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by.정지돈(작가) 2022-06-10조회 2,629

1.
금정연의 문자를 씹었다. 종종 있는 일이다. 그는 문자를 보내고 나는 씹고. 반대의 경우도 있다. 내가 멘션을 보내고 금정연이 씹고.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이에 금이 간다거나 어색한 상황이 발생하진 않는다. 적어도 지난 금정연의 원고를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는 지난 원고의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했다. “(JD는) 여전히 답이 없다. 말풍선도…” 금정연이 나의 답장을 기다렸다니. 어떻게 임창정 얘기를 꺼내고도 내 답장을 기다릴 수가 있지? 임창정이 내게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내가 만약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다면 그건 오로지 임창정 탓이다. 한국 남자가 나오는 악몽을 꾼다면 그는 임창정의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고 한국 남자가 노래를 부르면 그 노래는 <소주 한잔>일 것이며 한국 남자가 시비를 건다면 그는 17대1로 싸운 자신의 과거를 자랑할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임창정이야말로 한국 영화의 부인된 무언가이며 아무리 외면해도 기어코 돌아오는 실재의 찌꺼기다. 우연히 홍대나 건대의 술집이나 거리(혹은 그와 유사한 모든 먹자골목)를 지나치기라도 하면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우리를 습격하지 않는가. 나는 왜 그의 바이브레이션만 들어도 식은땀이 날까. 그러나 오해하지 말자. 이건 임창정이라는 배우이자 가수 개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라캉의 저 유명한 말을 생각해보라. “성적 관계 같은 것은 없다.” 다시 말하면 임창정 같은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임창정에 대해서 말해야한다. 

2.  
하지만 임창정에 대해 말하려면 윤제균에 대해 말해야한다고, 나는 소전서림에서 만난 문윤기에게 말했다. 윤제균이요? 윤기씨는 그런 이름은 생전 처음 들어본다는 듯 말했다. <색즉시공>(2002)이 개봉했을 때 그는 아마 초등학생이었으니 그럴수도 있다. 나는 윤기씨에게 더 많은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트라우마가 내 입을 봉하고 성대를 틀어막았다. 게다가 임창정에 대해 말하려면 이병헌과 최민수와 류승룡과 김상진과 신재호/신동엽에 대해서도 말해야하지 않나. 이 이름들은 무엇이며 이렇게 목록화 되는 이유가 뭐냐고는 묻지 말길. 나는 그 세계가 궁금하지도 그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도 그 세계를 언급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영화과에 입학한 이후 영화를 피해 이십여년을 도망다닌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니까.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다. 영화가 턱밑까지 칼을 들이 밀었고 마감을 알리는 메일은 벌써 일주일 전에 도착했다. 여느 때처럼 마감과 글쓰기의 고통 때문에 우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진심) 말해야할 때가 왔다는 의미이다. 

3. 
이쯤에서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유추의 방식으로 연결될 하나의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장 루이 셰페르의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가 그것인데, 나는 이 책의 서문을 다음과 같이 편집한 후 적용할 것이다.

관객에게 영화는 무엇보다도 영화에 대한 분석이 제시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으로 등장한다.

이야기가 이들 ‘괴물들’에게 역할(의미)을 부여하기 이전에, 이야기와 관계없이, ‘괴물들’은 그것이 나타나는 순간에 이미 무언가 알 수 없는 의미 자체로서 관객인 나에게 도래하는 것이었다.

스크린 위에 나타난 무언가는 바로 내 속에 도래하고 그곳에 들어와 일정한 장소를 점유한다.


내가 고찰하고 싶은 것은 영화와 함께 태어나 여전히 고착되어 있는 이상한 감정 – 이미지를 계속 받아들이면서 여전히 남게 되는, 말하자면 부식토와 같은 물질적인 감정에 대해서이다. 이것이 영화와 개인의 삶의 어떤 표현되지 않는 부분 사이에 사적인 연결을 갖게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내 삶의 가장 숨겨진 부분이며 내 삶에서 가장 굴종에 처해진 부분이기라도 하듯이, 침묵에 빠지거나 아니면 무언가를 말하려 해도 실어증에 빠지고 만다.

우리는 영화화된 행위에 대한 상상적인 참여를 통해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경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스크린의 형식이나 존재에 우리를 투사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삶 속에서 성장한다.

영화는 현실적인 어떤 것의 현실화 혹은 전용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실적인 것이란 잠정적으로 관객처럼 사는 어떤 것이다. 이미지와 경험적인 정동이 섞인 기억의 삶이다. 이것은 영화를 신체의 일부, 자신의 신체임에도 우리 자신에게는 보이지 않는 부분처럼 사용하는 습관에 대한 것이다.

