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촬영장소의 컷장면 칼럼 [KOFA 특강노트] 재현의 규범화, 그리고 한국 및 아시아 퀴어영화의 실험과 도전 by.신재영(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작년 여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된 
‘해외 영화학자 초청 대중 특강’의 내용을 강연자의 시점에서 정리합니다.
영화와의 첫 만남과 학계 입문 과정에 얽힌 소소한 에피소드부터, 
세계 속 한국영화의 위치, 최근 몰두하고 있는 연구 주제에 대한 학술적 분석까지.
한국영화를 향한 해외 영화학자 6인의 개성과 열정으로 꽉 채워졌던 2시간을  KOFA가 직접 기록한 특강노트로 만나보세요.
 

김응산 교수는 작품의 텍스트와 미학적 형식에 집중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퀴어영화를 연구한다.
특히 퀴어에 내재된 시간성을 반영하면서 유토피아적 상상력을 통해 구현되는 작품들에 관심이 있으며,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의 측면에서 실험을 거듭하는 영화 작업을 포괄해 퀴어영화로 연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 워싱턴대 아시아언어문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앞서 이야기한 관점으로 1990년대 이후 퀴어영화를 분석한 결과를 담은 저서 Future Imperfect를 집필하고 있다.



풍크툼의 관찰자에서, 퀴어영화 연구자로

강연을 제안받은 이후, 영화학자로서의 여정이 시작된 지점을 반추해볼 수 있어 뜻깊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 지인께서 주신 무료 관람권을 가지고 형과 지역의 단관극장을 찾았던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개봉 작품들을 거의 다 봤을 정도로 극장에 자주 갔다. 이때의 경험 덕분에 영화에 빠르게 익숙해지고, 보다 일찍부터 영화를 좋아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이 단관극장 대부분이 아쉽게도 사라졌고, 영화를 접하는 매체마저도 노트북과 태블릿, 스마트폰으로 옮겨갔지만, 극장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런 아련한 추억들이 내 영화연구의 출발점이 되어준 것 같다.
  영화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를 마련해준 단관극장들
그런 다음 본격적으로 영화학에 관심을 가지도록 만들어준 작품이 무엇일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롤랑 바르트는 보는 이를 ‘찌르는 듯한’ 이미지로서의 풍크툼(Punctum)*주1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나에게는 두 편의 장르영화가 풍크툼을 경험하게 했다. <양들의 침묵>(조나단 드미, 1991)은 포스터 자체가 시선을 사로잡았을뿐더러, 작품 속 연쇄 살인범에 대한 인물 설정이 트랜스포비아를 조장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음을 알린 한 영화잡지의 기사, 그리고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던 작품 속 일부 장면들까지 작품의 여러 요소가 꽤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당시 영화를 본 후 나는 트랜스나 동성애자 등이 악인으로 등장하는 경향을 꼭 부정적으로만 바라봐야 할 것인지에 대해 어렴풋이 의구심을 가졌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봤던 <캐리>(브라이언 드 팔마, 1976)도 비슷했는데, 흥미롭게도 주인공 소녀의 관점에 공감하며 작품을 감상했다.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던 소녀가 비극적 운명을 마주하기 전 복수를 감행하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관심을 받고 모두의 기억 속에 남는다는 설정이 가슴 아팠다. 그러면서 앞서 두 작품이 안겨준 충격을 풍크툼에 빗댄 것처럼, 영화는 배우거나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는 점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양들의 침묵>과 <캐리>
