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장강
Heo Chang-kang / 許長江 / 1925  ~  1975
본명
허장현 (Heo Chang-hyeon)
대표분야
배우
활동년대
1950, 1960,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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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모그래피 (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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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
청춘극장 (변장호, 1975)
약속 (김응천, 1975)
(최하원, 1975)
독사 (고영남, 1975)
잔류첩자 (김시현, 1975) 김동식
빨간 구두 (이성구, 1975)
여고졸업반 (김응천, 1975)
태풍을 일으킨 사나이 (이정호, 1975)
왜 그랬던가 (임권택, 1975)
학녀 (변장호, 1975)

기타정보

하고싶은 말
1975년 9월 21일 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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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25년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본명은 허장현(許長顯)이다. 허장강이란 예명은 연출가 서항석이 “뚝섬이 물이 마를소냐, 기나긴 강물처럼 부디 오래살고 대성하길 바란다”라는 뜻에서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동아일보). 서울에서 인문중학교를 졸업하고 이어서 부기학교를 다녔다. 해방 후 극단 백마산을 조직해 <황토를 찾는 사나이>라는 첫 작품을 무대에 올렸으나 흥행에 실패하고, 악극인 박구(朴九)가 이끄는 반도가극단(半島歌劇團)에 들어가 연기자생활을 시작하였다(경향신문).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국방부 정훈국에 들어갔고, 1952년 육군 군예대(KAS)에서 만난 이강천(李康天) 감독의 <아리랑>(1954)에 출연함으로써 영화계에 데뷔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듬해 이강천의 <피아골>(1955)에서 ‘만수’ 역으로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이며 주목받았다. 이후 이강천의 <격퇴>(1956), 양주남의 <종각>(1958), 김을백의 <72호의 죄수>(1959), 박성복의 <인생복덕방>(1959), 신상옥의 <상록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성춘향>, <연산군>(1961), 이형표의 <서울의 지붕밑>(1961), 이만희의 <7인의 여포로>(1965), <0시>(1972) 등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개성 있는 마스크와 특유의 능글맞은 표정연기, 독특한 음색으로 다양한 배역을 섭렵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연산군>으로 부일영화상 남우조연상, <군번없는 용사>로 청룡영화제 남우조연상, <분례기>로 백상예술대상 연기상 등 다수의 연기상을 수상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열정적으로 스크린을 누빈 그는, 1975년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연예인축구대회에 참가에 시합을 하는 도중 심장마비를 일으켜 사망했다(동아일보). 영화배우 허기호, 허준호가 그의 아들이다.

* 참고문헌
경향신문 1975년 9월 22일자 8면
동아일보 1975년 9월 22일자 5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27522

[작성: 김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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