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by.금정연(작가) 2022-12-07조회 1,878

짧은 여행의 기록(2)

3-1: 내 나이 42세, 이젠 오직…
위트앤시니컬이 있는 대학로는 내게 추억의 장소다. 90년대 후반, 나우누리를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을 만나던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아니면 신촌이거나. 그래서 매일 밤 채팅을 통해 우정을 쌓아가던 라이터37(나희도)과 인절미(고유림)가 마로니에 공원에서 만나기로 약속하는 장면이 내게는 반갑고도 무척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때 그곳에서 그들을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마음 울적한 날에 거리를 걸어 보다가, 혹은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도 보다가… 모두 동년배니 꼭 그곳이 아니더라도 어디선가 한번쯤 마주쳤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나저나 이제 우리도 슬슬 관리해야 하는 나이인데 다들 건강은 괜찮은지…

하지만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다. 오늘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번개’나 ‘추억여행’ 같은 걸 위해서가 아니다. 상을 (대신) 받기 위해서다.
처음 대리 수상을 부탁받았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냥 3단계면 끝나는 일 아닌가? 그러니까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기 위해서는 냉장고 문을 열고, 코끼리를 넣고, 냉장고 문을 닫으면 되는 것처럼.

1. 시상식장에 간다. 
2. 상을 받는다.
3. 집으로 돌아온다. 

물론 3단계면 끝나는 일이 맞긴 하다. 그 사이사이에 놓인 민망하고 귀찮고 자질구레한 일들을 제외한다면…
늦지 않게 도착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동양서림으로 들어가는데, 어쩌면 내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책을 구경하고 있는 김정환 선생(시인, 69세)의 옆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나는 2018년에 출간된 내 책 [아무튼, 택시]에서 김정환 선생과의 에피소드를 가볍게 언급한 적이 있다. 바로 이렇게. 

…파마를 하고 며칠 뒤 김준성문학상 뒤풀이에서 김정환 시인을 만났다. 김정환은 내게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개를 좋아하는 생계형 서평가이자 한 여자의 남편이며 지금은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는 후장사실주의 동인인 동시에 계간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을 맡고 있는, 전에도 몇 번 선생님에게 인사드렸던 37세 금정연이라고 말했다. 젠장, 나는 자기소개가 정말 싫다.
“뭐? 진짜?” 김정환이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처럼 안 생겼는데.”
누군가 물었다.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은 어떻게 생겼는데요?”
“문학에 대한 고뇌로 얼굴이 아주 썩었지. 이인성처럼. 근데 여긴 달라. 얼굴에 문학에 대한 고뇌가 전혀 보이지 않아. 훤해. 잘생겼어. 나랑 똑 닮았어.” 
김정환 시인은 1954년생이다. 그리고 윌리스를 닮았다……
몇 주 후에 문학과지성사 시상식장에서 김정환 시인을 다시 만났다. 그는 내 옆자리에 앉아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날은 미안했소……” 
나는 괜찮다고, 좋은 말씀해주셔서 감사했다고 말했다. 나는 시상식장을 나서며 두 번 다시 파마 따위는 하지 않겠노라고 문학의 이름으로 맹세했다.

윌리스는 “내 나이 35세, 이젠 오직 돈 생각뿐이다”라는 밈으로 유명한 루이 말 감독의 <앙드레와의 저녁 식사>의 주인공이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안녕하세요” 작은 목소리로 인사한 다음, 그 상태로 시인을 지나칠 때까지 몇 걸음 걸어간 다음에야, 고개를 들고 위트앤시니컬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랐다. 며칠 전에 새로 파마한 머리가 이마를 부드럽게 간질이는 게 느껴졌다…

시상식장에서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좋은 소식. 스무 명 남짓한 규모로 치러지는 시상식이라 사람이 많지 않다. 다음은 나쁜 소식. 그중 절반이 나와는 조금 어색한 사이에 있는 ‘선생님’들이고 나머지 절반은 시 부문 수상자인 신해욱 시인의 내가 모르는 지인들이다… 

들어가자마자 오늘도 문학에 대한 고뇌로 가득해 보이는 이인성 선생(소설가, 70세)이 있어서 꾸벅 인사했다. 이인성이 웃으며 말했다. 허허 근데… 누구시더라? 나는 개와 고양이를 좋아하는 프리랜서 마감 노동자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이며 지금은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는 후장사실주의 동인인 동시에 한때 계간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으로 활동하며 선생님과 몇 번 서로 다른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던 42세 금정연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냥 금정연이라고. 그러자 이인성이 말했다.
아, 금정연씨! 어떻게 지내시나? 요즘도 맨날 글 쓰고 그러고 있나?
나는 하하 뭐 그렇죠, 대꾸하며 마음 속으로 정지돈에게 과연 상금의 몇 퍼센트를 요구하면 좋을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위: 영화 <앙드레와의 저녁식사>에 출연한 김정환 시인, 
아래: 영화 <강변호텔>에 출연한 김정환 시인)

3-2: 복사꽃
그날 일도 이제는 가물가물하다. 희미하게 일렁이는 시간의 베일 뒤로 수치스럽고 민망했던 그날의 기억들이 반딧불처럼 잔존하고 있기는 하지만 구태여 그걸 끄집어낼 필요는 없을 거라고 믿는다. 물론 좋은 기억들도 있다. 그것들에 대해서라면 언젠가 또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영화 <동사서독> 중에서)