돌아보니 나는 공포영화를 볼 때 괴물이나 귀신, 복수하는 자들에게 감정을 이입했던 것 같다. 흔히 ‘빌런’으로 묘사되는 인물들에 자신을 동일시했던 당시부터, ‘퀴어’와 연관된 생각이나 태도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최근에 개봉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2023)과 같은 수작들을 지켜보면서도, 퀴어영화는 정체성을 그리는 영화, 미학적 실험을 하는 영화, 혹은 퀴어한 삶을 살아가는 관객들에 의해 재정의되는 영화 중 어떤 것에 해당할지를 깊이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성소수자에 관한 서사에 국한하지 않고, 퀴어영화가 얼마나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와 삶을 담아낼 수 있는지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사례가 아직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반복되는 형식적 특징은 발견되지 않기에 이를 ‘장르’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엄연히 영화의 한 양태로 자리 잡은 퀴어영화를 다각도에서 정의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동아리 차원에서 퀴어영화에 대한 정보를 담은 자료집을 만들고 관련 작품을 선정해 학내에서 상영하는 ‘이반영화제’라는 행사를 기획했다. 영화제에는 놀랍게도 아주 많은 이들이 찾아왔다. <안토니아스 라인>(마린 고리스, 1995), <화분>(하길종, 1972), 그리고 대사의 구성 등으로 볼 때 퀴어문화의 맥락에서도 무리 없이 해석될 수 있는 <공동경비구역 J.S.A>(박찬욱, 2000) 등의 작품을 상영했다. 이외에도 즐거웠던 기억이 또 한 가지 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 투게더>(1997)가 1997년 당시 존재했던 검열 제도로 인해 국내 상영이 불허되었을 때, 동아리 구성원들과 어렵게 테이프를 구해 학내 광장에서 상영한 적이 있다. 그러자 퀴어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에 수없이 몰려들었다. 아직 영화학을 공부하고 있지 않던 시절임에도, 이렇게 영화 상영을 직접 기획하는 경험을 거듭하면서 영화의 영향력과 효과를 몸소 체험했고, 영화만이 발휘할 수 있는 힘을 확인했다. 영화는 문화와 예술, 산업 등 다양한 개념으로 정의될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과 생각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을 보면 어쩌면 ‘운동’의 일환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앞서 강연해주신 교수님들과 달리 나는 영화학계에 다소 늦게 입문했지만, 국내 여러 영화제에 다니며 ‘현장’ 참여를 중심으로 영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부산, 전주, 부천을 비롯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서울인권영화제 등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서울인권영화제는 제2회가 이화여대에서 열렸는데, 퀴어 다큐멘터리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하비 밀크의 시간들>(롭 엡스타인, 1984)을 상영할 때 경찰 인력이 이화여대를 둘러싸고 있던 기억이 생생하다. 돌이켜보면, 그 시대를 직접 체험함으로써 영화를 보는 시선을 발전시켰던 시간이,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 지금의 자양분이 되어준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이 든다.
  다양한 영화를 접하고 시야를 넓힐 수 있도록 도와준 영화제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영화학에 관한 여러 외국 도서가 유입되곤 했는데, 내가 퀴어에 대해 잘 알지 못할 때 관련 내용을 처음 접한 경로 역시 번역서였다. ‘퀴어영화’라는 개념이 논의되기 전 게이·레즈비언 영화를 다룬 『베트남에서 레이건까지』(로빈 우드, 1993), 『레즈비언 게이 퀴어 영화비평의 이해(호모 PUNK 이반)』(바바라 해머 외, 1999) 등을 주제로 세미나를 진행했고, 퀴어영화의 고전을 감상하면서 생각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던 중, 나를 관통한 또 다른 풍크툼이 된 작품들을 만났다. 먼저, <세친구>(임순례, 1996)는 게이 인물 한 명을 포함한 세 친구의 삶을 보여준다. 친구 한 명의 성적 지향성과 젠더 표현은 이들 사이에서 중요치 않으며, 그들은 절망한 청년들로서 1990년대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가난하고 힘겹게, 하지만 더불어 살아간다. 이를 지켜보면서, (만약 ‘퀴어성’에 대한 정의가 가능하다면) 영화의 퀴어성을 결정하는 요소에는 성적 지향성만 해당하지는 않으리라는 견해를 갖게 되었다. “퀴어는 연대의 다른 이름”이라고 이야기한 주디스 버틀러의 말처럼, 퀴어성은 ‘누구와 연대하는지’를 결정하고 연대의 폭을 넓히는 데 기여하는 장치이지 않을까? 퀴어를 둘러싼 맥락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시도가 이런 영화들에서 벌써 나타나고 있었다.