다시 정리해보자. 장 루이 셰페르는 영화가 불러오는 시뮬레이션이 실제의 세계로부터 빌려온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게다가 이 시뮬레이션은 그 시뮬레이션의 모상인 영화보다 선행하는 것이며 계속해서 지속된다. 이 시뮬레이션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지각하는 어떤 신체의 운명 속에서 욕망했던 것이다. 지젝은 사본의 사본인 예술이 직접적인 첫번째 층위인 사본-물질적 현실과 경쟁하지 않고 오히려 이데아 자체와 경쟁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물질적 대상을 복사할 때 사실상 복사되는 것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제3의) 이데아라고 말이다. “플라톤이 예술의 위협에 그토록 당혹스럽게 반응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바꿔 말하면 이데아는 곧 현실이 복사될 때 나타나는 그 무엇이다. 사본(현실)의 사본(영화)의 사본인 셰페르의 시물레이션은 바로 이와 유사한 매커니즘을 가진다. 그것은 영화로부터 복사되어나온 환영이지만 영화보다 선행하는 현실보다 선행하는 무언가로 구성되며 그러므로 현실은 곧 영화가 시뮬레이션 될 때 일어나는 그 무엇인가의 복사물이 된다.

이러한 매커니즘은 빙크스 볼링의 경우처럼 영화의 수준 따위는 따지지 않는다. 따지는 방법도 모르며 안다한들 그 기준은 기이한 전-의식적인 단계에서 작동하는 일종의 괴물이다. 문제는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이 괴물이 괴물이 아닌 것처럼 군다는 사실이다.

4.
그러나 비천한 영화란 무엇일까. 정연씨를 통해, 마테리알의 오픈 스페이스를 통해 비천한 영화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너무나 적절한 작명이라는 생각을 했다. 비천한 영화는 디테일과 뉘앙스는 다르지만 유사한 형태로 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해왔다. 보통은 길티 플레저라는 이름으로, 요즘 말로는 쿠소 영화, 언젠가는 시네마 지옥이라는 명명하에 우리를 울리고 웃기지 않았나. 하지만 여기에도 혼란의 여지는 있다. 에드 우드와 같은 유형의 감독에 의해 만들어지는 망작 또는 괴작은 비천한 영화에 속할 수 있을까? 괴작과 망작을 한 묶음에 넣을 수 있을까? 유년의 기억을 차지하는 길티 플레저 영화들은 뻔하고 전형적이지만 망작은 아니지 않나? 이를테면 정연씨가 사랑하는 <콘에어>(1997)는 러닝 셔츠를 입고 턱걸이를 하는 니콜라스 케이지를 상상만해도 입안의 콜라가 뿜어져 나오지만, 생각보다 좋은(?) 영화 아닌가. 내가 초등학교 때 가장 사랑한 영화 는 <록키 4>(1987)였다. <록키 1>(1976)도 아니고 <록키 2>(1980)도 아닌, 4탄. 한 영화 잡지에서 <록키 4>를 최악의 시리즈로, 반공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천하의 졸작으로 평가한 걸 본 이후 나는 어디서도 <록키 4>를 인생 영화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무튼 다시 논점으로 돌아가면 비천한 영화는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1) 범작 2) 망작 3) 괴작. 하지만 진정 중요한 것은 비천한 영화들이 기거하는 시네마 지옥 속에서 이 세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비천한 영화 대부분은 개인의 기억에 속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기준이 의미를 (거의) 상실한다. 중요한 건 이 영화들을 사랑했다는 기억을 비천하게 만드는 사회와 나와 영화의 관계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진짜 비천한 것은 영화가 아니다. 이들 사이의 위계와 위상이, 비천함의 지정학이 행위자들을 비천하게 만든다. 어른이 된다는 것, 나아가 씨네필이 된다는 것은 이 비천함을 숨기거나 잊고 부정하는 것이다. 영화잡지의 리스트, 선생님들의 평론, 커뮤니티의 평가들이 우리를 그러한 길로 이끈다. 물론 다른 길도 있다. 리스트를 부정하고 선생님들의 뒤통수를 치고 커뮤니티를 혁신하려는 이들은 부인된 비천함 속에서, 사회가 어둠 속으로 쫓아낸 네트워크 속에서 뭔가를 찾아내고 비천함 그 자체의 미학화를 시도한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껏 봐왔던 명명들이다. 하지만 이 작업은 극도의 섬세함과 정치적 현명함을 요구한다. 비천하되 너무 비천하지 않은 영화들로, 괴작이지만 망작은 아니고 범작이지만 윤리를 벗어나지 않고(아니면 아주 완전히 벗어났거나) 잊혀졌지만 스토리텔링 하기 좋은 영화를 선택할 것. 

