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우
Chung Jin Woo / 鄭鎭宇 / 1937  ~ 
대표분야
감독, 제작/기획
데뷔작품
외아들 1963
활동년대
1950, 1960, 1970, 1980, 1990, 200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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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경력

1969년 (주)우진 필름 설립
1971년 영화인협회 감독분과 부위원장
1972년 영화제작자협회 이사

1973년 한국영화 진흥공사 제작 상임이사
1974년 <들국화는 피었는데> 제작 참여
1974년 영화제작자협회 부위원장

1978년 <율곡과 신사임당> 최초 동시 녹음
1985년 국내 최초 복합극장 씨네하우스 설립
1986년 민자당 중앙 위원회 및 상무위원
1987년 사단법인 한국영화인 협회 이사장, 사단법인 한국예술 총연합회(예총)이사
1994년 프랑스 문화훈장 기사상 수상(칸느 영화제)
1999년~ 한국영화인 복지재단 이사장
2001년 4월 제38회 대종상영화제 심사위원장
2001년 한국영화인협회 회장

기타정보

영화계 입문배경
교육에 종사하셨던 아버지를 일찍이 여위고, 6.25를 겪으면서 힘든 유년기를 보낸 난 농사에 대한 야심이 있었다. 그래서 농업 고등학교에 입학하지만 학교공부를 하면서 축산에 대한 관심이 커져갔다. 외삼촌으로 부터 얻은 오리 한 쌍으로 학비를 조달하게 되고 덴마크식 낙농에 대한 꿈을 가진다. 그러나 고등학교 1학년때 우연히 참가한 학생 극에 출연하면서 또 다른 길을 열망하게 된다. 배우 최무룡씨가 있었던 중앙대학에 지원 입학한다. 당시 영화계에서는 대학 연극부원들에게 단역출연을 교섭했다. 그래서 최초extra로 영화에 입문하게 되고, 최무룡선배가 출연한 영화에 연극부원들이 구경을 가게 되면서 영화에 대한 생각이 깊어만 간다. 연극부에서 활동하던 난 전공을 살려 졸업 전 사법고시 시험을 치르지만 실패했다. 이로써 사법고시에 미련없이 영화계에 발을 들여 놓는다. 영화촬영에 관심을 가진 나는 어떻게 해서든 빨리 영화를 배우고자 했다. 그래서 촬영현장에 가능한 많이 참여하면서 영화에 대한 모든 것에 직접 부딪혀 경험하고 공부하여 감독으로 입봉한다.
주요 영화작품
외아들(1963,정진우)
목마른 나무들(1964,정진우)
밀회(1965,정진우)
란의 비가(1965,정진우)
무정의 사십계단(1965,정진우)
초우(1966,정진우)
하숙생(1966,정진우)
악인시대(1966,정진우)
8240 K.L.O(1966,정진우)
하얀 까마귀(1967,정진우)
춘희(1967,정진우)
파란 이별의 글씨(1968,정진우)
구름(1968,정진우)
차라리 남이라면(1969,정진우)
국경의 밤(1970,정진우)
동백꽃 피고 지고(1970,정진우)
동춘(1970,정진우)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1970,정진우)
석화촌(1972,정진우)
섬개구리 만세(1972,정진우)
오백화(1973,정진우)
애종(1975,정진우)
심밨다(1979,정진우)
가시를 삼킨 장미(1979,정진우)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1980,정진우)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1981,정진우)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1982,정진우)
자녀목(1984,정진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1995,정진우)
주요기타작품
■ TV
1989년 KBS1 6.25 특집 5부작 드라마 <비극은 없다> 제작(우진필름)
애착작품 및 사유
<배신>, <국경 아닌 국경선> 63년에 만든 반공 영화인데 우리나라 최초로 이데올로기문제를 다루었기에 정보부에 붙들려 가서 일주일 옥고를 치르게 했던 작품이기도 한다. 신성일씨의 출세작이기도한 <배신>은 한국 영화에 새로운 형식을 시도했던 영화이다. 당시 불란서에서는 누벨바그가 출연하고 영화의 형식이 많이 바뀌었는데 우리의 영화에는 변화가 없었다. 본인이 누벨바그에 대해 알았거나 공부를 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도 영화의 형식을 바꿀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대사, 내용에 초점을 맞춘 기존 영화와는 다르게 영상과 몽타쥬에 많은 비중을 두어 만든 영화였다. 본인의 작품이 아닌 영화중에서는 66년 <초우>와 동시에 개봉했던 영화, 이만희감독의 <만추> 본인의 작품과 동시에 개봉하는 영화라서 많은 신경이 쓰이기도 했던 영화였는데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되고, 정말 인상깊게 본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화속 명소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강촌의 구룡폭포-폭포의 모습을 촬영해야 하는 장면이었다. 