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어느 여배우의 고백 김수용, 1967

by.한창호(영화평론가) 2017-12-15조회 1,905
어느 여배우의 고백, 한복을 입은 황정순이 주안상을 놓고 남자와 이야기 중이다

<어느 여배우의 고백>은 영화배우들 사진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나탈리 우드, 킴 노박, 존 웨인 같은 외국 스타들, 또 김지미, 남정임, 김진규 같은 충무로 스타들의 사진들을 배경으로 오프닝 크레딧이 뜬다. 말하자면 <어느 여배우의 고백>은 ‘영화에 대한 영화’라는 ‘자기 반영성’의 테마를 전제하며 시작하는 것이다. 세계영화사에서 영화가 스스로를 거울에 비추는 태도, 곧 자기 반영성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1963년이다. 이 해에 두 개의 중요한 영화, 곧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1/2>, 그리고 장-뤽 고다르의 <경멸>이 발표됐다. 주로 외부로 향해 있던 영화의 시선이 자기 내부로 향하는 성숙한 태도를 갖게 된 것이다. 김수용 감독의 <어느 여배우의 고백>은 한국영화사에서 자기 반영성을 말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작품이다. 충무로의 영화 만들기 과정 전부가 영화의 중요한 스토리로 이용되고 있어서다. 

영화가 자신을 거울에 비추다 보니, 현실과 이미지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현실과 허구는 뒤섞인다. 그래서 주요 인물들은 전부 실제 이름 그대로 나온다. 김진규는 과거 충무로의 스타였다. 영향력 있는 제작자와 상대 배우 캐스팅 문제로 다투다가 눈에 나는 바람에 영화계에서 쫓겨났다. 지금은 형편이 궁색하여, 거의 숨어 살다시피 한다. 우연히 옛 동료 황정순을 만나, 과거 상대 배우의 딸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김진규는 연인이었던 그 배우가 출산하다 죽는 바람에 딸도 죽은 줄 알고 있었다. 그 딸, 남정임은 술집을 운영하는 집에 입양돼 있다. 김진규는 딸의 외모에 깜짝 놀란다. 죽은 배우와 너무 닮아서다. 김진규는 자신의 궁색한 처지가 부끄러워 신분을 밝히지는 못하고, 남정임을 스타로 키우기 위해 뒤에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당시 데뷔 2년 차였던 22살의 남정임은 실제로 급성장하고 있었다. 

<어느 여배우의 고백>은 1960년대 특유의 눈물을 자극하는 ‘최루성’ 멜로드라마다. 할리우드의 고전 영향도 느껴진다. 무명의 여성을 스타로 길러내는 조지 쿠커의 <스타 탄생>(1954, 이 작품도 영화에 대한 영화다), 딸의 신분 상승을 위해 궁색한 처지를 숨기는 엄마의 희생에 관한 킹 비더의 <스텔라 달라스>(1937)의 서사구조가 자주 겹친다. 남정임은 점점 스타로 성장하고, 김진규는 그 과정에서 딸의 미래에 방해가 될까 봐 점점 뒤로 물러난다. 오로지 희생으로만 묘사되는 헌신적인 부성이 ‘최루’의 무기다. 

이 과정에서 당시의 충무로 세계가 그대로 노출된다. 감독(전창근)은 최선의 화면을 잡기 위해 재촬영을 거듭하고, 필름 값을 아끼려는 제작자(허장강)는 감독의 그런 태도에 화를 낸다. 다섯 편에 겹치기 출연하는 스타 배우(한성)는 촬영현장에 늦게 오기 일쑤고, 스타덤에서 밀려난 배우(전계현)는 질투심에서 신인 남정임에게 못되게 군다. 남정임은 사라진 김진규가 간혹 들른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나기 위해 양어머니가 운영하는 술집에서 하루 일하다 감독으로부터 ‘스캔들’ 주의를 듣는다(충무로에서 가끔 일어나던 일이다). 스타의 품위를 지키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충무로의 이런 ‘현실’들이 ‘허구’와의 경계를 자주 허무는 점이다. 전계현은 신인 남정임이 스타로 급성장할 뿐만 아니라, 자신도 좋아했던 남자 배우 한성(1960년대 미소년 같은 외모로 인기를 끌었다)과도 친해지자, 깡패를 동원해 두 사람의 관계를 깨려고 한다. 충무로에서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는데, 두 배우가 깡패의 폭력 앞에 놓여 있는 긴장된 순간에 감독의 “컷”하는 소리가 들리는 식이다. 우리가 보고 있던 영화 속의 현실은 사실 허구였던 것이다. <어느 여배우의 고백>은 현실이 허구이고, 허구가 또 현실일 수 있는 공간을 세련되게 교차하고 있다. 

자기 반영적인 영화들은 관객들에게 영화의 속성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미덕을 갖고 있다.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약간 높은 시선에서 내려다보는 경험을 하기 때문에 영화에 대해 되돌아보는 성찰적 태도를 가질 수 있다. 브레히트의 용어를 빌리면, ‘비판적 관객’이 되는 셈이다. 동시에 단점도 있다. 일반영화에서 기대되는 ‘환영적 쾌락’, 곧 주인공과의 동일시와 감정이입이 종종 차단된다. 남정임이 아버지의 헌신을 뒤늦게 알고, 오열하고 있을 때, 관객은 이것이 현실인지 연기인지 고민하기 때문에 배우에게 감정 이입하기가 머뭇거려지는 것이다. 

<어느 여배우의 고백>은 이런 형식상의 도전 때문에라도 소중한 작품으로 남는다. 당시의(사실 지금도) 영화 환경에선 반상업적, 반대중적으로 여겨질 주제를 하나의 작품으로 완결지은 까닭이다. 아마 그런 형식의 남다름 때문에 내용은 부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신파조로 흐른 것 같다. <어느 여배우의 고백> 덕분에 한국영화사는 형식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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