4-1: 꿈에
악!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와 나, 그리고 또 나밖에는… 오스스 몸이 떨려와서 주섬주섬 이불을 찾아 몸을 덮었다. 기억은 서서히 돌아왔다. 어제는 시상식이 있었다. 시상식이 끝나고 뒤풀이를 했다. 그리고 술을 마셨는데, 물론 그 술은 한 잔만 마셔도 지난 일을 모두 잊게 해준다는 취생몽사 같은 건 아니었다. 그냥 테라, 기네스(생), 편의점에서 파는 세계맥주 몇 개…

나는 텅 빈 방 안에 멍하니 앉아 두서없이 떠오르는 간밤의 기억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복사꽃, 복사꽃 아님, 복사꽃, 복사꽃 아님, 복사꽃 아님, 복사꽃 아님, 복사꽃 아님, 복사꽃 아님, 복사꽃 아님, 복사꽃 아님, 복사꽃 아님…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건 정말 어젯밤의 기억인가? 어쩌면 내가 ‘한영한사’ 마지막 연재를 준비한답시고 홍상수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건 아닌가? <강변호텔>과 <소설가의 영화>를 보며 시인으로 나오는 기주봉이 김정환 시인이랑 너무 똑같이 닮아서 영화를 보는데 자꾸 다른 생각이 들었던 것처럼, 아니 정확히 반대로, 어제 만난 김정환 시인이 <강변호텔>과 <소설가의 영화>에 나오는 기주봉과 너무 똑같이 닮아서 현실과 픽션이 뒤섞여버린 게 아닐까? 아니면 그냥 꿈을 꾼 것인지도 모르고.

하지만 마지막 가설은 이내 기각되었다. 간밤에 실제로 꾸었던 꿈의 조각들이 의식 위로 불쑥불쑥 떠올랐던 것이다. 평론가 임재철과 대통령 윤석열과 영부인 김건희가 나오는 꿈이었다…

씻고 설거지 하고 어제 (대신) 받은 꽃다발 꽃병에 꽂고 나윤이랑 영상 통화했다. “아빠! 나 여기 안산 할아버지네 집에 있어!” 나윤이가 말했다. 나윤이 안산 할아버지네 집 가고 싶어했잖아, 가니까 좋아? 물으니 “응, 전에 할머니랑 아빠랑 같이 차 타고 왔잖아”라고 했다. 그래, 바로 어제… 그러다 갑자기 내일 서울 할머니네 집에 가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하니까 표정이 바뀌더니 울먹이며 말했다. “나한테 안 물어봤잖아…” 그래서 미안하다고, 다음부터 꼭 물어보겠다고 했는데 단단히 마음이 상한 모양인지 안 가겠다고 해서 내일 다시 생각해보자고 했다.

행신에서 출발해서 광주송정으로 향하는 12시 18분 KTX-산천 417호 열차를 타기 위해 집에서 나섰다. 시간이 조금 남아서 근처 복권방에 들러 로또와 연금복권을 한 세트씩 샀다. 그리고 버스를 탔다.

마지막으로 행신역에 왔을 때는 공사중이었는데, 공사가 끝난 지금은 제법 넓고 환해 보였다. 연휴의 첫날이라 그런지 엄마 아빠를 따라온 아이들이 많았다. 저마다의 속도로 걷고 뛰고 말하는 아이들. 나는 나윤이를 생각했다. 아이의 눈과 코와 입과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표정들을, 무언가를 설명하기 전에 몇 번이나 곱씹는 말의 처음과 거기에 동반되는 손과 발의 움직임 같은 것들을. 이것들을 모두 버리고 나는 무엇을 얻고 있는 것일까요? 하는 질문이 절로 들었다…

물과 초코바를 사서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내 상식과는 달리 에스컬레이터가 중간에 있는 게 아니라 1호차 쪽에 있어서 18호차를 타려면 반대편 끝까지 걸어야 했다. 아마 5키로미터 정도는 걸은 것 같다. 그러면서 나는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와 미국의 철도 전쟁, 그리고 영화의 탄생에 대해 숙고했다(리베카 솔닛의 [그림자의 강]을 참고할 것). 거짓말이다. 그저 [마틴 에덴] 오프닝 시퀀스에 짧게 지나가는 기차 장면에 대해 조금 생각했을 뿐이다.

미리 말해두자면, 로또와 연금 복권은 꽝이었다. 나는 대통령 꿈을 꾼 또 한 명의 복권 당첨자가 되는 대신 그냥 윤석열 대통령 꿈을 꾼 사람이 되었다.
 
