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최영철 - 감독 - 충무로 액션의 대가

by.조희문(영화평론가, 상명대교수) 2008-11-11조회 1,039

1960년대와 70년대, 80년대 이어지는 한국영화의 역사는 다사다난하다. 영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정치적 환경, 제작 여건, 등 여러 가지 요소가 씨줄, 날줄로 얽히면서 어느 한 가지 시선이나 가치만으로 평가하기에는 참으로 많은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대를 이끌어온 영화계의 인물이 누구였는가를 평가하는 일조차 간단치 않은 문제가 되는 것도 영화를, 그 당시의 사회를 어떤 시각으로 받아들이는 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 역사를 평가할 때 가장 자주 드러나는 경향은 ''스타의 역사''로 바라보는 것이다. 어느 감독, 어느 배우, 어느 제작자 등 한국영화 발전에 기여했다고 생각되는 인물을 선정하고 그들이 이룬 업적을 예찬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한국영화의 역사는 스타의 역사, 주인공의 역사라기보다는 무명의 역사, 패자들의 역사처럼 보인다. 영화인들은 그들의 생존을 모색하는 동안 사회로부터 견디기 어려운 냉대를 받았고, 한국영화의 제작 여건은 참으로 오랫동안 너무도 열악했기 때문이었다. 



그 속에서 영화인들은 자신의 꿈을, 집념을 키우고 지켜왔다. 최영철 감독도 그런 인물 중의 한 명이다. 그는 1963년 <잉꼬부부>라는 영화를 감독하고 <백백교>(1992)라는 영화를 제작, 감독할 때까지 80여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한국영화의 중요한 스타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영화가 한국영화의 전환점을 만들었다고 평가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하지만 그는 한국영화계에서 평생을 바쳐 일한 감독이고 누구보다도 영화를 사랑한 영화인 중의 한 명이다. 



최영철 감독은 1933년, 서울 광희동에서 아버지 최석운과 어머니 김준주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철물점을 하며 생계를 꾸렸던 아버지 덕분에 생활은 웬만큼 살 만한 정도였다. 
어린 시절의 최영철은 다부지고 잽싼 날쌘돌이였다. 체격은 또래들에 비해 적은 편이었는데도 운동이나 싸움이라면 마다하는 적이 없었고, 져본 적도 별로 없을 정도였다. 그의 운동감각은 남달랐다. 특히 야구와 축구에 대한 감각과 재능은 놀라울 정도였다. 초등학교 시절에 이미 지역별 소년단 야구시합에서 3년 연속 우승하는 데 중심 노릇을 할 정도여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축구 솜씨 또한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무렵에는 선수급의 수준에 이르렀다. 보성중학교(5년제)에 진학한 것도 축구 덕분이었다. 축구 특기생으로 특채된 것이다. 



당시 서울의 고등학교 중에서 한양공업고등학교와 선린상업고등학교는 축구 명문으로 꼽히며 라이벌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보성중학교에 다니던 축구선수 최영철은 한양공고 축구팀의 스카웃 제의에 따라 학교를 옮겼다. 얼마동안 그곳에서 선수생활을 하던 그는 다시 선린상고 쪽으로 소속을 옮겼다. 두 학교 모두 그의 재능을 그만큼 높게 보고 있었다는 뜻이지만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두 학교의 축구부를 오간 일은 그의 인생에 미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그가 소속하고 있던 선린상고의 축구코치가 학교 건물을 방화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는 축구부를 해체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선수들 대부분은 한양공고 팀으로 합류했으나 그 곳에서 이적해온 최영철은 그럴 수 없었다. 하는 수없이 그는 광신상업고로 옮겼으나 그곳의 생활도 오래가지 않았다. 축구부가 개입한 싸움이 벌어지는 바람에 또 다시 덕수상고로 옮겨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덕수상고에서의 생활은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멈추고 말았다. 축구선수로 활동할 수 없게 된 그는 학도병으로 지원해 제8사단 21연대 수색중대에 소속되어 전쟁을 치렀다. 1.4후퇴 때 대구로 내려온 그는 영남고등학교 3학년에 복학했다. 축구부가 없었던 그 학교에 최영철은 축구부를 창설하는데 앞장섰다. 학교 측에서도 적극적이었다. 이때 같이 활동한 선수들 중에는 최정민, 문정식 같은 인물들이 있었고, 이들은 1957년, 한국이 처음으로 월드컵 대회에 참가할 때 한국대표로 활동했던 스타들이었다. 최영철 역시 당시 축구계에서 주목받는 유망한 선수였다. 덕분에 영남고는 잠시나마 당시 축구계의 스타들이 몰린 축구 명문으로 이름을 얻었다.



