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옥
Shin Sang-ok / 申相玉 / 1925  ~  2006
대표분야
제작/기획, 감독
활동년대
1940, 1950, 1960, 1970, 1980, 1990, 200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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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모그래피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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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Bad Boy (신상옥, )
겨울 이야기 (신상옥, 2004)
증발 (신상옥, 1994)
닌자키드 (신상옥(Simon S. Sheen), 1992)
마유미 (신상옥, 1990)
불가사리 (신상옥,정건조, 1985)
심청전 (신상옥, 1985)
소금 (신상옥, 1985)
탈출기 (신상옥, 1984)
돌아오지 않은 밀사 (신상옥, 1984)

주요경력

1945년 고려영화협회 미술감독
1952년 신상옥 프러덕션 설립
1978년 홍콩에서 납북
1986년 오스트리아 빈 미국대사관으로 탈출
1994년 제47회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2003년 안양신필름예술센터 이사장
2006년 7월 한국영화인복지재단 선정 영화인 명예의 전당 헌액

기타정보

기타이름
사이먼 S. 신, 신태서, Shin Sang-okk, Shin Tae-seo, Simon S. Sheen, 申泰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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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25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으며, 1945년 일본 동경제국미술학원(東京帝國美術學院)을 중퇴했다(한국영화감독사전, 연합뉴스, 국제영화). 귀국 후 고려영화사 미술부에 들어갔으며, 이듬해인 1946년부터 최인규 감독의 연출부에서 일했다고 한다(한국영화감독사전). 한국전쟁 발발 후 영화예술협회라는 제작사를 세우고 자신이 각본을 쓴 <악야>(1952)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했다(씨네21a). 1954년에는 역시 자신이 제작을 겸한 다큐멘터리 <코리아>를 연출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최은희를 배우로 기용했다. 1955년부터는 변순제 등과 서울영화공사를 설립하여 이광수 원작, 신상옥 감독으로 <꿈>을 제작했다(씨네21b). 서울영화공사 제작으로 <무영탑>(1957), <지옥화>,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 <자매의 화원>(1959) 등을 연달아 감독하는데, 특히 <어느 여대생의 고백>이 흥행에 크게 성공하여 도약의 발판을 만들었다(씨네21c, 최은희). 신필름이라는 영화사명으로 제작할 무렵에는 이미 흥행성을 보장 받은 감독으로 성장해 있었는데, <로맨스빠빠>(1960), <성춘향>, <연산군>,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상록수>(1961), <폭군연산>, <열녀문>(1962), <로맨스 그레이>(1963), <빨간 마후라>, <벙어리 삼룡>(1964) 등이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로맨스빠빠>는 김희창의 인기 라디오 방송극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며, <성춘향>은 홍성기 감독, 김지미 주연의 <춘향전>(1961)과 같은 시기에 개봉하여 “세기의 대결”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빨간 마후라>는 일본, 대만 등지에 수출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신필름과 신상옥 감독의 작품들은 1960년대 후반까지도 대체로 좋은 반응을 얻었으나, 1970년대부터는 시장의 수축으로 인해 제작의 질적 수준 유지에 일관성을 잃은 것으로 보이며, 결정적으로 1975년 검열 문제로 영화사가 폐업 조치에 처해지고 만다(한국영화감독사전). 이후 1978년 돌연 최은희가 납북되는 사건에 뒤이어 신상옥도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두 사람은 김정일의 지원 아래 북한에서 신필름영화촬영소를 세우고 <돌아오지 않은 밀사>, <탈출기>, <사랑 사랑 내 사랑>(1984), <소금>, <심청전>, <불가사리>(1985) 등을 만들었다(연합뉴스b). 1986년 오스트리아 빈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으며, 망명 기간 동안 미국 할리우드에서 신프로덕션(Sheen Production)을 설립하고 <닌자 키드> 시리즈를 제작, 감독하기도 했다. KAL 폭파사건을 다룬 <마유미>(1990), 정치영화를 표방한 <증발>(1994) 등도 탈북 후에 만든 작품들. 1999년에 최은희와 함께 남한으로 영구 귀국했으며, 2003년 안양에 신필름영화아카데미를 설립했다. 2006년 4월 지병으로 별세했으며, 유작으로는 신구 주연의 <겨울이야기>(2004)가 있다(연합뉴스a). 한국영화 역사를 대표하는 감독이자 제작자 중 한 명으로 볼 수 있으며, 영화배우 최은희가 그의 부인이다.

