 이제 더 이상 여기 없는 것들이 안기는 애상과 여전히 우리 안에 존재하는 환상 사이를 오가며 한 도시의 시공에 담긴 감정의 지도를 그려나간다. 지극히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이며, 물리적이면서도 영적인 탐험이 이제 시작된다. <유령들의 초상>은 자신을 길러준 이 도시와 극장에 바치는 클레버 멘도사 필루의 지극한 헌사이자 무엇보다 사랑 이야기다.
 

2.
“행복한 결말은 없어”라고 노래하는 톰 제의 곡 ‘해피 엔드’가 영화에 흥겨운 바이브를 연신 뿜어대며 ‘1부’가 시작된다. <유령들의 초상>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세투바우 아파트’라는 제목이 달린 1부는 70년대에 헤시피의 해안가 마을로 이사를 와서 40년을 살았던 필루 감독의 집을 주 무대로 한다. 이혼한 어머니가 대출을 받아 산 아파트는 두 번의 공사를 거치면서 크게 바뀌었는데 그 집의 구석구석은 20여 년간 그곳을 스튜디오 삼아 만든 10여 편의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클레버 멘도사 필루는 초기 단편부터 <네이버링 사운드>(2013)와 <아쿠아리우스>에 이르는 영화 클립을 가족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숏들 사이에 과격하게 툭툭 끼어 넣었다. 그러자 가족들이 식사하고 아이들이 뛰어 놀던 거실은 발밑으로 피가 쏟아지고 권총에 한 남자의 뒤통수가 날아가는 공포영화의 무대가 된다. 한 공간에 담긴 수십 년의 시간을 더듬는 방식치고는 유별나게 특이하다. 이 편집은 연대기적이지도 선형적이지도 않다. 전적으로 사적이며 별나다. 그 탓에 관객을 따돌리려는 건가, 혼자 추억에 잠겨 자기도취적인 에세이를 쓰는 중인가 하는 의심이 피어오를락 하는 순간 여기 매 숏들이 미스터리한 얼룩들로 우리의 시선을 잡아채고 영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 여기엔 영(靈)적인 기운이 담겨 있다.

우선 감독이 오래전 거실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보자. 무언가 형체를 알 수 없는, 흐릿한 유령의 형상이 포착된 이 사진은 영화 제목 <유령들의 초상>을 직관적인 이미지로 구현하고 있다. 해명되지 않는, 해명할 수 없는 이 이미지보다 우리의 뇌리에 더 깊은 인상을 남기는 유령은 이웃집 개 니쿠일 것이다. 니쿠는 깨어있는 한 내내 짖어대는 통에 필루 감독의 전작들에 불가피하게 배경 사운드로 새겨지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한밤, 필루 감독은 니쿠의 짖는 소리에 잠에서 깬다. 어? 니쿠는 벌써 몇 년 전에 죽었는데. 알고 보니 TV 공중파에서 방영하는 그의 영화를 온 동네가 보고 있는 중이었다. 클레버 멘도사 필루의 영화에서 니쿠는 여진히 활기차게 짖어대고 지칠 줄 모르고 울어대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니쿠는 유령이 되었’고, 그 유령은 영화를 통해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2부 헤시피 시내의 영화관’에서 클레버 멘도사 필루는 마침내 집을 나서서 헤시피 거리를 쏘다니다 영화관을 찾아간다. 우울한 잿빛의 도시 헤시피, 과일 향과 오줌 냄새가 뒤섞인 거리를 그는 여전히 사랑한다. 인파로 북적대던 거리는 이제 텅 비었고, 13살부터 25살까지 그가 살다시피 한 영화관은 문을 닫은 지 오래다. 극장의 마지막을 기록했던 청년 클레버의 영상 속에서 우리는 영사기사 알렉산드르를 만나 2차 대전 당시 헤시피의 극장이 나치 프로파간다의 전초기지가 될 뻔한 이야기, 4개월간 상영된 <대부>에서 니노 로타의 음악이 지긋지긋해져서 상영 마지막 날 도망친 이야기, 정권의 검열 이야기를 듣는다. 이 영화의 유일한 인터뷰 씬으로 그를 향한 클레버 멘도사 필루의 마음이 온전히 전해지는 순간이다. 영사기사 알렉산드르씨도 유령이 되었다. 그는 그렇게 여기에 있다.

