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by.정지돈(작가) 2022-12-30조회 2,730

나는 카를 마르크스를 택하겠습니다
쑨거의 「새로운 보편성을 창조하기」(미디어버스)는 2018년 1월 28일 베이징의 인사이드-아웃 미술관에서 열린 포럼에서 발표된 원고다. 이 글에서 쑨거는 명나라 말기의 사상가 이탁오의 철학을 인용한다. 갑자기 웬 명나라? 유교남인가? 이라고 속단하진 말자. 「현자들의 평생공부법」이라는 책은 이탁오를 중국 역사상 가장 독특하고 기이한 개성의 소유자로 설명한다. 그는 유교를 거부하고 남녀평등을 주장한 이유로 감옥에 갇혔고 온갖 핍박 끝에 감옥에서 자결했다. 쑨거는 다양성, 상대주의의 시대에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새로운 형식의 이론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탁오를 가져온다. 그에 따르면 이탁오의 중심 개념인 “진공”은 분별이라는 전제를 거부한다. “무선무적, 즉 선행도 없고, 업적도 없다.” “무인무안, 즉 타인도 없고 자아도 없다.” “무성무근, 즉 전통도 없고, 이단도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분별이 없고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분별이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쑨거에 따르면 진공 개념은 형이상적인 추론을 바탕으로 하는 서구 이론과 달리 형이하적인 것으로 구체적인 경험 속에서 기준을 찾는 것이다.

그레이엄 하먼은 브뤼노 라투르에게 도래한 비환주의적 깨달음의 순간을 데카르트와 루소, 아비센나와 비견되는 역사적 일화로 그려낸다. “데카르트의 꿈과 난로로 데워진 그의 방, 나무 아래에서 울고 있는 루소,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알-파라비의 주석을 읽은 후에 기도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아비센나…… 1972년 말 한 비범한 청년 사상가가 부르고뉴의 고속도로를 따라 시트로엥 벤을 운전하고 있었다. … 그는 환원주의에 관한 생각에 지나치게 몰두하다 정신을 차리려고 차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도, 가톨릭교도, 기술자, 행정가, 지식인, 부르주아, 서양인, 작가, 화가, 기호학자, 남성, 투사, 연금술사. 도로변에 앉아서 어떤 새로운 철학 원리를 꿈꾸고 있던 청년 라투르는 마침내 이 모든 환원자에게 역겨움을 느끼게 되었다.”1)

니클라스 루만은 1987년 독일 라디오 방송에서 진행된 대담에서 지식인이라는 개념에 집요하게 반대를 표명한다. 반면 사회자인 발터 판 로숨은 끊임없이 되묻는다. “정말 자신을 지식인이라고 하지 않으실 셈인가요?” 로숨이 보기에 지식인은 주관적인 가치를 보편화하고 사회로 내보내 특정한 삶에 대한 개념이나 기준을 제시하는 사람이다. 누구도 이러한 정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루만은 벗어난다.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비록 모든 것이 루만의 이름으로 정리되었을지라도, 이는 그 과정에서 벌어진 것을 말하는 관찰자의 단순화로 보입니다. 그에 반해 현실에서 우리는 그 어떤 결합 자체에 얽히게 되는 지적 네트워크에 연루되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루만에 따르면 지성은 “서로 다른 것끼리 비교할 수 있는 능력, 서로 다름 속에서 같은 부분을 가늠하는” 능력이지 보편성이나 기준이이 아니다. “저는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어디로 갈지 아는 것, 무엇인지 아는 것, 그리고 실재에 도달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을 따르거나 복종하거나 권위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 이런 것들은 이제 더 이상 우리 사회에 적합하지 않은 오래된 심성입니다. 윌리엄 제임스는 매우 아름다운 글 「인간에 있어 어떤 맹목성에 관하여」에서 이렇게 말하지요. 모두는 관찰자이고, 모두는 더 큰 예리함을 가지고 다른 이들보다 더 잘 보지만, 하나의 맹점을 필요로 한다.“2)

