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by.정지돈(작가) 2022-08-03조회 5,637

당신이 먹은 것이 무엇인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라고 18세기 프랑스의 법관이자 미식가였던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은 말했다. 그러나 금정연은 SNS에 음식 사진을 올리지 않는 사람이다. 셀카도 안 올리고 남이 찍어준 자기 사진도 안 올린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는데 관심이 없는 걸까. 금정연이 요즘 업데이트하는 건 자기 블로그 캡쳐 사진인데, 이것도 자기 어필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지속적이거나 유의미한 방식은 아니다(참고로 그는 오디오 전문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가 석달 만에 그만뒀다. 구독자는 2022년 7월 기준 40명. 가장 최근 올린 영상은 6개월 전의 것으로 GENE의 <I Say A Little Prayer>을 바이닐 판으로 재생한다. 조회수는 96. 댓글은 2개. 댓글 내용은 직접 확인하기 바란다. 참고로 한 사람이 두개의 댓글을 달았는데…)

솔직히 말하면 그의 SNS는 중구난방이다. 트위터에선 트위터의 법을 따르고 인스타그램에선 인스타그램의 법을 조금 따르긴 하지만, (육아 때문인지 마감 때문인지) 대체로 정신이 나가있다고 할 수 있다. 그와 개인적으로 아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의 SNS 자아는 실제와 거의 같다. 샤토브리앙은 이렇게 썼다.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프랑스 작가 중에서 자신의 작품과 비슷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 바꿔 쓰면,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작가 중에서 자신의 SNS와 비슷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금정연이 유일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그가 3년 만에 극장에 가서 <탑건: 매버릭>을 보고 <헤어질 결심>도 보고 트위터에 소감도 남겼다. 심지어 한영한사 지난 연재에는 탑건에 대한 글도 남겼다. 나는 21세기 한국 영화에 대한 연재에 왠 탑건이냐고 했지만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R2B>가 있잖아요, <창공>도 있고, 라고 했던가. <창공>이 뭐예요? 내가 묻자 정연씨는 말이 안 통한다는 듯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지돈씨. 왜 저랑 다른 세대인 척 해요? 네? 류시원이랑 김원준 나온 드라마 있잖아요. 류시원이요? 지돈씨도 알죠? 김원준이 류시원 데뷔시켜준 거?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정연씨가 왜 탑건에 대해 썼을까. 비천한 영화에 대한 논의를 지속하기 위해서? 아니면 어쩌다 극장에서 <탑건: 매버릭>을 봤고 마감은 다가왔고 억지로 논리를 맞춰야 해서? 모든 연재가 그런 식 아닌가? 그러나 어디서도 말한 적 없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는 톰 크루즈고 정연씨는 물론 그 사실을 안다. 지친 아저씨 류의 배우를 좋아하는 정연씨는 예순이 되어도 지칠 기색이 없는 톰 크루즈가 이해되지 않는지 내게 종종 묻기도 했다. 지돈씨, 지돈씨는 톰 크루즈가 왜 좋아요?