(위: 에드워드 머이브리지, ‘Railway Tracks. P.R.R. Quadruple Tracks Monmouth’
아래: 영화 <마틴 에덴>의 한 장면)

4-2: 빵과 장미
김재욱이 너무 많다. <커피프린스 1호점>과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에 출연한 배우 김재욱, ‘안녕하세요 제니퍼에요’라는 유행어로 유명한 코미디언 김재욱, [쇼미더머니 11] 2차 예선에서 댐핑 좋은 붐뱁을 선보이며 심사위원 올 패스를 받은 래퍼 김재욱, 바로 오늘 내가 주문한 [데이비드 댐로쉬의 세계문학 읽기]를 한국어로 옮긴 번역자 김재욱… 하지만 내가 아는 김재욱은 한 명뿐이다. 90년대 중반에 나우누리에서 만나 신촌과 대학로와 홍대와 그밖의 많은 곳들을 함께 싸돌아다니던 김재욱(아이디 gokjw).

지금 우리는 광주에 있다. 김재욱과 나. 광주는 두 번째였다. 그렇지만 처음이나 다름없다. 십년 전, 지금은 만나지 않는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대절한 관광버스를 타고 도착해서 축의금을 내고, 사진을 찍고, 밥을 먹고, 다시 관광버스를 타고 돌아간 것이 전부였다. 광주에 도착해서 처음 느낀 건 빛이 다르다는 거였다. 과연 빛의 고을이었다.

우리는 광주송정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문화전당역에서 내렸다. 마침 광주프린지페스티벌이 한창이었다. 쏟아지는 사람들, 빛들, 노랫소리들. 금남로를 건너 김재욱이 검색해서 찾은 ‘맛집’을 향했다. 월계수식당. 김재욱은 특제 소스와 함께 비벼 먹는 삼선볶음밥을, 나는 우삼겹짬뽕을 주문했다. 없던 숙취까지 몽땅 가시는 맛이었다. 지금 내게 숙취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직 GV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다. 우리는 충장로를 걸어 광주극장을 향했다. 중앙로를 사이에 두고 분위기가 갑자기 변하는 게 조금 신기했다. 식당이 있던 위쪽은 조금 북적북적한, 전국 어디에나 있는 ‘로데오 거리’ 같은 느낌이었다면 광주극장이 있는 아래쪽은 의상실과 금은방 등이 있는 좀 더 고풍스러운 분위기였다. 광주극장과 잘 어울리는 거리라고 해야 할까. 극장 바로 옆에는 <김군> 포스터가 크게 붙여진 ‘소년의 서(書)’라는 이름의 서점과 ‘빵과 장미’라는 이름의 빵집이 있었다. 

물론 ‘빵과 장미’라는 이름은 켄 로치가 감독한 동명의 영화에서 따온 것이다. <빵과 장미>는 우리나라에서 2002년 5월 24일 개봉했다. 누적관객은 444명. 그 444명 중에 나도 있었다. 2002년의 초여름, 당시 만나던 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고 나와 맞은편의 웬디스(Wendy’s) 2층에 앉아 햄버거를 먹으며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이 난다. 양배추 조각과 여기저기 묻은 빨간 케찹과 애드리안 브로디의 콧등 위로 떨어지던 햇빛 같은 것들이.

하지만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다. 정말이지 시간은 늘 없다. 오늘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극장에 대한 개인적인 추억에 빠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단관극장(중 하나)에서 서이제 작가와 함께 [마틴 에덴] GV를 하기 위해서다. 오해하면 안 된다. 이제 와서 내가 갑자기 극장을 찬양한다면 그건 제법 우스운 일이 될 거라는 사실을 나도 안다. 나는 유운성 평론가가 말하는 ‘빛 마니아’가 아니고,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종류의 씨네필 테스트도 통과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나는 우리의 기억이 형성되는 방식에 대해 잠깐 생각해보고 싶다. 어떤 책의 페이지를 (다시) 펼쳤을 때 문득, 그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더라도 종종 그것을 읽던 당시의 빛과 바람, 손에 들린 종이책의 감촉과 냄새 같은 것들이 떠오르는 것처럼, 어떤 영화에 대한 기억은 극장과 분리할 수 없이 달라 붙어 나라는 관객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기도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서울극장에서 본 바즈 루어만의 <로미오와 줄리엣>, 고등학교 시절 녹색극장에서 단체 관람했던 <콘에어>와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이대 영화마당에서 교복을 입고 본 <셰익스피어 인 러브>(미성년자 관람불가), 동기들과 ‘국문학 입문’ 강의를 째고 강변 CGV에서 봤던 <친구>와 <신라의 달밤>, 군대에서 휴가 나온 기분으로 불광 CGV에서 친구와 함께 봤던 <박쥐>, 기타 등등… 그건 어디로도 닿지 않는 개인적인 기억일 뿐이지만, 어쨌거나 그건 나의 기억이다. 프란체스코 카세티의 말처럼, 손상되기 쉽지만 기억은 과거를 되찾으려는 욕망의 원천이다. 그리고 욕망은 우리를 살게 한다. 기억이 없이는 ‘나’라는 존재도 없다. 꼭 있어야 하는 건지는 둘째치고… 그러니까 내 말은, 광주극장이 오랫동안 우리 곁에 머물러 있으면 좋겠다는 거다. 얼마 전에야 광주극장에 처음, 그것도 일 때문에 가본 사람이 하기에는 조금 머쓱한 말이긴 하지만.