그렇다. 환원자, 기준, 보편성. 모두 구역질이 난다. 구체적인 경험, 구체적인 존재자, 맹점, 관찰자. 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각자의 영화 경험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길고 복잡한 이론을 세워도 해소되지 않는 뭔가가 있다. 이를테면 우리가 정말 <범죄도시2>가 걸작이라는 입장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지금 극장에 걸린 한국 영화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K정연이 말했다. 그는 어느때보다 당당한 표정이었다. 숨길 것이 전혀 없다는 듯, 평생 후회라곤 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K정연은 말했다. 
 제가 처음부터 마블리의 가능성을 눈치 챈거 아시죠? 
K정연은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단다. K정연에 따르면 이미 <범죄도시 5> 빌런에 임창정이 캐스팅됐고 6편 빌런에 장혁이 캐스팅됐다. 
 범죄도시 멀티버스에 장첸이랑 손석구랑 이동휘랑 임창정이랑 장혁 다 같이 나오는 거 아시죠?
 K정연의 말을 들으며 치킨을 먹던 강보원이 닭다리를 떨어뜨렸다.
 그런 소식을 어디서 들으셨어요?
 K정연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트위터에서요. 

행복한 K정연씨
K정연에게 정정을 요구할 내용이 있다. K정연은 한영한사 19화에서 “정지돈은 여행이 좋지만 공항에 가고, 비행기를 타고, 환승을 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싫어서 여행까지 싫어질 때가 많다”고 썼다.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여행이 싫다. 터미널에서 기다리는 시간도 싫고 불편한 의자에 앉아 옆 사람 숨냄새를 맡는 것도 싫고 숙소를 예약하고 맛집을 검색하는 것도 싫고 줄서서 미술관에 들어가는 것도 싫고 유럽 욕실의 낮은 수압도 싫고…. 하……(너무 싫음) 그러면 왜 여행을 가냐고? 여기 있는 건 더 싫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머무르고 있는 곳에 계속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은 더 싫고 그건 서울이 싫어서라기 보다(물론 싫지만) 이곳을 떠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내가 무언가를 견디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잠재적인 가능성 때문이다. 문화는 이 가능성을 부채질하고 환금화하고 의미화하고 이데올로기화한다. 그것이 좋건 나쁘건, 당신이 세상에 노출되면 노출될 수록 가능성이 많아질수록 모든 것이 불가능할 거라는 기분에 시달리는 건 그 때문이다. 이렇게 막다른 골목에 부딪치면 목적지를 잃고 빙글 빙글 공회전하는 것에, 끝없이 이동하는 것에서 안락함을 느낀다. 목적지를 잃고 무엇도 의미화하지 않고 무엇도 믿지 않으면서. 납치한 비행기의 기장에게 기름이 떨어질 때까지 허공을 선회하라고 말하는 <찌꺼기>의 주인공처럼, 길 위를 떠도는 켈리 라이카트의 인물들처럼, 떠나 온 장소와 도달할 장소 사이에 있을 때만 행복한 K정연처럼.

 사실 정연씨가 이동 중에만 행복하다고 말했을 때 김기덕이 떠올랐어요.
나는 정연씨에게 말했다. 우리는 정연씨의 작업실에 있었다. 응암동이었고 책으로 가득한 방은 K정연의 오디오 시스템에서 흘러나오는 맷 버닝거의 목소리로 천천히 진동했다. 한영한사의 마지막을 기념하는 한국 영화를 보기로 했는데 뭘 봐야할지 알 수 없어서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내가 김기덕의 이름을 꺼낸 것이다. 김기덕의 이름을 들은 K정연은 설마 아직도 이 이름을 소리내어 발음하는 인간이 있나, 설마 그의 영화를 보자는 건 아니겠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김기덕이요?
 시나리오가 안 써지면 비행기에서 글을 썼대요.
 김기덕이요?
 네, 김기덕이요. 
 내가 대답하자 K정연은 우울한 표정으로 바닥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코노미석이요, 비즈니스석이요?