글쎄, 왜일까. 사실 이번 글에서 이렇게 답할 생각이었다. 톰 크루즈야말로 자본주의적 추상의 현현이라고,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히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죠. 마크 피셔는 말합니다.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한 닐 매콜리야말로 포스트 포드주의의 화신이라고. 닐 매콜리는 “익명의 이름, 가짜 여권의 이름, 역사가 없는 이름이다. … 하나의 스크린, 암호, 깊이를 알 수 없는, 냉정하고 전문가적인, 완벽한 준비.” 닐 매콜리에게 도덕이나 윤리, 역사는 무의미하거나 나중 문제다. 그는 단지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을 한다.” 그러니까 마이클 만이 21세기 초에 찍은 영화가 뭡니까. 바로 <콜래트럴>이죠. 포스트포드주의적 가치관으로 무장한 탈역사적 회색 킬러와 낭만주의적이고 포드주의적이며 아메리칸 드림의 신봉자인 택시기사의 대결. 그 킬러가 바로 톰 크루즈죠. 떠올려보세요, <탑건: 매버릭>에서 적의 존재를. 헐리웃 영화 역사상 가장 추상적인 적군이 나오는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이 애국주의적 영화는 그러나 생각해보면 대체 어느 나라에 충성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데(나라가 있다면 그건 톰 크루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건 톰 크루즈와 <탑건: 매버릭>의 감독인 조셉 코진스키가 함께 했던 2013년작 <오블리비언>에서 예고된 거나 다름없습니다. <오블리비언>의 외계인은 외계+인도 아니고 사실상 유기체인지도 알 수 없는 존재로, 표면적으로는 인간을 복제해서 내세우는 추상적 도형(원, 세모, 네모)의 형상을 한 추상 그 자체인데 이 추상적 존재에 의해 끝없이 복제되는 톰 크루즈의 적은 다름 아닌 톰 크루즈입니다. 영화를 보면 어떤 내용인지 아시겠지만 물론 정연씨가 이 영화를 볼 리는 없겠죠. 하지만 <엣지 오브 투모로우>를 떠올려보세요. 여기서 톰 크루즈는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는, 불사의 리셋-존재로 현현합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요? 영화니까 그런 거라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정말 단지 그 이유일까요. 제 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아는 탑 배우 중에 내면이 없는 사람은 톰 크루즈 하나라고요. 그러므로 “하나의 스크린, 깊이를 알 수 없는”은 비유가 아니라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톰 크루즈가 복제 가능하고 복제될수록 (존 말코비치처럼) 거북해지는 게 아니라 매력이 더하는 이유는 그에게 내면이나 깊이, 모순 따위가 없기 때문이죠. 그는 사실상 아무것에도 충성하지 않고(이단 헌트는 가족도 없고, 직책도 없고 상급자도, 국가도 안중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충성하고 적과의 싸움만 반복하는데, 그것은 그가 표면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추상성을 재현하는 일은 디지털 이미지도 포스트 시네마틱한 확장 영화도 아닌 복제 톰 크루즈가 하고 있다고, 마블 영화가 자본주의의 변명으로서 자본주의를 지속시킨다면 톰 크루즈의 영화는(사실상 지금의 헐리웃 영화는 이 둘로 나뉩니다) “서사를 포기한 채 충격과 스릴, 흥분이라는 감각적 경험에 모든 것을 내거는 것처럼 보인다”1) 고 나는 정연씨에게 답하려고 했지만 우선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것보다는 엔데믹 이후 다시 원래의 자리를 복귀한 것처럼 보이는 영화에 대해서, SNS에 줄을 잇고 있는 영화 인증에 대해서 묻기로 했다. 그러니까 왜 내 주변에는 <헤어질 결심>과 <애프터 양>과 하마구치 류스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것인지, 이렇게 난리가 났는데도 왜 “헤결”은 손익분기점을 겨우 넘은 건지(한 신문 기사에 의하면 “헤결” 각본집은 7월 18일 예약 판매 시작후 하루만에 6,000만부 이상이 팔렸다고 한다2) …), 왜 어떤 사람들은 <탑건: 매버릭>은 보고 “헤결"은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지, 왜 <토르: 러브앤썬더>를 본 사람은 한명도 없는지에 대해 묻기로 했다.

선호하는 작품이 다르고 같은 작품에 대해서도 평가가 다른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정연씨는 지금도 그러한 사실에 깜짝 깜짝 놀란다고 말했다. 역사의 불의를 처음 마주한 마르크스처럼 말이다. 똑같이 훌륭한 시민인데 어떻게 같은 영화에 대해서 이렇게 정반대의 말을 할 수 있는가. 문학에선 그런 일이 흔치 않다. 기본적으로 같은 문학 작품을 읽은 경우가 드물고 읽었다면 이미 그들은 합의의 공동체 또는 장에 속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문학은 끝났고 영화는 아직 가능성이 있다고 임재철 평론가가 말했던 것 같다고 정연씨는 말했다. 정확히는 맨날 보는 애들만 보면 뭐하냐, 안 볼 사람도 봐야 진짜 예술이지, 라는 식이었던 것이다.

