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용삐용B무비]특별수사본부 김수임의 일생 이원세, 1974

by.주성철(영화평론가) 2014-05-27조회 7,555
특별수사본부 김수임의 일생

엄태웅, 주원 주연, 황병국 감독의 <특수본>(2011)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특별수사본부’의 약자인데 시간을 더 거슬러 1970년대로 가면 설태호, 이원세 감독이 바통 터치하며 만든 <특별수사본부> 시리즈가 있었다. ‘한국의 CSI 였다!’라고 말하면 너무 거짓말이고, 한국영화사의 대표적인 반공수사물 시리즈라고 보면 된다. 한국영화사에 에로, 액션 시리즈만 있었던 게 아니라 나름 진지한 범죄추리(물론 추리는 좀 약하다) 시리즈도 있었던 것. 1편인 <특별수사본부: 기생 김소산>(1973)을 시작으로 2편 <특별수사본부: 여대생 이난희 사건>(1973), 3편 <특별수사본부: 배태옥 사건>(1973), ‘꽃할배’ 이순재가 출연한 4편 <특별수사본부: 김수임의 일생>(1974), 끝으로 역시 꽃할배 박근형이 출연한 <특별수사본부: 외팔이 김종원>(1975)에 이르기까지 모두 5편이 만들어졌다(1-2편은 설태호 감독, 3-5편은 이원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으며 2, 4, 5편은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에서 VOD 관람이 가능하다). 
 
특별수사본부 시리즈
특별수사본부 시리즈

이 시리즈는 민영방송 ‘라디오 동아방송’(1980년 신군부에 의해 KBS에 통합될 때까지 17년 7개월 동안 이어왔다)에서 1974년부터 1979년까지 방송된 라디오 심야프로그램 <특별수사본부> 시리즈가 그 모태다. 이 대공수사실록드라마에서 오제도 검사는 여간첩 김소산 사건, 해군 프락치 허만도 사건, 기생간첩 구자운, 점쟁이간첩 윤길도, 거물간첩 성시백 등을 도맡은 고뇌하는 반공검사로 큰 인기를 끌었다. 김수임은 광복 후 미군정기에 남조선노동당을 위해 일한 간첩으로 한국전쟁 발발 직전 총살형에 처해졌는데, 몇 년 전에는 조명화 감독에 의해 한미합작 영화로 만들어질 것이란 보도도 있었다. 이야기는 이렇다. 1948년, 주한 정보대장인 페이드 대령의 첩, 김수임(윤소라)이 특별수사본부에 체포되면서 시작된다. 매 시퀀스마다 회한을 머금은 표정으로 “그 이듬해 봄이었어요...”라는 식의 김수임 멘트로 시작하는 그 구조가, 마치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조안 크로포드의 회상으로 불쑥 시작하는 마이클 커티즈의 <밀드레드 피어스>(1945)를 연상시킨다. 아무튼 김수임은 남로당에 가입해 자신이 얻은 숱한 정보를 북한에 제공해오다가 오제도 검사(이순재)에게 체포된 것. ‘묻고 따지는’ 이순재에게 지난날을 회상하는 김수임의 과거는 도저히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다. 

이화보통여자학교에 입학한 김수임은 이복 오빠인 최만용(북괴공작원의 아이콘이나 다름없는 '문오장') 때문에 17살의 어린 나이로 농부에게 시집갈 수밖에 없었고, 이듬해 시집을 뛰쳐나와 다시 이화여전에 입학한 그녀는 이강국(신일룡)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박헌영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이강국은 “좀 더 위대한 미래를 위해 잠시 떨어져 있어야 해”라는 말을 남기고 월북하고 만다. 그런 사랑의 실패를 겪으며 페어드 대령과 결혼한 김수임은 아들 ‘밥’도 낳고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이강국을 미끼로 다시 수임에게 접근한 오빠 최만용의 획책이었던 것. 그렇게 수임은 남로당원으로서 첩보 활동은 물론 페어드에게 이런저런 인사 청탁까지 조종하는 위치에 이른다. 여기서 무엇보다 놀라게 되는 것은 후시녹음으로 완성된 외국인 배우들의 유창한 한국어다. 거의 아나운서 수준으로 얘기하는 페어드 대령은 물론 “엄마, 어디야? 빨리 와, 보고 싶어”라고 말하는 혼혈 아이 밥의 언어구사능력도 상당하다. ‘아들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다’는 수임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오검사가 집으로 전화했다가, 밥이 대뜸 “마미?”라고 영어로 답하자 황급하게 전화를 넘기는 이순재의 연기 또한 놀랍다. 

윤소라는 당시 서구적인 마스크로 눈길을 끌었다. 아마도 그런 외모가 당시로써는 낯설어서인지 김지미, 남정임, 문희, 윤정희의 자리까지 올라서지는 못했지만 꽤 깊은 인상을 남겼다. <속 팔도강산>(1968)으로 데뷔한 이래 제목부터 무언가 그녀의 선명한 캐릭터를 드러내는 <버림받은 여자>(1970), <특별수사본부: 배태옥 사건>, <야녀>(1974), <70인의 여죄수>(1974) 등에 출연하며 남다른 카리스마를 발산했다. <김수임의 일생>에서도 인사 청탁을 위해 속옷이 비치는 가운만 걸친 채 페어드 대령의 털 난 가슴을 어루만지며 유혹하는 장면이 생생하다. 물론 이강국을 그리워하는 사랑과 아들 밥을 향한 모성의 굴레 속에서 방황하는 그 깊은 슬픔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모습이 더 기억에 남는다. 당시 함께 이국적 외모의 글래머 배우로 주목받았던 김혜정의 다소 과잉된 연기와 비교하면 더욱 도드라진다. 물론 그 이국적 외모로 인해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1965)의 미얀마 여자, <여진족>(1969)의 여진족이기도 했던 김혜정 또한 유현목의 <아내는 고백한다>(1964), 이성구의 <지하실의 7인>(1969)에서 대체할 수 없는 에로틱한 매력을 뿜어냈다. 흥미롭게도 <지하실의 7인>에서 윤소라는 말 수가 적은 수녀, 김혜정은 성적 매력을 마구 발산하는 북한 여군으로 출연해 만났다. 역시 외모 하면 빠질 수 없는 남자 신일용도 있다. 수임이 이강국과의 첫 만남을 회상하며 “누구나 한 번쯤 보면 반할 수밖에 없는 쾌남아였어요”라고 말할 정도인 신일용과는, 윤소라의 은퇴작이기도 한 김수용의 <아라비아의 열풍>(1976)에서도 연인으로 출연했다. 그런 두 사람이 마치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2005)의 부부처럼 ‘그 사람이 매일 아침 어디로 출근하는지 모르고’ 살아온 그 세월이 허망하다. 
 