* 참고문헌
연합뉴스a 2006년 4월 12일자
연합뉴스b 2011년 12월 19일자
한국영화회고록 신상옥 7, 『씨네21』a 제406호(2003년 7월 발행).
한국영화회고록 신상옥 8, 『씨네21』b 제408호(2003년 7월 발행).
한국영화회고록 신상옥 9, 『씨네21』c 제410호(2003년 7월 발행).
최은희, 『최은희의 고백』,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김종원 외, 『한국영화감독사전』, 국학자료원, 2004.

[작성: 김한상]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25년 9월 12일 함경북도 청진에서 아버지 신병용과 어머니 김부선의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한의사인 아버지 덕분에 비교적 유복한 환경과 가족의 묵인 아래 하고 싶은 대로 자유분방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집 근처에 소화관이라는 극장이 있어 보통학교 시절부터 남달리 영화에 관심을 가졌다. 영화에는 미술을 비롯한 예술양식이 혼합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 것도 이때였다. 처음에는 무작위적으로 아무 구별없이 영화를 봤으나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나 나운규의 <아리랑>,이규환의 <임자없는 나룻배>와 같은 작품을 보게 되면서 볼거리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고향에서 천마보통학교와 경성중학을 졸업하자 보통학교 때부터 재능이 있는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194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미술전문학교에 입학. 일본 초현실주의 화가 후루조가 이와미의 그림에 심취하기도 했으나 중도에 포기하고 1945년 4월 귀국한다. 해방과 더불어 영화계가 정비해 나가자 형 신태선의 권유로 고려영화협회의 미술부에 들어가 영화 포스터를 그리거나 세트를 만드는 일을 했다. 이 무렵 이 회사에서 제작한 <자유만세>(1946)의 스탭으로 들어가 감독인 최인규를 보좌하며 영화의 메카니즘을 철저히 익혔다. 먼저 배운 것은 미공보원에서 빌려 온 미첼카메라를 안고 회사의 층계를 오르내리는 일이었다. 영화가 정신만이 아니라 체력이 요구되는 직업이며 카메라가 소중하다는 것을 스스로 일깨우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때 최감독 문하에서 연출 수업을 쌓은 이가 제 1조 감독인 그와 홍성기,정창화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신상옥이 직접 메가폰을 잡게 된 것은 1952년 자신이 만든 한국영화예술협회의 <악야(惡夜)>라는 영화였다. 이 작품은 진작에 착수했으나 6.25 전쟁때문에 촬영이 중단돼 피난지인 부산에서 완성되었다. 26세 때였다. 양공주를 사랑하는 문학청년의 갈등을 그린 사실주의적 경향의 영화로 황남, 문정숙이 주연을 맡았다. 그는 여기에서 촬영과 편집까지 했다. 그가 <악야>를 데뷔작으로 선택한 것은 8.15 해방 이후 6.25 전쟁에 이르는 시대상황을 표현하는데 있어 양공주의 소재만큼 적합한 것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이 영화에 대한 애착을 <내외 영화>(나의 영화를 말한다/1965.11)라는 잡지를 통해 표명한 적이 있다. 영화로서의 율동미, 템포, 편집 등에는 다소 어색함이 있을지 모르나 자부심을 갖게 했다는 것이다. 그뒤 신상옥 프로덕션을 설립(1953)하고 영화제작 및 수출 배급업체에까지 손을 댄다. 그가 당시의 떠오르는 스타 최은희와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6미리로 제작한 해외 홍보용 문화영화 <코리아>(1954)를 고리로 그녀와 영화적 동지가 된 신감독은 <꿈>,<젊은 그들>(1955),<무영탑>(1957),<지옥화>,<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동심초>(1959),<로맨스 파파>,<이 생명 다하도록>(1960),<성춘향>,<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상록수>(1961),<열녀문>(1962),<로맨스 그레이>,<쌀>(1963),<빨간 마후라>,<벙어리 삼룡이>(1964),<다정불심(多情佛心)>(1967)등 1960년대 