<올리버>(닉 디오캄포, 1983)는 필리핀의 게이클럽에서 유명인을 모사하는 올리버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올리버라는 인물은 성소수자이지만, 자녀를 낳고 한 가족의 가장으로 살아간다. 이 작품을 접하기 전까지 내가 알고 있던 퀴어영화는 대부분 당사자의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밀도 높게 담고 있었다. 하지만 성소수자 남성이 가정을 형성하고, 그러면서도 게이라는 지향성은 잃지 않는 모습을 기록한 영상은 당시의 내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편으로, 게이클럽에 찾아와 올리버와 같은 필리핀 현지의 성소수자들을 착취하는 제1세계 외국인 관광객들도 카메라 너머에서 등장한다. 카메라의 시선은 관광객의 시선과 일치하고, 아동 성착취 기사와 동성 성매매로 삶을 연명하던 과거 어린 시절 올리버의 고백이 몽타주로 재배치되어 등장한다. 마르코스 치하에서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민중의 모습을 전경으로 삼아 하층민 퀴어들의 인터뷰를 담아내는 장면까지. 영화를 통해 그 착취의 행태를 관찰하다 보면, 식민주의적 억압을 자행하는 태도를 소위 자유롭고 글로벌한 게이라는 이미지로 포장하면서 제3세계 성소수자 집단 위에 군림하는 제1세계 성소수자들과, 빈곤한 현실에 부딪혀 자신의 성적 지향성에 대한 확신을 갖기도 어려워하는 현지 성소수자들이 절대 동일한 층위에서 분석될 수 없음을 지각하게 된다. 이들을 같은 종류의 집단으로 지칭하는 순간, 퀴어정치학의 본질을 망각하게 될 우려가 있다.

<올리버>는 퀴어를 바라보는 서구의 시각으로부터 독립된 채 아시아 퀴어영화의 특수성을 보여준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가족 간의 유대, 가족 구성원으로서 이행해야 할 책임 등에 익숙한 아시아의 퀴어는 규범적이지 않은 자신의 정체성 혹은 젠더 표현과 자신이 속한 현실 사이에서 ‘타협(Negotiation)’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퀴어와 관련해서는 자유주의적 측면에서 개인의 권리 문제를 중심으로 담론을 형성하는 서구의 관점에서 이는 쉽게 이해될 수 없는 양태이다. 나는 이러한 관점의 차이가 흥미로워, 아시아 퀴어영화를 서구 이론의 틀에만 가둬 해석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면서, 아시아 영화를 주된 연구 분야로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세친구>와 <올리버> (사진: "Oliver", IMDb)

퀴어영화의 각기 다른 얼굴을 찾아

유학 중 영화를 공부한 경험으로 잠시 주제를 옮겨보자. 사실 주전공을 영화학으로 바꾸기 전 나는 영문학을 전공했기에, 미국 워싱턴대로 유학한 이후 퀴어이론을 방법론으로 하여 영미권 영화 연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토드 헤인즈 등이 이끌고 1990년대 퀴어영화의 대표적 경향으로 자리 잡았던 ‘뉴 퀴어 시네마’를 중심으로 미국의 퀴어영화를 연구하고자 했다. 하지만 토드 헤인즈의 작품 중 퀴어 및 비규범적 성정체성이 분명하게 재현되는 경우보다, 그의 영화적 스타일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퀴어미학에 더욱 관심이 갔다. 예를 들어, <파 프롬 헤븐>(토드 헤인즈, 2002)에서는 흑인 남성과 사랑에 빠진 여자 주인공이 이별을 통보할 때, 이들을 바라보는 주변 인물들의 반응을 짧은 길이의 로우 앵글 숏으로 보여준다. 샷의 배치 역시 타인의 시선을 극대화하기 위해 짧으면서도 히스테리컬하게 구성되어 있다. 퀴어한 인물을 바라보는 규범적 이성애자의 시선을 재현하기 위해 기존의 퀴어영화에서 자주 사용했던 공식을, 서로 다른 인종 간의 금기시된 사랑을 묘사한 장면에도 적용한 점이 아주 흥미롭다. 이렇게 영화 속 퀴어적 순간을 보다 다양한 맥락으로 조성하는 시도가 궁금해, 관련 주제로 연구를 이어갔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성적 지향성에 대한 논의만으로 요약할 수는 없는 퀴어영화(특히 아시아 퀴어영화)의 미학적 특징을 발견하고 싶었다.