이 부분을 쓰며 나는 혹시 모를 기억의 오작동을 방지하기 위해 구글에 ‘광화문 웬디스’라고 친다. 나무위키의 ‘웬디스’ 항목 다음으로 나오는 것은 2018년 2월 17일에 올라온 클리앙 게시물이다. 제목은 이렇다: “광화문에서 웬디스 먹어봤으면 아재 인정” 어 인정…

(빵과 장미, 외부와 내부)

4-3: (Unexpected) Guest Visit
그렇게 싸늘한 반응의 행사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2015년 12월의 어느 날 정지돈과 함께 명동 CGV에서 했던 빔 벤더스 감독의 <에브리씽 윌 비 파인> GV에 버금갈 정도였다(당시 행사 직후 SNS에 ‘올해 최악의 지브이’라는 평이 올라왔다). 관객은 40명 남짓, GV가 시작할 때는 30명 정도였고, 끝날 때는 그보다 더 적었다. 몇 명이 되었건 모두들 많은 것을 잊고 복사꽃이 좋았던 것만 기억하시기를. 그러니까 서이제 작가의 멋진 말들만…
 
(영화 <마틴 에덴> 중에서, 혹은 GV를 끝낸 어느 Guest의 마음)
(참고로, 그날 내가 GV에서 (하려고) 했던 말들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모든 것이 끝난 후 민망하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한 마음으로 광주극장을 나서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었다. 어떤 남자의 목소리로 몇 시냐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6시”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6시예요, 영화는 이미 끝났어요”라고 말했다.
그제야 나는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키가 크고 마른 체격의 남자였다.
광주에는 이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곧 나는 잃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난 “잃을 게 아무것도 없어!”라는 말을 큰 소리로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 같아서 그 문장을 큰 소리로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 남자는 시계를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시계를 잃어버린 후로는 이따금 사람들에게 말을 걸지 않을 수 없다오.”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
“시계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당신에게 말을 걸지 않았을 거요.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을 거요.”
그는 내가 6시라고 말한 후에야 6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러고 보니 오늘 아홉 시간 동안 한 가지 생각만 하면서 쉬지 않고 걸어 다녔다는 걸 알게 된 것 자체가 무척 흥미롭다고 말했다. “쉬지 않고 말이오. 왔다 갔다 한 게 아니라 곧장 앞으로만 걸어갔지. 그런데 이제 보니 원을 그리면서 걸어 다녔군. 미친 짓이지, 그렇지 않소?”하고 그가 말했다.

그는 “나는 자주 저 극장에 갔었다오” 하고는 내게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이름을 곧 잊어버렸다. 나는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누구나 어느 날엔가 마지막으로 극장에 가듯이 나도 어느 날 마지막으로 극장에 갔지. 웃지 마시오”하고 그는 말했다. “무슨 일이든 언젠가는 마지막이 있기 마련이오. 웃지 마시오!”

4-4: 인터내셔널의 밤
(ㄱ) 트뤼포에 앉아서 트뤼포를 마셨다. 소설가 박솔뫼가 추천한 곳이었다. 나는 언젠가 ‘박솔뫼의 맛따라 멋따라’라는 제목으로 박솔뫼가 전국 각지의 맛집을 찾아다니며 음식을 먹는 유튜브를 기획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기획은 여전히 유효하며 투자자를 기다리고 있다. 한국영화에 대한 우리의 오디오비주얼 에세이가 그런 것처럼… 

다만 트뤼포는 솔뫼가 직접 가본 곳은 아니었고, 이름을 듣고 언젠가 가보겠다고 기억해둔 곳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갔다. 한쪽 벽면이 DVD로 가득한 작고 아담한 느낌의 바였다. 손님도 많았다. 시그니쳐 메뉴인 트뤼포는 조금 달달한 우롱하이 같은 맛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분명 고다르라면 질색을 할 맛이라는 부분이 특히 좋았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사실이 아닌 것은 한 글자도 쓸 수 없는 나의 다큐멘터리스트적인 본성이 발목을 잡았다. 고다르가 시가를 피우는 모습은 많이 봤다. 와인을 마시는 모습도 본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어디서? 나는 구글에 ‘did jean luc godard drink a lot?’이라고 검색했다.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2002년 9월에 작성된 더글로브앤메일의 기사였다. 제목은 ‘외로운 밤들과 장 뤽 고다르와 함께 한 술자리(Lonely nights and drinks with Jean-Luc Godard)’. 25년간 토론토 국제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 일하다 올해 은퇴를 선언한 스티브 그레이브스톡의 부인인 케리 허프먼이, 남편이 영화제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동안 자신은 ‘Festival Widow’나 다름없다고 자조하며 구술한 기사였다. 

그렇지만 정말 멋진 순간들이 있긴 해요. 허프먼은 말한다. 어떤 영화를 보면 좋을지 내부 정보들을 얻을 수 있거든요. 그리고 스티브가 감독을 위해 준비한 칵테일 파티나 저녁 식사에 참석하기도 하죠. 그런 자리가 아니면 백만 년이 지나도 못 만날 흥미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요. 몇 년 전에는 장 뤽 고다르랑 같이 술을 마셨는데요. 정말이지 인상적인 사람이었어요. 모두들 그에게 푹 빠져서 자기들이 뭔가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전전긍긍했지 뭐예요!

