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가 정성일 평론가를 인터뷰 하다

by.유성관(한국영상자료원 정책기획팀) 2016-04-28조회 8,832
정성일과 인터뷰어

#1. 
1990년대에 영화의 매혹에 빠져들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정성일이라는 평론가를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내가 그를 인지하게 된 것은 잡지 「로드쇼」를 통해서였다. 잡지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편집자들의 짧은 글이 사진과 함께 실렸는데, 늘 사진 속에서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편집 후기에서는 영화보다는 음악 이야기를 더 많이 했던 거로 기억한다. 그 남자가 정성일이었다. 90년대 초, 내가 다니던 근처의 대학에서 정성일 평론가가 강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들과 몰려갔다. 강당에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없었고, 객석의 반응도 그닥 열광적이지 않았다. 강연의 마지막 즈음 U2의 어떤 뮤직비디오를 보여주며 독특한 영상기법을 설명하는 대목에서조차 반응이 없었다. 그때 정성일 평론가는 치욕적인 한마디를 던졌다. 여기 오신 분들은 U2보다 김수희를 들으시나 봐요.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은 학생들은 그제야 쑥스럽게들 웃었다. 하지만 나에게 그날 밤은,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1985)에 나왔던 롱테이크, 신성일이 누웠다가 일어나며 프레임에서 사라지다 들어오길 반복하는 그 장면을 충격적으로 목격한 날이기도 했다. 그 강연 이후, 몇몇 학생들은 정성일 평론가와의 뒤풀이 자리에 갔다고들 했는데 소심했던 난 그냥 기숙사로 돌아갔다. 그 후 ‘정은임의 영화음악실’이 있었고 「키노」가 있었다. 복사에 복사를 거듭해 화질이 엉망인 VHS를 보며 영화에 대한 갈증을 채우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에 2만 5천 명의 관객이 들고, 영화 전문 잡지가 계속 쏟아져 나오던 그때로 시간은 마냥 흘러갔다. 

#2.
KMDb 영화글의 편집자로서, ‘한국영화걸작선’에 정성일 평론가의 글을 받기 위해 수년간 연락했지만, 늘 불발되었다. 그는 거절하며 언젠가 한 감독의 작품에 대한 글 연재를 하고 싶다는 답을 해온 적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정성일 평론가는 임권택 감독의 전작 리뷰를 KMDb에서 하고 싶다는 제안을 해왔다. 그 ‘한 감독’이 임권택 감독이라는 것은 놀랍지 않았지만, 전작 리뷰 옵션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때부터 자료원 안에는 담당자들이 꾸려졌고, 정성일 평론가와 몇 번의 만남을 가지며 여러 가지 협의 및 사전 작업을 끝냈다. 현존하는 임권택 감독 영화의 리스트가 만들어졌고, 그 영화를 어떻게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도 강구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2012년 11월 5일, ‘서문’을 시작으로 이 연재는 시작되었다. 당시 칼럼 오픈 이벤트도 있었는데, 우리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 연재가 모두 끝나고 거나한 쫑파티를 하자, 그리고 이벤트에 당첨된 사람들을 그때도 초청하자는 이야기를 했었다. 당시에는 대략 4년 정도 후면 그 파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은 우리의 야심보다 빨랐다. 그 시간 속에서 처음 칼럼 제목이었던 ‘임권택x101’은 <화장>(2014)의 제작으로 ‘임권택x102’로 바뀌었고, 미보유 영화가 새로 발굴되어 써야 할 글이 늘어나기도 했다. 여러 인터뷰가 비평 글 사이사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바라보는 임권택 감독에 대한 이야기들이 기술되었다. 그러면서 작은 임권택의 우주는 스스로 생명을 가진 듯 점점 넓어졌다. 정성일 평론가는 매번 거대한 원고를 넘겼다. 도저히 한 호흡으로 읽히지 않아 퇴근길 전철 안에서 나머지 원고를 읽으며 때로는 탄식하고, 때로는 갸우뚱 하며, 때로는 다시 읽어야겠다며 가방 안에 원고를 주섬주섬 다시 넣었던 그 원고들을 편집하고 참조할 이미지를 준비해 온라인에 올렸다. 그리고 다음에 쓰일 영화를 인코딩했다. 그렇게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프로젝트가 어느덧 절반에 다다르고 있음을 문득 깨달았다.

이 인터뷰는 편집자인 내가 정성일 평론가에게 제안했다. 인터뷰를 통해 독자들에게 이 프로젝트를 환기시키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여전히 주요한 이유다. 독자는 인터뷰를 통해 절반이 지나간 이 프로젝트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첫 번째 장면 ‘#1’을 지나온 어떤 사람이 두 번째 장면 ‘#2’을 거치며 그저 정성일 평론가와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가, 실은 이 인터뷰 여기저기에 흩어져있음을 알아챌 독자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인터뷰이에게 말하지 않았던, 이 인터뷰의 두 번째 이유가 된다.
유성관_ 2012년 11월 5일, KMDb에서 ‘임권택x102; 정성일, 임권택을 새로 쓰다’ 칼럼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모두 43개의 글을 연재했습니다. 그리고 그 글들은 34편의 임권택 감독 영화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지금은 35번째 영화 <그 여자를 쫓아라>가 업데이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칼럼을 시작했던 2012년 기준으로 현존하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모두 76편이었습니다만 지금은 2015년 연합영화공사 한규호 대표의 자료를 수집하면서 <전장과 여교사> 한 편이 더 늘어나 77편이 되었습니다. 연재를 시작하신 지 3년 5개월의 시간이 흐른 셈인데요, 이 프로젝트가 끝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그 정도의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습니다. 대략 대장정의 절반에 도달한 지금, 필자로서 간단한 소감을 듣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성일_ 무엇보다 먼저, 이건 내가 꼭 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을 가졌던 프로젝트이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하는 상충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맨 처음에 내가 제안을 했을 때도, 솔직히 이야기를 하면, 두려운 마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유성관_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다는 그 자체의 두려움이었던 건가요?
 