대학원 과정 중에 출간한 두 편의 영어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두 작품을 그 예로 소개하고 싶다. 두 편 모두 영화의 소재를 차별화하고 미학적 실험을 거듭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한국 퀴어영화 출현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들이다. <줄탁동시>(김경묵, 2011)는 내가 개념적으로만 구상했던 퀴어영화의 이론을 영화적 언어로 이미 구현하고 있었다. 한국의 퀴어영화 역시 성소수자의 권리 보호를 주장하는 담론이 아니라 미학적 대상으로 연구될 가능성이 충분함을 확신한 작품이다. 주인공 준(이바울)은 탈북 청소년이고, 자신의 성적 지향성과 관계없이 동성 대상 성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 그리고 그는 타인에게 폭력적으로 착취당한 후 지금 보여드릴 장면에서처럼 청계천을 따라 정처없이 걷는다. 그 옆모습이 계속 롱테이크로 잡힌다. 천의 흐름을 거슬러 청계천의 끝으로 향하는 그를 보면서, 이 장면이 역사적 진보의 흐름, 즉 진보와 발전이라는 이성애·동성애규범적 시간성의 흐름을 거스르겠다는 의지를 함축한다고 느꼈다. 예를 들면, 특히 서구의 여러 퀴어 담론과 운동들이 개인의 권리와 자유주의적인 접근을 강조하면서 “앞으로는 나아질 것이다”라는 상황적 진보에 집중하고 있는데, 이러한 역학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는 퀴어들의 삶과 미래는 어떠할지에 대한 고민이 이 롱테이크 장면에서 드러나고 있다. 장면은 종로3가, 즉 게이 유흥업소들과 커뮤니티들이 자리한 일대에 다다르며 끝난다. 퀴어하지만 동시에 탈북 청소년이기도 한 준이, 성소수자의 공동체에 소속되고 구성원들과 소통하기가 어려운 현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성소수자라는 정치화된 집단, 혹은 이들이 속한 사회 공동체를 묘사하는 영화가 ‘퀴어하다’라고 인식되었다면, <줄탁동시>와 같은 작품들은 이를 넘어선 역사적, 문화적, 그리고 미학적 함의를 퀴어와 연관지어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 당시 위 논의를 접한 지도교수님께서도 같은 맥락에서 한국과 아시아 영화를 연구할 가치가 있음에 동의하셨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아시아 퀴어영화 연구를 시작했다.
      <줄탁동시> 중
<죽여주는 여자>(이재용, 2016) 역시 성 노동자인 여성 노인과 한국계 필리핀인(코피노) 아이의 삶을 중첩해 퀴어영화의 폭을 확장한다. 오프닝 시퀀스가 독특한데, 한국인 산부인과 의사 아버지가 필리핀에서 버리고 온 코피노 소년 민호(최현준)는 필리핀인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산부인과(재생산이 이뤄지고, 재생산 정치를 강화하는 장소)를 찾고, 병원 앞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는 아이에게 주인공 소영(윤여정)이 안부를 묻는다. 작품 전체의 내러티브를 보더라도, 국가의 관심 밖의 영역에서 출생한 코피노가 국내 재상산 정치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역설적이게도 그런 그를 거두는 존재가 재생산 정치와 가장 거리가 먼 인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나이 든 성 노동자라는 설정이 특별하다. 작품 말미에서는 주인공 소영과 트랜스젠더 티나(안아주)가 민호를 함께 양육하기도 한다. 미국 퀴어 이론가 리 에델만의 견해를 빌려 설명하자면, 미국은 재생산의 미래지향적인 측면을 이데올로기화하며 적극적으로 지지해왔고, 할리우드 영화는 이런 이데올로기를 적극 반영하여 소위 아동들을 죽어서는 안 되는 신성한 존재로, 지속가능한 미래성의 상징으로 그려왔던 것이다. 따라서 재생산의 주체가 될 수 없는 퀴어는 사라져야 마땅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국가의 돌봄을 받지 못한 코피노 아이의 상징적 재생산을 돕는 주체는 퀴어이다. 미국 내 주류로 자리 잡은 퀴어이론으로 동시대 퀴어영화를 비평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죽여주는 여자> 중
위의 여정을 토대로 정립된, 퀴어영화에 관한 나의 연구 방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시간의 매체인 영화가 ‘퀴어’라는 개념에 반영된 시간성을 표현하는 방식이 궁금한데, 특히 1990년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의 퀴어영화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미학적 실험을 분석하고 싶다. 그리고 미국 중심적으로 해석된 뉴 퀴어 시네마 이론을 아시아 퀴어영화에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관습에 저항하려고 한다. 최근 대두된 지역 영화(Regional cinema)라는 개념을 퀴어의 측면에서 구체화해, 아시아 지역의 퀴어영화를 보다 객관적이면서도 입체적으로 연구할 것이다. 더불어, 동시대 한국사회에서 공유되는 규범상으로는 부정할 수밖에 없는 개념인 퀴어는 영화에서도 절망 또는 실패의 형태로 나타나며, 유토피아적 상상력을 통해서만 성립 가능하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에 존재하며 그와 연관된다는 점에서, 퀴어만의 독특하고도 흥미로운 ‘변태적 시간성’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성애중심적 가치관으로는 포괄할 수 없는 타협돌봄, 그리고 취약한 타인에 대한 연대를 실천하는 퀴어의 면모를 영화에서 더 적극적으로 발견하고 싶다.
  미학적 실험, 타협 및 돌봄의 개념을 바탕으로 한 아시아 퀴어영화 연구의 방향성

