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를 꿈꾸는 경성과 동경 사이의 여성 퀴어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청연>

by.조혜영(영화평론가) 2024-05-02조회 712

한국영화의 '퀴어함'이 장르나 소재, 영화사적 순간 등에 반영되는 양상을 분석합니다.


한국영화에서 ‘경성’이라는 공간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경성은 단지 일제 시기의 서울이라는 지리적 위치를 가리키는 것을 넘어서 혼종성과 양가성이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표현될 수 있는 상징으로 자리 잡은 것처럼 보인다. 엄연히 주권을 뺏긴 식민적 현실에 놓여 있지만 일본과 서구 문화가 소개되고 젠더 역할과 계급적 체제가 큰 변화를 겪은 시기이기도 하다. 경성은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삶과 죽음, 상실과 기회, 사적 연애와 공적 역사, 신념과 배신, 매혹과 혐오,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같은 이질적인 것들의 경계가 무너지고 ‘정상적이고 적법한 것’을 지속적으로 문제 삼는 질문의 시공간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때로 경성은 어떤 것도 허용되지 않지만, 또한 (대의를 위한 자기희생과 폭력까지도) 무엇이든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공간처럼 그려진다. 그러한 허용이 가능한 것은 역사적 사실로 경성이 임시적 공간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혼돈의 존재양식과 그것이 주는 매혹적인 스펙터클의 쾌락을 제공하며 여러 다른 시공간과 정체성들을 재조합하기에 좋은 공간이 된다.

그러한 경성에 여성 퀴어 인물이 종종 출몰하는 것은 상당히 설득력 있어 보인다. 원래부터 가진 것 없거나 비존재에 가까웠던 퀴어 여성들에게 경성은 때때로 기회로 인지되며, 그러한 과정에서 계급과 민족을 가로지르며 친밀성으로 가득한 여성 동성 사회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 그 유토피아는 경성이 품고 있던 그러나 어쩌면 실현되지는 않은 잠재성일 것이다.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를 고려할 때 젠더와 섹슈얼리티, 민족, 계급의 억압 문제를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들은 역설적으로 경성의 환유적 장소로 여겨질 수 있는 고립된 공간에 갇히게 된다.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이해영, 2014) 중

이해영 감독의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2014)과 <유령>(2022)은 그러한 전형을 보여준다.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에서 십대 소녀들은 신문물 교육과 동경으로의 탈출을 꿈꾸며 입학한다. 몸이 약하거나 부모에게 버려지는 등 결핍과 상실을 겪은 소녀들은 다른 세계로의 이동을 꿈꾼다. 교장과 교사들은 체력 테스트를 통과하면 동경으로 가는 기회를 줄 것을 약속하며 학생들을 훈육한다. 소수에게 제공되는 기회를 잡기 위한 경쟁은 체제에의 순응과 인정욕구를 부추기고 소녀들이 서로 반목하게 하는 데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단순한 우정을 넘어선 사랑 혹은 동일시 그리고 한 번도 승인된 적 없는 통제되지 않는 과잉 욕망은 지속적으로 체제에 균열을 만든다. 조선총독부가 비밀리에 운영하는 이 학교는 인간을 비밀병기로 만들기 위해 생체실험을 하는 군사장소로 밝혀진다. 주란의 연덕을 향한 사랑은 역설적으로 일제가 원하던 완벽한 괴물-신체를 획득하게 하고 모두를 파멸로 이끈다. 이 영화에서 학생뿐 아니라 교장과 교사 등 여성들은 민족, 나이, 계급을 가로지르며 모두 인정욕구에 휩싸여 있다. 문제는 주란과 연덕을 제외하고 모두 무엇으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하는지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정하는 주체는 결국 군사화된 제국 남성, 동경이다. 경성에서 도쿄로의 이동을 통해 개인의 꿈과 욕망은 제국 군사주의라는 체제를 벗어나지 못한다. 괴물화된 레즈비언 소녀의 신체만이 유일하게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비밀스러운 장소로 숨어들 수 있을 뿐이다. 