전쟁의 상황이 변하면서 서울로 돌아온 그는 다시 배제고등학교에 다시 들어갔고, 그곳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마쳤다. 돌아보면 참으로 길고도 다난했던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대학 역시 축구 인생의 연속이었다. 축구 특기생으로 국민대학교에 입학했던 그는 다시 고려대학교 농림대학 임학과로 편입했다. 이때도 역시 그의 특기는 축구였다. 고려대학교 축구부에서 그가 맡은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공을 막을 때마다 날쌘 몸놀림으로 눈길을 모았던 그는 전국적으로 이름이 날만큼 유명한 스타였다.
그러나 그의 축구인생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 곳에서 멈춘다. 재능에도 불구하고 작은 키는 선수로서의 약점으로 작용했고, 더 이상 선수생활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자 결국 축구선수로서의 생활을 접고 말았다. 대학생활도 함께였다. 축구와 함께 성장한 청소년 시절의 마감이나 다름없었다. 

최영철이 시작한 새로운 인생은 영화였다. 1950년대와 6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촬영가로 활동했던 김명재 촬영감독의 조수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김명재 촬영감독은 최영철의 4촌 매부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가 축구를 그만두고 영화계에 입문하는데 중요한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유전의 애수> <오발탄> 등을 촬영한 김명재는 미첼 카메라를 국내 여건에 맞게 개조해서 ''코첼''(Kotchell)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하는 등 촬영분야에서는 현장에서의 작업 뿐 아니라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두드러지게 활동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최영철은 김명재의 소개로 안현철 감독의 문하에 들어갈 수 있었다. 스물일곱살 되던 해였다. 연출부에 서드(3rd)로 들어간 그는 <낙화유수>, <백진주>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영화계의 분위기를 익히며 영화제작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경험을 쌓았다. 촬영을 전담하던 김명재의 감독 데뷔작이기도 한 <백진주>에서 그는 시나리오 각색 작업을 주로 맡았다. 이 영화에는 훗날 한국영화계의 중요 감독으로 주목받았던 이만희가 역시 조감독으로 참여했다.
몇 년간 조감독생활을 하며 영화계에서 기반을 쌓아가던 최영철은 마침내 <잉꼬부부>(1963,동아영화사 제작)라는 영화를 직접 연출함으로써 감독으로 데뷔했다. 축구에 인생을 걸었던 그가 영화감독으로 인생을 바꾼 후 첫 번째 만든 영화였다. 그는 ''영화감독이 된 것은 오랫동안 지니고 있던 또 하나의 꿈을 이룬 것이다. 나에게는 영화도 축구만큼 흥미롭고 중요한 일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그가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옆 집에 왕평(王平)이라는 배우가 살았다. 해방 전부터 <군용열차> <나그네> 등에 출연하며 이름을 얻은 인물이다. 그의 부인은 나풍심이란 이름의 만담가로, 남편 못지 않은 유명인이었다. 유명한 스타 부부와 이웃하여 살고 있었던 셈인데, 어린 최영철은 나풍심의 귀여움을 받았다. 덕분에 나풍심의 손에 끌려 부민관(府民館)이나 단성사, 우미관 같은 극장을 자주 출입하게 되었고 영화의 매력에 일찍부터 빠져드는 계기가 되었다. 성장하면서 축구선수로 길을 잡는 바람에 영화와는 멀어졌지만 마음 속에는 영화에 대한 동경과 기대가 떠나지 않았다. 4촌 누이가 영화촬영감독과 결혼한 것도 영화와의 인연을 새삼스럽게 부추기는 중요한 일이었다. 최영철이 축구선수로서의 인생을 접었을 때 주저없이 영화인이 되기를 결심할 수 있었던 것도 주변의 그런 요소들이 작용한 결과였다.



