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MDb 연재를 시작한 지 2년이나 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지속되는 동안 연재와 함께 했다. 처음 기획단계에서 한국영화의 여성주의적 ‘정동’을 주제로 삼았고, 당시 양분된 반응을 얻었던 <
아워 바디>로 연재를 시작했다. ‘정동’이란 주제로 연재한 마지막 글은 시작 같은 끝이 될 수 있는 영화로 고르고 싶었다. 그래서 한국영화사의 첫 여성감독인 박남옥이 연출한 <
미망인>(1955)을 선택했다. 복잡하게 얽힌 오각관계를 재현하는 대화씬의 연출력이 빛나는 <미망인>은 거리를 방황하며 혼란스러움을 드러내는 발의 몽타주로 끝난다. 이 엔딩씬은 10분가량의 사운드와 마지막 장면의 프린트가 소실되어 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그 방황을 영원히 끝낼 수 없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망인>은 박남옥 감독의 첫 번째 영화이자 마지막 영화이다. 차기작에 대한 열망을 돌아가시기 전까지 갖고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결국 그 꿈을 이룰 기회는 없었다. 1955년에 개봉한 <미망인>은 전후 여성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일제식민지와 한국전쟁, 그리고 미군통치 시기를 지나며 조선의 전통적 이데올로기는 균열이 나고 어느 정도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전통적인 성역할은 현실적으로 급격하게 해체되는 수순에 이르렀다. 그것은 단순히 도덕이나 관습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전통적인 성역할이 유지되기 위해선 경제권을 갖고 있는 남성 가부장이 유지되어야 하는데 많은 남자들이 참전 중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은 채 돌아와, 가장이 된 여자들이 오롯이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또한 전후 미처 특정 체제가 구축되기 전 미군을 통해 유입된 새로운 문물의 파장도 있었다. 문학과 영화는 당시 전후를 묘사하기 위해 전통적 성역할에 도전하는 신여성들을 그리기 시작한다. 아프레걸(après-girl)이 그것이다. <미망인>뿐 아니라 동시대에 나온 <
자유부인>(한형모)과 <
지옥화>(신상옥) 등도 그러한 여성들을 그리고 있다. <미망인>의 주인공 이신자(이민자)는 전쟁 중 남편이 죽은 후 어린 딸을 홀로 키우고 있다. 신자는 딸과 함께 잘 살아 보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남편이 없다고 그녀를 우습게 본다. 옆집 여자 숙은 술 먹으며 빈둥대는 나이 든 옆집 남자와 신자를 엮어보려 하고, 남편 친구의 아내는 갑자기 집으로 찾아와 자기 남편에게 들이대지 말라고 협박한다. 그녀는 생활비가 모자라 돈을 빌리려던 신자를 극도로 경계한다.
신자는 남편 없는 설움을 겪는다. 이때부터 신자는 태도를 바꾼다. 어차피 자기의 감정과 욕망이 저자거리에서 다른 이들에 의해 쉽게 취급받을 바에야 정말로 좋아하는 남자와 사랑에도 빠져보면서 자기 생존에 유리한 방식으로 관계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신자는 무작정 순진한 여성도, 그렇다고 다른 영화들에서 묘사된 아프레걸처럼 치명적 매혹으로 남자들을 위험에 빠트리는 팜므 파탈도 아니다. 눈치 빠르고 생존력 강한 신자는 자신에게 성적으로 접근하는 유부남의 호감을 적절한 선에서 이용하고, 양장점을 운영할 만한 능력과 성실함이 있다. 이 과정에서 전후 여성의 관점에서 경제적 문제들이 치밀하게 묘사된다. 현물이든 인맥이든 자원이 없는 신자가 왜 남편친구인 이사장을 찾아갈 수밖에 없는지, 왜 사랑하는 딸을 자신이 키울 수 없고 모성과 사랑 사이에서 양자택일 하도록 강요되는지, 그리고 여성들 간의 불화와 연대는 왜 발생하게 되는지 등을 보여준다.
<미망인>의 인물들은 전쟁 중 죽은 줄 알았던 애인(택과 진)과의 재회처럼 극적인 사건과 선택을 맞닥뜨린다. 이사장과 신자, 택과 이사장 부인이 술집에서 마주치는 장면은 복잡하게 얽힌 선택의 길에 놓인 인물들을 동선과 공간화로 보여준다.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넷이 따로 차에서 내려 대문을 지나 방으로 들어가기까지 정원길을 걸어들어가고 나오는 장면을 정성들여 보여준다. 그 길은 선택의 길이다. 먼저 들어온 택과 이사장 부인이 있는 방의 옆방에 이사장과 신자가 들어온다. 두 방의 교차편집이 진행된다. 이사장 부인은 택이 신자를 만난 것을 추궁하고, 이사장은 신자를 만나 자신의 아내의 외도를 알리며 신으로부터의 위로를 바란다. 그리고 먼저 방을 나온 신은 따로 나온 택과 그 길에서 만나 같이 나가버리고, 이사장 부인은 급작스럽게 만난 남편에게 냉대를 당한다. 신자는 택과의 사랑도 이루고, 이사장에게 투자도 받는다.
신자는 택과의 연애를 이어가기 위해 딸인 주를 동네 나이든 부부에게 맡기지만, 택은 옛 애인인 진을 만난 후 사라진다. 신자는 이후 양장점을 열고 경제적 독립을 이룬다. 신자가 낮에 소설책을 읽다 방에 누워 애인 택과 딸 주의 환상을 보는 장면은 신자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재현한다. 신자가 독백으로 읽어 내려가는 소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인은 그 사나이와 평생을 행복하게 살고 싶었지만, 그 사나이는 하루의 향락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여인은 큰 유리컵에다 진한 술을 붓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방바닥에 누운 신자 위로 디졸브된 택과 주가 교차로 편집된다. 신은 경제적 독립, 사랑, 가족 어느 하나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신자는 신여성으로 방안 탁자에 놓여있는 액자 속 마를린 디트리히와 근대소설의 욕망하는 여성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미망인>의 마지막 10분은 안타깝게도 사운드가 손상되어 대사를 들을 수 없으며, 마지막 장면은 프린트가 완전히 소실되어 엔딩을 알 수 없다. 우리는 신자, 택, 진이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 알 수 없다. 사운드가 없는 무성영화의 상태는 그들의 혼란스러움을 더 극명하게 드러낸다. 속상한 신자가 옆집 친구 숙과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진과 택이 함께 있는 장면과 교차된다. 그 술자리에서 어떤 대화가 오고가는지는 사운드가 소실되어 알 수 없다. 신자와 숙의 대화 장면은 깊은 고뇌에 빠진 척하며 홀로 방황하는 택 그리고 휘청대며 걷는 몽따주된 그의 발들과 교차편집 된다. 욕망의 대상을 뚜렷하게 알고 그것을 다 갖기 위해 달려가는 생존력 강한 신자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 채 정처 없이 떠도는 무력한 택 모두 혼란에 빠진다.
미망인은 ‘(남편과 함께 죽어야 하는데) 아직 죽지 않은’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여자의 삶이 철저하게 남자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가부장제적 단어이다. 하지만 <미망인>은 남편이 죽은 후에도 자신의 주체적 삶을 살아가고 복잡한 현실과 욕망의 간극 속에서 갈등하는 신자를 매력적으로 그려낸다. 그녀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스크린 위 여성들의 복잡한 마음이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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