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수와 잠수를 오가며: (엿)보기에 관한 노트 <괴인>, <물안에서>

by.이보라(영화평론가) 2024-03-29조회 1,761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1.

잘 알려진 대로 음악 애호가였던 롤랑 바르트는 피아노를 웬만하면 느리게 치는 편이었다. 언젠가 바르트는 우연히 라디오에서 흐르는, 하프시코디스트 블랑딘 베를레가 연주하는 바흐 파르티타 4번의 쿠랑트를 듣고는 너무 빠른 속주에 자신이 알던 그 곡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고 술회한다. 그러나 쿠랑트는 그 어원(courir, 달리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애당초 쾌활한 춤곡인 터, 실상 바르트의 기준점은 느린 자기 자신이었다.*주1 달리 말해 대개의 곡을 느긋하게 연주했던 바르트가 베를레를 특히 겨냥했다기보다는, 자신의 속도보다 훨씬 빠른 것이 이미 표준이 된 현대적 기준 자체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한편 나는 이 불만을 발화하는 그의 위치가 퍽 재밌다. 그가 요구한 기준이 여타 프로페셔널 연주자의 ‘정통적인’ 해석이나 정련한 이론에 근거한 게 아니라 오로지 자의적인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물론 그는 음악비평을 위시하여 악기 연주와 작곡까지 꾸준히 실행했지만 끝내 아마추어 음악가로서의 자신을 긍정했다는 점에서, 이 일화 속 바르트의 발언은 비평가의 무리한 지적과 외부인의 ‘미흡한’ 불만이 동시에 발휘된 경우처럼 느껴진다. 그는 괄호에 넣어 덧붙인다. “(이것은 음악 애호가의 자만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왜냐하면 애호가의 욕망은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 쿠랑트는 그 자체로 (분명 역사적 진실에 따라) 연주되었지만, 나를 위해 연주된 것은 아니었습니다.”*주2

말하자면 내게 비평 또한 “역사적 진실”에 대한 충실도를 떠나 “나를 위해 연주된” 것을 찾는 과정인 듯하다. 나는 바르트의 이 마음가짐이 내가 영화에 느끼는 불손한 태도와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느꼈다. 사실 이미 정해진 원고 분량을 훌쩍 넘겼음에도 송고 후 며칠이 지나서 나는 이 글의 서두를 다시 쓰고 있는데, 이 코너의 기획을 오해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나는 비평(가)에 대한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이 지면에, 비평에 대해서도 비평가에 대해서도 쓰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싶은 주제였을까? 솔직히 내게 영화평론가로서의 자의식은 별로 없고, 더 솔직히 그럼에도 영화평론가로서의 무게감은 너무 크다. 하나에서 기인한, 거의 없는 것과 너무 큰 것이 내 안에서 이상한 대결을 벌이는 탓에 이걸 직접적인 글감으로 삼는 글쓰기가 다소 곤란했다.

물론 비평을 글쓰기에만 국한할 수 없는 시대다. 어떤 추천의 목록과 그 방식, 기획과 운영, 수입과 수출, 또한 동료를 모으는 일까지도 모름지기 비평가의 ‘활동’ 영역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허덕이지만, 이러한 수행을 시기와 맥락에 맞게 이어나가는 동시대의 탁월한 비평가들은 분명 여럿 있다. 다만 나는 앞서 언급한 사례에 공감한 바, 보다 소박한 의미에서 태도로서의 비평을 돌아보고 싶다. 결국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당연히 할 말이 있기 때문인데, 이때 중요한 것은 (바르트의 불평처럼) 납득할 수 없는 표준을 의심하고, 대상과 거의 무관한 나를 데려와서라도 나에게 효과적인 것을 찾는 일이다. 내 사유를 보편과 일반에 등재시키고픈 마음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능하다면) 당연한 소리는 덜하고, 의외의 얘기를 더하고 싶다. 연장선상에서 (이제는 왠지 자주 오용되는 것 같은) 정확하게 쓰라는 주문에 오기가 생기곤 하는데, 나는 평문이 정교해지는 데는 관심이 있지만 정확해질 의무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 돌고 돌아 영화로 간다면, 오염 없는 적확성과 유의미의 강박을 동력 삼지 않는 영화들, 도리어 먼지나 얼룩을 묻히고도 별로 개의치 않는 이상한 욕구의 영화들에 대해 더 말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나는 대체로 이곳 저곳을 오가며 힐끗 엿보는 사람이다.
 