정성일_ 그렇습니다. 시작을 한다면 끝을 봐야 한다는 것인데, 중간에 힘들다고 중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두려움이 있었죠. 일단 시작하면 나로선 많은 것들을 중단하지 않으면 계속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이 프로젝트는 영상자료원의 도움이 없이는 진행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한쪽 손으로는 (이미 진행 한) 임권택 감독의 전작 인터뷰를, 또 다른 손으로는 임권택 감독의 전작 평론을 갖고 싶다는 건, 한 사람의 비평가로서 떨치기 힘든 욕심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어떤 비평가도 한 사람에 대한 전작 비평을 쓴 적이 없었죠. 하지만 저는 이 일을 누군가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이런 비평 프로젝트는, 존경해마지않는 하스미 시게히코 평론가조차도 하지 못했는데, 그도 오즈의 전작 비평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그걸 한국에서 해보고 싶었던 거였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내 배움을 검토하는 자리도 되기 때문에 내 자신에게도 매우 간절하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겁니다. 사실 맨 처음 생각으로는 3년 4개월이 지난 이 시기 즈음에는 연재가 거의 다 끝날 것으로 생각을 했죠. 하지만 진행하면서 이게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심지어는 그 과정을 통과하면서 어떤 영화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도 했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그걸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마치 하나의 생명인 것처럼, 임권택 감독의 영화 안에서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었고 이런 활동이 저로서는 이 글을 쓰는 가장 큰 힘이 된 것이죠. 그런 과정 속에서 사실상 앞으로 쓰일 글에서 나의 비평의 내면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흥미진진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내 견해에 대해 고스란히 카피하는 과정이라면 지루했겠죠. 하지만 과정 안에서 비평의 내면이 새롭게 활동하는 힘을 느낄 때 나로선 이 글을 쓰는, 임권택 감독과의 인터뷰는 배움을 청하는 것이었다면, 이것은 나 자신으로부터 배움을 청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유성관_ 그렇다면 이 질문이 꼭 나올 수밖에 없겠습니다. 왜 임권택 감독인가요?

정성일_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가장 단순한 의미는... 이렇게 생각해보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과정을 통해 영화를 처음 사랑하고, 반복해서 보면서 배움을 청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것들을 이해하고, 생각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영화를 보며 얻는 배움은 잡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에 관련된 책, 영화와 관련이 없더라도 그 책을 보조하는 철학, 사회학, 인문학, 역사 배경 등의 자료를 찾게 됩니다. 많은 비평가들은 영화를 보다가 책에 가까이 가는 순간, 이론과 불장난을 벌이게 되어있습니다. (그 이론과의 사투가) 영화에 대한 지식을 구하는 것처럼 전도되기 시작하고, 그다음부터는 이론들이 이 비평가의 영화에 대한 견해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이건 굉장히 나쁜 상황이란 것을 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에 알았습니다. 내가 너무 감사한 것은, 내 나이 20대 중반 시절, 그때가 80년대였다는 것을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때는 구조주의, 기호학, 정신분석학, 마르크시즘 등이 거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지만, 이것에 대해 나의 선배 중에서 그것들을 가르쳐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 세대들은 고스란히 그걸 책에서 배운 것이죠.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화의 모든 것들을 깨달은 것 같은 이론적 도구를 가지고 영화를 난자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런 느낌을 받게 됩니다. 수술은 성공했는데 환자가 죽었다는 것. 매번 그런 어떤 허망한 느낌이 들었었을 때에, 정말 운 좋게, 저로서는 세월이 훨씬 지난 후에야 운이 좋았음을 깨달은 거지만, 임권택이라는 감독과 인터뷰를 하게 된 것입니다. 1987년. 
 
