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정진우 - 감독 - 한국영화의 세계화, 집념의 영화작가

by.김수남(영화평론가) 2008-11-11조회 2,917

한국영화계에서 영화작가를 논할 때, 편애하는 경향이 분명히 있다. 그것은 작가영화를 거론하되 리얼리즘 색채가 강한 작가를 우위에 두는 것으로 멜로드라마 작품보다 사회성드라마를 연출하는 감독을 영화작가로 대접하겠다는 한국영화비평계의 편향성이다. 정진우는 ''사랑의 부재''를 극복하고자 하는 ''사랑의 작가''로 <초우>(1966년) 이후 멜로애정물에 애착을 갖고 있는 영화작가이다. 정진우가 말하는 사랑의 부재는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에서부터 일제와 민족분단 그리고 군부독재 권력에 의해 무너진 인간적 존재에 대한 물음까지 광범위하다. 



어쨋든 사랑타령하는 영화를 주로 만들어 왔던 그의 영화에 대한 영화작가로서의 홀대는 영화비평계의 편견에 있다. 그러나 정진우의 영화작가정신은 작품세계는 물론 한국영화에 대한 애착과 자긍심을 고취하는 그의 노력에서 더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영화수준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한국 영화작가로서 정진우의 작품평가가 인색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정진우의 한국영화의 세계화를 부르짖는 실천력은 치열하였고 그 성과도 무시할 수 없었다. <섬개구리 만세>가 1972년 제 23회 베를린영화제에 참가할 때, 인도 레이의 <천둥소리>가 수상하고 <섬개구리>는 후시녹음때문에 대사와 입이 안 맞는 영화라고 현지의 매스콤에서 망신을 당한 일이 있었다. 그때 정진우는 인도영화보다 기술적으로 뒤진 한국영화의 현실을 개탄하고 동시녹음만이 한국영화 세계화의 첫걸음임을 확신하였다. 결국 그는 <율곡과 신사임당>(1978년)에서 동시녹음을 시도하여 후시녹음을 전적으로 하였던 한국영화 제작풍토를 쇄신하는 데에 공헌하였다. 



이후 기술의 세계화에서 내용의 세계화를 모색하던 그는 <심봤다>(1979년) 등 일련의 향토물로 한국영화 세계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정진우의 한국영화의 세계화는 작품에만 승부를 걸지않았다. UIP파동 이후 미국메이저회사에 대항하여 한국영화 공급과 배급체계의 난점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시네마 콤플렉스 <시네하우스>를 건립하였고 이후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멀티콤플렉스 극장은 한국영화 세계화의 경쟁력을 고취하는 데에 일조하였다. 정진우는 한국 사실주의 영화의 맥을 이어 온 최인규의 문하생 정창화 감독 밑에서 연출수업을 하여 1963년 <외아들>로 감독 데뷔하였다. 이후 1969년 우진필름을 창립하기 전까지 무려 27편의 작품을 연출하였고 1970년부터 그가 운영하는 우진필름에서 직접 제작하거나 연출한 작품까지 계산하면 99편에 이르렀다. 여기에 타영화사에서 의뢰받아서 연출한 30작품을 합하면 무려 129편의 한국영화를 혼자서 만들고 제작하였다. 



척박한 한국영화계에 뛰어들어 나름대로 한국영화를 위해 열심히 살아 온 정진우는 1938년 1월 17일 경기도 김포군 양촌면 양곡리 골말에서 부친 정원모 鄭元謨와 모친 황을순 黃乙順의 4남 5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김포와 강화에서 36년간을 교육에 종사해 온 그 일대에선 존경받는 교장선생님으로 통했다. 정진우는 고향에서 양곡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김포중학교와 농사에 대한 야심으로 김포농고에 진학하여 축산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1학년 때 우연히 참가하게 된 학생연극에 출연하면서 배우로서 낙농의 꿈과 먼 다른 길을 열망하게 된 것이다. 그가 중앙대학 법대를 진학한 것은 연극영화학과가 없었던 당시 연극부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였던 중앙대에 입학한 것이다. 
그는 연극부 써클에서 활동하며 연극부 회원인 최무룡 선배의 소개로 영화계에 단역배우로 출연하기도 하였다. 본격적인 영화계 입문은 1958년 박상호의 <장미는 슬프다>에서 강범구 촬영기사의 조수로서 였다. 그는 촬영경험을 거치지 않고는 열악한 한국영화계의 제작여건을 극복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후 정진우는 한국 액션영화의 거장인 정창화의 조감독으로 활동하다가 25세에 <외아들>을 연출해서 한국 최연소 감독이 되었다. 