윤종찬 감독의 <청연>(2005)은 경성에서 동경으로의 이동을 실현해 낸 실존 인물을 소재로 삼는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실존 인물인 박경원은 조선의 민간 여성 비행사라는 이력을 갖고 있다. <청연>에서 박경원은 식민지의 가난한 소녀의 꿈이 이뤄지는 과정의 모순과 혼란을 서사화하기 위해 여성 연대 혹은 여성 간 사랑의 서사를 외삽한다. 박경원은 어린 시절부터 하늘을 날기를 꿈꿨지만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딸의 교육을 거부한다. 영화는 박경원이 거의 혼자의 힘으로 동경에 건너와 비행학교에 다니고 결국 꿈을 이뤄낸 것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제국의 승인, 즉 고위관료인 당시 외무대신의 후견 없이 박경원은 성공할 수 없었다. 이러한 후견을 성적인 관계로 연관 짓는 소문을 사전에 막는 장치로 영화는 기베라는 일본 여성 비행사를 출연시킨다. 영화에서 외무대신의 애인으로 설정된 기베는 박경원이 일본 고위관료의 후견을 받고 일본제국을 홍보하는 상품이 되는 것을 머뭇거릴 때마다 그의 죄책감을 씻어주는 역할을 한다. 
 
<청연>(윤종찬, 2005) 중

기베와 경쟁을 하던 박경원은 그와의 시합에서 기베가 위험에 처하자 시합을 포기하고 그를 구한다. 이후 기베는 박경원에게 동경 혹은 연대의 감정을 진하게 내비친다. 기베는 박경원에게 자신은 폐가 좋지 않아 고공비행을 할 수 없는 처지임을 고백하며 박경원의 성공은 기베 자신의 성공이자 아시아 여성의 성공이라고 역설한다. 그렇기에 박경원이 어떤 비난을 들어도 여성 차별을 넘어서는 대의가 있다고 포장해준다. 어떤 상황에서도 경원의 편에 서서 아낌없이 퍼주는 기베의 행동은 가장 순수한 사랑으로 보인다. 특히 비행사로서 주로 남장에 가까운 옷을 입는 둘의 시각적 퍼포먼스는 퀴어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민족을 넘어서는 여성 연대 혹은 퀴어적 관계처럼 보이기도 한 둘의 관계는 박경원을 친일 혹은 일본 고위관료와의 성적 관계라는 혐의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만든 장치다. 그리고 ‘아시아 여성’을 강조하는 기베의 언어는 정확히 대동아를 열망했던 일본제국의 언어이기도 하다. 박경원은 기베가 마련해주고 북돋아준 마지막 비행에서 조선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중간에 추락해 죽고 만다. 사랑과 꿈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처럼 서사화된 박경원의 죽음과 동경과 경성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식민지적 여성 주체는 실제로 퀴어하다. 하지만 이 퀴어적 퍼포먼스와 여성 연대의 순간들은 또한 친일과 성적 낙인을 돌파하지 않고 덮으려는 장치로 사용된다. 기베는 그러한 장치의 희생자이다. 두 영화에서 여성 퀴어들은 민족을 넘으려 하고, 경성과 동경 어디도 아닌 유토피아를 찾으려 하지만 결국 죽음만이 그들을 수용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이해영 감독의 또 다른 경성 퀴어물 <유령>(2023)은 그런 면에서 싸워 이기는 다른 결말을 보여주지만, 미국 갱스터 장르와 재즈 시대의 스크린으로 문자 그대로 걸어 들어간 것 같은 시각적 연출은 앞의 두 영화만큼이나 환상적 유토피아를 열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유령>(이해영, 2022) 중


 
조혜영(영화평론가) l 영화적 순간들을 공유하고자 글을 쓴다.
영상문화 기획연구 단체 '프로젝트38' 연구원, 『원본 없는 판타지』(2020), 『Mediating Gender in Post-Authoritarian South Korea』(2024) 등 공동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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