임권택이라는, 오로지 영화를 만들어 온 경험만으로 영화에 대한 배움을 청하고 자기를 끊임없이 새롭게 혁신시켜나간 감독. 하지만 이것에 대해 나를 만날 때까지 그 누구와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죠. 이 어린 유치하기 짝이 없었던 애를 만날 때까지 말이죠. 아무도 그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고, 본인도 아무에게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던 그는 원시림 상태였습니다.(웃음) 만약에 그 당시 임권택 감독이 수많은 인터뷰로 굉장히 숙련된 상태였다면 난 많은 도움을 얻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겁니다. 나는 원시림을 완전히 헤쳐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 과정 속에서 영화라는 것이 말하자면, 너무나 간단한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있었던 것, 즉, 창작이라는 과정의 예술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을 책으로는 틀림없이 읽었는데, 무슨 말인지 몰랐던 것들. 임권택 감독이 영화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 속에서 그 자신의 방법론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나에게 영화와 이론이 뒤집혔던, 전도되었던 관계가 제자리를 찾게 된 겁니다. 나는 한 사람의 비평가로서 임권택 감독님을 만나기 전과 후가 있다고 해도 괜찮아요. 그 후에 완전히 다른 견해를 갖게 되었으니까요. 그러고 나서 영화감독을 만나는 것이 나의 임무가 되었던 것입니다. 임권택 감독을 만나 후, 왕가위, ‘키노’를 만들면서 만났던 홍상수와 김기덕, 그리고 부산에서 만났던 지아장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전주영화제를 하면서 처음 사람으로 만났던 후 샤오시엔, 그다음에 만나게 되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그리고 왕 빙까지. 이 과정은 전적으로 임권택이라는 배움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좀 이상한 말이지만, 왕 빙 다큐멘터리, <천당과 밤의 안개>(2015)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임권택 감독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임권택이라는 한 영화감독의 세계로 들어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이 개인적인 이유라면, 또 하나의 공적인 이유가 있는데, 이 글을 써나가면서 한편으로 내 글의 목표 중 하나는, 1962년 후의 한국영화사, 혹은 1962년 이후의 한국 근대사를 다시 써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 글의 숨은 나의 욕심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연대기적으로 쓰지 않는다, 가 처음부터 원칙이었죠. 작년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 갔을 때 장 프랑소와 로제가 똑같이 지적해줘서 너무 기뻤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권택 전작 회고전을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이 사람이 한국영화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이만희라는 위대한 감독의 이름을 알고 있고, 유현목, 신상옥, 김기영이라는 위대한 이름도 알고 있지만, 그 감독들은 특정한 시기에 위대한 감독들이었다. 오직 임권택만이 완전히 다른 시대를 오로지 자신의 방법을 통해 그 시간을 경유하여 온, 말하자면 한국이 한국전쟁을 끝내고 근대화가 시작된 그 시점에서부터 21세기까지 건너온 유일한 이름이다. 그의 작품을 우리가 이해한다는 것은 동시에 한국 근대사를 이해하는 것이자 한국 영화사를 이해하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했을 때 나는 완전하게 동의했습니다. 이 글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말하자면 내가 임권택뿐만 아니라 한국영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고, 받아들이고 있으며, 한국영화사에 대한 나의 입장이 어떤 것이며, 한국영화에 대한 한 비평가의 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여기에 기록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유성관_ 연재의 서문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과거의 영화를 현재의 자리에서 미래에 개방하기’로 새로 쓰기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셨습니다. 어쩌면 이곳의 글은 우리가 흔히 읽어 온 일반적인 비평 글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에 걸맞게 서문에는 또한 ‘비평의 변주’라는 대목도 있는데요, 한 마디로 필자 자신이 생각하는 이 연재 안의 ‘글’이란 무엇일까요.
 
정성일_ 명백하게 이 글들은 텍스트 비평이 아닙니다. 그건 내가 처음부터 피하고 싶었던 것이죠. 한 편의 영화를 미학적으로 평가하고, 영화 안에서 영화에 대한 네트워킹을 찾아내며, 그 영화에 한정 지어진 방법을 찾아내는 것으로는 임권택 감독 영화의 세계, 한국영화사 속에서 임권택 감독이 갖는 위치, 그리고 그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한국영화사의 지도를 배회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임권택 감독을 정의할 때 쓰는 방법 중 하나인데, 누군가 임권택 감독은 어떤 감독이냐 질문할 때, 난 “이 사람은 시행착오의 대가”라고 답변합니다. 이 점이 임권택 감독 영화의 가장 위대한 점 중 하나입니다. 모든 감독이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임권택 감독은 특히 만일, 자기를 혁신시키려는 노력이 자기의 예술의 방법론이 아니었다면 60년대의 수많은 범작들 속에서 70년대로 넘어오지 못했을 것이고, 70년대의 국책영화로부터 80년대의 마스터로 올라오지 못했을 겁니다.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임권택 감독은 스스로 말합니다. 60년대 영화의 많은 작품들은 형편없습니다. 나쁘죠. 하지만 하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다음 영화는 앞의 영화에서 못한 무언가 한 가지는 더 한 영화입니다. 이런 표현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임권택 감독의 모든 영화는 일종의 전 미래시제입니다. 이 자리에서 앞으로 그렇게 했어야 할 것인데, 라는 걸 포함하는 영화라는 의미입니다. 과거의 경험 없이는 이 영화는 없는 것이죠. 앞의 영화의 절대적인 반성 없이는 다음 영화는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이 영화의 실패만이 이다음 영화에 대해 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쪽으로 열릴지는 앞 영화만으로는 알 수가 없죠. 어떤 영화에 5개의 실패가 있었다고 칩시다. 그중 무엇이 가장 뼈아픈지는 당장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쪽 방향으로 가리라 생각했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쪽으로 나갈 때가 있는 겁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보면, 같은 영화를 두 번 만드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내면적으로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렇다는 말이죠. 앞에서 못 한 걸 뒤에서 반드시 합니다. 여기에서 잘 안 된 게 저쪽에서 반드시 나타나게 됩니다. 그게 바로 다음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담아 두었다가 세 번, 네 번 건너뛴 다음에 다섯 번째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보죠. 1981년 임권택 감독은 <만다라>를 찍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은 건 하나였겠죠. 원작은 소승불교를 가던 법운이 대승불교를 가는 지산을 닮아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들여다보던 임권택 감독은 마지막에 원작 소설을 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가는 사람은 절대로 대승불교로 못 간다는 것이죠. 이건 그냥 소승불교를 가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대승불교란 무엇인가. 소승불교의 길을 남성적인 길이라 이해하고, 대승불교의 삶을 여성적인 세계로 이해한 후, 이걸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로 옮겨오게 됩니다. 또 다른 예. 모든 사람들이 성공작이라 생각하는 <서편제>(1993)를 임권택 감독은 스스로 실패작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그걸 <천년학>(2006)으로 다시 찍습니다. 임권택 감독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서편제>는 다시 보기가 두렵다. 이유는, <서편제>는 그 영화를 찍을 때 내가 판소리를 너무 몰랐다. 그래서 온통 내가 몰랐다는 것만 보인다.” 하지만 <춘향뎐>(2000)을 찍은 후에는 <천년학>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이기 때문에 그의 모든 영화는 전 미래시제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한편으로는 지나간 시간을 영화가 끌어안는 한편, 미래를 향해 자신의 영화를 열어놓고 있는 것이죠. 나는 그 방법론을 어떻게 해서든지 비평 안에서 정식화시키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정식화의 과정이 이론적 방식이 아니라 비평의 방식으로 제시하고 싶은 비평가의 소망이 있는 겁니다.