‘3부 신전과 성령들’은 오래전 교회의 자리에 지어올린 상 루이스 극장이 다시 복음주의 교회로 바뀌는 과정을 담은 장이다. 교회에서 극장으로, 극장이 다시 교회로 바뀌는 동안, 의미심장하게도(어쩌면 우연이겠지만) 영화와 종교는 무언가를 공유하게 되었다. 스크린과 의자가 그대로인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스크린에 매혹된 관객의 표정과 기도하는 신도들의 얼굴에는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다. 믿음, 열광 그리고 사랑. 하지만 헤시피에서 극장과 교회는 공존하지 못한다. 클레버 멘도사 필루의 진단으로는, “극장이 죽고 교회가 부활했다.” 이제는 사라진, 흥분과 즐거움으로 들썩이던 극장 객석을 보며 “이토록 하나가 되는 공간이 헤시피에 또 있을까”라며 경탄 혹은 탄식하는 감독의 목소리가 긴 감정적 파장을 남긴다.
 

3.
다시 말하지만 <유령들의 초상>은 음울하고 무거운 영화가 아니다. 때때로 향수에 젖고 가슴 한편이 저릿해오는 순간도 있지만 영화는 대체로 경쾌하고 친근하고 별나면서 유머러스하다. 그리고 마지막에 영화 전체를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특별한 시퀀스가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재밌는 장면으로 꼽을 만한, 그리고 우리에게 좀 더 생각해보라고 요청해오는 듯한 그런 장면이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필루 감독은 지금 우버 택시를 타고 있다. 차에는 허브 앨퍼트의 트럼펫 연주곡 <라이즈 Rise>가 흐르고, 택시 기사와 필루 감독은 트럼펫을 연주하는 일과 영화를 만드는 일에 관해 소소한 대화를 나눈다. 운전석과 뒷좌석을 나눠 찍은 방식으로 보나 그들의 대화로 보나 분명 이 시퀀스는 배우를 기용하여 연출한 픽션 장면이다. 그 사실을 확증해주듯 택시 기사는 문득 자신의 초능력에 대해 털어놓는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는 능력’, 즉 사라지는 능력을 가졌다는 그의 고백은 곧장 증명되고, 필루 감독은 운전석은 비었지만 여전히 잘 굴러가는 택시 뒷좌석에서 옅은 미소를 짓는다. “거기 있는 거죠?” “네, 여기 있어요.”

클레버 멘도사 필루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작동하는 어떤 존재/비존재들에 대한 믿음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하더라도 투명인간 시퀀스는 왜 여기 있는가. 픽션으로 다큐멘터리를 매듭 짓는 클레버 멘도사 필루의 선택은 2부에서 “픽션 영화는 최고의 다큐멘터리야”라고 주인공 청년(아마도 감독의 페르소나)의 귀에 비밀처럼 속삭인 에이젠쉬테인의 대사와 정확히 접속된다. 단편 <에이젠쉬테인>에서 가져온 이 장면에 대해, 그리고 이 대사에 대해 필루 감독은 아무런 논평도 덧붙이지 않았지만, 픽션과 논픽션의 접속에 관해서라면 극영화는 물론 현대 다큐멘터리 제작에서도 유연하게 수용되는 편이니 덧붙일 말이 필요했을까 싶다.

그보다 더 의미심장한 것은 ‘보이지 않는, 그러나 존속하는’ 존재 혹은 비존재들과 관련한 대목일 것이다. <유령들의 초상>이라는 제목이 지시하는 바대로, 이 영화에는 유령들이 즐비하다. 여기서 유령의 모티프는 가시적인 유령의 이미지를 담은 심령사진으로 시작해서 이웃집 개 니쿠,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밤거리를 활보하는 남자(드라큘라), 영사기의 빛과 함께 사라진 영사기사 알렉산드르로 차츰 확장된다. 이들 ‘유령들의 초상’과 더불어 <유령들의 초상>은 보이지 않는 유령들도 담고 있다. 2부 끝자락에서 우리는 텅 빈 극장에서 승강기와 극장 문이 저절로 열리고 닫히는 걸 보았고, 인적 없이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를 들었다. 그는 유령들에 둘러싸인 공간에 살고 있다.

고향 헤시피의 거리와 극장에서 클레버 멘도사 필루가 하려던 것이 과거에 있었지만 현재에 사라진 것들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이라면, 본질적인 속성 상 영화는 언제나 그래왔던 게 아닐까. 모든 영화는 과거의 흔적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스크린으로 보는 모든 것은 그때 거기에 있었지만 지금 여기에 없는 것들이다. 과거에 존재했었지만 현재 여기 없는 것. 혹은 소멸되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것. 유령 혹은 시네마. 영화의 역사가 사자(死者)들의 발자취이듯, 개별 영화는 유령들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유령들의 초상>은 그 사실을 문득 일깨운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불멸화하는 클레버 멘도사 필루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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