2.

“우리가 어딘가로부터 듣는 것이 듣기의 본질이라면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의 앞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주3 사진의 존재론적 모호성을 설명하기 위해 청각과 시각의 차이를 논하는 스탠리 카벨은 듣기와 보기 행위에 있어 위치/방향의 문제를 지적한다. 우리는 분명 우리 앞에 있는 것을 본다. 문제는 우리가 앞에 놓인 것, 의 앞면까지 선택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우리 앞의 그(것)도 우리를 보고 있다면 눈을 마주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약간 초조한 심정이 될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곤충처럼 겹눈을 지니지 않은 탓에 앞에 있는 것’밖에’ 보지 못하고, 이에 더해 타자인 대상의 앞뒤 또한 결정할 수 없다.

우리가 우리의 앞에 있는 것을 볼 때, 우리 앞에 있는 것은 무엇을 보고 있나? 먼저 나는 어떤 뒷모습을 떠올렸다. 낭만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8)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두 가지인데, 첫째로는 어느 비장하고 숭고한 뒷모습이고, 둘째로는 그 뒷모습을 비장하고 숭고하게끔 보이도록 만드는, 그의 앞에 펼쳐진 풍경이다. 그 풍경은 인물에게는 전경이겠지만 원근법에 의해 우리에게는 원경이다. 우리는 인물의 뒷모습과 더불어 그가 보고 있는 것까지 볼 수 있다. 모든 레이어를 조감할 수 있는 감상자의 위치 덕에 주체적인 응시자가 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못지않게 우리는 (카벨이 “회화는 세계이다”라고 딱 잘라 말하듯 그 본연의 완결성이라는 속성에 더해) 인간의 시점이 지니는 일방향성이라는 강력한 한계에 도착하게 된다. 시선의 문제는 인식의 문제로 이어진다. 우리는 그의 얼굴을 영원히 볼 수 없다(=모른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Wanderer above the Sea of Fog)>(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1818)

옆모습(profile)에 관해 떠올릴 수도 있다. 내게 옆모습이라는 개념은 주로 피아니스트의 무대를 상기시킨다. 일반적으로 오늘날의 리사이틀에서 연주자는 관객에게 측면을 보인다. 이 측면의 무대화는 (프란츠 리스트가 기원이라는 통상의 오해와 달리) 얀 라디슬라브 두세크가 최초로 시도한 것이었는데, 콘서트 피아니스트의 시초 격인 그가 연주의 기본 위치로 옆모습을 택한 이유는 그것이 연주자의 입체적인 윤곽을 과시하기에 가장 적절한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연주자는 손뿐만 아니라 신체 전부를 적재적소에 써야 이상적인 연주에 도달할 수 있다. 다채롭게 변모하는 표정과 흔들리는 상체는, 그러나 청중에게 ‘완전히’는 노출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절반의 획득/결핍이야말로 연주자를 향한 호기심을 배가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잡을 수도 없는 음악의 기이한 위상을 상상하게 만든다. 연주자는 입퇴장 시에만 청중에게 인사할 뿐 음악을 만들 때는 우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정면의 욕구는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영화는 화면 분할이나 오버랩의 기술을, 무엇보다 몽타주의 기법을 터득한 매체라서 우리에게 그(들)의 얼굴을 짜잔, 보여줄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는 시야를 조각내는 기계인 카메라로 담은 세계이다(인간의 신체를 모방하며 발전해온 많은 기계장치가 그렇듯 그 기원적 조건을 인계받았을 뿐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말대로 ‘겨우 오려낼 줄 아는 사물’을 통해 우리는 애당초 분절과 절삭을 거친 모습을 간신히 제공받을 따름인지라, 테크놀로지의 가능성을 무한한 역량으로 긍정하기에는 어쩐지 미진함이 남는다. (가령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열병의 방>(2015)처럼 공간의 삼면을 스크린으로 이용해 동일한 인물과 그 주변을 다양한 각도에서 동시에 바라보는 시도의 경우도 영사 과정을 사후적으로 활용한 것이며 이는 물론, 영화관에서 진행될 수 없는 작업이다. 결과적으로도 우리는 다면을 일체에 조망하지 못하고 각각의 화면을 띄엄띄엄 관람할 수밖에 없다.)
 
