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by.금정연(작가) 2022-08-31조회 5,826

사이버 세상에 대한 몽상
일주일 내내 밤을 샜다. 조너선 크레리의 [24/7 잠의 종말]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책이 없었다. 어차피 읽을 시간도 없었다. 언제부턴가 집에서 책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책장 구석에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포털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될 정도다. 처음에는 누군가에게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한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에게 책을 빌려준 게 언제였더라? 정지돈에게 프랭크 커머드의 절판된 [종말 의식과 인간적 시간]을 빌려준 건 기억나는데. [유령과 파수꾼들](2018) 출간 기념으로 유운성 님과 함께 북토크를 하느라 그 책을 읽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아닐 수도 있고. 분명한 건 아직 책을 돌려받지 못했다는 건데, 괜찮아요 지돈 씨…

그런데 정말 그 행사는 뭐였을까? 나는 구글에 ‘유운성 정지돈 북토크’라고 쳐보았지만 내가 찾는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이라고 할까? 에이아이는 내게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사람들’과 ‘Kmdb 정지돈’이라는 관련 검색어를 제시해주었는데,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유운성 님을 뵈었을 때 조너선 크레리 책을 번역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게 떠올랐고, 세상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하는 생각도 든다. 신이 있다고 해도 아마 그것을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무언가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에이아이가 유일하지 않을까. 요 며칠 트위터에서 화제를 모았던 n행시 짓는 에이아이가 지은 삼행시를 보면 심증은 더 강해진다.
 

허공에의 질주
내가 밤을 샌 건 김쿠만과 나일선의 소설집에 해설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두 작가의 작품 모두 영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는데, ‘개들만이 안달루시아에서 산다’라는 단편으로 시작하는 나일선의 소설집에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루이스 부뉴엘, 리차드 라우드, 앙리 랑글루아, 차이밍량, 장 뤽 고다르, 장-마리 스트로브 같은 영화인들의 이름들이 이어진다. 네이버에 검색하면 AI가 알아서 김주만이라고 정정해주는 김쿠만이라는 이름은 실은 쿠엔틴 타란티노와 이만희에게서 한 글자씩 빌려온 것이다. 어차피 돌려주지 않을 것을 빌렸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지돈 씨…

덕분에 나는 [축음기, 영화, 타자기](프리드리히 키틀러), [소리의 정치](이화진), [경성과 도쿄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정충실), [영화와 소리]와 [영화의 목소리](미셸 시옹)처럼 영화에 관련된 책들을 읽고,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앨런 식수), [음악 인류](대니얼 J. 레비틴), [사탄 박사의 반향실](루이 추데 소케이), [역사](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내용 없는 인간](조르조 아감벤), [아케이드 프로젝트](발터 벤야민), [미래가 사라져갈 때](자넷 폴), [레트로 마니아](사이먼 레이놀즈), [리믹솔로지에 대하여](데이비드 건켈), [소설의 이론](게오르그 루카치), [미래 이후](프랑크 베라르디 ‘비포’), [자본주의 리얼리즘](마크 피셔), [허구세계의 존재론](미우라 도시히코)처럼 영화와 큰 관련은 없는 책들을 읽었지만 원고는 쓰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비평, 평론, 해설, 뭐라고 부르건, 다른 사람들의 작품에 대해 쓰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고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 작품에 대해 말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말하지 않기. 둘. 최후의 최후까지 마감을 미루고 있다가 더는 미룰 수 없는 순간이 닥치면 눈을 감고 후다닥 써버리기. 한기 씨는 글이 안 써지면 눈을 감고 쓴대요, 언젠가 정지돈은 내게 말했고 그것은 분명 효과가 있다. 가끔(실은 자주) 내가 무엇을 쓰는지 나조차 몰라야 글을 쓸 수 있는 때가 있는 것이다. 중력을 모르기 때문에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처럼.

