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식탁, 어떤 믿음 두 사람을 위한 식탁, 2023

by.김영글(미술작가) 2024-01-29조회 1,751

오래전 인간은 손으로 사냥을 하고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 도구를 찾기 전까지 오랜 시간 그랬다. 한 쌍의 포크와 나이프가 입과 손 사이를 벌려 그 안에 식탁이라는 문화의 공간을 형성하기까지 기나긴 세월이 흘렀다. 폭력과 야만을 본질로 하는 인간은 그렇게 천천히 문명화의 과정을 밟았다. 미술가 안규철은 「손, 인간의 조건」이라는 글에서 한 인간의 생애 역시 인류의 문명화 과정과 닮아있다고 설명한다. 인간이 젖을 떼고 처음 배우는 숟가락질은 사람 구실을 하며 살아가기 위한 첫 규범이 된다. 숟가락질은 학교에 들어간 후 글씨를 쓰고 셈을 하는 방법과 때리거나 훔쳐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학습하는 것으로 변주된다. 그 지난한 훈련의 과정을 거쳐 인간은 손과 입 사이, 몸과 세상 사이의 “여백”을 얻는 것이다. 

여백은 당연히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양육자에게 아이란 무엇보다도 밀착해 먹여 키워야 할 과제로서 존재하는 대상이다. 아이는 아이대로 난항을 겪는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는 존재만으로 자연스레 양분을 공급받다가 모체로부터 떨어져나온 뒤부터 자력으로 생명을 유지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밥을 먹는 행위는 독립된 주체로 홀로 선다는 것의 가장 원초적인 은유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은 이 행위를 매개 삼아 모녀라는 관계의 가깝고도 먼 거리를 조망하는 영화다.
 

십여 년 전, 열다섯 살 채영은 섭식장애 진단을 받고 병동에 입원했다. 치료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거식증이 지나가자 폭식증이 찾아왔다. 엄마 상옥은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병의 근원을 이해하고자 씨름하는 시간을 보냈다. 김보람 감독은 원래 섭식장애에 관심을 가지고 다수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리서치를 진행하다, 오랜 시간 섭식장애를 앓은 당사자인 채영을 만나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이어트와 외모 강박이라는 익숙한 문법으로 이 질환을 읽으려는 시도를 일찌감치 거둔다. 대신에 채영 스스로 말하는 몸의 역사와 마음의 변화에 집중하며, 딸 채영과 엄마 상옥 두 사람의 관계를 다루기로 한다. 그리하여 영화는 섭식장애라는 표면적 징후 대신에, 삶의 밑바닥에서 오랜 시간 축적되어온 내면의 문제, 즉 가족이라는 복잡한 실타래를 따라가기 시작한다. 
 
채영과 상옥은 서로의 상처를 드러내는 데서 출발한다. 오랜 시간 서로 말하지 않고 묵혀두었던 감정들이 카메라 앞에서 우연히, 어쩌면 카메라 덕분에 비로소, 조금씩 꺼내어진다. 섭식장애를 처음 앓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채영은 당시에 두려움이나 고통보다는 온몸으로 확신을 느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음식을 거부하거나 폭식을 하거나 구토를 하는 행위를 가장 적극적이고 자기 주도적인 행위로 여겼다는 것이다. 상옥은 놀라움을 숨기지 않는다. “각본을 수백 가지는 써봤는데 지금 네가 말한 각본은 참 뜻밖이네.”
 

젊은 시절 사회운동에 투신했던 상옥은 1990년 이후 더 이상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좌절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지역으로 이주해 대안학교의 사감으로 일하며 아이들을 돌보는 데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았다. 학교 특성상 그곳은 채영을 학교 구성원들과 함께 키우는 공동양육의 공간이기도 했다. 이 영화를 관람할 무렵 나는 우연찮게도 비비언 고닉이 쓴 『사나운 애착』을 읽고 있었다. 평생에 걸친 어머니와의 애증을 다룬 이 자전적 에세이는 뉴욕 브롱크스가에 위치한 가난한 이민자들의 다세대주택을 배경으로 한다. 저자가 일평생 보고 자란 것은 엄마를 포함한 이웃 여성들의 삶이었다. 고닉은 타인들과 밀착된 그 어린 시절이, 그리고 벗어나고자 했으나 어느새 거울이 되어버린 엄마의 이미지가 자신의 인격을 형성하는 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날카롭게 분석한다. 