중반까지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1959),<연산군>(1961),<폭군 연산>(1962) 등 세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 배를 탄 동승자로서 호흡을 맞추었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는 <내시>(1968),<천년호>(1969),<이조여인 잔혹사>(1969),<전쟁과 인간>(1971),<이별>(1973),<13세 소년>(1974),<장미와 들개>(1975)등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만종>(1970)등 한 두 편을 빼고는 윤정희(이조여인잔혹사),김지수(천년호),김지미(이별),오수미(장미와들개) 등 여주연을 폭넓게 기용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최은희의 역할이 줄어들었다. <코리아>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한국의 역사를 소개한 문화영화에 지나지 않았으나 각 숏에 리듬을 살린 편집 등 기술이 돋보였다는 평가를 받았고, 역사극의 장르에 속하는 <꿈>과 <젊은 그들>,<무영탑>은 허무와 비련과 좌절의 테마로 짙은 여운을 안겨 주었다. <꿈>은 여인을 따라 파계한 조신이라는 중(황남)을, <젊은 그들>은 거사를 도모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내일을 기약하는 남장미인(최은희)을, 그리고 <무영탑>은 삼층석탑을 세우기에 몰두하가 사랑하는 아사녀의 죽음을 맞게되는 석공 아사달(황남)을 각기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현실 고발적인 작품으로 데뷔를 장식했던 신상옥은 이처럼 역사에서 소재를 얻어 탐미주의적인 경향을 띄었으나 <지옥화>(1958)를 통해 일단 현실로 눈을 돌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야기의 패턴이 <악야>와 비슷한 이 영화는 양공주(최은희)와 사랑하는 양키 물건 장수(김학)가 비정상적인 돈벌이에 빠져 경찰에 쫓기다가 여자와 함께 시궁창에 추락하여 비참한 최후를 마친다는 내용이다. 앞의 영화들은 <꿈>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가 운영한 서울영화사에서 제작했다. 그런데 그 이후 나온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을 신호 삼아 1960년까지 2년 가까이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의 세계로 전환한다. 곧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춘희>,<동심초>,<자매의 화원>(1959),<이 생명 다하도록>(1960)등 6편이 여기에 해당된다. 최은희,김승호 주연인 <어느 여대생의 고백>은 불우한 환경속에서 법학을 전공하여 변호사가 된 여주인공이 여죄수를 변호하는 동안 자신의 지난날과 흡사함을 알고 스스로를 속죄하며 눈물로 선처를 호소한다는 것이고, 추리극 형식을 취한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는 살인미수 사건의 피해자인 여자가 자신의 과거와 사건의 전모를 고백하며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진술, 무죄를 입증받는 결말을 보여 주었다. <동심초>는 딸의 바람대로 사랑하는 남자(김진규)를 포기하고 수절의 길을 선택한 미망인의 이야기를, <이 생명 다하도록>은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부상당해 성불구자가 된 남편을 의지하며 주위의 유혹에도 흔들림 없이 꿋꿋이 살아 나가는 여자의 행로를 전형적인 메로드라마의 구조로 ?굶?내었다. 이 시기에 대중의 감성에 호소하는 일련의 통속영화와는 다른 전기영화 한 편이 선을 보기에 된다. 자유당 정권 아래서 반공예술인단을 조직하여 기세를 떨친 임화수의 한국연예사가 제작한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1959,최남현,엄앵란 주연)이 바로 그것이다. 이 작품은 한때 어용시비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뭐라해도 그에게 기업적 기반을 조성해 준 것은 1961년 구정을 앞두고 명보극장에서 개봉하여 74일간 3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성춘향>(최은희,김진규 주연)이었다. 