김수임의 화장, 그리고 페어드 대령의 유창한 한국말
김수임의 화장, 그리고 페어드 대령의 유창한 한국말

그래도 김수임과 이강국은 서로를 잊지 않고 살아왔다. 클라이맥스는 이강국을 시골에서 올라온 외삼촌이라 거짓말하고 페어드 대령에게 빼내 달라고 말하는 순간이다. 수임으로 인해 한국식 인사 청탁 문화가 몸에 밴 그는 부탁대로 강국을 집으로 데려오지만, 외삼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젊고 잘 생긴 그를 살짝 의심한다. 결국 페어드는 “부인, 난 이제 사무실로 나가 볼 테니 삼촌을 좀 대접해요”라고 출근하는 척 거짓말을 하고는 그들의 뜨거운 포옹을 몰래 훔쳐본다. 그렇게 수임은 사랑에 실패하고 감옥에 이르게 된다. 반공영화이기는 하지만 “사랑과 사상이 꼭 일치되어야 하나요. 전 좌익을 사랑한 게 아니에요, 그의 마음과 육체를 사랑했어요. 사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라는 항변은 가슴 절절하다. 그렇다. 당시 공공의 적은 북한이 아니라 일본이었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전 죽일 년이에요”라는 마무리 멘트를 들은 오제도 검사는 “사랑의 에고이즘이군요”라는 명쾌한 결론을 내린다. 마치 제 자리에 앉아 모든 것을 척척 추리해내는 탐정 엘큘 포와로처럼 고뇌하는 모습으로 소파에 앉은 이순재의 모습이 그 기나긴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특별수사본부: 기생 김소산>에서 마지막으로 담배를 피우는 윤정희의 모습이 압권이었다면, <김수임의 일생>에서는 페어드 대령의 면회 전 손거울을 보며 눈화장을 고치는 윤소라의 연기가 심금을 울린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페어드 대령의 마지막 한 마디가 귓전을 울린다. “딸링...” 그 딸링에 덧붙여 확실히 이것 또한 말할 수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하루종일 “마미~~~”라는 말이 입에서 내내 맴돌 것이다. 김수임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검사에게 이렇게 부탁한다. “내 얼굴을 곱게 화장하겠어요. 추하게 있는 것은 자신을 사랑할 줄 몰라서죠. 늙은 여자보다 더 불쌍한 여자는 화장을 하지 않고 남자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여자에요.” 
 

정말 마지막으로 이순재에 대한 얘기로 마무리하고 싶다. <그대를 사랑합니다>(2011) 당시 인터뷰했던 그는 가장 존경하는 선배 배우로 최무룡을 꼽았다. “후시녹음 시절에도 그처럼 자기 대사의 템포를 살려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후시녹음이라 그런 주연급 배우들 중에 대사를 안 외워오고 그냥 입만 벌리거나 조감독이 옆에서 읽어주는 대사를 그대로 따라 읽는 경우가 허다했지. 뭐 나중에 성우가 다 하니까. 그런데 최무룡 선배는 최고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늘 내실을 다지는 사람이었지. 메소드 연기의 대가였고 늘 끊임없이 새롭게 변신하는 배우였어. 물론 다른 좋은 선배 배우들이 많았지만 자기만의 확고한 원칙과 ‘폼’이 잡혀 있는 최고의 배우였지. 그래서 한번은 최민수를 만나 진지하게 얘기하고 싶은 생각도 있어. 내가 민수 백일잔치도 가고 어렸을 때부터 쭉 봐왔거든. 이제 작품으로 만날 일은 없고, 전에 무슨 행사장에서 만난 적 있는데 머리에 두건 쓰고 수염 기르고 요란한 청바지 입고 왔기에 ‘야, 너 허리에 도끼만 차면 딱이겠다’고 한 적 있어. (일동 대폭소) 연기자로 치면 ‘성골’ 출신 배우고 또 한때 얼마나 잘했어? 멈추지 말고 좀 더 하면 정말 최고의 배우가 될 수 있을 텐데. 마스크도 얼마나 좋아. 참 아쉬워, 한번 만나서 얘기해야지.” 그렇게 그는 한국영화사 최고의 배우로 최무룡을 꼽았다. 그러면서 앞선 시리즈에서 오제도 검사를 연기한 최무룡에 이어 자신이 그 역할을 이어받은 <특별수사본부> 시리즈에 대한 애착이 컸다. 그로서는 얼마나 감격적인 캐스팅이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윤소라
신일룡
이순재
문오장

감독: 이원세
각본: 오재호

개봉극장: 대한
관람인원: 11,249명


특별수사본부 김수임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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