채영 또한 남달랐던 유년 시절의 환경을 의미심장하게 복기한다. 채영은 주변의 인물들을 통해서, 특히 그러한 공동체의 삶으로 자신을 이끈 엄마 상옥을 통해서 일찍이 세상을 보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법을 배우기에는 너무나 불안정한 환경이었다. 상옥은 주변을 돌보느라, 여성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에 집중하느라, 어린 채영의 곁에 있어주지 못할 때가 잦았다. 세월이 흘러 카메라 앞에 선 채영은, 엄마가 상정한 기준에 결코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막연한 불안이 자신을 오래 괴롭혔음을 털어놓는다. 당신의 삶이 실패였음을 인정하길 원했었다는 날선 말을 뱉은 후였다.
 

섭식장애를 앓는 환자는 여성이 남성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고 한다. 성별화된 질병이라는 점에서 이 현상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것이다. 『명랑한 은둔자』를 쓴 캐럴라인 냅 역시 자신의 삶을 추락시킨 알코올 중독과 섭식장애를 어머니와의 관계에 연결 지어 이야기한 바 있다. 이러한 서사와 종종 조우하는 것이 아마도 완전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 여성의 삶에서 매 순간의 선택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자기 선언의 표명이자 실패이기 때문이다. 채영과 상옥의 회고는 세대를 넘어 할머니의 시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돌이켜보면 몸과 마음을 억압당하는 시대를 살았던 채영의 할머니도 먹은 것을 스스로 게워내곤 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자기 몸 하나밖에 없어서였다. 환경과 시대는 달라도 세상과 불화하는 여성이 자신의 육체라는 최전선 위에서 부대끼고 고전하는 과정은 서로 닮아있다. 

괴로운 기억도 날선 말들도 공동의 식탁 위에 올려지고 난 뒤에는 조금쯤 무게가 가벼워진다. 성인이 된 채영은 일을 하러 호주로 떠나고 상옥은 딸의 진정한 독립을 응원한다. 흥미롭게도 채영이 선택한 일은 타인을 위한 식사를 만들고 식탁을 준비하는 일이다. 음식을 만드는 일은 누군가 낯선 이를 먹이는 일이고, 다른 존재가 무사히 일상을 유지하도록 돕는 일이다. 채영은 자신에게 요리란 조금 더 괜찮은 사람, 조금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준비운동’이라고 말한다. 그 일 앞에서 도전과 실패를 감행하며 삶을 다시금 써 내려가는 채영의 모습은, 회복의 과정이란 결코 자기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실감케 한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조용히 듣는 귀의 역할을 고수하기에 함부로 진단을 내리지도, 첨언하거나 평가하지도 않는 미덕을 지녔다. 그러나 고민과 결단의 순간들을 짐작하게 하는 편집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족사를 다루는 인물 다큐멘터리가 흔히 취하는 전략에 비추자면 이 이야기는 사적인 정보를 무척 적게 말한다. 다큐멘터리가 결국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지로 시선을 드러내는 일이라면, 그러한 선택과 집중이 이 영화를 여성들의 내면세계에 관한 보다 섬세하고 집요한 연구에 가깝게 만드는 것 같다. 

재밌는 건 영화를 보는 내내 화면 어딘가 투명한 물음표가 계속 따라다닌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감독의 전작인 <피의 연대기>와는 무척이나 다른 형식과 화법을 가졌는데도 그 인상만은 두 작품이 궤를 같이하는 느낌이다. 그건 영화가 지닌 시선이 정제되고 흐트러짐 없는 ‘서술자’의 시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물을 대하는 카메라는 조용하지만 존재감이 꽤 있다. 대상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때로는 갈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도 끈질기게 이야기를 듣는다. 신중한 호기심이라고 할까. 그 특유의 시선 때문에, 카메라가 관찰과 기록의 도구가 아니라 함께 질문하며 답을 구하는 ‘동행자’의 역할로 여겨지는 것이다.
 