유성관_ 이 칼럼의 글을 읽다 보면 혹은 평론가님의 특정 영화에 대한 강연을 듣다 보면 영화에 대한 견해, 글 자체가 또 하나의 창작물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정성일_ 고마운 표현이죠.(웃음) 혹은 과분한 표현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독자들이 어떻게 수용하는가에 대한 문제라고 봅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있겠죠. 나는 비평의 방법론이 멈춰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나의 방법론도 영화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수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영화에 대한 평가의 수정뿐 아니라 방법론에 대한 수정이란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다지 눈여겨볼 이유는 없겠지만, 내가 썼던 비평 글은 예전 글과 비교해보면 그간 많이 바뀌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소망하는 바는, 나의 비평이 그 영화와 닮은 느낌이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게 가당키나 한 소망이지는 모르겠습니다.(웃음)
 
유성관_ 영화와 닮은 비평이란 무엇일까요?

정성일_ 그걸 정식화시켜놓으면 바로 그곳으로 떠나야겠죠. 개념화하거나 도구화한다면... 그건 이론이 해야 할 일이지 비평이 할 일은 아닐 겁니다. 

유성관_ 이론가와 비평가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정성일_ 발터 벤야민이 한 말을 빌리자면, 한 편의 작품이 타오르는 장작과 같은 것이라면 이론가들은 장작과 타고 남은 재만이 관심이겠지만 비평가들은 타오르는 불꽃의 신비로움 그 자체만이 관심인 것입니다. 

유성관_ 연재를 하면서 지금까지 좋았던 것, 혹은 아쉬웠던 것, 뜻밖의 보람 같은 것, 이를테면 굉장히 의외의 사람에게 잘 읽고 있다는 고백을 받았다거나 하는 것들이 있을 것 같은데요. 

정성일_ 의외의 고백이라면, 이 비평을 잘 읽었다는 중국 영화 비평가나 일본 영화 비평가를 만났을 때입니다. 그럴 때는 이 사람이 어떻게 한글을 읽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한국말을 못하는 사람인데 말이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에, 생각보다 넓게 읽히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맙죠. 하지만 나의 좀 더 큰 소망은 넓게 읽히기보다 오래 읽히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서 연재가 끝난 다음에도, 혹은 내가 세상에 있지 않은 시간 후에도 임권택 감독을 연구하는 비평가, 이론가들, 혹은 맛보기 시작하는 시네필들이 참고할 수 있는 좋은 기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 글이 시간을 견딜 수 있는가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까 좀 더 두고 봐야겠습니다만.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좋았던 점은... 견해가 바뀔 때입니다. 어떤 영화를 다시 보고, 그 영화를 다시 생각하면서... 이를테면 이런 거죠. 예전에 영화를 봤었을 때는 인터뷰를 위해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비평을 쓰기 위해서 볼 때는 그 목적이 달라지는 겁니다. 이 영화를 보는 나의 자리가 옮겨가면서 이 영화를 다시 바라보게 될 때 그 영화에 대해 새로운 것을 발견할뿐더러 견해 자체가 바뀌는 순간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럴 때, 한 편으로는 신나다?(웃음) 그와 동시에 지금 연재의 절반이 지나왔는데, 벌써 다시 쓰고 싶은 글이 있다는 것은 아쉬움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걸 어쩌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연재가 거의 끝나갈 즈음, 문득 이 글로 바꿔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유성관_ 그런 영화에 대한 글은 바꾸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같이 두는 게 좋을까요?

정성일_ 얼터너티브 버전?(웃음) 그건 그때 가서 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유성관_ 편집자로서는 같이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처음 올라갔던 글이 언제 올라갔다는 것과 그리고 새로 쓴 글이 몇 년 후 언제 올라갔다는 것까지 모두 기록에 남는 것이니까요. 그 자체가 평론의 아카이브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으로선 모두 살아남는 것은 어떨까 하게 되네요. 이미 현재도 그런 글들이 있다는 거지요?

정성일_ 물론 있지요.

유성관_ 어떤 영화인지 알려줄 수 있을까요? 
 
정성일_ 아직은 비밀입니다.(웃음) 현재 읽은 독자들에게 예의가 아니기 때문에. 이번에 낭트와 파리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 가서 그런 영화들을 스크린으로 다시 보게 된 겁니다. 그때 갑자기 아, 이 영화에 대해서는 생각을 바꾸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성관_ 잘 알겠습니다. 그 영화에 대한 새로운 글은 다시 기다리는 거로 하고, 연재 기간은 더 길어질 수밖에 없는 거로 알고 있겠습니다.(웃음) 평론가님이 늘 아쉬워했던 것 중 하나는 글 안에서 참조되는 영화 캡처 이미지가 동영상이었으면 하는 것이었는데요. 

정성일_ 그렇죠. 나는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 스틸사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동영상 참조가 가능하다면 너무 좋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기술적인 이유, 저작권의 이유, 제작비의 이유... 등등이 있을 테니까요. 