나는 지금 <루니 툰Looney Tunes>의 로드러너와 와일 E. 코요테의 클래식 루틴을 떠올리고 있다. 배고픈 코요테는 호시탐탐 로드러너를 노리지만 잡을 수 없다. 로드러너가 너무 빠르기 때문이다. 무슨 방법을 써도 로드러너의 발끝도 못 쫓아가던 코요테가 로드러너를 앞지르는 순간이 오는데, 그건 로드러너가 절벽 앞에서 급제동을 할 때다. 절벽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코요테는 걸음을 늦추지 않고, 로드러너를 지나쳐 허공으로 질주(Running On Empty)한다. 짧은 순간이지만 그때 코요테는 의기양양하고, 자신감에 차 있으며, 공중에 떠 있다. 자신이 공중에 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 전까지는. 비극 주인공이 종국에 도달하는 앎은 자신의 불행을 낳은 오류에 대한 앎이었다, 라고 랑시에르는 [모던 타임스: 예술과 정치에서 시간성에 관한 시론]에서 말한다. 나는 내가 공중에 떠 있어도 절대 모를 거야. 꿈에도 모를 거야, 라고 TV를 보던 어린 나는 다짐한다. 정지돈의 말마따나 내가 “대체로 정신이 나가 있다고 할 수 있다”면 아마 내가 어린 시절의 다짐을 아직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연과 상상
1) 어제와의 이별
- 김쿠만 해설의 결말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아 괴로워하며 트위터 타임라인을 새로고침 하고 있는데 나일선의 트윗이 보였다. 언제나처럼 영화 이미지 두세 컷과 직접 찍은 책의 구절(혹은 부감으로 찍은 커피잔)의 이미지를 데쿠파주한 잠언풍의 트윗이었다. 첫 두 장은 검은 화면 위에 적힌 독일어 문장의 이미지였는데, 그 아래 “우리를 어제와 이별하게 만드는 것은 / 균열이 아니라 위치의 변화다”라는 한글 자막이 달려 있었다. 이건 어디에 나오는 거죠? 나는 나일선에게 멘션을 보냈고, 알렉산더 클루게의 어제와의 작별 시작 부분입니다, 라는 친절한 답을 받았다. 그때 나는 비로소 며칠을 끌어오던 김쿠만 해설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마지막 단락은 이렇게 시작한다. “알렉산더 클루게의 영화 <어제와의 이별>(1966)은 “우리를 어제와 이별하게 만드는 것은 균열이 아니라 위치의 변화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그것이 김쿠만이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을 통해 하는 일이다…” 

2) 메멘토
- 이번 ‘한영한사’는 시간에 대해 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영화가 시간을 공간으로 바꾸는 픽션의 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시간이 없고, 가난한 사람이 돈을 생각하듯 내가 시간을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물론 돈도 생각하고… 그런 생각으로 트위터 타임라인을 보고 있는데, 내가 지난해 12월 4일에 ‘한영한사’ 업데이트 소식을 알리며 “쇼미는 끝났지만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은 여전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한 것 같네요 이번 화에서는 자비스 코커와 토니 블레어와 노엘 갤러거와 벤앤제리가 혼톨로지 음악의 리듬에 맞춰 노래합니다 그래요 뮤지컬이죠”라고 쓴 트윗을 누군가 리트윗 했다는 알림이 떴다. 뜬금없이? 이 시대를 살아가며 SNS를 하는 다른 많은 작가들처럼 혹시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그게 지금 털린 건가? 벌벌 떨며 링크를 클릭해 ‘한영한사’ 9화를 읽었는데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대신 나는 내가 이번 화에 쓰려던 모든 것을 그때 이미 써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론적으로 순수한 선행 기억상실’이라는 소제목을 붙인 단락을 나는 이렇게 쓰고 있었다.

모든 것은 시간 문제다. 요즘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원고를 마감하는 것도 시간 문제고, 밀린 책을 쓰는 것도 시간 문제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우리의 영화도 마찬가지다. 돈? 물론 중요하지. 그렇지만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그러니까 시간이 있기만 하다면. 시간과 관련된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시간과 관련된 문제는 또 있다. 뭘 보고 듣고 읽고 생각하건 약간의 시간만 흘러도 까맣게 잊혀진다는 사실이다. 정지돈이 말하는 몇몇 고유명사들은 나도 익히 아는 것들이었다. 나는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축음기, 영화, 타자기]를 읽었을 뿐만 아니라 역자 유현주 선생을 모시고 출간 기념 북토크를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내용은 내개 전혀 새롭게 들렸다. 혼톨로지? 물론 알지. 사이먼 레이놀즈의 [레트로 마니아]와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물론 혼톨로지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책은 아니지만)을 두어 번은 읽었으니까.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도 읽었다. 반쯤. 나원영과 강덕구가 번역한 마크 피셔의 글들도 읽었고, 큰 상관은 없지만 베리얼의 첫 두 앨범을 최근 LP로 구입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것들은 내게 매번 새롭게만 느껴지는 걸까…