두 번째는 2015년 6월에 작성된 더스튜디오EXEC의 ‘장 뤽 고다르의 우유를 마십시다 캠페인’이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하며 눈을 크게 뜨고 봤는데 알고 보니 패러디 기사였다…
상반된 분위기의 기사가 이어진다. ‘와인과 와인문화에 초점을 맞추는 잡지’ [와인 스펙테이터], ‘그 어느 때보다 더 크고, 낫고, 빠르게 변해가는 위스키 업계에서 누구보다 빠른 소식을 전해주는 증류주 전문지’  [위스키 애드버킷]과 함께 M. Shanken Communications에서 발간하는 ‘좋은 삶과 시가의 세계를 즐기는 데 전념하는 잡지’ [시가광Cigar Aficionado] 1997년 9/10월 호에 실린 ‘프랑스 영화의 주저하는 천재’라는 제목의 인터뷰다. 인터뷰어는 LA타임스의 스콧 크래프트.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장 뤽 고다르는 극소수의 관객이 감상하는 이해할 수 없는 영화를 만들고 있으며, 그는 변화할 생각이 없다.”

25년 전에 이미 66세였던 고다르는 말한다. 나는 모든 종류의 영화를 하고 싶다. 모든 영화 속에 있고 싶고,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고 싶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나는 사운드를 발견한 감독 중 하나가 되고 싶다. 하지만 나는 사운드를 발견한 사람들의 슬픔도 알고 싶다. 요즘은 쫓겨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오늘날 영화를 만드는 건 애플 컴퓨터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라.

스위스 시골에 은거하는 괴짜 예술 감독을 인터뷰 하라며 자기에게 돈을 쥐어준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노련한 저널리스트 크래프트는 곧이어 이렇게 쓴다. 몇 해 동안 고다르는 스위스에서 개당 20달러에 판매되는 코이바를 피워왔다. 하지만 그는 조금은 나른한 끽연가다. 인터뷰를 하며 그는 열두 번도 넘게 시가에 다시 불을 붙였고, 세 시간이 지나서야 한 대를 겨우 끝냈다. 값비싼 쿠바산 시가를 피우는 게 그의 유일한 부르주아적인 약점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 말하기를 거부했다. 나중에 전화를 통해 시가에 대한 그의 분명한 사랑에 대해 말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그는 이의를 제기했다. "그 질문에 대답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군요." 파리에 있는 그의 조수는 고다르가 자신의 영화 <포에버 모차르트> 때문에 우울한 상태라고 설명한다. 고다르는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촬영 직전까지 기다리는데, 그것이 그의 습관이다…

(ㄴ) 나 역시 원고를 쓰기 위해 습관처럼 마감 직전까지 기다리고, 때로는 마감이 나를 기다리기도 한다. 그럴 때 담배는 도움이 된다. 나는 몇 해 전에 [담배와 영화: 혹은 나는 어떻게 흡연을 멈추고 영화를 증오하게 되었나]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물론 가끔은 영화를 증오하기를 깜박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흡연을 멈추기를 잠깐 멈추기도 한다. 사실 내가 담배를 끊은 건 아이가 생겨서였다. 그렇다면 오늘처럼 아이와 떨어져 밤을 보낼 때는 한 대쯤 피울 수 있는 거 아닌가? 혹은 두 대, 어쩌면 세 대 정도는…

트뤼포를 두 잔씩 마시고 우리는 트뤼포를 나섰다. 포플레이로 자리를 옮기기 위해서였다. 광주극장의 김형수 이사가 추천해준 곳이었다. 바로 옆옆 건물이었는데, 그전에 담배를 사기 위해 편의점을 찾아 십 미터 정도 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갑자기 골목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바로 직전까지는 늦은 시간의 종로 뒷골목 같은 느낌이었다면 갑자기 쿵쿵쿵! 비트가 쏟아지는 클럽, 클럽형 소주방, 혹은 대형 헌팅 포차…들이 연이어 있었다. 모두 사람들로 바글바글 했다. 그때야 김형수 이사의 말이 떠올랐다. 거기 가면 아주… 시끄럽죠, 혹자는 광주가 어떻게 이러냐고 하기도 하던데. 그는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우리에게 물었다. 광주가 그러면 뭐, 도대체 어쩌라는 걸까요?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젊음이 드럼 비트처럼 뿜어나오는 골목에서 우리 두 명의 늙은이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금연 거리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우리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으니까) 에어컨 실외기 뒤에서 담배를 피웠다. 보헴 시가 1미리. 오랜만에(어제 시상식장 뒤풀이에서도 강보원의 담배를 빌려 피우긴 했지만) 담배를 피우니 머리 끝까지 나른해지는 기분이었다. 조금쯤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기분으로, 우리는 포플레이를 향해 올라갔다.

