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에서 비켜난 자리에서 <리턴 투 서울>, <나의 피투성이 연인>, <절해고도>

by.박예지(영화평론가) 2024-04-12조회 892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영화를 좋아해서 시작하게 된 일이지만, 평론가로 활동하는 일은 솔직히 내겐 사치스러운 일이다. 영화평론가로서의 명맥을 유지하는 건 내 돈과 시간, 자원을 써야만 가능한 일이니까. 영화를 감상하고 분석하고 연구하는 걸 멈추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개봉작을 부지런히 보러 다녀야 하고, 미처 보지 못한 고전 영화도 꾸준히 찾아봐야 하며 영화 관련 이론이나 최근 담론을 공부하는 것도 게을리할 수 없다. 시간은 차치하고서라도 한 달에 청탁 받은 원고를 써서 받는 돈이 이 모든 활동을 하는데 드는 돈보다 더 많았던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본업이 있기 때문에 주로 평일 낮에 열리는 시사회에 가지 못해 일반 관객과 똑같이 직접 내 돈을 내고 영화를 보러 다녀야 하며 OTT 콘텐츠 구독료와 영화 관련 서적, 강의에도 돈을 쓴다.

나는 궁금했다. 다른 평론가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그들은 대부분 영화와 관련한 학계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거나 영화 관련 업종에 종사하고 있거나 아니면 아직 학생이었다. 나처럼 영화와 관련 없는 본업을 갖고서 퇴근 후나 주말에 짬을 내어 활동을 이어가는 평론가가 과연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이쯤 되면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다. 그런데도 왜 나는 계속 영화를 보고 글을 쓰나? 비정규직 회사원과 프리랜서 생활을 번갈아 전전하며 혼자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한 30대 여자인 내게 영화평론가로 활동하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기존의 평론을 볼 때마다 나와 시선이 너무 다르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높은 평가를 받은 영화 중 내게 불편하게 다가온 것들이 많고, 반면 주목받지 못한 영화 중에 어떻게 이런 영화가 저평가 받고 그대로 묻힌 건가 생각이 드는 것들이 있다. 이렇게 주류 대중과도 기존의 평론가들과도 시선이 어긋나는 지점들을 하나씩 짚고, 내가 영화 안에서 다르게 포착한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한 영화의 뛰어남을 형식 중심으로만 얘기할 때의 거북함도 있다. 한 영화가 영화사적으로 높게 평가받을 만한 훌륭한 형식을 갖추었다는 이유로 그 안에 드러나 있는 노골적인 혐오나 비윤리성을 아예 못 본척하고 언급하지 않는 비평들이 불편했다. 영화는 형식과 내용의 결합이다. 형식이 곧 내용이라는 관점에서 비평을 한다면 놓치는 것이 너무 많다. 어쩔 때는 내용이 곧 형식이라는 관점에서 영화를 볼 필요도 있다. 형식과 내용은 결코 분리될 수도 없고, 한 가지가 다른 한 가지를 온전히 대변할 수도 없다. 이런 점에서 한편으로는 타자의 입장에서 만든 영화가 그 생경함으로 인해 저평가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지금까지 말할 수 없는 입장에 놓였던 타자의 시선에서 구성된 형식과 내용은 기존 영화의 역사와 문법으로만은 파악될 수 없는 지점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리턴 투 서울>(데이비 추, 2022) 중

작년에 개봉한 영화 중 가장 좋았던 작품은 캄보디아계 프랑스 이민 2세대인 데이비 추 감독의 <리턴 투 서울>(2022) 이었다. 한국의 해외입양 정책에 의해 갓난아기 때 프랑스로 입양된 한국 여성 ‘프레디’가 20대 중반에 처음으로 한국에 와서 겪는 혼란들을 불균질적으로 담아냈다. 최근 활발하게 제작되고 있는 아시안 디아스포라 영화의 자장 안에 놓여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결이 조금 다르다. 부모 세대나 자신의 의지로 인해 외국에 정착하게 된 이민자들이 주류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을 그린 게 아니라, 어렸을 때 입양되어 외국인 부모 밑에서 평생을 그 나라의 시민으로 자라다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이 느끼는 당혹스러움을 담았기 때문이다. 프레디의 감각은 그 어떤 한국인과도, 프랑스인과도, 또 프랑스에 정착해 살고 있는 한국인 이민자와도 다르고, 프레디의 부모 찾기 여정은 <라이스보이 슬립스>(앤소니 심, 2022)의 경우처럼 캐나다에 이주했다가 한국의 친가에서 아버지의 흔적을 통해 한국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는 동현(이든 황)의 경우와도 매우 다르게 진행된다. 입양아, 한국계 프랑스인, 여성이라는 삼중의 소수자성이 교차되며 만들어지는 감각의 특수함이 긴 시간 안에서 파편적으로 묘사된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중요성과 작품성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다고 느꼈던 영화 중엔 여성 주체의 이야기를 여성의 시선에서 만든 영화들이 많다. 작년에는 <나의 피투성이 연인>(유지영, 2023)이 그랬다. 여성의 원치 않는 임신 문제를 그린 영화는 많지만 보통 그런 영화는 두 가지 중 하나의 방향을 선택한다. ‘그래도 낳아야 한다’라는 당위성 안에서 아이 낳는 과정을 어떻게든 긍정적인 색채로 꾸미거나 또는 아이를 지울 수 없거나 결국 낳게 되어서 불행에 휩싸이는 여성의 삶을 고통스럽게 묘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그런 이분법적 함정에 빠지지 않고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 예술가가 자신의 작업을 계속 해나가기 위해서 어떤 선택에 직면하고 어떤 비난에 취약하게 노출되는지를 적나라하게 그려냈다. 그에 무너지지 않고 그녀가 자신의 신념을 지킬 때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게 되는지를 냉정하게 담아낸 결말에 힘이 있었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유지영, 2023) 중