그래서 설악산으로 가기로 했었는데 설악에 홍수가 났었다. 그러던 중 주위사람들로 부터 비가 많이오면 폭포가 생기는 아름다운 곳이 있다고 듣게 되어 찾아간 곳이 강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도림공원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비가 오지 않는 때에도 가뒤 두었던 물이 흐르고 있어 예전만큼의 신비로움은 적다. 그외의 장소:그는 주로 대관령을 넘지 않는 강원도 평창일대에서 장소를 섭외한다. 이유는 서쪽에서 찍으면 작품성은 우수하나 흥행에서 실패하고 태백을 넘어 동쪽에서 찍으면 작품성과 흥행 모두에서 실패하는 이상스런 징크스가 있기때문이다. 강원도 평창에 있는 '오대산'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밋밋하지만 골짜기 안으로 들어갈수록 심오하고 깊은산이다. 깊은 사람의 속을 헤아리는 여성같은 섬세하고 매력적인 산이라고 생각한다. 강원도 속초는 쉬기 위한 여행으로는 가장 좋은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추구하는 스타일/배역
데뷔작인 외아들은 어머니를 생각하고 만든 작품이다. 소시민적인 우리의 어머니가 외아들을 키우면서 어머니가 바라는 뜻과 모순되는 아들을 표현했다. 60년대에는 인간성을 바탕으로한 액션물 70년대에는 고민하는 젊은이의 고독,방황를 <초우>, <동춘> 등에서 표현했다. 80년대에 국제적인 영화를 생각한 난 <뻐꾸기도 밤에 우는 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등을 우리영화특유의 색깔을 살려 만들었다.95년 만든 '무궁화 꽃이 피어습니다'에서는 기술적 메카니즘이 뒤쳐져 있었던 우리영화에서 세계적인 기술을 도입, 특수촬영과 스테레오에 많은 신경을 썼다. 본인이 옥고를 치르게 했던 작품이었지만 후회나 미련은 없다고 한다. 처음 영화를 시작할 때 액션을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전쟁영화등을 만들다 보니 섬세함이 결여되고 개성을 살리기 어려웠다. 그래서 후반에는 본인의 생각을 잘 살릴 수 있는 영화, 적은배우, 제한된 소재에서 자신을 찾아 가는 영화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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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정진우는 4남 5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양곡 초등학교, 김포중학교, 김포 농고, 중앙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1957년 유현목 감독의 <잃어버린 청춘>에 참여하면서 영화계에 입문하였다. 정창화 감독의 조감독을 거쳐 1961년 <외아들>로 감독 데뷔했다(한국영화감독사전, 경향신문a).
<심봤다>(1979),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1980), <앰무새 몸으로 울었다>(1981) 등을 통해 6,70년대 흥행감독 대열에 올랐다(필름2.0). <초우>(1966)가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성공을 거두며 영화작가로도 인정받았다.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1980)는 대종상 9개 부분에서 수상해 대종상 최다 수상작이라는 진기록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스타뉴스). 또한 제 23회 대종상 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한 <자녀목>(1984)은 제1회 도쿄영화제에서 ‘세계영화 베스트30’에 선정되기도 했다(경향신문c).
<초우>를 시작으로 영화 제작도 겸하게 되면서 1969년에는 영화사 우진필름을 설립하여 대표이사를 맡았다. 후시녹음이 일반화되어있던 70년대에 동시녹음 영화제작에 앞장섰다. 그가 제작·연출한 <율곡과 신사임당>(1978), <가시를 삼킨장미>(1979), <심봤다>(1979)는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동시녹음영화로 꼽힌다(경향신문a).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1981)에서는 국내 최초로 제대로 된 수중촬영을 하는 등 영화기술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동아일보a ).
1972년 영화진흥공사 제작담당 이사로 재직하면서 국책영화인 임권택의 <증언>(1973)과 이만희의 <들국화는 피었는데>(1974)를 제작하였다(한국영화감독사전). 1985년에는 멀티플렉스의 전신인 국내 최초 복합극장 씨네하우스를 설립하였다. 1989년에는 미국직배영화인 <인디애나 존스>(1984), <레인 맨>(1987)등을 상영한 것이 영화인들의 반대에 직면했고 그 여파로 자신의 극장이 방화피해를 입기도 했다(동아일보b, 경향신문b).

