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서울에서 마지막 탱고 박용준,1985

by.김형석(영화저널리스트, 전 스크린 편집장) 2017-08-31조회 5,717
서울에서 마지막 탱고 스틸

1980년대 에로티시즘 영화의 ‘정전’(canon)이라면 <애마부인>(정인엽, 1982)과 <산딸기>(김수형, 1982)에서 시작해 <어우동>(이장호, 1985)과 <변강쇠>(엄종선, 1986)를 거쳐 <매춘>(유진선, 1988)에 이르는 계보일 것이다. 당대 상업영화의 트렌드였던 이 작품들은 불륜 멜로드라마, 궁중 사극, 문예 영화, 호스티스 영화 등 한국영화의 장르적 전통을 변형시키며 그 위에 에로티시즘이라는 ‘시대정신’과 여배우를 토대로 한 스타 시스템을 결합시켜 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정전의 뒷길엔 ‘외전’의 계보도 존재한다. <반노>(이영실, 1982)와 <빨간 앵두>(박호태, 1982)에서 시작해 <색깔 있는 남자>(김성수, 1985)와 <사방지>(송경식, 1988)를 경유해 이후 에로 비디오로 이어지는 이 흐름은 일종의 ‘B 무비’의 전통이었다. 이 영화들은 ‘에로 정전’들이 지닌 보수적 이데올로기와 나름의 엄숙주의를 파괴한다. 이질적 요소들이 결합되고 내러티브는 불균질적으로 전개되며, 때론 급진적인 테마를 관객에게 갑작스레 들이밀어 당황스럽게 만드는 영화. 지금 소개할 <서울에서 마지막 탱고>(박용준, 1985)(이하 <서탱고>)는 그 전형이다.

사건은 1박 2일 동안 일어난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가정주부 한수진(오수비)은 서울에서 남편의 전화를 받는다. 수진의 남편인 신 박사(김동현)는 저명한 가정 문제 전문가. 세미나 때문에 부산에 내려간 그는 아내에게 내려오라고 한다. 오랜만에 바닷가에서 데이트를 즐기자는 제안이다. 경부선 열차에서 우연히 만난 협(유승무)이라는 청년은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데, 이후 부산에서 심하다 싶을 정도로 자주 조우한다. 남편은 강연과 방송 출연 등으로 너무 바쁘다. 환영 리셉션 자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새벽에 겨우 숙소로 들어올 정도다. 홀로 남겨진 수진. 여기저기 다녀 보지만, 그 누구도 외로움을 채워주진 못한다. 

<서탱고>가 특별한 건, 이 영화 속엔 1980년대 에로 영화의 굵직한 관습들이 심하게 과장된 방식으로 뒤엉켜 있다는 점이다. 첫 번째는 여주인공을 둘러싼 폭력의 시선이다. 이 영화의 초반부는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 범죄 스릴러가 연상될 정도로 공포스럽다. 수진은 대형 마트에 장을 보러 가는데, 이때 바바리코트에 마스크를 쓴 남자(배수천. 이하 ‘마스크 맨’)가 갑자기 그녀를 공격한다. 알고 보니 그 남자는 수진이 대학생 시절 때부터 쫓아다니던 스토커였다. 영화엔 여러 차례 플래시백으로 마스크 맨과 수진의 과거 장면이 삽입되어, 그녀의 삶 자체가 ‘강간 공포’라는 트라우마로 점철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열차에서 우연히 만나 부산에서 여러 차례 마주치는 청년 협은 수진을 지켜주는 인물처럼 보인다. 수진이 외로울 때나 위험에 처할 때 항상 그는 나타난다. 하지만 그 역시 호시탐탐 수진의 육체를 노린다는 점에서 마스크 맨과 그다지 다를 바 없다. 이외에도 해운대의 천막 나이트에서 수진을 바라보던 남자들의 음험한 눈빛이나, 술에 취해 수진의 숙소에 난입해 그녀를 범하려 했던 남자처럼, 그녀 주위엔 항상 남성의 거친 시선이 존재한다. ‘성-폭력’을 동력 삼아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국 에로 영화의 민낯은 <서탱고>의 중심 내러티브를 이룬다.

<서탱고>가 따르는 또 하나의 장르적 관습은 여성의 욕망에 대한 분열증적 표현이다. 1980년대 한국 에로 영화들은 여성의 욕망이 일단 억눌리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애마 부인>은 선구자적인 영화일 텐데, <서탱고>는 이 전통을 한층 더 기괴한 방식으로 확장한다. 대표적인 장면은 마스터베이션 신이다. 숙소에서 남편만 기다리던 수진의 외로움은 급기야 분노로 변한다. 그녀는 갑자기 숙소를 뛰쳐나와 해변의 숲속으로 뛰어간다. 그녀는 이곳에서 그네 타는 소녀를 발견한다. 소녀는 수진에게, 자신의 엄마는 죽었으며 그네는 아빠가 만들어 주었다고 말한다. 수진은 그네를 타다가 숲속에서 섹스를 나누는 젊은 커플을 우연히 목격한다. 그녀는 다시 뛰기 시작해 아무도 없는 백사장에 도착한다. 그곳에 다리를 벌리고 앉은 수진. 그녀는 ‘무릎과 무릎 사이’로 밀려드는 파도에 몸을 맡기며 황홀경에 빠진다.