유성관_ 저희도 저작권만 해결된다면, 물론 힘은 들겠지만 충분히 할 수는 있습니다.

정성일_ 그런데 이렇게 짧은 동영상에 대해서도 꼭 저작권 협의가 필요한 걸까요? 비상업적이고 학술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은 허문영 평론가의 ‘존 포드 이야기’ 쪽에서도 아쉬워할 것 같은데 말이죠. 

유성관_ 평론가님도 지금은 숏바이숏 글을 잠시 멈추신 상태이지만, 허문영 평론가의 ‘존 포드 이야기’에서도 한 장면에 대해 길게 언급하는 장면은 많지 않습니다. 아무튼 평론가님이 다시 숏바이숏을 분석하는 글이 올 것을 대비해 저희 쪽에서도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평론가님이 아까 인터뷰 중에 말씀하시길, 하스미 시게히코도 오즈 영화의 전작 리뷰를 하지 않았다 하셨는데, 혹시 다른 평론가의 전작 리뷰 사례가 있는지요? 

정성일_ 이론가들은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데이비드 보드웰이 오즈의 전작을 리뷰했죠. 작품별로. 보드웰은 에이젠슈타인도 그렇게 설명했고요.

유성관_ 트뤼포는 히치콕과의 인터뷰 말고 리뷰를 쓴 적은 없었나요?

정성일_ 인터뷰만이죠. 인터뷰라면 나도 진즉에.(웃음)

유성관_ 그러고 보니 요즘 사놓고만 있다가 미뤄두고 있었던 책, 「트뤼포」를 평론가님이 ‘영화천국 48호’ 시네필 특집 글 ‘10권의 책’에서 가장 첫 책으로 언급해주신 김에 이제야 꺼내서 읽고 있습니다.
 
정성일_ 앙투안 드 베크와 세르주 투비아나가 쓴 그 책, 굉장히 빨리 읽히지 않나요? 정보량도 만만치 않고. 그 책을 읽다 보면 그 당시 영화 컬처 전체를 알게 됩니다. 전기는 그렇게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기의 대상이 되는 사람만 아는 게 아니라, 씨네 클럽부터 시작해서 ‘까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진들 그 후의 고다르, 리베트, 샤브롤, 바쟁이 어떤 사람이었으며, 비평의 흐름, 영화의 흐름, 누벨바그의 전체적인 흐름까지도 딱 잡히는 책입니다. 굉장히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성관_ 그 책을 읽으면서 눈에 뜨인 것이 있었는데, 트뤼포가 작가정책을 가져가면서, 그 작가에 대해 이야기해야지 개별적인 작품에 대해 혹평한다든가 하는 것은 지양한다는, 이를테면 아벨 강스의 <악의 탑>에 대해서는 굉장히 실망했지만, 그 당시 트뤼포는 ‘아르’지를 통해 <악의 탑>을 옹호하면서 아벨 강스에 대해 작가적으로 접근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평론가님이 이 칼럼을 진행하는 것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성일_ 감사합니다.(웃음)

유성관_ 어떤 작품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정말 없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전작 비평’이기 때문에 그런 영화에 대해서도 글을 쓸 수밖에 없죠. 그런 영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정성일_ 정직하게 말해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중에 할 이야기가 없는 영화는 없습니다. 60년대 영화를 볼 때 느끼는 점이죠. 허문영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도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는 “하지만 임권택 감독의 영화 중 60년대 영화도 나쁜 영화는 나쁜 영화다.”라고 이야기했고, 나의 대답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나쁜 영화입니다. 하지만 나쁜 영화이기 때문에 할 이야기가 있는 영화인 거죠. 즉, 이 사람의 영화에서 이런 나쁜 점들이 이 사람의 어떤 서명일 수 있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 나쁜 측면이 임권택이 남겨 논 한국영화사의 서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나쁜 것에 대해 내가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면, 그건 임권택의 나쁜 습관 혹은 한국영화사가 임권택 영화에 침입하여 남겨놓은 나쁜 상처, 그리고 그런 것들이 영화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잘 설명할 수 있다면 그렇게 나빴던 60년대 한국영화를 설명할 수 있는 비평의 방법론을 내가 여기서 제시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여기에 어울리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큰 배움이 하나 있는데, 브레히트가 했던 말 중, “좋은 옛날에서 시작하지 말고, 나쁜 현재에서 시작하라.”라는 게 있습니다. 이 말이 정확히 적용되는 건 아니겠지만, 변주해서, 나쁜 임권택을 잘 설명할 수 있을 때만, 훌륭한 임권택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난 임권택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왜. 좋은 임권택의 영화 속에 나쁜 임권택이 동거하고 있음을 지금 나는 이제 명백히 알 것 같습니다. <취화선>에는 60년대 임권택이 있습니다. 혹은 <서편제>와 <하류인생>에도 나쁜 임권택이 있어요. 굉장히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걸 감추고, 한편으로는 변형시키고, 좋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서 임권택 감독은 여러 가지 훌륭한 테크닉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젠 뭐가 있는지 보이고 있어요. 그게 보이지 않았던 유일한 영화는 오직 <춘향뎐> 뿐이었습니다. 그건 완전히 과거로부터 끊어내고 다시 찍은 영화에요. 그래서 <춘향뎐>은 임권택 영화 중 예외 중 예외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는 자신의 최고 걸작을 완전히 예외의 영화로 찍은 겁니다. 그래야만 최고의 걸작을 찍을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의 그러한 영화적인 경험을 통해 영화 전체를 통과하고 있는 하나의 어떤... 딱히 개념어로는 제시할 수 없지만, ‘그 무언가’가 거기 있습니다. 그 불길한 무언가를 설명하는 것이 저의 지금, 이 글을 쓰는 나에게 넘겨진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결론을 갖고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그 무언가’를 해명하는 것이 한 사람의 비평가로서 해야 할 일 중 하나라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유성관_ 임권택 감독이 어떤 감독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시행착오를 거친 감독이라고 소개한다 하셨는데, 가장 걸작은 과거와 모든 것을 끊어 낸 단 한편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집니다. 
 