*참고문헌
경향신문a 1979년 10월 20일자 5면.
경향신문b 1996년 10월 31일 56면.
경향신문c 1995년 5월 27일자 23면.
동아일보a 1981년 10월 8일자 12면.
동아일보b 1989년 5월 27일자 13면.
한국영화감독사전
(http://www.kmdb.or.kr/actor/mm_basic.asp?person_id=00001958&keyword=정진우)
“정진우 감독, 인터넷 회고전 개최”, 『필름2.0』(2001년 6월 25일 발행).(KMDS 검색)
“키스신, 특수효과, 심야영화, 韓영화 최초는?”, 스타뉴스.
(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1030411465868539&type=1&outlink=1)

[작성: 김성희]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38년 1월 17일 생. 경기도 김포군 양촌면 양곡리 골말 출생하였다. 가족 사항은 4남 5녀 중 3남으로 태어났으며 부친은 오랫동안 김포와 강화에서 교장선생님으로 재직했으며, 교육자 집안에서 출생하고 성장하였다. 양곡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해방과 전쟁으로 가세가 다소 기울었으며 김포중학교와 김포 농고에 진학하여 고향에서 축산업에 종사하려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중앙대 법학과를 진학하여 연극반에서 활동하였으며 방송인 이종환, 성우 오승룡 등이 당시 함께 활동했던 대학동기들이었다.
영화계는 1957년 유현목의 <잃어버린 청춘>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입문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활동은 1958년 박상호 감독의 <장미 병들다>에서 강범구 촬영 기사 조수일을 맡으면서 시작하게 되었다. 그 후 엑스트라, 촬영조수, 조명조수, 미술부 등에서 두루 일하면서 영화 일을 배워가던 중 정창화 감독의 조감독을 끝으로 감독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25세 되던 해인 1963년 <외아들>을 연출하면서 감독의 꿈을 이루게된다. 감독의 영역에서 제작의 영역까지 작업의 확장을 꾀해오던 그는 1969년 우진필름 영화사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우진필름은 김기영, 심우섭, 정소영을 포함하여 34명의 감독들이 작업에 참여하게된 영화사로 성장하였으며, 임권택 감독 역시 정진우 감독과 의막역한 사이로 우진필름에서 11작품을 연출하게 된 각별한 인연을 맺은 영화사이기도하다.
1972년 영화진흥공사 제작담당 이사로 재직하면서 국책영화인 임권택의 <증언>과 이만희의 <들국화는 피었는데>를 제작 상영하여 국가주도의 영화제작의 길을 열어가는데 일조한다. 국책영화는 한국영화의 세계화와 한국영화시장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한다는 순기능보다 국가기관에 의한 영화시장의 개입과 국가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한 관주도의 관객동원이라는 폐해가 지적되기도 한 양면성을 지닌 정책의 산물이었다.
영화기술의 선진화를 위해서 촬영과 조명 특수효과 기술팀의 교육과 연수에 관심을 갖기도하였으며 영국과 일본에서 동시녹음과 편집기술등을 견학하고 연수하여 동시녹음 영화 인 <율곡과 심사임당>을 제작하였다. 그 후 <심봤다>, <가시를 삼킨 장미>,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를 동시녹음으로 연출하여 한국영화계에 동시녹음기술을 도입하는데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김수남은 그의 영화 활동을 세 시기로 구분하여 정리한 바 있다. 제 1기는 1960년대 <외아들>로 데뷔하여 1969년 ‘우진필름’을 설립하여 제작자로 활동하기 이전의 시기이며 제 2기는 1970년대 대종상 우수작품상을 수상한 <마지막황태자 영친왕>과 한국일보 연극영화상 작품상과 감독상 그리고 부산일보 주최 부일영화상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한 <동춘>과 <석화촌>를 위시하여 <섬개구리 만세>까지 연출하여 중견감독으로 입지를 굳혀가던 시기이다. 제 3기는 1980년대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하여 향토적 서정을 소재로 한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등의 작품을 연출하면서 동시에 동시녹음을 영화제작에 시도하던 영화작가로서 완숙의 경지에 접근한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본격적인 작가로서 입지를 굳힌 작품은 <초우>(1966)이다. <초우>는 서비스 공장 직공인 철(신성일 분)이 대사의 딸을 이용하여 출세를 꿈꾸다가 좌절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으로 인해 청춘영화 작가의 가능성을 열어주었으며 이후 1970년대 전성기의 작품 세계를 열어가는 기반을 구축했다고 한다. 