미래불완료의 아시아 퀴어영화, 계속 꿈꾼다

집필 중인 저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연구 주제를 더 자세히 소개하고 싶다. Future Imperfect, 즉 ‘미래불완료’라는 제목이다. 미래에 완료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를 미래불완료라는 (존재하지 않는) 시제로 설명할 수 있다면, 아시아 퀴어영화의 성격이 이와 유사하리라고 생각했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퀴어문화를 제도권 안에서 존중하려는 노력이 아직은 부족한 상황이어서, 그 안의 퀴어영화는 유토피아적 상상력을 동원한 판타지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또한 영화의 형식적이고 미학적인 측면에서도, 아시아 퀴어영화는 앞으로의 변화 양상을 짐작하기 어려운, 말 그대로 미래불완료 시제의 주체가 되는 영화 양태에 속한다. 그만큼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방식으로 발전하리라는 기대가 가득하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퀴어는 ‘시간’과 분리해 논의할 수 없는 개념이므로, 저서에서는 시간을 조작해 선보일 수 있는 매체인 영화가 이를 담기에 아주 적합하다는 점을 설명하려고 한다.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개념으로서의 유토피아가 현실에서 문득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푸코가 제시한 ‘헤테로토피아*주2’가 몇몇 퀴어영화에서 공간성으로 구현된 사례도 기록했다. 한편, 파울 클레의 회화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1920)를 본 벤야민은 ‘역사의 천사(der Engel der Geschichte)*주3’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진보하는 시대를 따라 날갯짓하면서도 수많은 상처로 얼룩진 과거로 시선이 향해 있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천사의 모습에는 동시대 퀴어영화의 숙명과 맞닿는 지점이 있다. 일종의 진보라고 볼 수도 있으면서 실제로도 진보라는 이름으로 선전되곤 하는 동성혼 합법화 등, 퀴어를 존중하는 제도 한 가지가 합법화된다고 해서 다양한 계급과 차이를 가진 퀴어 모두를 위한 유토피아가 펼쳐질 수 없고, 그들은 늘 어딘가에서 차별로 인해 고통 받았거나 받을 것이다. 그리고 퀴어 안에서도 계급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거나 혹은 성소수자로서 생활하기에 보다 안락한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이들과, 끊임없는 착취의 굴레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의 차이는 더욱 도드라질 것이다. 따라서 갈수록 규범화되어 가는 퀴어의 영화적 재현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과 형식 상의 실험을 통해서, 그리고 퀴어라는 개념이 포용할 수 있는 집단 혹은 주체의 저변을 확장함으로써 퀴어영화의 다양성에 기여하는 영화들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때이다. 이렇게 진보적 흐름에 합류하지 못하고 고통 받는 존재들을 모두 아울러 더 나은 세상을 일구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가 퀴어의 윤리라고 생각하는데, ‘영화’에 이 윤리가 상당 부분 구현되었음을 추후 연구와 저서를 통해 계속 전달하고 싶다.