정성일_ 그런 점이 흥미롭죠. 그래서 <춘향뎐>을 처음 봤을 때는 쇼크였습니다. 완전히 다른 영화를 들고 왔을 때,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심지어 <춘향뎐>을 맨 처음 봤을 때 비평가로서 이 영화를 무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었어요. 이건 예외. 임권택에는 두 개의 영화가 있다는 거죠. 그의 모든 영화와 <춘향뎐>. (웃음)

유성관_ 이 연재를 통해 평론가님은 임권택 감독, 안성기 배우, 영상자료원의 장광헌 당시 자료서비스부장, 송길한 작가, 허문영 평론가, 봉준호 감독으로 인터뷰를 이어왔습니다. 작년, 2015년에는 아쉽게도 유일하게 인터뷰가 진행되지 않은 해였습니다. 현재 예정 중인 인터뷰이가 있다면 소개해주시기 바랍니다.

정성일_ (이미 이야기가 된) 강수연 배우를 만나야 하는데, 부산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이라 지금은 진행할 상황이 아니죠. 김홍준 감독 역시 인터뷰할 계획인데 <서편제> 즈음에 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아직 <서편제>는 다룰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좀 더 뒤로 미뤄두고 있습니다. 그다음...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임권택 감독에게 배움을 청했던 한국영화 감독을 한 명 더 했으면 합니다. 

유성관_ 예전에 봉준호 감독과 인터뷰 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말씀이시죠?

정성일_ 그렇죠. 그다음에... 허문영 비평가와 마찬가지로 임권택 감독에게 배움을 청했던 영화 평론가 중에서 누군가와 대화했으면 합니다. 

유성관_ 염두에 둔 사람이 있는지요?

정성일_ 현재로써는 없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사실 안타까운 점은, 이청준 작가가 곁에 있었다면 인터뷰를 했을 텐데 하는 생각. 기회를 놓친 것이 너무 안타깝죠. 또 잘 성사될는지는 모르겠지만, <개벽>을 쓸 즈음에, 도올 김용옥 선생을 인터뷰하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그분을 뵙는 건 무척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며, 임권택 감독이 한 기간 동안 이 철학자를 일종의 멘토로 여겼고, 많은 철학자의 사유 방식을 배워왔기 때문에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중요할 거로 생각해요. 만년필을 가지고 가야 하나?(웃음)

유성관_ 전혀 생각하지 못했지만 김용옥 선생과 인터뷰하면 좋고 재미있겠습니다. 하지만 담당자로서 녹취가 걱정되긴 합니다.(웃음)

정성일_ 그 외 떠오르는 사람이 있나요?

유성관_ 저도 딱히 없지만, 이 전에 이야기 나왔던 임권택 감독에 대해 관심이 많은 젊은 비평가들과의 대화에 관심이 있습니다. 

정성일_ 누가 있을까요?

유성관_ 그게 누군가라는 게 여전히 잘 잡히지 않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임권택이라는 감독에 대해 관심이 있는 평론가를 찾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를 생각해보면 참 희한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정성일_ 임권택 감독을 어려워하는 것도 있을 겁니다.

유성관_ 편집자로서, 허문영 평론가와의 대화, 그리고 ‘영화천국’ 대담을 통한 김홍준 감독과의 대화가 대단히 인상적이어서 그런 대화를 또 듣고 싶은 게 사실입니다. 앞으로 그런 대화가 또 있길 바라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대화 중에 <춘향뎐> 이야기도 나왔고, <만다라> 이야기도 나왔지만, 이와 같이 우리가 흔히 임권택 감독의 영화 중 걸작이라는 영화, 혹은 널리 알려진 영화들 대부분이 아직 이 연재를 통해 쓰이지 않았습니다. 

정성일_ 일부러 뒤로 배치해 놓은 상태입니다. 이 영화들이 이어지는 선을 쳐다볼 생각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거죠. <만다라>를 쓴 다음에는 반드시 그다음에는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쓸 겁니다. 그다음 <개벽>은 어떤 순간에 딱 끊어내면서 쓰게 될 것이고, 그리고는 <취화선>을 쓰게 될 겁니다. 이런 식으로 짝패를 이루게 되는 겁니다. 혹은 이제까지 없었던 방식의 글 중 이런 방식도 있을 겁니다. 한 편의 영화를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1부, 2부, 혹은 3부로 나눠 쓰는 영화가 나올 것입니다. <취화선>의 경우는 그 영화 자체에 대해 설명하는 글이 있을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영화에 164회 차 촬영 중 90여 회 차를 참여했기 때문에 현장에 있었던 임권택 감독의 인상에 대한 설명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있을 겁니다. 세 번째 글은, <취화선> 이 영화는 절대적으로 임권택 감독 자신에 대한 자서전입니다. 그래서 그 영화 속의 대사를 통해 예술가에 대한 태도를 재구성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취화선>을 그러한 방식으로 재구성해서 임권택이라고 하는 한 예술가가, 장승업이라고 하는 한 예술가를 반추시키면서 자신의 예술관을 어떻게 설명했는가에 대한 글 역시 진행될 겁니다. 

