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철
Ahn Hyun-chul / 安賢哲 / 1929  ~  2020
대표분야
감독, 제작/기획, 시나리오
데뷔작품
어머니의 길 1958
활동년대
1950, 1960, 1970,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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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꽃보다 고운것 (안현철, 1984)
노마의 집 (안현철, 1981)
용문호객 (안현철, 1979)
숙녀교실 (안현철, 1977)
땀흘리는 보람 (안현철, 1977)
아내여 미안하다 (안현철, 1971)
열두 여인 (안현철, 1971)
아빠품에 (안현철, 1970)
야광주 (안현철, 1970)
맹강녀 곡도 만리장성 (안현철,요봉반, 1969)

주요경력

1942년 평양 종로초등학교 졸업
1948년 평양공립고등보통학교 졸업
1949년 북조선국립영화촬영소에 연구생으로 입소
1949~50년 <운파산의 전투>에 조명부로 참여
1951년 1월 월남
1951~54년 한국전쟁 기간 동안 국민방위군 제7교육대 정보처, 지게부대, 미 극동사령부 한국방첩대 등에서 근무
1954~55년 육촌 자형인 이창근 감독을 만남
1956년 <구원의 정화>, <비류>, <숙영낭자전> 조감독
1957년 <나그네 설움>, <두 남매>, <인생화보> 조감독
1958년 <어머니의 길>로 감독 데뷔
1961년 안현철프로덕션 설립
1965년 한국영화인협회 감독분과위원회 이사
1971년 문화광고영화사인 대정프로덕션 설립. CF, 단편드라마, 교육프로그램, 기업홍보물 등 520여 편 제작 연출
1976년 한국영화인협회 '아시아감독대회' 준비위원
1992년 한국영화인협회 감사

기타정보

영화계 입문배경
평양보통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부터 영화에 대한 관심과 흥미가 남달랐고 1949年 말에는 북조선 영화촬영소 6개월 연구과정을 수료하기도 하였다. 월남후 6촌 누나의 남편인 이창근 감독과의 인연으로 이만흥 감독의 <구월의 종말>이라는 작품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하였다.
애착작품 및 사유
모든 작품에 애착이 간다.
영화속 명소
<사명당>, <남이장군>을 작업할 때 북한산성을 평양성으로 놓고 촬영하는 도중에 폭약사고로 3명이 부상하고 재촬영 도중에도 또다시 폭파사고가 일어날뻔 했던 북한산성이 기억에 남는다.
추구하는 스타일/배역
자유로운 카메라의 이동을 중요시하며 몽타쥬 기법이나 후레쉬커트 기법을 사용하여 관객의 박진감, 긴박감을 조성하는 등 방향전환에 제한이 없는 카메라 기법을 중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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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29년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49년에는 북조선 영화촬영소에서 6개월 연구과정을 수료하기도 했으며, 이 기간 동안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론과 러시아의 몽타주 이론, 에이젠슈타인, 푸도푸킨의 작품을 접하게 된다. 전쟁 발발 이후 월남하여 군복무를 마치고, 6촌 누나의 남편인 감독 이창근의 소개로 이만흥 감독의 <구월의 종말>에서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한다(한국영화감독사전). 1958년 <어머니의 길>이라는 멜로드라마로 감독 데뷔하는데, 당대 평단에서는 '신파 시대의 감격조나 애상조'(조선일보)라는 식의 후하지 않은 평을 내린다. 이후의 작품은 크게 두 장르로 나뉠 것인데, <과거를 묻지 마세요>(1959), <슬픔은 나에게만>(1962), <내 목숨 다하도록>(1968) 등의 멜로드라마와 <인목대비>(1962), <사명당>(1963), <남이장군>(1964), <무관의 제왕 장보고>(1965) 등의 사극이다. 1971년에 문화광고 영화사인 대정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CF, 단편드라마, 교육프로그램, 기업홍보물 등을 제작한다.