2000년대에 가까워지며 영화 촬영과 감상의 매체가 디지털로 전환되면서, 여러 감독이 각자의 특색을 반영한 퀴어영화를 다수 발표해왔다. 아시아 곳곳에서 활동 중인 그들 덕분에, 디지털 기술의 가능성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며 미학적으로 실험을 거듭하는 작품들이 선을 보일 수 있었다. 특히 태국의 툰스카 판시티워라쿤 감독은 태국의 역사나 현실을 고발하는 장면을 그와 관련 없는 다른 쇼트와 병치하는 등 퀴어성과 정치성을 결합하는 독특한 시도를 보여주기도 한다. 퀴어가 태국사회에 정착된 규범을 거스르는 데 기여하는 방법을 영화로 탐구하는 흥미로운 창작자이다. 한편, 퀴어한 영화에 대한 작업으로 국내에서 돋보이고 있는 창작자로서 임철민 감독도 언급하고 싶다. 그의 작품들에서는 퀴어한 촬영과 편집 방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엿볼 수 있다. <프리즈마>(2013)의 한 장면에서, 카메라는 값비싼 촬영기기 없이 단순 용도의 짐벌이나 핸드헬드로 구현하기 어려운 움직임을 선보이며 부드럽게 유영한다. 사실 촬영 당시 짐벌이 고장 났고, 이를 수리할 여건이 변변치 않았던 임철민 감독은 고장 나서 제멋대로 돌아가는 짐벌을 가지고 하나의 쇼트를 촬영해봤다고 한다. 보시는 바와 같이 결과물은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더군다나 임철민 감독은 <프리즈마>를 포함해 이렇게 우연과 실험을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들이, 시장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는 그 실험성으로 인해 배급되지 않으리라는 점을 알고 있었고, 작품들을 대중에게 무료로 공개하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작품의 형식뿐만 아니라 유통 면에서도 퀴어한 방식으로 시스템에 저항하면서, ‘실패’가 곧 미학적 실험의 성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한 사례이다.
      <Santikhiri Sonata>(툰스카 판시티워라쿤, 2019)와 <프리즈마>
마지막으로 퀴어영화에 대한 재미있는 리메이크 사례를 소개하며 강연을 마치고자 한다. 이성애자인 남성 주인공의 연인이 숨진 후 남성으로 환생한다는 설정을 가진 <번지점프를 하다>(김대승, 2001)는 몇 년 전 국내에서 드라마로 리메이크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원작 시나리오 작가분께서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리메이크에 반대하면서 제작이 무산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작품은 태국에서 생각지도 못한 서사로 리메이크된다. 원작에서는 주인공이 동성으로 환생한 연인과 이성애적 관계를 이어가고자 죽음을 택한다. (사실 동성애 금기에 관한 통념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리메이크작 <듀, 우리 함께 떠나자>(추키얏 삭위라쿤, 2019)에서는 본래 동성 연인이었던 두 주인공 중 한 명이 숨진 후 이성으로 환생하고, 이들은 동성 연인으로서의 삶을 다시 시작하고자 극단적 선택을 한다. 인물이 지향하는 관계에 대한 설정을 완전히 뒤바꿨다. 여기서 한국 또는 아시아 퀴어영화의 특징이자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본국이 아닌 어딘가에서 얼마든지 퀴어한 영화로 재탄생하며 더 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그 영향력을 이어가는 힘. 한국 퀴어영화에도 그 힘이 가득하다는 점을 믿고, 응원해 주시기 바란다.
      <번지점프를 하다>와 <듀, 우리 함께 떠나자>

  * 질문과 답변 *
(질문1) 퀴어영화 연구를 위해 영화학과 철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의 이론을 도입해 간학문적 연구를 진행하고 계신 듯하다. 다만 여전히, 해당 이론들만으로 아시아 퀴어영화를 완벽히 연구하고 설명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연구 도중 이와 같은 이론적 공백을 발견하게 되신다면 보통 어떻게 대처하시는지가 궁금하다.