3) 긴 복도
그렇다면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새롭게 하자, 지금껏 내가 한 번도 가져오지 않았던 레퍼런스를 가져오자, 나는 생각했고 조너선 크레리의 [24/7 수면의 종말]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책이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책은 보이지 않았고, 책장 구석에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포털이 있는 건 아닌지 투덜거리면서 트위터 타임라인을 보고 있는데, 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과 e-flux가 연계 온라인 상영을 해서 정여름의 <긴 복도>를 볼 수 있다는 트윗이 올라왔다. 나는 링크를 따라 e-flux에서 <긴 복도>를 플레이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책들이 사라지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환상의 빛
김쿠만 해설, 나일선 해설, 한영한사, 그리고 정지돈 작가론까지… 4중의 마감에 시달리다 정지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내 전화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국 영화 속 싸대기 액션, 혹은 액션으로서의 싸대기에 대해서. 혹시 그건 제 싸대기를 때리고 싶다는 뜻인가요? 나는 묻지 않았다. 마감에는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는 데 그중 하나는 크고작은 피해망상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지돈은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싸대기는 할리우드에는 없는 한국의 고유한 액션입니다. 그것의 목적은 단순히 상대를 제압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계도 나아가 계몽의 수단인 거죠. 정연씨, 모르시겠어요? 뺨을 맞으면 눈 앞에 빛이 번쩍하는 빛이 바로 계몽의 빛이라는 걸! 라이트 오브 엔라이트먼트(Light of enlightenment)! 과거에 싸대기는 부정적인 액션이었습니다. ‘아부지 뭐하시노?’라는 김광규의 대사, 그리고 이어지는 무자비한 싸대기를 떠올려보세요! 그때 싸대기는 권력의 부조리하고 억압적인 폭력을 상징했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그것은 참교육이라는 이름의 사이다가 되어버렸죠. <베테랑>이 천만 관객을 넘은 건 황정민이 유아인의 뺨을 때리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장면에 아트박스 사장으로 나오는 마동석을 기억하세요. 황정민에게 바통을 이어받은 마동석이 싸대기 액션의 대명사가 되어 헐리우드까지 진출한다는 사실을요! 
-하지만 싸대기는 김치 싸대기 아닌가요? 
-뭐요? 
-김치 싸대기요. 
-그게 뭐죠? 
-김치 싸대기라고요 지돈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그러니까 미래는 드라마다. 정서경 작가가 각본을 쓴 드라마 <작은 아씨들>의 티저 예고편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짧은 영상을 통해 내가 파악한 바로는 가난하지만 구김살 없이 살아보려는 세 자매 앞에 어느날 700억이 든 가방이 나타나고 가질 것인가 돌려줄 것인가 고민하는 사이 사건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게 된다는 내용인 것 같았다. 이건 드라마보다는 영화에 어울리는 시놉시스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던 기억도 난다. 그래서 의아하다기보다는 더욱 기대가 됐다. 지난 원고에서 정지돈은 맨날 보는 애들만 보면 뭐하냐, 안 볼 사람도 봐야 진짜 예술이지, 그래서 문학은 끝났고 영화는 아직 가능성이 있다, 라는 임재철 님의 말씀을 인용했다. 내 생각은 다르다. 기나긴 팬데믹을 거치며 영화 역시 이제는 보는 사람만 보는 매체가 되어 가고 있다. N차 관람러들 아니었으면 내 인생은 공허했을 거라는 박찬욱의 말을 떠올려보라. ‘그’ 박찬욱의 영화도 거듭 관람하는 팬들이 아니었으면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나만 해도 그렇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영화는 거의 보지 않지만, 올해 본 드라마만 해도 벌써 <스물다섯 스물하나>(마지막 두 편은 안 봄), <우리들의 블루스>, <나의 해방일지>, <우린폭망했다wecrashed> 그리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까지. 모두 더하면 영화를 최소한 40편은 볼 수 있었을 시간이다! 마담 보바리, 그것은 바로 나다, 라고 플로베르는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바로 대중이라고 말해야겠다. 지금보다 어리고 민감하던 시절엔 나도 내 취향이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안다. 내 취향은 정확히 대중적이라는 것을, 다만 남들보다 조금 느릴 뿐. 요즘 내가 즐겨 듣는 노래는 2010년대의 히트곡들이다. 정작 그때는 그게 히트했었는지도 몰랐던…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인생)
마감 때문에 마음이 소금밭인데 홍대에 갔다.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진행하는 영화인 교육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오진우 평론가의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 특강. 길지 않은 특강이었지만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특히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을 직접 제작하는 사람으로서의 경험담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던 점이 특히 좋았다.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의 위상이 너무 애매해서 만들다 보면 차라리 글을 열심히 쓰거나, 영화를 만들거나, 유튜버가 되거나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는 것 같은 부분이…

