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빠빠 : 11월의 영화 I 신상옥, 1960

by.송효정(영화평론가, 대구대학교 인문교양대학 창조융합학부 조교수) 2019-11-01조회 1120
로맨스빠빠 스틸

영화 초반부 가족 구성원들은 도시적 삶 속에서 누릴법한 로맨틱한 순간을 선보인다. 막내딸은 버스에서 남학생과 눈이 마주치고, 여배우와 연애를 하는 큰아들은 멜로 영화를 찍고 있으며, 첫째 딸은 동물원 데이트를 즐긴다. 이러한 낭만의 중심에는 가장 ‘로맨스 빠빠’가 있다. 궁핍한 일상 속에서도 아름다움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양, 그가 매일 출근길에 잊지 않고 챙기는 것은 꽃다발이다. 

평범해 보이지만 세상에 없을 듯한 이상적 가족이다. 홈드라마 <로맨스 빠빠>(신상옥, 1960)는 일반적으로 1960년대 한국사회가 요청한 서민 가족의 전범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돼왔다. 로맨틱한 가장과 개성 강한 자식 세대의 조화, 실직으로 인한 위기를 쾌활히 극복해나가는 어질고 고운 이야기는 폭넓은 관객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작품은 오프닝에서부터 가족 구성원의 간명한 캐리커쳐를 제시한다. 탈세속적 로맨티스트 아버지(김승호), 현실주의자 주부 어머니(주증녀) 그리고 2남 3녀의 자식들로 구성된 서울 거주 가족이 모델이다. 매사에 반항적이고 도전적인 막내(신성일), 서울깍쟁이 여고생 넷째(엄앵란), 외모에 관심이 많은 여대생 셋째(도금봉), 대학 자퇴 후 영화계에 투신한 자유주의자 둘째(남궁원), 결혼적령기의 현모양처형 첫째(최은희)는 당대 청년층의 보편적 범주를 이루고 있으며, 특히 막내는 4.19를 선도한 신세대를 대변하고 있다. 

여기에 과학자 맏사위로 김진규가 측은한 도둑으로 주선태가 등장하니 작품 자체가 1960년대를 이끌 배우들의 온상으로 보일 정도다. 당시 신필름 소속 신예 신성일은 이 작품을 통해 영화배우로 데뷔하였다. 등장인물을 통해 이성·지성·감성의 분배, 문화적 육체적 건전성의 조화, 공동체와 가족 윤리까지 고려된 인상이며 좀도둑까지 의리와 인정을 따지는 형국이니 참으로 다사롭고 호혜로운 소우주다.  
 

김희창의 동명 인기 라디오 드라마를 각색하였으니 자연스레 영화의 전개는 에피소드식이다. 드라마틱한 갈등과 불화보다 소소한 상황 속 유머와 페이소스에 주목하고 있는 셈이다. 감독 신상옥이 다양한 영화형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특히 영화 중반에 가족 모두가 안방에 모여 시나리오를 창작하는 장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더니즘, 신파 멜로, 사극 등 다양한 형식이 가족의 상상력에 동원되며 이는 실상 신상옥이 이전과 이후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전개해간 작품들의 다양성을 이룬다. 신상옥은 이 작품을 전후로 해서 <동심초>(1959)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와 같은 가장 아름다운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로맨스 빠빠>는 각 캐릭터가 지닌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심성의 성좌를 선보이는데, 그 우아한 조화로움의 경지가 신상옥 영화의 형식적·감성적 스타일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여러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를 유려하게 연결 짓는 것은 김승호가 맡은 로맨스 빠빠 캐릭터 탓이 크다. 김승호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한국적 아버지의 전형적 표상이었다. 그가 담당한 한국적 아버지의 전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1958), <박서방>(1960), <마부>(1961)에서처럼 봉건적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하층민 가부장의 역할이 하나라면, 속물적 근대화의 조류를 반영한 <인생차압>(1958), <삼등과장>(1961), <로맨스 그레이>(1963) 등에서 최종적으로는 영악한 시대에 패배하고 마는 서글픈 샐러리맨의 모습이 다른 하나다. 보험회사 만년 계장으로 겨우 가족을 부양하는 <로맨스 빠빠>는 아마도 두 번째 경향과 비슷해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선뜻 영화 <로맨스 빠빠>에 ‘한국적’(근대화의 균열과 가부장주의를 동반한다는 뉘앙스에서)이라든가 ‘현실적’(4.19전후의 시대정신의 반영이라는 뉘앙스에서)이라는 레테르를 붙이는 데 주저하게 되는 건 왜일까. 오히려 <로맨스 빠빠>는 세계시민적 교양과 이상적 추동으로 가득해 보이지 않는가. 