* 참고문헌
조선일보 1958년 7월 30일 석간 4면
김종원, 『한국영화감독사전』, 국학자료원, 2004

[작성: 황미요조]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29년 평양 대찰리 출생. 1948년 평양고보 졸업. 수산업에 종사하던 아버지 안영범씨와 어머니 이영팔씨의 삼 남매 중 둘째로 평양 대찰리에서 태어난 안현철은 고교졸업 후 북조선 영화촬영소에 입소하여 영화감독을 꿈을 키워나갔다. 주로 스타니 슬라브스키의 배우 수업론과 에이젠슈타인, 푸도푸킨의 몽타주 이론에 입각한 영화수업을 받았으며 특히 에이젠슈타인의 작품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그의 이론과 작품은 훗날 안현철의 영화작업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자유로운 카메라 워크나 몽타쥬, 플래시 기법 등을 이용,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새로운 영상적 화면구성이 돋보이는 작품세계를 선보이게 된다.
영화공부에 한창이던 1950년 발발한 전쟁으로 피난길에 오른 그는 전쟁의 혼돈 속에서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지금까지 이산의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야만 했다. 1954년 군 생활을 마치고 매형이었던 이창근을 감독을 찾아가 이만흥 감독을 소개받고 본격적인 영화판에 뛰어들어 조감독 생활을 시작한다. <인생화보>(이창근 감독), <숙영낭자전>(신현로 감독) 등의 조감독을 거쳐 1958년 <어머니의 길>이란 멜로 영화로 데뷔한다. 장래를 약속한 문철과 인숙은 부모의 반대로 어쩔 수 없이 헤어지고 인숙은 홀로 고통의 세월 속에서 아들을 낳아 키운다. 몇 년이 흐른 후 재회한 이들은 행복한 미래를 약속하며 함께 살기로 한다는 줄거리로 이민자, 박노식, 강미애가 출연했다. 평범한 이야기지만 이 작품에서 그는 당시 관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몽타주 기법 등 파격적인 영화리듬을 선보이며 평론과 흥행 모두 좋은 결과를 얻으며 성공적인 첫발을 내딛었다. 그 이후 <낙화유수>(1958), <다시 찾은 양지>(1959), <과거를 묻지 마세요> <어머니의 힘> <아들의 심판> <푸른 하늘 은하수>(1960), <8.15전야> <별> <영산도> <비단이장사 왕서방>(1961), <슬픔은 나에게만> <그리움은 가슴마다> <인목대비> <주유천사>(1962), <거지왕자> <천관녀> <사명당>(1963), <세종대왕> <남이장군>(1964), <장보고>(1965), <생일 없는 소년>(1966), <내 목숨이 다하도록>(1968), <용문의 여검> <사랑이라는 것은> <윤심덕> <미욕의 결투> <떠나도 마음만은> <사랑은 가고 세월만 남아> <야적>(1969), <아빠춤에> <야광주>(1970), <열두여인> <아내여 미안하다>(1971), <용문호객>(1979) 등 40여 편의 작품을 만들었다.
주로 가족 간의 훈훈한 애정이나 진실한 우정을 바탕으로 정감 있는 멜로드라마에서 두드러지는 능력을 보여줬는데 데뷔작 <어머니의 길>을 비롯 과거 기생이었던 까닭에 모진 시집살이와 아이를 빼앗기만 결국 슬픔을 견디고 가족이 된다는 <어머니의 힘>(김승호, 주증녀 출연), 가난 때문에 어린 딸과 생이별한 부부의 슬픔을 그린<푸른하늘 은하수>(최무룡, 김지미 출연), 보석을 훔친 강도단이 과부섬으로 숨어들어 그곳에서 만난 여인과 진실한 사랑에 빠져 자수를 결심한다는 내용의 <열두여인>(최무룡, 윤정희 출연) 등이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멜로드라마와 더불어 사극에서도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표현해낸 그는 사극의 역사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인물의 인간적인 고뇌와 섬세한 감정적인 면을 이끌어내며 감동적인 작품을 다수 연출했다. 대의를 위해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준 양녕대군과 그런 형의 깊은 마음을 헤아린 세종대왕간의 아름다운 형제애를 그린 <주유천하>(신영균, 도금봉, 전계현, 김동원 출연)는 그의 이런 연출스타일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꼽을 수 있다. 이외에도 국난에 빠진 나라를 위해 혁혁한 공을 세운 영웅의 일대기를 다룬 <사명당>(김진규, 조미령, 최남현, 허장강 출연), <남이장군>(신영균, 황정순, 김지미, 이예춘 출연), <장보고>(신영균, 이민자) 등이 있다.
그의 영화에서는 주로 따뜻한 인간의 감성과 가족의 끈끈한 애정, 그리움이 많이 다뤄지는데 이는 감독자신이 가족들과 갑자기 전쟁으로 생이별한 후 겪었던 슬픔이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헤어진 가족을 애틋하게 생각한 나머지 자신의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었지만 그의 가족과 연락이 된 적은 아직 없다고 하여 주위의 안타까움을 사기도 했다.
영화 연출 이외에도 영화계의 크고 작은 문제들에 늘 앞장을 서왔던 그는 1988년 UIP직배 반대 및 스크린 쿼터 사수투쟁, 1998년 제 2차 스크린 쿼터 사수 투쟁시 삭발을 주도하여 47명의 감독 동참을 이끌어 내기도 했으며, 2002년 영화인협회 감사와 감독협회 이사를 거쳐 한국영화감독협회 고문으로 영화인의 권익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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