그 흐름을 따르면, 해소되지 못한 욕정, 아이를 가지고 싶은 욕망, 격렬한 섹스에 대한 열망 등이 (<서탱고>의 명장면 중 하나인) ‘파도 마스터베이션’ 신으로 마무리되는 셈이다. 실험영화에 가까운 매우 격한 방식의 장면 연결이다. 특히 이 대목에서 밤 장면과 낮 장면은 무질서하게 배열된다(갑자기 낮에서 밤이 되고, 그러다가 낮으로 이어진다). 물론 촬영 과정에서 생긴 실수겠지만, 결과적으로 이 시퀀스의 급진적인 플롯 구성은 이 영화의 스토리가 마치 여주인공의 의식(욕망)의 흐름에 의해 전개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여자의 억눌린 욕망에 대한 테마는, 자연스레 남성 캐릭터가 지닌 모순으로 이어진다. 1980년대 에로 영화에서 묘사되는 부부 관계의 대전제는, 부부 사이에선 절대로 성욕이 해결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대부분 성불구이거나 먼 곳에 있거나 섹스를 거부한다. 그리고 그 자리를 ‘우연히 만난 젊은 남자’가 차지한다(이것은 <애마 부인>이 세운 전통으로, 애마(안소영)의 남편(임동진)은 교도소에 있고 그 자리를 미술학도 동엽(하재영)이 채우는데, <서탱고>에선 ‘협’이 그 역할을 한다). 

<서탱고>의 신 박사와 수진은 섹스리스 커플인데, 남편은 아내의 과거가 불결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영화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남편을 가정 문제 전문가로 설정한다. 그는 TV에 출연해 말한다. “부부 사이에 가장 중요한 건 신뢰입니다. 결혼 전에 일어났던 일은 서로 망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성 문제에선 여자보다 좁쌀스러운 게 남자요.” 그러면서 과거에 마스크 맨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솔직하게 고백할 것을 강요한다. 의처증에 걸린 가정 문제 상담가라는 극단적 모순 상황. 이것은 당시 에로 영화가 지녔던 남성 중심적인 보수 이데올로기를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이처럼 <서탱고>는 당대 한국영화의 트렌드를 한껏 과장하고 뒤틀며 계승한다. <애마부인>의 틀을 가져와 그 안에서 <무릎과 무릎 사이>(이장호, 1984)의 강간 모티프를 변형시키고, <애마부인 2>(정인엽, 1984)의 히로인 오수비를 여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러면서 외국 영화의 섹슈얼 코드들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접합시킨다. 내용상 전혀 상관이 없으면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를 차용한 제목은 어쩌면 1990년대 이후 성인 비디오 시장을 휩쓰는 ‘제목 패러디’의 효시다(게다가 <서탱고>의 무대는 서울이 아니라 부산이다). 남편이 면도할 때 옆에서 샤워하는 아내를 한 프레임에 담은 장면은 <드레스드 투 킬>(브라이언 드 팔머, 1984)에서 가져왔다. 이런 이질성은 <서탱고>를 더욱 불균질적 텍스트로 만든다.

특히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메어 자르치, 1979)를 가져온 엔딩은 이 영화의 가장 강렬한 지점이다. 마스크 맨 역할을 맡은 배수천이두용 감독의 ‘발차기 액션’ 영화의 악역으로 유명한 배우인데, 이 영화에서 길이 남을 사이코 연기를 보여준다. “너를 가질 수 있다면 내 인생의 막을 내려도 좋아.” <서탱고>의 엔딩은 마스크 맨의 이 대사를 완벽하게 구현한다. 남편에게 이혼을 통보하고 협과 처음이자 마지막 정사를 나눈 후, 수진은 숲속으로 달려간다. 그곳 그네에선 마스크 맨이 기다린다. 과거 같았으면 겁에 질렸을 수진은 담담하게 옷을 벗고 그를 받아들인다. 마스크 맨도 마스크를 벗고, 드디어 스토커가 아닌 ‘남자’로서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절정에 오르기 직전의 순간, 그녀는 그넷줄을 올가미로 만들어 마스크 맨의 목에 걸고 마치 교수형 집행자처럼 남자를 나무에 매단다. 욕망에 억눌렀던 수진은 자신의 육체를 무기로 남자에게 복수한다. 하지만 반전과 충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경찰에게 체포되어 수갑을 차고 있는 수진 앞에 남편이 나타나자, 그녀는 말한다. “난 댁을 모릅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난 댁의 여자가 아닙니다. 남의 여자입니다.” 그리고 신 박사에게 싸늘한 시선을 날린다. 이 시선엔 그녀를 욕정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던 수많은 남성들의 시선을 단번에 뒤엎는 서늘함이 있다. 그리고 이 전복성은 <애마부인 2>에서 오수비가 남편에게 했던 대사를 환기시킨다. “이제 난 누구와도 사랑할 수 있어요.” 

사실 <서탱고>는 ‘한국영화 걸작선’이라는 코너 제목에 어울리는 영화는 아니다. 컬트나 괴작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법한 영화? 그럼에도 굳이 이렇게 장황하게 소개한 건, 이 영화를 통해 당대 한국영화가 지닌 분열증의 극단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박용준 감독은 오혜림을 내세워 <서울의 탱고>(1986)를 만들었고 <서울에서 마지막 탱고 2>(1992)로 ‘탱고 3부작’을 완성했으나 전편의 충격을 넘어서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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