 <열병의 방>(아핏차퐁 위라세타쿤, 2015)


3.

앞에 있는 것을 본다는 감각이 유효하더라도 정면을 보지 않으면 어딘가 부족한 느낌은 영화를 볼 때 역시 우리를 자극한다. 일단 정면 쇼트가 없는 영화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부족한 정면’, 그로 인한 ‘마주침의 결여’를 도리어 영화가 핵심적인 동력으로 삼을 때 우리는 그 여집합을 풍족하게 껴안게 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엿보기의 영화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식으로 존재(해야)할까? 가령 무언가를 바라보는 행위 자체를 엿보기와 동일시한다고 느껴질 정도로, 관음적 요소를 서사의 국면마다 개입시키는 <괴인>(이정홍, 2022)은 어떨까. <괴인>의 도입부에는 어두운 밤 중 두 남자가 어느 문앞에서 도어락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자꾸 비밀번호를 틀리는 그들은 이 집의 주인이 아닌 것 같다. 추후에 밝혀지지만 그들이 머문 곳은 개업을 앞둔 피아노 학원이고 두 남자는 그곳의 공사를 맡은 목수들이다. 기홍은 다음 날 공사를 마저 진행하기 위해, 고객인 원장의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학원을 간밤의 잠자리로 이용한다.
 
   
<괴인>(이정홍, 2022) 중

기홍은 눈을 감기 위해 그곳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날 그는 예기치 못한 사태를 맞닥뜨린다(흥미롭게도 이 사실마저 얼마 지나서야 알게 된다). <괴인>은 주인과 침입자라는 대비된 설정을 반복해 제시하면서도 그 양분된 세계에 머무르기보다 인물들의 동선마다 회색지대를 깔아놓는데, 이 과정에서 엿보기의 충동을 여지없이 기입한다. 남의 집안을 훔쳐보기(그러다가 휴대폰을 떨어뜨려 한쪽이 까맣게 나간 액정 화면), 답사의 명목으로 공간을 힐끔거리며 관찰하기, 심지어 계절이 지난 어느 날 길을 걷다 우연히 스쳐지나가는 어떤 얼굴을 알아보는 것까지. 자유로운 시선이 아니라 어떤 낌새와 기미를 감지할 수 있을 만큼만 유유하게 바라보는 이 찰나의 행위는 인물들 사이에 완벽히 봉인되지 못하고 새어나가는(영화의 주요한 사태를 빌려 말하면 ‘누수되는’) 관계의 파열음을 누적시키며 끝까지 미스터리를 야기한다.

인물들은 편하게 대화하는 듯하지만 매번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가까운 친구 사이에서 나누는 메시지에도 의중이 애매한 뉘앙스가 오가고, 오랜만에 식구들과 시간을 보낼 때조차 개인이 발휘해야 할 의무가 마치 감시하듯 맴돈다. 보기는 봤지만 정확히 본 것이 아니라 확정할 수 없는 사태가 연속된다. <괴인>은 인물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 ‘모호한 확실함(혹은 그 역)’을 섣부르게 ‘묘사’하는 게 아니라 차라리 ‘일별’하기 때문에 성공적이다(그 점에서 하나가 기홍에게 구태여 다시 돌아와 자신이 자동차 지붕을 망가뜨린 “그 사람”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이 사건의 유일한 증거로 기능한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한편 화면상에서 시각적으로 거의 와해된 조건을 설정함으로써 도리어 관객에게 엿보기의 감각을 완전히 이양해버리는 사례도 있다. <물안에서>(홍상수, 2023)의 개봉 당시, 언론시사회에서조차 이 영화의 화질을 영사 사고로 착각해 관객이 문제를 제기한 해프닝도 있었고, 시종 흐릿한 화면을 두고 제목 그대로 수중의 느낌을 표현하려 한 것이냐는 농담 섞인 평이 돌기도 했다. 말하자면 참을 수 없는 화면의 흐릿함. (초반부 약간을 제외하고는) 끝까지 초점 없는 화면으로 일관하는 이 영화를 관습적인 언어로 규명하기에는 아직도 어려움이 따른다. 특히 영화를 보고 말하는 작업에서 거의 불가피한, 장면 내부에 배치된 시각적 요소들의 기술(記述)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난감할 수밖에 없다.
 