포플레이에는 아무도 없었다. JBL4344 스피커와 가게를 꽉 채운 70년대 소울풍의 음악, 그리고 살 빠진 월터 화이트를 닮은 사장님을 제외하면. 사장님이 우리를 보았고, 우리도 사장님을 보았다. 잠시 아무도 말이 없었다. 우리가 방해를 했나, 나가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사장님이 쑥스러운 듯 말씀하셨다. “제가 이 베이스를 좋아해가지고, 조금 크게 듣고 있는데 손님이 왔네…” 우리는 자연스럽게 바에 앉았고, 사장님은 메뉴판을 주는 대신 음악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렇게 베이스를 치는 건 흑인밖에 없어요. 그런 농담도 있잖아요. 신은 흑인에게 운동능력과 음악을 주었다. 물론 요즘 같은 세상에 적절하진 않은 농담이지만요. 저는 아직도 미국이라는 나라를 모르겠어요. 버드 파월이 차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경찰이 차를 세웠어요. 그리고 문을 열라고 하더니 운전대를 잡고 있는 파월의 손을 경찰봉으로 내려친 거죠. 한 대, 두 대, 세 대… 사정없이요. 미국 최고의 재즈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을 망가뜨린 거예요. 단지 흑인이 차를 몰고 있다는 이유만으로요. 그런 나라에서 오바마가 대통령이 돼? 그건 좋은 일이지만 그런다고 얼마나 달라질까 싶은 거예요. 그래서 파월 노래를 들으면 슬퍼요. 아무리 신나는 노래라도, 자꾸 그런 게 생각나서 여기가 너무 아파요. 아주 미치겠어요…

근데 그거 제프 다이어 [그러나 아름다운]에 나오는 이야기 아닌가요? 김재욱이 물었다. 아시는군요! 사장님이 반색하며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좋아하세요? 

우리는 몇 잔의 보드카 토닉을 마시고, 사장님이 내려주는 커피도 그만큼 마셨다. 크림 치즈와 누텔라를 바른 크래커를 먹었다. 소울과 재즈, R&B를 들었고 조르디 사발이 연주하는 비올의 소리를 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시간에 대해서, 잃어버린 꿈들과 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가능성에 대해서, 변해버린 것들에 대해서,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해서, 이제 아무 상관없는 것들, 그러나 여전히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서…

그때 다른 손님들이 들어와서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스콧 매켄지의 ‘샌프란시스코’와 스팅의 ‘셰입 오브 마이 하트’를 신청했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 일어나자 사장님이 계단 위쪽에 재떨이가 있으니 그곳에서 피우라고 했다. 좁은 계단 아래로 살짝 보이는 길거리는 술집 조명으로 대낮처럼 환했다. 반대로 우리 위쪽은 어두운 심연처럼 보였다. 그 사이에서 담배를 끊은 우리 둘은 거듭해서 하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계단 아래 빛 / 계단 위 어둠)

슬슬 일어날 시간이었다. 우리는 마지막 잔을 부탁했다. 사장님이 김재욱에게 메모장을 주고는 이름과 생년월일을 써달라고 하더니 두꺼운 책을 뒤적이며 사주를 봐주었다. 똑닮은 자식이 있다고 나오네요. 김재욱이 자식은 없다고 하자 사장님이 말했다. 만약 자식을 낳으면 똑닮은 자식이 나올 거예요… 내년에 내게 딱 맞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인연을 만난다고 나오네요. 이미 결혼을 했으면 어쩔 수 없고요… 그러더니 갑자기 탄성을 질렀다. 와우! 내년이죠? 43살부터 63살까지 20년 동안 모든 일이 잘 풀리는 시기네요. 영어로 골든 이어즈. 앞으로 20년 동안 전성기라는 말이에요, 무슨 일을 해도 잘 돼요. 축하합니다. 이렇게 좋은 사주를 보니 저도 좋네요.

다음은 내 차례였다. 사장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내 이름과 생년월일이 적힌 메모장을 들여다보았다. 일종의 데자뷰가 느껴졌다. 결혼 전에 대출을 받으러 은행에 갔을 때 내 소득증명서를 받아본 은행 담당자의 표정이 딱 그랬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무슨 일인지 한동안 언성을 높이며 통화하던 사장님이 한층 더 심각해진 얼굴로 메모장을 들여다보다가 내게 물었다. 혹시 결혼하셨어요? 네, 결혼했어요. 아! 다행이네요. 이런 사주는 결혼 안 하면 큰일나는 사주거든요. 이유는 묻지 않았다. 어쩐지 겁이 나서 물을 수가 없었다…

사장님이 계속해서 말했다. 여태까지는 조금 일도 잘 안 풀리고 겨우겨우 살았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망하거나 잘못되지는 않아요. 저를 믿으세요. 이건 진짜에요. 그리고 자식 복이 있어요. 나중에 자식 덕을 좀 볼 거예요. 내가 너무 사랑하고 나를 무척 사랑해주는 자식이 있어요, 라는 말을 듣는데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 아이와 함께 지낸 후로 눈물이 많아졌다. 그리 좋은 사주는 아닌 모양이라고, 그래도 다행이라고 혼자 생각하고 있는데, 다른 손님 술을 만들어준 사장님이 다시 책을 들춰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약간 노래방 보너스 타임 같은 느낌으로. “49살부터 69살까지 전성기네요! 정말 두 분 다 전성기가 아직 오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제가 이렇게 보는데 전성기가 지났으면 할 말도 없고 속상하거든요. 그런데 두 분은 이제 잘 될 일만 남았어요. 정말 축하합니다!”

