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by.정지돈(작가) 2021-12-31조회 10,679

전 남자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전 여자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전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전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저라면 이 행성에 빵점을 주겠어요.
- renata litvinova

나와 금정연, 임재철 평론가는 2021년 어느 겨울 낮, 은평구 갈현동의 만포면옥에서 물냉면과 설렁탕, 눈꽃 만두를 먹고 있었다. 우리가 왜 만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평소처럼 금정연이 연락을 해 그분이 보자고 합니다, 라고 말했을 뿐이다. 나는 그분이 금정연을 만나고 싶은데 둘이 보기 뻘쭘하니까 나도 같이 보자고 한 건지, 아니면 금정연이 둘이 만나기 싫어서 그분 몰래 나를 끼워넣은 건지 의심스러웠고 갈현동까지 가는 길을 생각하면 눈물이 차올랐지만, 영자원 연재를 생각하며 꾹 참았다. 원고를 위한 작은 소스라도 얻겠지 하는 심정이었다. 모든 연재가 그렇듯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도 매 원고가 위기였다. 시나리오 작법서로 베스트셀러가 된 시드 필드에 따르면 시나리오는 시작, 대립, 해소의 3막으로 구성된다. 반면 우리 에세이(필름)의 원고(대본)는 시작, 시작,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요. 1년을 연재했는데 도무지 앞으로 나아가지 않네요. 

금정연이 말했다. 지난 원고도 2주나 넘겨 마감한 정연씨는 안본 사이에 더 늙은 모습이었다. 더희미해지고 하얘졌달까. 그러나 동안인 건 여전했다. 금정연을 본 사람이라면 별다른 설명없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가 박솔뫼는 정연씨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늙은 아기.

상업 영화나 드라마 시나리오도 보통 2~3년은 걸린데요. 너무 걱정마세요.  

나는 정연씨를 위로했지만 사실 걱정되긴 마찬가지였다. 나름 호기롭게 시작한 연재였고 쓰는 동안 괜찮은 호응을 얻기도 했다. 한 인터넷 게시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올라왔다.

제목: 한국영화 커뮤니티가 격변하는 시점 두 가지.
하나는 엠파이어가 moma로부터 가져온 16mm 필름으로 상영되는 날이고 다른 하나는 정지돈 금정연이 오디오비주얼필름크리틱을 완성하는 날 


금정연이 게시물을 쓸쓸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날이 올까요? 

반면 임재철 평론가(이하 LJ)는 우리의 걱정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야, 지난 번 원고도 쓰기 싫은 티가 너무 나더만. 으하하하.

금정연과 나의 인상이 동시에 구겨졌지만 우리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LJ에겐 어떤 대응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일설에 따르면 LJ는 무적의 비평가였다. 저널리스트의 객관성과 독학자의 주관성을 두루 갖춘 비평계의 전무후무한 존재. 놀라운 건 이 사실을 LJ에게 직접 들었다는 사실이다. “나, LJ, 무적의 비평가.” 그러나 이와 같은 발언을 오만함이나 과대망상, 자기 현시 등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LJ는 특정한 시공의 열림 속에서 어느 순간 가장 정확한 비평가가 되기도 했다. 그러니 중요한 건 언제 어느 때 그러한 시공이 열리는지, 그 조건을 포착하는데 있다. 마찬가지로 금정연 역시 때때로 무적이 된다. LJ와 그가 다른 점이 있다면 금정연은 스스로를 무적의 비평가로 칭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비평가/평론가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럼 정연씨는 뭐예요? 언젠가 나는 정연씨에 물었고 정연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서평가죠. 서평을 쓰지 않는…
그게 뭐야.
글쎄요. 전 뭘까요, 지돈씨? 
자꾸 쓸데없는 말만 하지말고 영화나 만들어.

LJ가 말했다. 두 세대 어린 영알못들의 감상주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투였다. 그의 앞에 놓인 설렁탕은 이미 싹 비워져 있었다. 만포면옥은 백년식당으로 선정된 냉면 맛집이었고(소설가 김훈은 “인생관을 바꾸는 맛”이라고 극찬했다) 나와 금정연은 물냉을 주문했지만 LJ는 설렁탕을 시켰다. 동시대에 기자로 활동했던 김훈에 대한 질투였을까? 내가 묻자 LJ는 김훈 정도는 기자로 쳐주지도 않는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걔는 기사도 소설처럼 썼어(물론 칭찬이 아니다).

LJ의 말은 늘 과격했지만 가끔 우리를 뜨끔하게 했다. 이를테면 “원고 쓰기 싫은 티” 같은 말 말이다. 익명의 블로거는 금정연의 <아무튼 택시>를 읽고 이렇게 글 쓰기 싫어하는 저자는 처음 봤다며 책값이 아깝다고 화를 냈다. 반면 또다른 블로거는 책 전반에서 느껴지는 쓰기 싫음, 일하기 싫음 때문에 저자가 좋아졌다고 말했다.