이 결과는 같은 시기에 경쟁한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김지미,신귀식 주연)을 참패시키는 불운을 안겨 주었다. 이를 계기로 신상옥의 전성기를 예고하면서 우리 나라에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시대를 열게 된다. 이와 같은 기반 아래서 그는 최은희,김진규 콤비에 의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를 제작하고 계속하여 <상록수>(1961),<열녀문>(1962),<벙어리 삼룡이>(1964) 등 4대 문예영화를 내놓게 만드는 여유 속에 감독 생애의 절정기를 누린다. 이는 또한 <하녀>(1960)의 김기영, <오발탄>(1961)의 유현목과 함께 '트로이카 디렉터'를 이루게 한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일부종사(一夫從事)의 봉건적 도덕관념과 인습을 미덕으로 내세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사실상 그의 대표작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문맹퇴치 등 농촌계몽운동의 당위성을 담은 <상록수>는 당시의 새마을 운동에 부합되는 소재로서 <쌀>(1963)을 낳는 모티브가 되었다. <열녀문>은 양반집 과부 며느리와 통정한 죄로 쫓겨 난 머슴이 혼자 고생하여 키운 아들이 찾아왔으나 아들이라 불러 보지도 못한 채 수절이라는 멍에를 지고 살아가는 남성중심 사회의 관습적 모순을 그렸고, <벙어리 삼룡이>는 남편에게 구박받는 지주의 며느리를 연모하는 벙어리 머슴의 우직스런 사랑의 진실성을 김진규라는 탁월한 연기자를 빌어 구현해 내었다. 이상의 작품들은 그의 연보에 빼어 놓을 수 없는 19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의 한 성과라 할 수 있다. 이런 시기에 공군 조종사들의 전우애와 사랑을 담은 <빨간 마후라>(1964)로 <성춘향>이래 최대의 흥행적 성취를 맛보게 된다. 신상옥은 이밖에도 <연산군>(1961),<폭군연산>(1962),<다정불심>(1967),<대원군>(1968),<이조괴담>(1970)등 사극을 포함 <마적>(1967),<무숙자>(1968),<전쟁과 인간>(1971),<아이러브 마마>(1975)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다. 1970년대 이후의 작품들은 거의 대부분 음식을 골라먹던 미식가가 어느 날 갑자기 집히는 대로 포식하는 양상이었다. 이는 화려했던 전성기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1975년 11월 28일 박정희 정권 아래서 홍콩과 합작한 <장미와 들개>의 삭제된 예고편 키스 장면이 그대로 극장에서 상영됐다는 등의 이유로 운영하던 신필름 간판이 내려지는 수모를 겪고, 1978년 1월 14일 홍콩 체류 중 납북돼 1986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탈출하기까지 그는 신사옥 프로덕션 명의로 <탈출기>,<소금>(1985)등 7편의 북한영화를 제작한다. 이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영화사를 내 <닌자 키드> 3편까지 제작,감독하는 한편 한국에서 KAL기 폭파사건을 다룬 면죄부성 반공영화 <마유미>(1990)와 1970년대 박정권 말기의 정치적 음모를 소재로 다룬 <증발>(1994)을 연출, 오늘에 이르렀다. 근년엔 북한에서 동반 탈출한 아내 최은희와 함께 국내에 거주하며 후진 양성과 제작 등 활동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그동안 신필름 등의 명의로 제작한 영화 225편, 감독 작품 66편(이상 국내)을 헤아린다. 그는 이를 통해 제 1회 대종상 작품상(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제 12회 아시아영화제 작품상(벙어리 삼룡이)등 수많은 영화상을 수상했을 뿐 아니라 한국영화제작자협회 회장직을 네 차례나 역임했다. 1965년에는 아세아영화제를 서울에 유치하여 집행위원장직을 맡기도 했다. 그는 신필름 산하에 전속 시스템을 도입. 전응주,나봉한,임원식 등 많은 감독을 배출했고, 연기실을 두어 배우들을 양성하여 연기의 기초를 쌓게 하는데 기여했다.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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