김종원은 <초우>에 대해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좌절된 꿈을 보여주었으며 카메라는 생명체처럼 움직이며 구멍가게 아주머니의 푸념과 철조망의 눈부신 광선,권태로운 일기예보,변화없는 여주인공의 레인코트,우산속의 밀어등을 통해 정진우식 영상미를 잘 담아낸 수작'으로 평가하였다. 1980년대에는 대종상 감독상과 여우주연상(유지인)을 수상한 <심봤다>(1979),대종상 남우 주연상(이대근)과 여우 주연상(정윤희)을 동시에 수상한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1980),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1981)와 같은 산을 배경으로 한 작품과 <석화촌>(1972)에 이어서 <바다로 간 목마>(1980),<백구야 훨훨 날지마라>(1982)로 이어지는 바다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김수남은 이에 대해 '세속적인 사회로부터 벗어나 자연세계와 원초적인 인간 본능의 탐구와 사랑의 부재를 극복하는 힘을 제시하는 시선과 한국영화의 세계화를 추구하는 정체성의 탐구로 선회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며 동시에 정진우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영화는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이다. 이 영화는 정비석의 <성황당>이 원작이다. 내용은 남사당패 딸 순이(정윤희)와 그녀를 키워준 어머니와 숲을 구워파는 현보(이대근)가 숲 속에서 가족을 이루어 살아가는 이야기다. 순이와 현보는 혼례를 올리고 살아가지만 순이를 소유하고 싶은 산림감독원의 방해로 헤어지게 된다. 산림감독원이 순이를 성폭행하려하자 순이를 좋아하던 칠성에서 구출되어 숲 속으로 떠난다. 순이는 다시 숲으로 돌아와 살게 되지만 산림감독원의 폭력에 그를 안고 숯가마에 들어가 동반자살하게 되는 비극적인 결말을 맺게 된다. 원작에서는 순이가 다시 돌아오는 결말을 보이지만 영화는 폭력에 죽음으로 대항하는 비극적인 결말로 맺는다. 영화평론가 김종원은 이 영화의 특징을 네 가지로 들었다. "첫째,원작 정비석의 <성황당>에 없는 도입부의 설정이다. 이러한 도입부의 설정은 단조로운 내용에 변화를 주고 입체적인 구성과 극적인 재미를 꾀할 수 있다. 둘째,원작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비장미가 있다. 셋째. 목욕하는 순이와 그녀의 옷을 거두어가는 김주사의 실랑이에 선녀와 나무꾼 같은 전래동화의 이미지를 접목시킴으로써 친근감을 준다. 마지막으로 험준한 골짜기와 울창한 숲, 숯막의 원경을 망원렌즈에 의한 부감의 유동성있는 카메라 움직임으로 세상의 선과 악, 그리고 이기주의적인 욕망에 의해 파괴되는 인간적인 비극에 접근하고 있다"(영화평론집-영상시대의 우화,1985)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는 원레 제목이 <침묵>으로 발언할 수 없는 1980년대의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홀아버지 최영감은 문(최윤석)과 수련(정윤희)을 산 속에 데려가 키운다. 문과 수련은 친혈육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되어 사랑에 빠지고 최영감은 이들을 갈라놓기 위해 문을 서울로 보내버린다. 문은 숙(김형자)을 데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최영감은 수련을 타지로 내보낸다. 수련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다가 성폭행을 당한 후 죽게 되는 비극적 결말을 보여준다.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와 배경과 구조가 유사하며 부당한 폭력에 희생되는 여성이라는 주제도 유사성을 보인다. 1990년대에는 작품 활동이 이전에 비해 대폭 줄어들었다. 1995년 김진명의 베스트셀러 소설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연출하여 춘사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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