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by.정지돈(작가) 2022-03-30조회 3,505


어제는 제 20대 대통령 선거일이었고 나는 오후 1시 즈음 코인세탁소에 이불 빨래를 돌리고 성원초등학교에 들러 투표를 했다. 어느 때보다 경쟁이 치열하고 향방을 알 수 없는 선거라지만 투표에 어려움은 없었다. 나는 약 20년 정도 되는 투표의 나날동안 일관되게 한 당과 그 당의 후보에 표를 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선거 때마다 같은 말을 듣는다. 사표를 만들지 말아달라, 이번에는 어떤 후보가 되는 걸 막아야돼, 니 고집만 지켜서 될 일이 아니야 등등. NL 출신 금정연씨(42세)의 사정은 어떨까. 그와 나는 정치 이야기를 거의 나누지 않는다. 정치에 냉소적이거나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왜 할 말이 없냐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말을 하기 시작하면 생각이 시작되고 생각이 시작되면 행동을 꿈꾸게 되는데 그 일이 우리를 막다른 곳으로 몰고가기 때문에. 그러나 이번은 다르고 이제는 다르다(는 생각도 든다). 세상은 변하지 않지만 어느새 세상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징징대는 건 이제 그만. 그래서일까. 금정연은 정치 트윗을 리트윗하고 세태/세대에 대한 담론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고 우리는 어쩌면 이것이 한국 영화에서 길 잃은 한국 사람들이 길을 찾는 방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는 선거일을 기념해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정치 에세이 <기운내, 심바: 안티 후보의 트레일에서 보낸 일주일>을 읽었다. “롤링스톤즈”의 특파원 신분으로 2000년 공화당 대선 경선 후보 존 매케인의 캠프를 밀착 취재한 기사인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글을 삐딱한 자세로 읽기 시작했다. 공화당 후보를 옹호하는 기사를 쓰다니 제정신이 아니군 생각했던 것이다. 역시 DFW는 근본주의자야(여기서 근본주의자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실천은 급진적이지만 신념은 보수적인 일군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나만의 용어로 구체적인 설명은 글의 방향과 어긋나니 나중으로 미루겠다. 그럼에도 부연하는 까닭은 1. 근본주의자라는 용어에 대한 오해를 피하고 2. 근본주의자들이 특정 장에 끼치는 영향이 상당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기사는 충분히 흥미로웠다. 고귀한 보수의 상징인 존 매케인(버락 오바마와 대선에서 맞붙었을 당시 네거티브를 요구하는 언론과 지지자들에게 매케인은 오바마는 훌륭한 시민이며 우리는 의견이 다를 뿐이다, 라고 대답했다. 물론 그는 대선에서 패했다)의 인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어서가 아니라 특정 현상에 대해서, 그리고 그 현상을 경험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DFW는 “이 글은 어떤 인상적인 인물의 선거운동을 다룬다기보다는 밀레니얼 세대의 정치와 그 모든 포장과 홍보와 전략과 미디어와 여론 조작과 만연한 부패가 우리 미국인 유권자로 하여금 실제로 어떻게 느끼게 하는지에 대해” 다룬다고 쓴다. 여기서 인물과 선거운동 따위를 작품이나 영화 등으로 바꾸면 어떨까. 그러니까 한영한사가 진짜 다루고 싶은 건 어떤 작품이 왜, 어떻게 좋으냐가 아니라, 작품과 그 작품을 둘러싼 환경을 우리가 실제로 어떻게 느끼고 경험하고 재생산하는가 라고 말이다.