나는 월트 화이트를 닮은 사장님에게 진심으로 몇 번이나 거듭해서 감사드렸다. 동시에 마음 속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이건 지나치게 영화적인 경험이 아닌가? 만약 내가 통 속의 뇌라면? 어떤 미친 홍상수가 끊임없이 자신의 영화를 보여주고 있는 거라면…? 견우야, 미안해…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 영화 관객인가봐…

(흑백 장면: <강변호텔>, 컬러 장면: <엽기적인 그녀>)

0-0: 집으로
그날에 대해서라면 약간의 이야기가 더 남아 있다. 하지만 이쯤에서 다음 날로 우리의 시계를 돌리는 게 좋을 것 같다. 아침. 우리는 광주극장에서 잡아준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와 아침밥을 먹고 헤어졌다. 나는 기차를 타러 광주송정역으로, 김재욱은 혼자 국군광주병원 옛터로. 광명역에서 내린 나는 택시를 타고 안산으로 갔다. 나의 사람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밥을 남기면 미스터 온실가스가 나오잖아.” 핑크퐁 기후변화 동요에서 온실가스의 존재를 알게 된 나윤이가 평소와 달리 밥을 싹싹 비웠다. 그러더니 박수 치는 엄마 아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향해 밥그릇을 들어보였다. 의기양양하게, 마치 상패라도 보여주듯이…

이어 아내가 내가 없는 이틀 동안 있었던 일들을 들려줬다. 한번은 나윤이가 손을 뻗어 크게 움직이면서 “해가 이렇게 떠서 여기(가장 높은 곳) 오면 아침이고 이렇게 가면 저녁이야”라고 해서 아내가 이렇게 뜨면 바로 아침이고, 가장 높은 곳에 가면 점심이고, 이렇게 가면 저녁이라고 정정해주었다고 했다. 그러자 나윤이가 아니라고 짜증내서 한참 그걸로 이야기하다가 아내가 그래 알았어, 그럼 그렇게 생각해, 하고 넘어갔는데 한참 지나서 나윤이가 귓속말로 소곤소곤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해가 이렇게 뜨면 아침이야…”라고, 마치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하는 갈릴레오처럼…
 
(미스터 온실가스)

한동안 [뽀롱뽀롱 뽀로로]에 푹 빠져 지내던 나윤이는 [아기상어]와 [핑크퐁], [꼬마버스 타요], [로보카 폴리], [바다나무], [꼬모], [따개비 루], [엉뚱발랄 콩순이] 등을 거쳐 요즘은 [캐치! 티니핑] 시리즈에 과몰입 중이다. 차에 탈 때마다 티니핑 노래를 틀어달라고 하고, 티니핑 인형을 안고 자고, 본인은 ‘사랑해 하츄핑’ 엄마는 ‘솔직해 끄레핑’ 아빠는 ‘다정해 꾸래핑’이라고 역할을 분배해 놀기도 하며, 티니핑 게임에서 나오는 카드를 모으고, 이빨을 닦거나 밥을 먹을 때면 아빠에게 티니핑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고, 크리스마스에 산타할아버지가 티니핑 놀이동산을 선물해주지 않을까봐 엄마 아빠 말을 잘 들으려고 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건 정작 [캐치! 티니핑] 애니메이션은 단 한 편도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몇 번인가 보여주려고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런 게 바로 본편은 보지 않고 설정과 2차만 판다는 건가. 한 번은 내가 물었다. 나윤아, 왜 티니핑 만화는 안 봐? 그러자 나윤이가 말했다. “나는 안 봐도 다 알아.” 실제로 나윤이는 [캐치! 티니핑]의 세계에 대해 많은 것을 안다. 노래나 스티커북이나 카드를 통해서 혹은 다른 친구들에게 들은 거 반, 스스로 지어낸 거 반. 어쩌면 지어낸 게 더 많을 수도 있고… 내가 프린세스 로미라고 하면 자꾸 “프린세스 로미가 아니라 롱이!”라고 고쳐주는 게 약간 짜증날 때도 있지만(‘로미’가 맞음), 안 봐도 다 안다는 나윤이의 말이 무슨 말인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이런 거다. 나는 한때 (상업 영화라면) 한국 영화와 미국 영화와 유럽 영화를 가리지 않고 보던 사람이다. 물론 미국 영화를 제일 많이 보고 한국 영화도 적지 않게, 유럽 영화는 가물에 콩나듯 보긴 했지만.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점점 더 영화를 보지 않게 되었고, 이 연재를 시작할 무렵에는 극장에는 전혀 가지 않고 1년 동안 보는 영화를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영화와 멀어진 삶을 살게 되었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아무리 멀리 도망친다고 해도 결코 도망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다. 나. 그리고 영화.