안 볼 사람이 본다는 건 무슨 뜻일까. 그리고 그것들의 인증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영화를 무엇으로 변형시키는 것일까. 영화는 사바랭의 음식이 된 걸까. 며칠 전에 미팅을 진행한 어느 출판사는 사내 행사로 직원들이 다 같이 <헤어질 결심>을 봤다고 했다. 다른 업종의 회사도 “헤결”을 볼까? 아니면 <범죄도시2>? 노동자들이 함께 보는 영화는 어떤 의미일까?

케빈 켈리는 <통제 불능>에서 생명과 유사한 특성을 갖는 복잡적응계를 비비시스템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벌이나 개미처럼 개별적으로는 연약하지만 군집이 되면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들이 그 예다. 개별적일 때는 존재하지 않는 특성이 창발하는 것이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픽사의 공동 창업자인 로렌 카펜터는 라스베이거스의 회의장에서 5000명의 군중들과 실험을 했다. 사전 준비 없이 비디오 스크린 화면을 보며 다 같이 하나가 되어 비디오 게임 <퐁>을 하거나 카드섹션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실험의 절정은 비행기 조종 시뮬레이션이었다. 왼쪽에 앉은 사람들은 비행기의 좌우기울기roll을 조종하고 오른쪽 사람들은 상하요동pitch를 조종했다. 대형 스크린 위에 비행기는 떠 있고 조종사는 경험이 전무한 5,000명의 사람이다. 비행기는 분홍 산들 사이의 분홍 계곡에 있는 활주로를 향하고 있었다. 상황은 곧 급박해졌다. 회의장은 고함소리와 비명소리로 가득찼다. 왼쪽! 왼쪽!! 오른쪽~~!!! 오!른!쪽! 군집은 혼란을 일으켰고 비행기는 갈지자를 그리며 추락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어느 순간 5,000명의 조종사는 착륙 시도를 중단하고 고도를 높이고 기수를 돌렸다. 그들이 갑자기 어떻게 합의한 것일까? 지휘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비행기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크게 선회했다. 그러더니 아무런 논의 없이 함께 날개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지평선이 어지럽게 돌아가면서, 비행기는 크고 아름답게 360도 회전을 하며 하늘을 가로질렀다.

케빈 켈리는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철새떼들이 하는 행동, ‘무리지어 날기’를 했다고 썼다. 새들은 그들이 어떤 모양을 만드는지, 규모나 배열, 형태 등에 대한 개념이 없다. 그들은 단지 군집에 감응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패턴을 만들어내고 개별일 때보다 더 놀라운 반응과 움직임을 선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개별 영화가 새라면, 시네마는 철새떼, 개별 영화가 벌이라면, 시네마는 벌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한편의 영화를 보고 거기에 대해 말하고 반응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영화가 지금과 같이 존재하는 것은 영화가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화에 대한 사유는 걸작이나 비천한 영화 개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뛰어난 작가-감독이나 명배우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숫자와 그것들의 연결에서 온다. 루이스 부뉴엘은 “노동자들을 좋아하고 존경하며 이들의 노하우가 부럽다”고 말하며, 안제이 바이다의 영화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한 편의 영화에서 다른 영화로,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흘러가는 비밀스러운 연속성 속 무언가가 내게 감동을 준다.”3) 

***
1) 서동진, "시네마 이후의 이미지 : 자본주의적 추상은 재현 가능한가"(2021)
2) 이투데이, "N차 관람→'왜놈 칠 결심' 밈까지...'헤어질 결심'의 조용한 신드롬"
3) 루이스 부뉴엘, 이윤영 옮김 <루이스 부뉴엘>(을유문화사, 2021)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정지돈, 2022.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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