한편, 정연씨는 꿈을 꿨다고 했다.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둔 밤이었고 매일 같이 악몽으로 시달리던 한 주였기 때문에 꿈을 꿨다는 사실 자체는 특별할 게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꿈은 달랐다. 정연씨는 한국의 영화제 시상식에 있었다. 부산국제영화제인지 대종상인지 청룡영화상인지는 알 수 없다. 그게 그건가 싶기도 하고, 셋 모두 보지 않는 정연씨로서는 구분할 방도가 없었던 탓이다. 그러나 한국의 영화 시상식임은 분명했다. 사회자는 왜인지 박솔뫼였고(또는 박솔뫼 역할을 하는 김혜수) 시상자로는 소설가 김연수가 나왔다. 다만 정연씨의 꿈에서 김연수는 소설가가 아니라 영화감독이었고(“아마 홍상수 영화에서 맡은 배역 탓이겠죠.” 정연씨가 말했다) 얼굴은 허진호와 닮아있었다. 그러면 정연씨는 어떻게 김연수가 김연수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외모도 직업도 다른데 김연수가 맞긴 한 걸까. 김연수를 규정하는 영혼의 징표라도 존재하는 걸까. 내가 정연씨에게 말하자 정연씨는 그게 꿈의 신기한 점이라고 했다. “꿈에서는 우리를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나 과거와 같은 전기적 사실보다 생각이 현실을 규정하니까요.” 정연씨는 칼 융의 공시성을 생각해보라고 했다. 우리가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 정신의 작용이라면. “정신이 물질과 상호작용한다는 사실이 정신과 물질을 가르는 경계가 모호하다는 증거예요.”

“그게 한영한사랑 무슨 상관이에요?” 

내가 정연씨에게 물었다. 

참고로 우리는 에세이 필름 제작을 위해 서교동의 카페에서 미팅을 진행 중이었다. 미팅 전에 나는 DFW 에세이를 읽고 든 생각을 말했다. 21세기 한국 영화를 말할 때 보통은 비평적으로 훌륭한 영화를 나열하고 그 의의를 평가한다. 홍상수, 이창동, 봉준호 등. 특정인의 감식안에 선정된 영화들이 곧 한국 영화인 것이다. 그게 아니면 산업적인 측면을 주목한다. 천만 영화의 등장, 제작, 유통의 변화, 새로운 기술의 도입 또는 한국 영화의 해외에서의 위상 등. 그러나 그게 정말 우리가 경험한 한국 영화일까. 이런 과정들은 중요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우리의 경험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그렇게 고민을 하는 와중에 정연씨가 뜬금없이 꿈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정연씨는 엠마뉘엘 카레르가 쓴 필립 K. 딕의 전기 <나는 살아있고 너희는 죽었다>를 읽고 있다고 말했다. PKD를 따라 주역과 칼 융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그들이 미국영화와 한국영화, 현재의 정치 상황과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이다.

“20세기 말 이후의 모든 미국 영화는 PKD의 자장 아래 있습니다. <매트릭스>, <트루먼 쇼>, <다크 시티>, <플레전트빌>에서 시작됐죠.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요? 미국 영화는 PKD의 편집증적 우주다. 그리고 21세기 한국 영화는 미국 영화죠. <기생충>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고 이정재가 미국배우조합상 남우주연상을 받은 사실을 생각해봐요. 이곳은 누구의 편집증적 우주일까요? 윤석열?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영화라는 우주가 그것을 보고 원하는 사람들의 정신과 원격작용을 한다는 뜻이에요.” 

정연씨가 말했다. 나로서는 알아듣기 힘든 이야기였지만(<플레전트빌>이나 <다크 시티>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나요?) 정연씨의 편집증-꿈-영화제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정연씨의 꿈에서 작품상을 받은 영화는 <돈 룩 업>이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제니퍼 로렌스, 아담 맥케이, 티모시 살라메가 나란히 도열해서 박솔뫼와 김연수가 주는 상을 받은 것이다.

“작품상은 보통 제작자가 받지 않나요?”
“그건 핵심이 아니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정연씨가 하고 싶은 말은 다음과 같았다. <기생충>, <오징어게임> 같은 한국의 영화/드라마가 로컬이자 글로벌인 미국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것은 이상하지만 납득할 수 있는 현상이다(정연씨는 아이비리그 인류학과 박사과정생들의 면면을 살펴보라고 했다. 각국의 학생들이 자국의 가장 중요한 문화인류학적 사안을 미국에서 연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헐리웃 영화다). 하지만 반대로 한국 영화제에서 헐리웃 영화에 상을 주면 어떨까?