(답변)

말씀하신 대로 퀴어나 영화이론 자체가 영어권 중심으로 논의되어왔고,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이를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퀴어이론에 대한 영미권 학자들의 저서를 번역하며 느낀 아쉬운 점을 역자 후기에 남기려고 노력하는데, 그럼에도 새로운 담론이 원활히 생성되지는 않는 것 같다. 영화학이 학문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곳이 영미권이며 퀴어영화 연구도 거의 미국 중심으로 이뤄져온 터라, 그간 형성된 패러다임을 전환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나는 이론적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영화의 텍스트로 돌아간다. 이론 자체는 서구에서 발생한 논의를 참고하더라도, 이를 반박할 근거를 영화 텍스트에서 찾는다. 작품 속 다양한 재현 양상,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영화의 특이성, 한국영화에서 타협과 가족이 중요한 이유 등을 살피다보면 길이 보이는 것 같다. 텍스트는 영화 분석의 필요조건이다.

(질문2) 임철민 감독의 작품처럼 미학적 실험으로서의 퀴어영화들의 사례를 알려주셨다. 영화적 규범을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는 작업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상영되는 장소로 ‘미술관’도 자주 언급된다. 혹시 퀴어를 소재로 한 미술 작업 중 눈여겨보신 사례가 있을까?

(답변) 이 자리에 와 계신 김경묵 감독님께서도 몇 년 전 대안공간 탈영역우정국에서 VR과 AR 매체를 이용한 개인전 <QUARANTINE: 독방의 시간>을 개최하신 것처럼, 퀴어영화의 무대가 꼭 영화관이 될 필요는 없다. 임철민 감독 역시도 자신이 제작한 작품들이 ‘퀴어영화’라고 생각하고 영화제에 출품하고자 했지만 퀴어 관련 국내 영화제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퀴어영화의 성립 조건을 주로 동성애나 트랜스 재현 관련 내용으로만 한정하고 있는 국내 영화제의 한계가 드러난다. 임철민 감독도 그랬듯이 이 작품들은 오히려 미술관에서 상영의 기회를 얻었고, 많은 퀴어영화 감독 및 작가들이 미술관과 협업하며 자신의 작업을 공개할 대안적 공간을 찾고 있다. 이런 기회들이 지속적으로 마련되어야 작품들 간의 유의미한 ‘차이’가 보전되어 퀴어영화가 더욱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질문3) 대학에서 한국영화사 강의와 영화사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계시다고 말씀해주셨다. 영자원의 데이터베이스 KMDb의 영화글 카테고리 중 ‘한국영화의 퀴어한 허구들’이라는 코너에서는, 그간의 한국영화에서 시대적 한계 등으로 인해 미처 드러나지 못한 퀴어적 측면을 발견해 분석하고 있다. 혹시 선생님께서도, 한국고전영화 작품들 중에서 퀴어와 관련하여 맞닥뜨리게 되신 풍크툼이 있으시다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다.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신재영)