만약 글 쓰는 걸 진심으로 싫어했다면 이렇게 상반된 감상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애초에 책을 내지 않거나 에밀 시오랑 마냥 아포리즘을 끄적대며 거만을 떨거나). 우리의 태도는 냉소나 시니컬함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너스레나 솔직함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느 쪽일까? 양쪽 다인 걸까 둘 모두 아닌 걸까.

정연씨의 글 대부분은 진심으로 무언가를 믿고 실천하는 것의 어려움, 어딘가를 향해 가는 게 아니라 부유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지난 원고에서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구태여 매끈하게 만들려고 애쓰지도 않고 좋아하는 단편들로만 채우기.”

어쩌면 이것은 우리 세대의 “시대적 정신질환” 아닐까. 진심으로 문학을 믿고, 영화를 믿고 작업을 체계적으로 완성하고 싶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할수록 무기력해지고 거부감이 솟구쳐 한글자도 쓸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 이건 새로운 세기의 집필자장애writer’s block 일지도 모른다. 미국정신의학협회의 <진단과 통계요람(DSM)> 6판에 해리성장애의 하위 병 중 하나로 포함될 것이다. 이른바 K-wirter’s disorder.

과학철학자인 이언 해킹은 19세기 말 유행한 특이한 정신질환에 대한 책 <미치광이 여행자>에서 시대적 정신질환을 특정한 시대, 특정한 장소, 특정 사회계급이나 젠더에서 선택적으로 나타나는 정신질환이라고 말한다. 시대적 정실질환은 그것이 실재하는 것인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인지 논쟁을 불러일으키지만 이언 해킹은 그런 식의 이분법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실재성 역시 “인간의 삶과 언어의 변화에 따라 그 개념을 재조정하는 끝없는 과정에서 찾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정신질환을 번성하게 하는 환경인 생태학적 틈새다. 이 틈새를 만들어낸 벡터의 방향이 달라지면 틈새는 흩어진다. 다시 말해 이 틈새 속에서 정신질환은 잠시동안 실재가 된다.

잠깐 옆길로 샜는데,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시작만 하고 아이디어만 낼 뿐 믿음, 역량, 진심 또는 그 무언가의 부재로 실천하지 못하고 매듭짓지 못한다면, 그렇게 만드는 어떤 벡터들이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한 벡터가 우리를 한국영화에서 길 잃게 만든 걸지도 모른다.

우리의 에세이필름이 벡터들의 교차로 만들어진 생태학적 틈새를 가시화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이런 실천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완성이나 구성과 다르며 개봉이나 배급, 출판의 과정도 조금 다를 것이다. 어떻게 다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때였다. 금정연과 나의 핸드폰이 동시에 우웅- 하고 울린 것은. 확인해보니 영자원의 연재 담당자가 우리에게 보낸 메일이었다. 다음 원고 마감일을 고지하는 내용 아래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었다.

혹시 작가님들이 여력이 되신다면 연재를 내년 12월까지 연장하면 어떨까요?

연재 연장? 1년 더? …… 

금정연과 나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투숏? 숏, 리버스 숏? 
 







   
영화학자 미하일 얌폴스키에 따르면, 현대 영화언어 구조의 가장 본질적 형상은 리버스 앵글이다. “현대 영화는 볼거리의 두 가지 (재현적) 체계로 이루어진 하나의 체계로서 기능한다. 관객은 끊임없이 어떤 때는 목격자가, 어떤 떄는 주인공이 된다. 여기서 세계는 언제나 다중시점으로 보인다.” 다시 한번 정신의학적 은유를 빌리면 영화는 처음부터 해리성장애를 수행하는 매체였다.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내 눈물인지 금정연의 눈물인지 알 수 없었던 건 그래서일까. 이것은 기쁨의 눈물일까 고통의 눈물일까. 우리에게 1년의 시간이 더 주어진 것일까, 1년의 시간을 더 빼앗긴 것일까. 우리를 보던 LJ가 담담히 말했다.

 고다르와 나도 통하는 게 있었지. 
 뭔데요?
 우리 둘 다… 군대를 가기 싫어했어. 그래서 고다르는 브라질로 갔고 나는 아르헨티나로 가려고 했지…..

2022년 연재 예고
We Are Truly Fucked: Everyone Is Making AI-Generated Fake Porn Now

김희천의 VR <사랑과 영혼>에 대한 비평과 앙드레 바쟁의 완전영화의 신화, 미하일 얌폴스키의카이로스의 시간과 딥페이크와 리얼리즘의 시대의 MBTI로 보는 한국영화 유형학과 완전 자동 (한국)영화, 마동석, 마블유니스버스, 마크 피셔로 연결되는 자본주의 익스텐디드 리얼리즘에 관한 비평적 연대기…(어쩌면) Coming 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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