<절해고도>(김미영, 2021)에서도 최근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풍경과 감각을 마주했다. 여성 캐릭터와 남성 캐릭터 간의 관계 묘사가 레퍼런스를 찾기 힘들 정도로 신선했고 벌어지고 있는 사건과 그에 영향받는 등장인물의 고통에서 한 발짝 물러나 시간과 여유를 갖고 지켜보는 거리감도 범상치 않았다. 계절감을 갖는 자연을 풍부하게 담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조각가인 윤철(박종환)은 불혹을 넘긴 나이에 자신에게 예술가로서의 재능이 그다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방황한다. 그러던 중 미술에 재능을 보이던 딸인 지나(이연)가 미대 진학을 포기하고 출가를 하겠다고 한다. 예술가가 되지 못하면 스님이나 수도사가 되고 싶었던 윤철은 그가 갖지 못했던 재능을 갖고 그가 가지 못했던 길을 가는 딸을 지켜보며 변화한다. 속세에 있을 때 서로 가시 돋친 날카로운 반말을 스스럼없이 주고받던 부녀는 딸이 행자가 되고 난 후 예우를 하고 존대하며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자신의 욕망을 우선시하며 딸의 삶에 간섭하기 보다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선택해 걸어가는 딸을 옆에서 지켜보며 지지하면서 윤철 자신도 변화한다. 영화의 전반부는 대부분 핸드헬드에 롱테이크로 찍혀 불안감을 자아내지만 지나가 도맹 행자가 되고 난 뒤의 후반부에서는 이들의 모습을 고정샷으로 차분히 지켜본다. 자기중심적인 태도로 인해 한때 관계가 틀어졌던 애인과의 관계 또한 변한다. 윤철은 암이 재발해 죽어가는 전 연인을 바라는 바 없이 옆에서 지켜봐 주고 또 그녀가 자신의 존엄을 위해 호스피스로 가는 선택 또한 존중해 준다.

<절해고도>를 만든 김미영 감독은 임권택 감독 밑에서 십여 년 동안 연출부로 활동했다. 이번 작품은 마찬가지로 임권택 감독과 일했던 강창호 미술감독과 함께 만든 영화이다. <안개마을>(임권택, 1982)을 레퍼런스로 해서 자연 안에서 인물이 하나의 요소로 공존하고 어우러지는 모습을 표현했다.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1981),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 같은 불교영화에서 다뤘던 주제의식을 이어가면서도 여성을 타자화했던 시선에서 벗어나 모든 인물을 주체로 그린 점이 인상적이었다. 구도의 길을 걷는 주체와 그를 현혹하는 타자의 이분법을 벗어나면 영화의 정서와 스토리의 방향성, 미학 등도 다 함께 바뀌게 된다. 한국 영화의 거장 아래에서 받은 영향을 짙게 드러내면서도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의 시선에서 이뤄진 이 전환에 대해 좀 더 주목하고 의미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절해고도>(김미영, 2021) 중

한 편의 영화엔 세상과 인생을 대하는 감독의 태도가 담겨있다. 무엇을 담을 것이고 어떤 거리에서 어떤 시간과 빛으로 그 장면을 구성할 것인가? 이건 영화에 대한 지식과 경험에 더해 살아온 삶과 사유가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것이다. 결국 영화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고, 거기엔 단순히 영화의 역사나 형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것을 초과하는 삶이 있다. 따라서 한 편의 영화를 이해하는 데는 영화사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삶의 감각도 필요하다.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 비슷한 교육을 받고 비슷한 과정을 거쳐 비슷한 삶을 삶고 있는 사람들은 한 영화를 비슷하게 평가할 것이다. 하지만 전혀 다른 배경에서 다른 삶을 산 사람이 그 영화를 본다 해도 그 영화에 대한 비슷한 평을 가질 수 있을까? 어떤 감상들은 그것이 전문적인 영화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너무 쉽게 무시당하고 간과된다. 하지만 다른 위치에서 오는 삶의 감각으로 영화를 보는 사람의 의견은 한 영화를 둘러싼 담론의 장을 넓히고, 영화가 나아갈 수 있는 다른 방향성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

등단한 후에도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해 쓰는 내 삶과 태도는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블로그에 취미로 영화 비평을 쓰던 아마추어 정신으로 평론을 쓰고 있다. 주류에서 비켜난 자리에서 내가 좋다고 생각한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영화의 흥행이나 홍보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청탁이 들어와도 본업에 치여 마감을 어기기 일쑤이고, 별로라고 생각한 영화에 대해서는 에둘러서라도 칭찬을 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나는 영화평론가라는 명칭에 걸맞은 자격을 여러모로 갖고 있지 못하면서도 우연히 등단한 후 뻔뻔하게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있고, 이런 자리에서만 쓸 수 있는 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오늘도 영화를 보고 글을 쓴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유지영, 2023) 중


박예지(영화평론가) l 소수자의 시선에서 영화를 보고 쓴다.
2022 영화의 전당 영화평론대상을 수상하며 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
영화비평 구독 메일링 서비스 <씨네픽션>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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