(답변) 현재 집필 중인 저서에서는 1990년대 이후의 영화들만 다루지만, 이후에는 한국영화라는 주제를 더욱 자세히 다루고 싶다. 한국고전영화 중에서도 퀴어한 순간들을 다수 포착할 수 있다. <화분>(하길종, 1972)처럼 직접적인 방식이 아니더라도, <여사장>(한형모, 1959)에서는 규범화되지 않은 여성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성애의 맥락에서만 해석되어온 <자유부인>(한형모, 1956)에서도 아주 재미있는 순간이 등장한다. 극중 자유부인 오선영(김정림)은 처음으로 비어홀을 찾았다가 서구식 무용을 화려하게 선보이는 무희를 바라보고 크게 놀라며 깨달음을 얻는다. 자유부인이 각성하는 계기가 남성이 아니라 여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자유부인의 내면에 있던 욕망이 여성 무희를 봄과 동시에 수면 위로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이어도>(김기영, 1977) 역시 재생산을 언급하면서도 작품의 중심에는 여성 집단이 있으며 여기서 길러진 남자 아이들은 출가한다. 이성애를 규범으로 인정하고 재생산을 목표로 삼은 사회의 통념을 역이용한 서사로, 충분히 퀴어적으로 해석될 만한 텍스트이다. 이외에도 퀴어의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는 한국고전영화에서의 순간들이 아주 많다. 여러 연구자분들께서 또 다른 사례를 활발히 발견해주신다면, 후에 이를 성실히 인용하며 연구를 이어가겠다.
 
(상) <자유부인> 중 무희의 춤에 놀라는 오선영 / (하) <이어도> 중
(질문4) 현재 춘천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를 맡고 있는데, 올해(강연일 기준 2024년) <럭키, 아파트>(강유가람, 2024)와 <딸에 대하여>(이미랑, 2023)를 상영했다. 흥미롭게도, 상영 이후 관객들 대다수가 잘 만들어진 ‘가족영화’라는 감상을 전했다. 강연에서도 말씀해주셨지만 아시아, 특히 한국 퀴어영화가족과 연결지어 이해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대해 조언을 구하고 싶다. (영화저널리스트 김형석)

(답변) 가족을 중시하는 아시아 문화를 고려할 때 아시아 퀴어영화 전반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겠지만, 한국에서 특히 짙게 나타난다는 데 동의한다. 다만 (<시인의 사랑>(김양희, 2017)에서 볼 수 있듯이) 이성애 규범에 따르며 가족을 이룬 이들도 삶의 특정 ‘상황’에서 퀴어적으로 수행할 수 있으며, 이들을 규범화된 이성애자로만 인식할 수는 없음을 짚고 싶다. 퀴어를 논할 때 오직 당사자의 정체성(이성애자, 동성애자 등)으로만 퀴어 여부를 판단하려고 하는 본질주의적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 한국 퀴어영화의 가족을 이해할 때 역시, 위와 같이 퀴어적 순간을 경유한 인물이라면 현재 소속된 가족에서 이성애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더라도 폭넓은 관점에서 ‘퀴어’로 바라볼 수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 퀴어영화에 관심을 가진 관객들에게, 정체성 정치만으로 퀴어의 영역을 재단하는 경향으로부터 이제는 탈피하기를 권하고 싶다.
  <시인의 사랑> 중


***
주1.
롤랑 바르트가 저서 La Chambre Claire(밝은 방, 1980)에서 사진과 관련하여 제시한 개념이다. 바르트는 사진의 관찰자가 지닌 개인적 측면을 건드리며 그를 찌르거나 뚫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우연적 요소로서 풍크툼을 설명한다. 관찰자는 사진 속 풍크툼을 통해 자신을 사적 개인으로 인식한다.

주2.
미셸 푸코가 Les mots et les choses: Une archéologie des sciences humaines(말과 사물, 1966)에서 처음 설명한 개념으로, 현실의 장소들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과 반하는 가치를 가지는, 하지만 현실에는 존재하는 장소를 가리킨다. ‘현실화된 유토피아’와 같은 의미를 지녔으며, 푸코는 이를 ‘헤테로토피아’라고 명명했다.

주3.
벤야민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1940)’라는 글에서, 파울 클레의 작품에 묘사된 천사는 진보의 폭풍에 떠밀려 날갯짓하고 있기는 하지만, 폐허가 된 과거의 잔해더미를 바라보며 마음 아파한다고 말한다. 미래로 향하는 진보의 흐름이 거세더라도 상처받은 과거는 치유되지 않은 채로 잔존함을 암시한다.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파울 클레, 1920)
2025-03-14조회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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