5.     
하지만 내게 임창정은 비천한 영화도 시네마 지옥도 쿠소 영화도 아니다. 임창정은 현실에 뿌리내린 시뮬레이션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묻기도 했다. 왜 그렇게 임창정이 싫은건데? 다시 말하지만 나는 임창정을 싫어하는 게 아니다. 내가 싫어하는 건…

6.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하기로 한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1987) GV를 앞두고 금정연은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의 회고록 링크를 보냈다. 나는 스포츠서울 창간 편집국장이자 추리소설가인 이상우의 회고록 링크를 보냈다.

이태원과 이상우는 옛날 사람들이다. 한 사람은 건달이자 영화제작자로 일세를 풍미했고 한 사람은 스포츠신문의 귀재이자 한국의 조르주 심농으로 알려져 있지만(안 알려져 있기도 하다) 두 사람은 한번도 함께 일을 하거나 마주치지 않았다. 최소한 회고록의 내용을 봤을 땐 그렇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정연씨와 내가 함께 한 GV의 픽션 속에서 잠깐이지만 마주했다.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는 6.10 민주항쟁이 있고 한달 후쯤 개봉한 작품으로 그해 한국 영화 흥행 1위를 기록했다. 관객 수는 약 28만명. 영화에 대해 할 얘기는 많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영화를 보면 알 것이다. 우리는 영화 보다 영화를 둘러싼 이야기를 주로 했다. 청춘영화의 계보나 당시 영화계의 상황 같은 것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과거의 영화를 보는 행위 자체의 곤혹스러움이었다. 만약 과거의 영화가 동시대의 영화를 뛰어넘는 걸작이라면 문제는 간단할 것이다. 과거의 영화가 역사의 과오를 되새기게 해주는 따위의 용도가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과거의 작품이 현재의 시각에서 안이한 범작일 때 발생한다. 스탠리 카벨의 말처럼 우리는 “결코 그 당시 알았던 것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과거의 작품을 보고 이야기해야하는 걸까? 우리가 역사학자도 아닌데 말이다. 안 보면 되는 것 아니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가장 불가능한 태도다. 과거는 더 이상 과거가 아니다. 아카이브와 네트워크를 경유한 너무 많은 과거가 현재에 존재한다. 우리는 이 범속한 과거들에 어떤 식으로건 응답 할 것을 요구받는다. 뭐라고 말할까? 그건 너무 비천하다고 무시하거나 그저 개인의 추억일 뿐이라고 뭉개고 넘어갈 것인가. 아니면…

7.
국문학자 권보드래는 기이할정도로 충격적이고 다층적인 3.1운동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직접성’과 ‘무매개성’을 동원한다. 파국과 유토피아가 함께 임박해 있다는 감각은 민중들의 시간성에 있어 직접성의 형식을 구성한다. 한편 무매개성은 문제가 좀 더 복잡하다. 3.1 운동은 일반적으로 기미독립선언서, 유관순 등으로 대표되어 왔다. 이러한 대표성에는 민족이나 진보라는 관념, 사회주의, 의회정치 등등이 매개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3.1 운동의 면면을 살펴보면 현실은 다르게 작동했다. 교통도 통신도 미비하고 변변한 조직체도 없는 시절에, 사람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운동에 참여하고 사건을 일으켰다. 권보드래는 묻는다 “인민은 대표되고 재현되어야만 하는가? 개별 그대로, 인민의 존재 그대로 사건의 동력이 될 수는 없는가?” “매개되지 않고 대표되지 않는 세계가 가능할까.”

이를 한국 영화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특정 사조나 흥행, 감독이나 작품 등으로 매개되지 않고 대표되지 않는 한국 영화의 역사가 가능할까. 영화가 실재의 찌꺼기처럼 존재하며 현실을 구성하고 작동시키는 시뮬레이션이라면, 그것을 개별 그대로의 동력으로, 사건으로 구조화할 순 없을까. 헤겔의 유명한 문구가 있다. “세계의 역사는 세계의 도살장이다.” 프랑코 모레티는 이 표현을 가져와 <문학의 도살장>을 썼다. 살아남은 소수의 문학과 사라져버린 다수의 문학. 추앙받는 소수의 영화와 비천해져버린 다수의 영화. 그러나 내가 원하는 건 양적 연구도, 형식주의도 아날학파도 아니다. 흥미롭게도 권보드래는 <3월 1일의 밤> ‘나가는 글’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아직, 3.1 운동을 만나면 길을 잃는다.”

나는 정연씨에게 답장을 썼다. “임창정 신보가 나왔네요. 17집. 유튜브 링크 보냅니다. 노래제목은 <트로트가 싫어요> https://youtu.be/wsH0mv3yZEc 왠지 <국제시장>이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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