''신필름''의 신상옥 감독 이후 한국영화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겨냥해 다양한 장르를 연출하고 제작해 온 감독으로서도 기억되어야 한다. 정진우의 한국영화에 대한 신념과 그 실천에 대한 한국영화인들의 공감은 1985년 그를 ''한국영화인협회'' 원장으로 추대하였다. 이 자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실감한 정진우는 한국영화의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한국영화의 주체인 영화인의 복지향상을 증진하여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으며 지금도 ''한국영화인 복지재단''의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관주도로 거행되었던 ''대종상영화제''를 영화인협회 주관하에 영화인 손으로 영화제를 치를 수 있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이러한 정진우의 작품활동을 시기별로 분류하면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1963년 <외아들>로 데뷔한 이후 1969년 ''우진필름''을 설립하여 제작자로서 활동하기 전까지의 시기이다. 정진우는 영화작가로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이던 이 시기에 자기 중심적인 인간드라마의 작품세계를 구축하였다. 
영화 <외아들>은 정진우의 자서전적인 영화임을 짐작케 한다. 정진우의 성장배경에서 들어나듯이 부친이 돌아가신 이후 정진우의 청소년 시절은 농촌에서 어머니와 농사지으면서 많은 고생을 겪었고 집을 떠나 온 이후 <외아들>로 감독 데뷰하기까지 숱한 사람을 만나면서 그가 경험한 인생공부는 인간의 이중적 심성인 선악의 갈등을 체험케 하였다, 그의 휴머니즘은 바로 인간의 양면성을 극복한 참 인간상의 표현으로 표출되었다. <외아들>의 주인공은 정진우의 이념으로 그려지고, 그의 이념으로 채워진 작품세계는 정진우의 현실적 삶에서 원동력을 얻어 그 중심에 자리잡은 정진우의 작가정신인 주제의식으로 강조되었다. 

정진우를 한국영화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첫 작품으로서 <초우>는 그의 초기영화 특징을 잘 보여주었다. 소재와 영화적 기법 그리고 주인공들의 연기가 눈에 띄게 신선하여 그 당시 비교적 잘 만들어진 작품으로 알려졌다. <초우>는 현실성이 부족한 인물묘사로 단점이 들어나기도 하였지만 영상기교의 놀라운 일면과 일상적인 규격 속에서 탈피해 보려는 두 주인공의 내면을 포착하였다. 청춘영화 <초우>는 흑백 영상의 밀도를 높힌 작가의 의욕으로 정진우 스타일을 구축하여 그의 영화작가로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둘째,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1970년)과 <동춘>(1970년)을 계기로 중견 감독으로 부상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정진우는 역사의식으로 민족의식을 추구하는 한편 멜로드라마의 깊이를 모색하였다. 
역사의식에 눈을 뜬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일제에 대한 반제국주의 의식을 피력하였고 <국경의 밤>(1970년)은 분단된 민족의 비극과 이산가족의 아픔을 그렸다. <동백꽃 피고지고>(1970년)는 일제에서 6.25를 거친 근현대사를 통한 한민족의 한맺힌 마움을 평범한 가족 이야기를 통해 풀어 갔다. 정진우는 척박한 한국 근현대사의 극복을 위해 일제침략과 동족상잔의 6.25동란으로 겪어야 했던 민족의 비극사를 그의 역사의식으로 조망하였다. 



