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을 마주하며 생각한 것: 진실, 매 순간 새로운 얼굴로 피어나는 만남에 대해 고레에다 히로카즈, 2023

by.송경원(씨네21 기자) 2024-01-26조회 2,806

영화는 인연이다. 영화의 경계가 얇아지고 구분이 모호해지는 요즘 부쩍 그런 생각에 자주 잠긴다. 어떤 영화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매번 다른 얼굴로 찾아온다. 2023년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이 그랬다. 나는 이 영화를 칸영화제에서 한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시 한번, 국내 개봉 뒤 마지막으로 한번, 총 세 번에 걸쳐 극장에서 만났다. 공교롭게 <괴물>은 하나의 사건을 세 가지 관점으로 재구성하는 이야기다. 안팎으로 묘한 인연과 기시감에 사로 잡힌다. 하나의 사실이 어떤 경로를 경유하여 나에게 당도하는가.

영화는 결과를 산출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에 이르는 과정을 구태여 복기하는, 비유하자면 지나간 길의 얼룩을 다시 더듬어 본다. 같은 사실을 보고도 다르게 기억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괴물>은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영화였지만 여러 번 보면서 빠져들었던 건 나에게 당도하는 사실들의 미묘한 차이들을 비교하는 즐거움 때문이었다. 이미 수 많은 평자들의 빼어난 분석들이 다 완료된 지금, 이 영화를 새삼 되돌아보며 딱 맞춰지지 않았던 부분들에 대해 복기해보고자 한다. 이것은 분석이라기 보다는 인상의 차이를 비교하는 쪽에 가깝다. 다시 말해 영화 안팎의 (개인적인) 경험과 불순물들이 함께 섞여 들어간 기억의 기록이다.
 

세 번의 만남, 두 가지 감상, 하나의 얼룩
칸에서 처음 마주했을 때 <괴물>은 대수롭지 않은 영화였다. 전작 <브로커>에 대한 실망감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였는데, 경쟁작 중 제일 먼저 상영한다는 걸 알고 난 뒤 그저 그런 범작일 거라 판단했다. 대부분 초반에 상영되는 경쟁작들은 신인의 작품이나 수상권에서 먼 경우가 있는지라 멋대로 판단하고 영화의 최초 시사를 보지 않았다. 함께 간 다른 기자가 보고 온 뒤 영화에 대한 흥분과 열기를 전해주었고 뒤늦게 표를 구해 극장에 갔다. <괴물>은 나의 무지와 편견에서 비롯된 오해를 여지없이 부수어 주었고 뒤늦은 부끄러움이 찾아왔다. 여기까진 평범한 반성의 이야기.

정작 의아했던 건 영화에 대한 기자들의 평가가 대체로 좋지 않았다는 점이다. 상당 수 평자들이 ‘고레에다의 새로운 드라마와 안정된 연출’정도로 박한 평가를 내렸다. 박한 평가의 가장 큰 이유는 이미 많이 본 소재와 구성이라는 점이었다. 형식적으로는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의 영향 아래 놓인 영화라는 단편적인 인상이 지배적이었고, 내용적으로는 작년에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던 루카스 돈트 감독의 <클로즈>와 종종 비교되기도 했다. 요약하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는 흥미롭긴 하지만 (그가 늘 그랬듯이) 무난하고 깔끔한 결과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평이었다. 영화를 막 보고 나온 뒤 심장이 두근거리던 입장에선 얼핏 이해가 가면서도 납득은 되지 않는 반응이었다.

올해 칸영화제의 수상 결과는 대체로 고개를 끄덕일만한 것이었는데, 무엇보다 <괴물>의 각본상을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이 영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연출’보다는 사카모토 유지의 ‘이야기’가 도드라진다. 사카모토 유지는 이 영화가 본인의 경험에서 출발한 이야기라고 여러 번 밝혔다. “차를 타고 집에 가는 길에 겪었던 일이다. 신호가 빨간불이어서 멈췄는데 내 앞에 트럭이 한대 있었다. 그런데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뀌었는데도 한참을 꼼짝하지 않는 거다. 이상해서 경적을 몇번 울렸다. 잠시 뒤 트럭이 움직이고 나서야 휠체어에 탄 사람이 건널목을 건너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트럭은 그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던 것뿐이었다. 그때 사정도 모르고 경적을 누른 게 내내 마음에 남았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내가 알지 못한 채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었다가 깨닫게 되는 이야기를 쓰겠다고 결심했다.”(씨네21 1433호, 괴물> 각본가 사카모토 유지 인터뷰 ‘어쩌면 진실은 이야기 바깥에’ 중) 범상하지만 그래서 더 소중한 통찰. 영화를 향한 상찬도 딱 그정도에 그쳤던 것 같다.
 