“지금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가 누구죠?” 정연씨가 말했다. 
“윌 스미스?” 
“그렇죠. 윌 스미스가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받는 거예요.” 
“오… 그런데 윌 스미스가 상을 받으러 올까요?”
“지돈씨,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필립 k. 딕의 전기에 이런 문장이 나와요. ‘네 엄지발가락에서 해방되어라. 그리하면 벗이 다가오리니 그를 믿어도 될 것이니라’.”
“그게 무슨?”
“영화를 엄지발가락이라고 생각해보세요.”
“?”
“이렇게 말해보죠. 지돈씨 <명량> 봤어요?”
“아니요.” 
“<해운대>는?”
“아니요.” 
“<국제시장>은?”
“아니요.” 
“하지만 이 영화들은 모두 천만 영화죠.”
“그렇죠.” 
“제 말이 바로 그거예요. 사람들이 정말 이 영화를 봤을까요?”
“사람들이 안 봤는데 본 척 한다는 말이에요? 천만영화는 음모다?”
“아니요. 이게 무슨 나꼼수도 아니고. 핵심은 영화라는 ‘형식’이 단지 내적인 요소로 짜여진 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정연씨는 나윤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데리러 가는 길에 곰곰히 생각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21세기 한국 영화에 대해 얘기하려면 정말로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 말이다. 그러던 중에 버스에서 PKD의 전기를 읽었고 잠이 들었고 꿈을 꿨고 영화가 어쩌면 개인들의 편집증적 우주라는 생각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러한 편집증적 우주의 공시성 속에서 살고 있는 거고. 

“오.”

정연씨에 따르면 영화를 보는 것은 어떤 작품의 내용이나 내적인 형식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다양한 사회정치적 형식들이 영화라는 형식과 마주치고 얽히면서 의식이나 행위를 조직하고 나아가 삶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저는 그걸 영화 경험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정연씨가 말했다. 사람들은 단지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영화 이상을 보거나 영화 이하를 본다.

“캐롤라인 레빈은 이렇게 말했죠. 의미보다는 패턴을, 해석적 깊이보다는 관계의 복잡성을 찾는것이 비평이라고. 가장 전략적인 정치적 행위는 사회적 경험을 지배하는 서로 다른, 연결성 없는 배열들을 면밀하고 세심하게 이해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좋은 말인데… 그래서 어떻게 해야되는 건데요?”
“저는 사람들이 영화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할 것을 제안합니다. 더 나아가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하는 것도요.”
“그게 무슨…?”
“예를 들면, 유튜브 영화 채널은 영화 리뷰를 보는 용도일까요, 영화를 보는 용도일까요? 다시 말해, 이 재생산의 플랫폼이 영화와 무관하게 존속할 수 있다면 그건 무슨 의미일까요?”
“그 말은 영화가 없어도 영화 리뷰 채널이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인가요?”
“그건 장 보드리야르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네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영화 보다 영화에 대한 것이 더 영화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정연씨의 말을 들으며 왜인지 최근 읽은 워커 퍼시의 소설 <영화광>을 떠올렸다. 주인공 빙크스 볼링은 이렇게 말한다. “사실 나는 못 만든 영화라도 일단 빠져들면 무척 행복하다.” 다시 말해, 빙크스 볼링에게 좋은 영화 나쁜 영화는 문제가 아니다. 영화의 내용 역시 문제가 아니다. 그가 동경하는 헐리웃 스타 윌리엄 홀든은 어떤 영화에 나오든 윌리엄 홀든이다. 그렇다고 그가 완전히 현실의 윌리엄 홀든인 것도 아니다. 영화 속 인물과 실존 인물 사이 어딘가에 윌리엄 홀든이 있고 빙크스 볼링은 일상 속에서 그 형상을 반복적으로 창조하고 구성하는 것이다. 

<영화광>은 씨네필에 대한 소설도 아니고 빙크스 볼링도 씨네필이 아니다. 그러나 볼링은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영화광이고 영화 경험의 창조자다. 그에겐 모든 현실이 영화 경험을 경유해 “인증” 된다. 예를 들면 볼링은 요즘 세상에서는 어디에 살든 그곳에서 진짜 산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다고, 공허감만 팽창할 거라고 말한다. 이러한 공허감을 불식시킬 유일한 방법은 자기 동네가 영화에 나오는 것이다. 영화에 자신이 사는 곳이 나오는 순간 그곳은 “아무 데가 아니라 특정한 데”가 된다. 

이것을 영화 경험이 만들어낸 편집증적 우주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21세기 첫 20년 후의 대한민국이라는 편집증적 세계 속에서 영화를 경유해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면 그 반대가 될까.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정지돈, 2022.08.03.

초기화면 설정

초기화면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