유성관_ <취화선> 외에도 이렇게 몇 가지 다른 버전의 글이 올라올 가능성이 있을까요?

정성일_ <춘향뎐>도 그럴 것입니다. 그 영화도 한 번에 설명하기엔 중층적인 영화라, 두 개의 글이 짝패를 이루면서 서로가 서로를 보충하는 방식으로 쓰일 것 같습니다. 이 칼럼이 인터넷으로만 남을지, 책으로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약 책이 만들어진다면 <춘향뎐>에 대한 글은 두 개의 버전을 쓰고, 하나의 버전은 오른쪽에, 또 하나의 버전은 왼쪽에 배치하는 편집을 했으면 합니다. 

유성관_ 안 그래도 이 칼럼에 대해 책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필자로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정성일_ 이거 전집 수준이 아닌가요(웃음). 보낸 원고 중 100매가 넘는 원고가 꽤 있는 거로 압니다. 

유성관_ 맞습니다. 분량이 적다고 해도 80매, 90매인데, 텍스트의 절대적인 양보다도 글에 첨부된 이미지들도 어떤 식으로 편집되는 게 맞는가 하는 게 의문입니다. 평론가님은 책이 나온다고 하면 동의하는 건가요? 사실 처음에는 전적으로 온라인 프로젝트였습니다.

정성일_ 맞습니다. 그래서 매수와 관계없이 쓴다는 거였죠. 하지만 이건 내가 절대적으로 종이 세대이기 때문에, 종이에 대한 욕망이 있습니다. 종이로 옮겨 졌으면 좋겠어요. 이는 절대적으로 자료원의 동의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니, 자료원의 입장도 포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유성관_ 연재의 마지막 영화는 뭐가 될까요?

정성일_ <화장>입니다. 실은 <화장> 직전의 영화도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짝코>. 임권택 감독의 많은 지지자들이 뽑는 영화들의 최고 걸작은 <만다라>와 <서편제>이잖아요. 다음 세대의 임권택 감독의 최고 걸작은 <짝코>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다음 세대에게 보내는 저의 러브레터?(웃음)

유성관_ <짝코>는 5년 후에나 그 글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웃음)

정성일_ 그 영화는 명백히, 임권택의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임권택 감독다운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어떤 정수가 담겨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임권택 영화의 상처와 모순, 문제와 힘과 가능성, 그 모든 어떤 복잡한 것들이 한 편으로 모여있는 것을 들자면, 그게 <짝코>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와 낭트에서 개막작은 <짝코>였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렸고, 결국 두 행사 모두 <짝코>로 시작했습니다. 

유성관_ 이 칼럼에 국한된 질문은 아니지만, 꼭 듣고 싶은 답변이 있습니다. 평론가님의 글에 대해 변치 않는 질문이 있는데, 어렵다. 혹은 읽기 힘들다, 왜 독자들이 읽기 편하게 써주지 않느냐, 는 말을 오랜 시간 합니다. 이에 대해 평론가님은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요? 

정성일_ 그분들은 실망스럽겠지만, 그런 지적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내 글이 잘 읽히고, 잘 전달되고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글이라는 건 그 사람의 의식, 생각의, 좀 멋있게 말하자면 사유를 기록하는 흔적이라 생각합니다. 흔적을 읽어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글은 그 사유를 카피하는 것이고, 카피의 과정을 통해 이 사람의 뇌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흐름을 읽어 나가는 것이지, 이 글 자체가 사유와 동떨어져서 문법 자체와 수사학의 번들거림에 종속되는 것은 일종의 분장이라 생각하는 쪽입니다. 그것보다 어떤 대목들은 명백하게 나 자신의 글이 비문이란 걸 아는 대목도 있습니다. 물론 주어가 두 개, 이런 문장들은 고치지만, 애매하게 비문인 그런 문장들이 있어요. 이런 문장들이 문제가 되는 거로 생각하는데, 어디서 끊어 읽는가에 따라 비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나의 판단은 하나입니다. 이게 내가 이 영화에 대해 생각했었던 그 사고에 대한 기록인가, 그 문장 구조 자체가 그렇다고 판단되면 내버려두는 쪽입니다. 나중에 나의 글을 읽어볼 기회가 있을 때, 내가 왜 이렇게 썼지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이런 문장을 통해 아, 이래서 내가 이렇게 썼구나, 하는 환기하는 순간이 있어요. 그런 울퉁불퉁한 모퉁이들을 글에 남겨둬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고, 독자들이 이런 글을 읽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독자는, 그걸 읽는 게 목표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가장 실망스러운 독자는, 글을 통해 정보를 갖고자 하는 독자들입니다. 그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실망스러운 독자는 지식을 갖고자 하는 독자들입니다. 한편으로는 내 마음속에 그런 독자들로부터 내 글을 방어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그 정보를 갖고 가고자 하는 독자들을 실망시키고, 지식을 갖고 가고자 하는 독자들을 좌절시키고 싶은, 대신 내가 사고하고 있는 것을 쫓아와서 아, 이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하는 독서의 방법론을 가져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언제든지 열어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걸 공유하고 싶은 것이고 그 과정만이 나의 글 쓰는 방식, 그리고 그것이 나의 문체라고 생각합니다. 필자인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음에도 나의 뇌의 구조를 알 수 있도록, 글이 카피해 놓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이유로 임권택 전작 리뷰 연재를 통해 어떤 글은 쓰는 데 보름 이상 걸리기도 합니다. 그런 과정이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유성관_ 몇 년간 KMDb에서 ‘영화글’이란 섹션을 유지하면서, 요즘 영화에 대한 글을 읽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얼마나 독자가 남아있는가, 혹은 영화에 대한 글을 생산하는 것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으며 또 얼마나 중요한 일일까, 라는 고민을 늘 합니다. 영화 글이라는 것이 그럼에도 지속되어야 하는 게 맞다면, 왜 그런 것인지를 묻고 싶습니다. 
 