영화는 어디에나 있다! 주말 밤, 아이를 재우고 아내와 함께 앉아 돌리는 채널 사이사이에. 어느새 씨네필로 가득해져버린 트위터 내 타임라인에. 책장에 꽂힌 책들 속에—특히 적지 않은 존재감을 자랑하는 영화책들에 가득. 내가 구독하지만 보지는 않는 스트리밍 서비스에.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끊임없이 영화를 보는 정지돈과의 대화와 또 다른 사람들과의 스몰 토크 속에. 정말이지 영화는 어디에나 있고, 나는 내 손가락에서도, 발가락으로도, 나를 둘러싸고 있고 끊임없이 자라나고 있는 영화를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바람에 쓰여 있고, 내가 가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다. 정말 그렇다. 다만 내가 그것들을 보지 않을 뿐이다. 질문. 내가 영화를 보지 않는다고 영화도 나를 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영화와 영화에 대한 담론, 플랫폼, 매체, 2차 컨텐츠, 기타 등등을 마구잡이로 섞어서 말하고 있다. 카세티가 말하는 ‘재배치’를 염두에 두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영화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화가—미세먼지나 방사능이 그런 것처럼—세상에 흘러 넘쳐서 좋든 싫든 우리는 영화의 영향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한국 영화에 대해 생각하는 게 아니라 한국 영화처럼 생각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어떻게?

0-1: 잠언
영화가 꿈이라는 오래된 비유가 여전히 유효하다면 더 이상 그것이 인간의 꿈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극장이 꾸는 꿈이다. 영화는 기계들이 꾸는 꿈이고, 사물들이 꾸는 꿈이다. 세계가 꾸는 꿈이고, 그것은 종종 세계와 구분되지 않는다. 

0-2: 마지막 편지
친애하는 지돈씨에게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제 차례의 마지막 원고를 보냅니다.
2년 가까이 이어진 우리의 원고를 어떻게 끝내야 할지 오랫동안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스티븐 샤비로의 [탈인지], 이언 보고스트의 [에일리언 현상학], 프란체스코 카세티의 ‘영화의 재배치’ 같은 글들을 읽기도 했습니다. 영화는 인간의 꿈이 아니라 사물들이 꾸는 꿈이라는 아이디어는 그 과정에서 나왔습니다. 물론 그건 어디로도 닿지 않은 채 공상에 더 가까운 짧은 질문의 형태로 남았을 뿐이지만요.
그때그때 떠올랐던 자잘한 아이디어를 하나의 원고로 만들기 위해 저는 쉼없이 자르고 붙이고 버리기를 반복해야 했습니다. 미끄러운 바닥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춤을 춰야 하는 불운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왜 이런 압박을 느낀 걸까요? 그건 아마도 ‘한국 영화’가 제 안에 있는 것들, 너무도 강렬하게 발현하고 있기에 외면할 수 없던 많은 것들을 불러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게다가 글을 쓴다는 것이 기호 속에 포착해 넣은 그 무언가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신비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매번 글을 쓰고 나면 저의 정신은 그 문장들을 들여다보고 뒤집어보고 마치 새로운 양식인 것처럼 씹고 또 곱씹어보았습니다. 글을 써 나갈수록 수많은 질문들, 끝없이 속아나는 수수께끼들을 반추하게 되었고, 깨어 있는 삶과 잠들어 있는 삶, 저의 모든 삶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며칠 전 이 원고에 대해 말씀드렸던 것도, 이제 원고를 보내드리는 것도 아마 이러한 중압감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일 겁니다. 
정처 없이 떠난 여정과도 같은 이 글에는 밝혀내지 못한 것이 무척이나 많습니다. 그리고 특별하기보다는 사소한 것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통해 ‘한국 영화’ 그리고 그곳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 그러니까 우리 자신이라는 존재에 다가갈 수 있었기를, 그 존재가 자신의 말을 할 수 있었기를 바랍니다. 
이제 이 글을, 이 책을 당신에게 맡깁니다.

K정연

0-3: 끝
“헤이 클로버, 캐치 티니핑 노래 틀어줘” 나윤이가 말하면 클로버는 “바이브에서 캐치, 티니핑 율동 동요 앨범을 재생할게요”라고 말하며(요즘 나윤이는 그 말을 따라 하는 데 재미 붙였다) 노래를 재생한다. 

빛나는 마법을 보여줘 (캐치캐치!) 
예쁜 마음을 모아 티니핑 타임

가끔 그건 내게 마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말이다.
 
(구글 번역기에서 언어 설정을 잘못해서 발생한 오류, 그런데 이건 정말 오류일까?)

*이 글에는 늘 그런 것처럼 다른 작품들의 인용이 있고, 대부분은 본문에 출처가 명시되어 있다. 가독성이나 여타 다른 효과를 의도하고 일부러 명기하지 않은 부분은 아래와 같다.

4-3 두번째 문단의 "갑자기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었다"에서 해당 장의 마지막 "웃지 마시오!"까지의 내용은 토머스 베른하르트의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김현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모자])에서 아주 약간의 수정과 함께 인용했다. 

0-0 중 “정말이지 영화는 어디에나 있다…내가 가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다” 부분은 Wet Wet Wet의 노래 ‘Love Is All Around’의 가사를 조금 수정해서 인용했다. 

0-2 편지라는 형식과 몇 개의 문형, 그리고 문장들은 뤽 다르덴의 [인간의 일에 대하여](조은미 옮김, 미행 펴냄)의 서문에서 빌린 것이다. 특히 “왜 이런 압박을 느낀 걸까요?”에서 마지막 문장까지는 아주 약간의 수정과 함께 그대로 인용했다.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정지돈, 2022.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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