사실 이 카메라의 미묘한 존재감은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중요한 요소로 배치된다. 촬영 초반 일대일 상담에 응한 채영은 아직 카메라의 존재가 어색하고 낯설다. 지금 감정이 어떠냐고 인터뷰어가 거듭 묻자 채영의 얼굴에는 노골적인 불편함이 드러난다. 이 시퀀스는 의도했든 아니든 인물 다큐멘터리가 지닌 근본적인 고난, 상처를 지닌 타인의 삶에 깊숙이 개입해야 하고 환부를 들추어야만 하는 어려움을 환기시킨다. 그러나 김보람 감독의 영화에는 그 어려움을 딛고 개진해 내는 힘 또한 있다. 영화를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 사이에 좋은 질문이 있는 한 카메라도 있고, 이 카메라가 언젠가는 양쪽 모두에게 답을 줄 것이라는, 어떤 믿음 비슷한 것이 느껴진다. 

영화가 완성되고 공개된 이후, 채영은 GV에서 영화를 통해 깨달은 사실 하나를 이야기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상옥의 눈빛이 그렇게 애틋한 줄 처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평생을 보아왔지만 스크린을 통해 새롭게 자각하게 된 엄마의 시선이다. 딸은 그 시선을 경유해 자신의 얼굴 또한 새롭게 받아들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중간에는 인서트컷으로 수영장 물속에 잠겨있는 채영의 얼굴이 잠시 등장한다. 이 이미지는 그가 최근 쓴 자서전 『이것도 제 삶입니다』의 표지로 사용된 사진이기도 하다. 눈을 감은 채영의 얼굴이 사뭇 편안해 보인다. 모녀 관계란 엄마의 뱃속에서 하나였던 두 몸이 별개의 개체로 분리된 직후부터 시작되는 분투의 여정이다. 채영은 이제 스스로의 삶을 설명하는 언어를 가짐으로써, 새롭게 자각한 얼굴을 가짐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서 자연스럽게 숨쉬는 법을 배우고 있는 듯하다.
 

영화의 엔딩은 채영과 상옥이 제사를 지내는 장면이다. 간단하게 차린 제사상 앞에 앉은 두 사람은 술잔을 들어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명복을 빈 뒤 상을 맞들고는 거실로 옮긴다. 죽은 부모를 위한 제사상은 살아있는 두 모녀의 아침식사를 위한 식탁으로 역할이 바뀐다. 이 식탁을 내리사랑의 은유로 읽어야 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대신에 식탁이, 어쩌면 둘 사이의 공간이, 그렇게 언제든 임시적인 거처일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다. 다큐멘터리에서 카메라가 그러하듯이, 식탁은 두 타인의 사이에 잠시 어떤 공간을 마련해준다. 너무 크고 거창하지만 않다면, 둘러앉은 이들이 이렇게도 차려보고 저렇게도 차려볼 여지가 있다면, 식탁은 예절과 격식의 자리만이 아니라 적당한 환대와 우정의 자리도 될 수가 있다.

네모난 식탁을 사이에 두고 채영은 상옥과의 관계에 대해 잠정적 결론을 내려본다. “평행성도 좋지, 나란히 가는 거니까.” 평행선이 그려지는 곳에서 두 존재는 억지로 겹치거나 지나치게 멀어지지 않을 것이다. 적당한 거리에 서로를 두고서 오랫동안 같은 방향을 향해 걸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비비언 고닉 식으로 말하자면 “내가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날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 믿음을 지탱해줄 튼튼하고 평평한 식탁 같은 것. 어떤 가족에게 필요한 건 대단한 사랑이나 헌신이 아니라, 바로 그런 중간지대의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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