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불나비 조해원, 1965

by.이연호(영화평론가) 2013-02-13조회 3,298
불나비

같은 영화도 배우의 입장에서 보면 달리 보인다. 2010년 부산국제영화제의 김지미 회고전에 출품되었던 <불나비>의 경우가 그렇다. 회고전 기념 책자의 필자였던 나는 그해 여름을 꼬박 영상자료원 AV룸에서 보내면서 한 여배우의 경력 50여년을 훑게 되었는데, 그 범주의 방대함에 비하여 실속은 초라한 편이었다. 그 과정에서 세 번쯤 크게 놀랐다. 우선 마지막 출연작으로 기록된 <명자 아끼코 쏘냐>(이장호, 1992년)를 찍던 당시의 인터뷰에서 그녀가 밝힌 출연작이 무려 800여편이라는 점. 지구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양이다. 그런데 더 놀란 것은 영상자료원이 어떤 방식으로든 흔적을 찾아낸 검색 필름수는 겨우 363건이라는 점. 그렇다면 남은 필름보다 사라진 필름이 더 많다는 이야기이다(여기에는 시나리오나 신문평 같은 것도 포함되는 것이니 유실의 규모는 더욱 심각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놀란 것은 그 300여편의 영화 혹은 자료들에서 역사적, 문화사적 의미를 부여할 만한 작품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오랜 세월 부동의 톱스타로서 확고한 이미지를 구성했던 김지미라는 존재는 참으로 불가사의하지 않은가? 

생소한 감독의 장르 영화 <불나비>를 주목하게 된 이유 역시 그 때문이다. 김지미의 불가사의한 존재감은 이 영화의 내러티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영화 속에는 1960년대 내내 가부장제 사회의 통제 대상이 되었던 김지미라는 여성 스타의 표상이 단계적으로 들어 있다. 사실 조해원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알았다. 1960년대에 번성했던 이식된 서양 장르들, 필름 누아르와 미스테리, 스릴러의 한국적 수용에 나름의 감식안을 보여 주는 그는 자료를 찾아보니 <지옥화>(신상옥 감독)의 조연배우였으며, 연출 데뷔작 <불나비>에 이어 다이아 목걸이 강도를 다룬 추리물 <불개미>(1966)를 찍었다고 한다. 불나비와 불개미라...약간은 장난 같은 조합이고 전작의 성공을 이으려는 안간힘이 느껴지지만, 강렬한 캐릭터를 중심에 두고 내러티브보다는 스타일로 움직이려는 순수 장르의 기분만은 잘 전달되는 듯도 하다. 하여튼 이후의 연출작 <공포의 18일>(1968), <안개 속의 탈출>(1970), <여인숙>(1971) 등의 자료에서도 필름 누아르와 스릴러의 취향이 확연히 느껴지는 감독이다. 

하지만 <불나비>가 흥미로워지는 것은 여배우 김지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이다. 이 영화에는 김지미 외에도 신영균, 박암, 최남현 등의 남성 스타들이 즐비하지만 그들의 뒤틀린 욕망들이 일제히 여주인공을 향해 반사되고 여주인공에 의해 조작된다. 그만큼 장르가 요청하는 팜므파탈의 성격이 강하다는 이야기인데, 그녀의 도덕적 모호함을 선망하거나 응징하는 방식 또한 남성적 시선의 위계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어떤 길을 선택하든 여성의 육체나 섹슈얼리티는 남성의 집단적 무의식과 의식이 집중적으로 표출되는 장소이다. 그래서 한국 여성의 성애는 필연적으로 한국 역사와 사회의 구성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영화를 통과할 때 김지미는 비주류 장르영화들에 가장 많이 출연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 스스로 구축한 스타성에 그다지 훼손을 입지 않은 희귀한 예이다. <불나비>에서도 당대를 규정하던 경제적 물신과 성적 물신의 이중 소비자로 위치 지워진 그녀는 가부장적 상상이 허용하는 선에서 매혹과 거부라는 이중 처벌을 받는다. 

복잡한 플롯을 과시하는 <불나비>는 영화가 시작되고 30여분 동안 김지미의 이름을 수차례 바꾼다. 살인사건을 몰고 다니는 절세미인은 자칭 미세스 양, 타칭 미스 강과 안 여사를 거치면서 ‘칼멘’과 ‘아편꽃’, ‘우리들의 비너스’라고 부르는 숭배자들을 거느린다. 이 대열에 막 뛰어든 열혈 변호사 성훈(신영균)은 살해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그녀 주변을 배회한다. 그녀의 정체는 하반신마비의 성불구자 남편(박암)을 둔 부유한 주부 민화진. 그녀가 숱한 남자들과 호색 행각을 벌인 이유는 자신을 유린하고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게 만든 의붓오빠(최남현)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다. 민화진을 사랑하게 된 성훈은 그녀의 주변에서 발생한 살인들의 용의자로 의붓오빠를 지목하지만 그 역시 결정적 순간에 살해당한다. ‘의외의 살인자’가 밝혀질 때까지 민화진의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남성적 과잉의 기호들이 넘쳐나고 끝내 정숙한 부인이기를 요구받는 김지미의 딜레마는 성과 속을 오가는 이중성 속에서 폭발한다. 60년대 영화답게 성과 속의 이분법은 정숙한 한복과 화려한 양장이라는 복장을 통해 대비된다. 

위에서 ‘의외의 살인자’라고 표현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물론 서사의 반전에 익숙치 않았던 당대에는 그랬을 것이다). 휠체어 신세였던 남편이 사실은 정상이었고 부정한 아내의 뒤를 캐고 있었다는 것은 상투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것을 남성 주도의 장르적 운명론으로 보면 꽤 유의미해진다. 결국 누구보다 다채롭게 변신해온 여주인공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와 바꿀 수 없는 현재 사이의 만화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대가 공모하고 유희한 듯한 여성 재현의 이중성은 이 영화의 한계이자 매력이기도 하다. 커다란 개 한 마리를 통해 깜짝 놀랄만한 장르적 쾌락을 발산하기도 하는 <불나비>의 특정 장면이 뇌리에 남는 걸 보면, 내가 혹시 그 장면에서 본 것은 으르렁거리는 정글의 먹이감이었던 한 여배우가 살아남았다는 신화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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