한국의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의 역사와 현황을 일별하는 와중에 박유정의 <The Futures of Future 1>, 정여름의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같은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 작품뿐 아니라 김병규 평론가 같은 분들이 [씨네21] 지면을 통해서 이미지들과 텍스트를 병치시키며 그 자체로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에 대한 스크립트가 될 수 있는 작업을 한 것들을 예로 들며 우리의 ‘한영한사’가 지나가듯 언급되기도 했다. “그리고 정지돈 작가와 금정연 작가가 연재하고 있는 ‘한국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이 있는데… 거의 유일하게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을 이야기하시는 분들이죠. 글쎄요, 영상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데, 뭐랄까, 영상화가 되기를 바라지만… 이루어지기는… (크흡) 모르겠습니다…”

오진우 평론가가 최근에 하고 있는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 작업도 잠깐 소개했는데, 매일매일의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모은 <덧 없는 이미지들>(2022)도 그렇고 아이폰으로 직접 촬영한 영상만으로 만든 <영상자료원 가는 길>(2022)도 그렇고, 다른 영화의 장면들을 직접적인 재료로 하지 않는다는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이 글을 통해 비슷한 시도를 하고 있는 중이다. 엥? 어느 부분이? 라고 되물으신다면… 한국 영화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인용)을 하지 않는다는 부분이…?
 
(*출처: 오진우 평론가의 블로그 https://blog.naver.com/jinu_montage/222855477268)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지돈 씨에게, 
우리가 통화한 게 화요일이던가요? 전화를 끊기 전에 제가 그랬죠. 지돈씨 걱정마세요, 10시까지 제가 김쿠만 해설 쓰고 아침 닭이 세 번 울 때까지 한영한사 원고 써서 보내드릴게요. 그러니까 와, 좋아요, 하더니 이렇게 물었잖아요. 근데 정연씨, 여태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어요?

그때도 말했지만 있습니다. 최소한 한 번은, 어쩌면 두 번쯤, 생각을 백 번 했다면 그중에서… 지금은 금요일 아침이고 저는 오늘도 밤을 꼬박 새고 말았네요. 그렇지만 김쿠만 원고에 이어 이렇게 한영한사 원고도 마감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제가 그랬잖아요. 저는 무척 대중적인 사람인데 단지 조금 느릴 뿐이라고. 원고도 마찬가지에요. 저는 마감을 칼 같이 지키는 사람입니다. 단지 조금 느릴 뿐이죠…

사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고 싶었습니다 아시겠지만 지돈씨가 좋아하는, 그리고 저도 좋아하는 요아킴 트리에의 신작을 개봉하는 날이었거든요. 게다가 트위터를 보니(이번 원고에 트위터란 말이 몇 번이나 나오는지 정말 알고 싶지도 않네요) 아트나인 9관에서 8시에 영화를 관람하는 모든 관객들에게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모자를 준다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무척이나 예쁜 초록색 모자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극장에 가지 않았어요. 그리고 이 원고를 썼죠. 결과적으로는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나일선 해설과 정지돈 작가론 두 개만 남았으니까요. 하하. 가끔은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누구도 잘못하진 않았어요. 저도 알아요. 제가 궁금한 건, 그렇다면 왜 저는 매일 이렇게 고통을 받아야 하는 걸까요? 가끔은 정말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쓸데없는 말이 너무 길어졌네요. 하지만 너무 걱정마세요. 지돈씨 원고의 도입부는 벌써 생각해두었거든요.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에 붙인 나탈리 레제의 서문의 한 구절을 인용하려고 합니다. 이런 부분이에요. 

바르트가 죽었을 때 그의 타자기 위에는 스탕달에 대해 진행하던 연구의 원고 한 장이 끼어 있었고, 그 제목은 "인간은 항상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데 실패한다......"였다.

이만 총총.
 
(*출처: 그린나래 미디어 트위터 https://twitter.com/greennarae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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