   
<물안에서>(홍상수, 2023) 중

그러나 <물안에서>가 형상을 분명히 제시하지는 않는다고 영화를 지탱하는 모종의 조건들을 아예 유폐한 것 또한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제시된 것을 우리는 어떻게 본 걸까. 그냥 단순히 흐린 것을 깨끗하게 보는 드문 경험에 참여한 것일까(아니면 그 반대인 걸까)? 특기할 만한 지점 중 하나는 영화의 서사다. 홍상수 영화의 이야기를 쉽사리 정돈하는 일은 몹시 어려운데, <물안에서>는 시공간을 불확실하게 맞물려놓거나 복수의 구조를 경합시키는 시도가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서사를 파악하기가 어렵지는 않다. 한편 우리는 인물들의 얼굴과 표정, 자세와 제스처 등 비언어적 표현들을 소상하게 살필 수는 없는데, 대신에 우리는 이들의 (이마저도 종종 ‘불성실’하게 처리된) 목소리, 그리하여 서술되는 이야기를 건네받게 된다. 정면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와중에 이들의 말은 계속되고, 심지어 관객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시시콜콜 얘기하는 그들은 우리에게 시각적 경험의 불확실성을 절감하게 만든다. 관객은 이 갑갑한 화면을 정면으로 (못) 보면서 이미지의 제한된 용법이 단일한 서사 안에서 문법을 형성해나가는 과정에 함께 놓인다.

<물안에서>는 극영화에서 서사를 전달하기 위한 형식으로써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명쾌한) ‘화면’이 역할을 거부할 때, 이 불가결하다고 간주되는 요소의 찌그러진 상태 와중에도 기묘하게 지속되는 영화의 방향을 새롭게 일깨운다. 우리가 보는 것은 밝은가, 어두운가. 또렷한가, 흐릿한가. 움직이는가, 정지해 있는가. 짓물러진 화면은 이 판단을 진정 불가능하게 하는가? 그렇다면 영화는 성립하지 않는 걸까? 열화된 화면을 보는 내내 우리가 (물리적으로 정확히 볼 수 없다는 의미에서) 엿보고 있다는 감각이 피어오르는 한편, (못) 보기의 문제가 역설적으로 정말 본다는 것의 감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물안에서>는 듣기의 작업과도 연동하여 주장한다. 예컨대 남희가 새벽에 들었다던 “정신 차려!”라는 말은 어디서 들렸으며 누가 말했는지 전혀 밝혀지지 않는다. 이 잠수된 것 같은 화면에서 그 존재가 해소되지 않은 청각적 정보가 대사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다. <도망친 여자>(홍상수, 2019)에서 대사로는 대두되지만 그 모습은 제시되지 않는 ‘3층’이나 ‘위층’, ‘지하실’의 존재(부재)가 떠오르기도 한다.

종장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뒷모습을 보게 된다. 서론에 언급했던 회화와는 전혀 다른 시대와 맥락에 놓여 있음에도 몹시 완결된 인상을 전달하는 뒷모습이다. 역시나 그를 돌려세우고픈 마음이 일지만, 흐르는 물소리가 화면을 메울 때 우리는 이곳이 영화의 종착지임을 직감하게 된다. 그가 점점 멀어지고 우리는 여전히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일단 엿보지 않으면 보는 것은 시작도 할 수 없다.
 
 

***
주1. 
다음의 논문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김주원, 「롤랑 바르트의 음악비평」, 『불어불문학연구』, 제136집, 2023, 144쪽.

주2.
롤랑 바르트, 변광배 옮김,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민음사, 2021), 전자책 377쪽.

주3. 
스탠리 카벨, 이두희·박진희 옮김, 『눈에 비치는 세계』(이모션북스, 2014), 53쪽



이보라(영화평론가) l “나를 위해 연주된 것”을 찾겠다는 마음으로 일단은 쓴다.
씨네21 영화평론상,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비평공모 당선.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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