찜찜한 의문을 뒤로 한 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시 만난 영화는 전혀 다른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개인적인 인상으로 작년 부산에서 가장 뜨거웠던 영화 중 하나는 <괴물>이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아역 배우들이 내한한 게 열기를 달구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미나토와 요리 역을 맡은 쿠로카와 소야, 히이라기 히나타 배우는 의도를 초과하는 존재감을 스크린에 새겨 넣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놀라운 마법(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재능)은 어린 아이들을 카메라에 담는 방식에 있다. 그의 카메라는 사실의 일부분을 무난한 방식으로 담아내는 다큐멘터리의 시선을 따르지만 그가 포착하는 대상은 현실에 없을 정도로 눈부시게 빛난다. 단지 예쁘고 잘생겼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시절에만 허락된 반짝임을 찾아내고 원석 그 자체의 생동감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방식은 재능과 감각이라는 헐렁하고 추상적인 단어 이외로는 표현할 길이 없다. 마침 올해 부산에 <아무도 모른다>의 야기라 유야 배우가 <간니발> 홍보 차 방문해 있었기 때문에 묘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올해 부산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많은 설명을 쏟아냈다. 몇몇 멘트들은 배우들과 함께 하는 자리이기에 더욱 의미 있는 발언들도 있었다. 다시 본 <괴물>이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의도를 초과하는 장면들이었다. 소년들이 사실 어떤 관계였고 어떤 마음으로 서로를 마주했는지, 이야기의 전모를 알고 난 뒤 다시 보는 어른들의 시점은 어딘가 절박하고 애처롭다. 진실을 오해했기 때문이 아니다. 애초에 여기에 진실 따윈 없다. 싱글맘 사오리(안도 사쿠라)와 담임 선생 호리(나가야마 에이타)의 시점에서 재구성된 이야기 역시 각각의 진실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진실찾기의 추리에 매달리는 대신 매 순간 장면에 맺히는 시점의 가능성에 공을 들인다. 한 마디로 모두 진심으로 절박하다.
 

<괴물>의 다중시점은 카메라의 본질적인 한계를 증명한다. 진실은 없다. 우리가 목격하는 건 사실의 조각일 뿐이다. 정확히 진실이란 이야기 바깥 혹은 사건과 사건 사이에 깃드는 가능성에 가깝다. 때문에 눈앞에 보이는 사실이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인정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괴물>은 그 소년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이야기의 전체 그림이 무엇인지를 추리하는 이야기의 구성에 홀리지 않고 각각의 인물들이 순간에 집중한다. 어떤 이야기인지 전체 꼴을 알고 있음에도, 아니 알고 있기에 각 인물들이 느꼈을 절박한 감정들이 더욱 진심으로 다가온다.

진창에서 미나토를 찾아서 함께 걸어오는 장면에서 사오리, 아니 안도 사쿠라의 몸짓은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 전체를 초과한다. 미나토와 사오리가 나란히 선 뒤 걷는 이 장면은 지금 포착되고 있는 것에 온 힘을 쏟는다. 매 순간의 진실들을 포착하는 시선. 그렇기에 우리는 역설적으로 시선의 한계를 인지한다. 부분을 전체로 호도하지 않을 수 있는 태도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 순간 <괴물>은 사카모토 유지의 이야기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시선으로 무게추를 이동한다. 아니 애초에 영화는 그 자리에 헐거운 장면들을 느슨하게 꽂아둔 채 있을 뿐, 이동한 건 내 마음이다. 두 번째 본 <괴물>은 결국 어떤 자리에서든 사람에 초점을 맞추는 고레에다의 시선의 영화였다.
 

나를 되돌아보고 너를 상상하는 시간
마지막으로 2023년 끝자락, 겨울 한복판에서 <괴물>을 다시 본다. 다시 말하지만 정교한 이야기나 안정감 있는 구성, 빼어난 연기는 이미 설계도 수준으로 자세히 해설되어 있다. 이 글은 미처 닦아내지 못한, 어쩌면 영영 닦이지 않을 내 마음 속 얼룩에 대한 묘사다. 칸에서 영화를 보자마자 동료와 의견이 갈린 지점은 엔딩에 대한 해석이었다. 동료는 마지막 장면이 소년들의 완벽한 순간을 그리는 플래시백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나는 소년들의 죽음 이후를 보여준다고 받아들였다. 폭우 이후 미나토와 요리는 함께 세상을 떠났고, 우리가 보고 있는 건 두 사람만의 낙원으로 떠난 모습이다. 의도 했건, 무지했던 현실은 두 소년을 여러 방식으로 밀어냈고 두 사람만의 아지트를 찾아낸 소년들의 시간은 거기서 멈췄다,고 생각했다.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던 날 엄마 사오리와 호리 선생이 아지트를 발견하는 장면과 이어지는 비가 갠 장면의 연결 방식, 날이 갠 바깥으로 뛰어나가는 소년들을 잡아주는 희뿌연 장면의 톤까지 명백히 사후세계를 묘사한다고 받아들였다.

왜 소년들을 죽여야만 했는지를 묻는다면 다양한 답변도 가능할 것이다. 왜 끝을 비극으로 마무리했어야만 했는지를 묻는다고 해도 설명할 논리들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를 세 번째 다시 본 날, 그것이 죽음과 이별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이 이야기가 누가 괴물인지 찾거나 책임을 묻기 위한 진실 찾기 게임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까지 기억에 남는 건 변해가는 아들을 보는 어머니의 절박한 얼굴, 상황이 왜 이렇게 됐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선생님의 황망한 얼굴, 세상 해맑게 서로를 마주보는 소년들의 화사한 얼굴이다. 그리고 마치 이야기의 벽을 깨는 듯한, 세상 바깥에서 들려오는 듯한 트럼펫 소리와 교장 선생님의 헤아리기 힘든 얼굴. 이것들을 어떤 순서로 어떻게 연결할지는 결국 스크린 앞에 앉은 내 몫이다. 문득 아직도 이야기의 빵부스러기를 찾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세 번을 마주한 뒤에야 손을 털고 일어나 스스로를 돌아본다. 영화가 진실의 씨앗을 심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다. 1년에 걸친 만남 끝에 어느덧 거울이 된 영화 <괴물>을 마주하며 이야기 바깥, 프레임 바깥, 나의 바깥을 그려본다. 2024년 <괴물>을 되돌아보며 너를 상상하는 힘이 얼마나 귀한지 새삼 실감한다. 비가 갠 뒤 뽀샤시하고 포근해 보이는 소년들의 낙원, 그곳에서의 힘찬 뜀박질을 뒤로 한채 극장 바깥으로 나선다. 아직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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