그 일차적인 이유는 김승호가 열연한 ‘로맨스 빠빠’ 캐릭터가 한국의 전형적 가부장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기 때문인 듯하다. 그는 꽃다발 든 샐러리맨이자 책을 즐겨 읽으며 자식들과의 일상적 대화에도 무심치 않은 다정한 중년이다. 영화 속 빛나는 장면들은 로맨스 빠빠의 낭만적 몰입과 상상을 통해 등장하곤 하는데, 가령 이러한 장면이 있다. 동네에 기생집이 들어섰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로맨스 빠빠는 아내가 말로 일러주는 약도를 따라 골목골목을 상상으로 누빈다. 이는 기생에 대한 세속적인 욕망으로 발동된 상상적 모험이기보다, 이 마을 어느 골목엔가 있다는 어여쁜 기생아기씨라는 아름다움에 일반에 대한 상상적 지향인 셈이다. 또 이러한 장면도 있다. 아내와 사랑싸움 끝에 자식들이 부르는 합창곡을 받아 눈을 지그시 감고 부르는 세레나데 ‘기쁜 우리 젊은 날’이나 실직된 날 술집에서 부르는 ‘켄터키 옛집’과 같은 노래의 장면들 말이다. 

서민 가족을 서술하는데 관습적으로 동반되는, ‘먹고살기 힘들었지만 인정만은 넘쳐나던 그때 그 시절’이라는 정서는 늘 공동체의 과거 기억과 맞닿아있다. <로맨스 빠빠>가 전달하는 가족은 서민적이고 온정 가득하지만 아직 한국 사회에 도래하지 않은 이상적 가족이자 미래의 상이다. 1960년 당시 자동차와 피아노가 집집마다 다 있다는 둘째 딸의 투정도 투정이거니와, 장성한 자식 전부가 남녀차별 없이 대학교육 이상의 문화적 수혜를 누리고 있으며 가족 구성원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교양을 갖추고 있다는 점도 일반적이지 않다. 
 

다시금 온 가족인 둘러앉은 시나리오 상상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각자의 입장에 따라 소환된 상상적 이야기들은 사실상 이러한 교양에 기반을 두고 있다. 둘째의 시나리오 버전은 <춘희>나 <안나 카레니나> 등에서 보암직했던 치정 서사를 전제로 정서적 모더니즘을 선보인다. 둘째의 이야기가 삼강오륜에서 벗어날 것이라며 경쟁에 나선 아버지는 초로의 남자와 젊은 여성과의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절대적 진리와 아름다움의 추구를 바탕에 두고 있다. 어머니 버전은 어떠한가. 그녀는 값싼 연애물을 비판하며 <춘향전>과 같은 한국 고전에 나타난 정서와 윤리를 강조한다. 한편 실직당한 날 밤 바에서 술을 마시던 로맨스 빠빠는 맥주병 뚜껑을 머리에 뒤집어 얹고 왕관을 쓴 양 “오늘부터 난 자유의 왕자야”라며 외치는데 대사의 어조가 사뭇 셰익스피어답다. 

<로맨스 빠빠>는 1960년대 초 요청되었던 문화와 교양의 심상적 분배를 서민가족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위트 있고 관용적이며 낭만적인 분위기가 영화 전반을 휩싼다. 형식적으로는 다양한 장르를 경유하는 한편 정서적으로 서양과 동양의 고전을 바탕에 둔 문화적 국제주의에 기반을 둔다. 그런 점에서 <로맨스 빠빠>는 비슷한 시기 제작된 서민적 홈드라마인 <삼등과장>이나 <서울의 지붕 밑>보다 한국적 현실에 덜 긴박되어 있으며 세태풍자적 요소도 적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가피하게 영화 속에는 당대적 터치가 가미되었는데 투쟁과 반항을 고유한 개성으로 삼던 막내가 아버지 실직 후 기성세대와의 투쟁을 포기하고 협력을 택하는 모습이 그러하다. 저돌적 아들을 포함한 전 가족의 자력갱생으로 마무리되는 결말을 가부장의 복권과 명랑한 근대화의 지향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왕좌에서 물러나 권력을 잃은 아버지가 비로소 진정한 가족의 중심이 된다는 아이러니야말로 <로맨스 빠빠>가 영민하게 시대에 응답하는 한편 능청스레 시대를 넘어서는 지점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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