셋째, <심봤다> 등 향토물로 동시녹음과 영화기술의 세계화에 매진하여 <무궁화꽃이 피었읍니다>로 개화하던 한국영화의 세계화를 모색하던 시기이다.
멜로애정물이나 민족의 비극사를 떠나 더 원류적인 우리의 문제를 바라보기 시작한 정진우는 한국영화의 세계화로 우리의 정체성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1980년)는 정진우의 연출 기량이 가장 두드러진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데, 그 시작은 원시종교 무속을 내세운 <석화촌>(1972년)에서 시작하여 <심봤다>(1979년)부터 정진우의 향토물로 자리잡았다. 이 작품은 한국영화의 전통성과 정체성을 포착하기 위해 토속적인 경향을 띤 영화로 스케일보다는 깊이있는 내면을 탐색하려는 노력이 드러난 정진우의 다섯 번째 동시녹음 필름이다. 정진우의 향토물은 주인공들의 삶의 공간이 다를 뿐 부당한 힘의 횡포에 도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작가정신은 일맥상통하게 향토물의 모든 작품세계를 관통하고 있다. 




이제 정진우는 진화된 주제의식과 영화기술력으로 우리의 주체성을 주장하고 정체성을 정립하여 한국영화의 세계화를 향한 주제의식을 탐구하고 있다. 김진명 원작 <무궁화꽃이 피었읍니다>(1994년)는 그 첫 시도로서 내용상으로는 ''침략자는 예고가 없다''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모토아래 강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핵무기를 보유함으로써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대내외의 적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자는 의지를 과시한 주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영화기술상으로는 시각적인 특수효과와 동시녹음으로 한국영화의 세계화에 매진하였으나 한국영화계의 현실은 정진우의 이상을 실천하기엔 그의 끈질긴 실천력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정진우의 영화작가 정신은 우리사회의 사랑의 부재를 극복한 사랑의 쟁취를 통해서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인간군상들을 묘사하였다. 하지만 영화적 현실로 표현된 정진우의 영상은 그의 영화작가적 의지를 충분히 담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영화의 세계화라는 정진우의 집념을 그의 작품세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김수남(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1938년 1월 17일 경기도 김포 출생

1960년 중앙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 졸업

1962년 외아들로 감독 데뷔

1967년 감독협회 창립 (부회장)

1969년 (주)우진필름 설립(대표이사)

1973년 영화진흥공사 창립 초대 제작 상임이사

문교부 교육의 날-<섬개구리 만세> 국민 훈장 수여

1981년 한국영화제작협동조합 수석 부회장

한국영화 자율정화 위원장

1985년 복합극장 '씨네하우스' 설립

한국영화 복지재단 설립(원장)

1987년 사단법인 한국영화인협회 원장 / 한국예술총연합회 이사

1994년 프랑스 문화훈장 기사장 수상

1999~ 현 한국영화인 복지재단 원장 


정진우 감독 작품

1962 외아들

1964 배신, 국경 아닌 국경선, 목마른 나무들

1965 밀회, 난의 비가, 가을에 온 여인, 무정의 40계단

1966 초연, 8240KLO, 초우, 하숙생, 악인시대

1967 밀월, 하얀까마귀, 4월이 가면, 춘희, 폭로, 정부마농, 구름, 별아 내가슴에

1968 파란 이별의 글씨, 미로, 여여여 

1969 국경의 밤,황진이의 첫사랑,청춘,차라리 남이라면,항구무정,동백꽃 피고지고,돌아오지 않는 밤

1970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동춘

1971 풋사랑 

1973 황소타고 시집왔네

1975 애종, 초연

1978 율곡과 신사임당

1979 심봤다, 가시를 삼킨 장미

1980 바다로 간 목마,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1981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1982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

1984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자녀목

1991 사랑과 죽음의 메아리1, 사랑과 죽음의 메아리 2부

1994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ㅇ 수상 경력

초우-서울대학생 최악 영화상

동춘-제7회 한국일보 연극영화상 작품상/부일영화상 작품상, 감독상

석화촌-제9회 청룡상 최우수작품상/부일영화상 작품상, 감독상

섬개구리 만세-제10회 청룡상 감독상/베를린 영화제 최초 본선 경쟁부문 진출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제10회 대종상 계몽 및 우수작품상/아시아영화제 최우수 청년감독상

율곡과 신사임당-제17회 대종상 특별상(한국영화 최초 동시녹음 작품)

심봤다-제18회 대종상 감독상/ 한국영화 기자상 작품상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제19회 대종상 우수작품상

자녀목-제23회 대종상 작품상, 감독상/ 동경국제영화제 '세계영화 베스트30'선정

베니스영화제 본선 진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춘사영화예술상 심사위원 특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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