비행기에 관한 소식은 하나 더 있다. 씨네포크에서 장 뤽 고다르 회고전을 위해 출간한 팸플릿에는 조너선 로젠봄이 New Lines Magazine에 쓴 고다르 추모글이 있다. 여기서 로젠봄은 1980년 처음 고다르를 만나 인터뷰 했을 때를 떠올린다. 그 인터뷰에서 로젠봄은 모든 인터뷰를 통틀어 가장 지혜로운 말을 들었다.

고다르는 자기 자신을 비행기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로젠봄은 그게 무슨 뜻이냐고, 스스로를 일종의 탈것으로 생각하는 거냐고 되물었다. 
 “맞아요.” 
이어지는 로젠봄의 글. “고다르의 많은 발언이 그렇듯이 나는 지금도 이 말의 진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완전히 확신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 발언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라는 점은 보다 명백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사실 영화나 텍스트는 우리를 어딘가로 데려가는 운송수단이라는 사실을 말한 것이며 만드는 사람의 경로는 이 운송수단을 실제로 이용하는 사람의 경로와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어떤 운송수단의 제작자인데, 다른 사람들은 이 운송수단을 이용해 자신들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것이다.”

역시 멋진 말이다. 여기에서 글을 끝내고 싶을 정도로 의미심장하고 열려있고.... 다들 우리가 만든 운송수단을 이용해 다음 장소로 이동하세요. 자기 만의 길을 찾아 떠나세요! 여행을 시작하세요!

하지만 나와 K정연은 여전히 답답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싶은지 알까?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알 수 있을까? 우리가 보고 싶은 영화가 뭔지, 그 영화를 보는 게 정말로 좋은 일인지… 넷플릭스에서 오늘 저녁 볼 영화도 못 고르는데! 영화 따윈 보지 않아도 아무 상관 없는데 우리는 왜 사서 고생하는 것일까.

파올로 체르키 유세이Paolo Cherchi Usai는 2001년에 출간된 「시네마의 죽음The Death of Cinema」에서 시네마는 본래 자기 파괴적인 매체라고 주장한다. 본성이 화학물질인 필름은 불꽃으로 타오르지 않으면 천천히 용해될 것이다(식초증후군vinegar syndrome). 디지털 역시 엔트로피 부식과 노후화 과정을 겪는 건 마찬가지다. “영화 역사의 궁극적 목적은 그 자신의 소멸, 혹은 다른 존재로의 변형을 서술하는 것이다. 가설적 모델 이미지를 세우는 단계에서 시작해 재현했던 대상을 완전히 망각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역사는 상상력에 의존하여 서술된다.”3)

현대적인 최초의 VR 기기인 센소라마를 만든 헐리웃의 촬영기사 모튼 하일리그는 미래의 영화는 “더 이상 시각 예술이 아닌 의식의 예술”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종류의 감각에 대한 자료를 창조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의식의 형태로 그 자료들을 배열시키게 될것이다.”4)

 하지만 이미 그렇게 하고 있지 않나? 
 K정연은 새로 산 JC-2 프리앰프를 연결했다. 
 지돈씨 듣고 싶은 음악 있어요?
 아니요. 전 조용한 게 좋아요. 
 K정연은 프리앰프의 전원을 켜고 볼륨을 0으로 낮춘 진공관 앰프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 조금 기다린 다음 아무 판도 올리지 않고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곧 치직 하는 크래클이 일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음악을 들으며 영화를 봤다.  

***
1) 「네트워크의 군주」, 그레이엄 하먼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 「아르키메데스와 우리: 니클라스 루만 대담집」, 김건우 옮김, 읻다
3) 「디지털 영화 미학」, 데이비드 로도윅 지음, 정헌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4) 「멀티미디어」, 랜덜 패커, 켄 조덕 엮음, 아트센터 나비 학예연구실 옮김, 나비프레스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정지돈, 2022.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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