정성일_ 이 질문은 글에 대한 역사 쪽에서 보는 것이 훨씬 더 걸맞은 대답이 될 것입니다. 간단히 이렇게 생각해보죠. 영화에 대한 비평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모두들 말하고 있지만 그 표현과는 정반대로, 정확하게 표현하면, 영화 비평가의 글을 싣고 있는 지면이 줄고 있는 것이지 영화에 대한 글은 폭발하고 있습니다. 온갖 블로그, SNS에서 영화에 대해 쓰지 않는 사람이 없고, 영화를 보면 쓰고 싶어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쓰고 싶은 사람은 많은데 읽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겠죠. 즉 남의 글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줄어들고 있다는 문제의 핵심은 어쩌면 글 자체라기보다는 플랫폼의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플랫폼은 그 콘텐츠를 올바로 전달하는가, 네트워킹을 하는가, 그 플랫폼들이 그걸 읽고자 하는 사람들을 목표로 정확하게 도달하고 있는가. 그래서 나는 KMDb도 그걸 성실하게 운영하는 것만이 목표가 아니라, 이런 홈페이지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의외로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그래서 이렇게 플랫폼을 정성스럽게 운영하는 것뿐 아니라, 온라인 속에서 글을 원하는 사람들과 올바르게 접속하는 일에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핵심이 아닐까요? 반격이랄까?(웃음) 정말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영화아카데미 학생들도 KMDb를 몰라요. 영상자료원 홈페이지가 있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상영일정만 보고 나오는 게 다인 거죠. 영화학교 학생들도 홈페이지를 모를 정도라면, 홍보를 좀 더 잘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유성관_ 갑자기 제 쪽으로 이야기가 넘어온 것 같은데 플랫폼에 대해서는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웃음) 그럼에도 여전히 궁금한 것, 말씀하신 것처럼 영화에 대한 남이 쓴 글을 읽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고, 또 영화에 대한 글이 폭발하고 있다고 해도 SNS에 쓰는 짧은 영화 인상 낙서들이 범람하는 것도 같습니다. 그러한 지금, 여전히 진지하고 긴 영화에 대한 글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성일_ 저는 SNS를 통한, 전적으로 인상에 의지한 메모도 훌륭한 영화평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그런 평이 섬광 같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남들보다 먼저 시사를 보고 나와 으시대는 잡담을 셈에 포함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하지만 여전히 영화를 본다는 체험을 글로 옮긴다는 것은 전적으로 그 영화를 본 시간의 리듬을 어떻게 옮기느냐의 문제입니다. 저는 영화에 관한 훌륭한 글을 읽으면서 종종 위대한 비평가들이 그 리듬을 온전히 구현해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 비평이 때로는 영화에 완전히 안기거나 혹은 반대로 품어준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무엇보다도 영화평은 그 영화를 다시 보게 만들 때 정말 힘이 있는 것입니다. 혹은 보고 싶게 만들어야 합니다. 영화평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는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그건 영화에 다가가는 방법의 기술입니다. 차리리 이렇게 대답하면 어떻겠습니까. 한정 없이 글이 길어질 때 그건 영화가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 같은 것입니다. 

유성관_ 마지막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또 다른 움직임 중 하나가 영화독립잡지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겁니다. ‘아노’는 이미 오래되었고, 유운성 평론가가 발행한 계간지 ‘오큘로’는 막 1호가 발간되었고, ‘캐스트’라는 독립영화 잡지가 크라우드 펀딩 중이며, 여성 영화를 주제로 하는 ‘세컨드’라는 독립잡지 또한 준비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영화에 대한 저널이, 독립잡지이지만 예전보다는 활발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정성일_ 종이 잡지를 만든다면, 웹도 서버가 돈이 들기도 하지만, 종이는 바로 종잇값, 인쇄비, 배포에 관련된 비용, 정기 구독자 관리 등, 첫 호를 만들 땐 잘 못 느끼는데, 그게 지나가면 반품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창고비 까지도 장난이 아니게 됩니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를 개인이 감당하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이죠. 진심으로 잡지는 많이 팔리는 게 목표가 아닌, 오래 팔리는 게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유성관_ 평론가님은 ‘키노’ 이후 종이 잡지에 대한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나요? 

정성일_ 늘 하고 있죠. 지금 현재도. 

유성관_ 어느덧 마지막 질문입니다. 오늘 인터뷰를 한다고 하니 누군가 궁금하다고 추가해 준 질문인데 저 역시도 궁금합니다. 비평가로서 영화를 볼 때, 오늘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제가 인사차 여쭤봤던 질문 “최근에 보신 영화 중 좋은 영화가 있었나요?”에 대해 한숨 쉬며 “없었죠” 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혹은 60~70년대의 부서진 한국영화들을 계속 봐야만 할 때, 혹 비평가로서 내상을 입지는 않으신지요? 

정성일_ 물론 상처를 받습니다.

유성관_ 그럼 그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십니까? 

정성일_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임권택 감독의 몇몇 영화를 봅니다. <짝코>랄지, <춘향뎐> 같은 영화를 또다시 보며 일종의 상처를 해독한 달까요.(웃음)

유성관_ 일종의 영화 해독제인 셈이군요. 

정성일_ 정말 그렇습니다.(웃음)

2016년 3월 29일, 북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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