<잉꼬부부>는 김진규, 문정숙 등이 주연한 홈 드라마. 자식 없이 사는 부부와 많은 자식을 거느리고 살면서 힘겨워하는 두 집안을 대조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 이형표 감독의 <서울의 지붕 밑>, 강대진 감독의 <마부> <박서방> 등 60년대 한국영화계의 주요 흐름을 이루었던 홈 드라마의 경향을 잇고 있는 <잉꼬부부>는 최영철의 영화감독 데뷔를 무난하게 만들었다. 같은 해 <로맨스 가족>이라는 영화를 또 한편 감독한 그는 주위로부터 ''편하게 일할 수 있는 감독''이란 평을 얻으며 비교적 빠르게 감독의 자리를 다져나갔다. 성격적인 요소도 있고, 운동을 했던 영향 때문이기도 했지만 멜로드라마와 더불어 그가 관심을 가진 장르는 액션영화였다. 
<낙인찍힌 사나이>(1964), <저 자를 쏴라>(1964) <무명가의 지배자>(1965) <악인가>(1967), <여선장>(1969), <암흑가의 지배자>(1969), <사나이중 사나이>(1969), <홍콩의 마도로스>(1970), <홍콩의 단장잡이>(1970), <동경의 호랑이>(1971) 등을 내놓으며 이른바 60-70년대 한국영화계의 중요한 흐름을 이루었던 ''충무로 액션'' 장르에서 손꼽히는 감독으로 활동했다. 
부족한 자본, 미약한 기술 등으로 대작을 만들기 어려웠던 당시 한국영화계 사정에 비추어 최영철 감독의 활동은 적은 제작비로 흥행성 있는 영화를 무난하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경우로 평가받았다. 그의 활동은 80년대까지 이어진다. <괴도출마>(1981), <화야>(1983), <삿갓쓴 장고>(1985), <비내리는 영동교>(1986) 등은 그의 후기 목록들이다. 그가 감독한 영화 편수가 80여 편에 이르는 것은 그의 활동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다. 



영화계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람''이란 평가를 많이 받았다. 마음에 없는 말이나 행동으로 남의 환심을 사려는 생각도 별로 없었고, 경우에 벗어나는 일은 하려 들지도, 하지도 않았다. 운동선수나 건달들의 세계에서 흔히 보는 ''정정당당''이나 ''의리'' 같은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정작 본인이 피해를 입을 때가 많았다. 흥행을 끝내고도 이런저런 이유로 일한 비용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오죽하면 그러겠는가''하는 마음으로 물러서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영화감독 최영철은 두 편의 영화를 직접 제작까지 했지만 영화제작은 그를 회복할 수 없는 형편으로 몰아붙이고 말았다. 감독 생활을 오래 하기는 했지만, 모든 사람이 내 마음 같으려니 하는 마음으로 맡긴 일들에서 사기를 당하면서 곤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는 <비 내리는 영동교>(1986)와 <백백교>(1992)를 직접 제작하고 연출까지 맡았다. 8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작업 기회가 멀어진 그가, 사재를 털다시피 하여 기획한 영화들이었다. 마지막 혼신을 다한다는 각오로 작업에 몰두한 그는 시나리오, 연출 등의 분야에 힘을 기울였고, 흥행은 그쪽 일을 잘 안다는 사람에게 맡겼다. 그러나 어렵게 제작을 마치고 흥행을 했지만 그는 ''10원짜리 동전하나''도 건지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것이다. 젊음을 바쳐 영화계에서 일했던 그는 그 영화계로부터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셈이었다.
그는 영화인이 된 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미국처럼 제작여건이 좋은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아쉽다고 했다. 그러면 좀 더 나은 조건에서 만들고 싶은 영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아쉬움의 표시였다.
 
조희문(상명대교수) / 2003년




<프로필>

1933년 8월 25일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임학과 졸업


1963년 <잉꼬부부>로 데뷔 



<작품 연보>

1963 잉꼬부부/ 로맨스 가족

1964 낙인찍힌 사나이/ 저 자를 쏴라

1965 무명가의 지배자 

1966 나그네 밤거리/ 그늘진 삼남매

1967 악인가

1969 사나이 중 사나이 / 죽어도 좋아 / 암흑가의 지배자

1970 동경의 무정가 / 여선장 / 홍콩의 마도로스 / 홍콩의 단장잡이

1971 맨발로 왔다 / 맨주먹으로 왔다 / 54번가의 마담

1972 동경의 호랑이 

1973 사나이 훈장

1974 낙인/ 후계자 / 흑백대권

1975 검은띠의 후계자 / 황금마담 / 천의 얼굴

1976 킹콩의 대역습 / 거대한 음모 

1977 7호실 손님

1978 특명 8호 

1979 여호신

1980 대근이가 왔소

1981 괴도출마

1983 화야

1984 돌아온 장고

1985 비내리는 영동교

1993 백백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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