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장강
Heo Chang-kang / 許長江 / 1923  ~  1975
본명
허장현 (Heo Chang-hyeon)
대표분야
배우
활동년대
1950, 1960,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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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모그래피 (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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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
약속 (김응천, 1975)
청춘극장 (변장호, 1975)
아이 러브 마마 (신상옥, 1975) 강문길
학녀 (변장호, 1975)
왜 그랬던가 (임권택, 1975)
태풍을 일으킨 사나이 (이정호, 1975)
(최하원, 1975)
빨간 구두 (이성구, 1975)
여고졸업반 (김응천, 1975)
조약돌 (이상언, 1975)

기타정보

하고싶은 말
1975년 9월 21일 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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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본명은 허장현(許長顯)이다. 허장강이란 예명은 연출가 서항석이 “뚝섬이 물이 마를소냐, 기나긴 강물처럼 부디 오래살고 대성하길 바란다”라는 뜻에서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동아일보). 서울에서 인문중학교를 졸업하고 이어서 부기학교를 다녔다. 해방 후 극단 백마산을 조직해 <황토를 찾는 사나이>라는 첫 작품을 무대에 올렸으나 흥행에 실패하고, 악극인 박구(朴九)가 이끄는 반도가극단(半島歌劇團)에 들어가 연기자생활을 시작하였다(경향신문).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국방부 정훈국에 들어갔고, 1952년 육군 군예대(KAS)에서 만난 이강천(李康天) 감독의 <아리랑>(1954)에 출연함으로써 영화계에 데뷔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듬해 이강천의 <피아골>(1955)에서 ‘만수’ 역으로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이며 주목받았다. 이후 이강천의 <격퇴>(1956), 양주남의 <종각>(1958), 김을백의 <72호의 죄수>(1959), 박성복의 <인생복덕방>(1959), 신상옥의 <상록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성춘향>, <연산군>(1961), 이형표의 <서울의 지붕밑>(1961), 이만희의 <7인의 여포로>(1965), <0시>(1972) 등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개성 있는 마스크와 특유의 능글맞은 표정연기, 독특한 음색으로 다양한 배역을 섭렵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연산군>으로 부일영화상 남우조연상, <군번없는 용사>로 청룡영화제 남우조연상, <분례기>로 백상예술대상 연기상 등 다수의 연기상을 수상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열정적으로 스크린을 누빈 그는, 1975년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연예인축구대회에 참가에 시합을 하는 도중 심장마비를 일으켜 사망했다(동아일보). 영화배우 허기호, 허준호가 그의 아들이다.

* 참고문헌
경향신문 1975년 9월 22일자 8면
동아일보 1975년 9월 22일자 5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27522

[작성: 김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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