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의 체제와 닫혀있는 여자들의 세계 궁녀, 2007

by.조혜영(영화평론가) 2022-04-13조회 1,769

2000년대 한국영화는 종종 호러 장르를 경유해 여자들의 세계를 다뤘다. 이 영화들은 가족, 아파트 단지, 학교, 종교단체 같은 특정 여성 공동체 내부의 관계나 감정을 서사의 동력으로 삼으면서 신인 여성 배우들을 발굴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1998년에서 2009년까지 5편을 제작한 <여고괴담> 시리즈가 가장 대표적이며 <장화, 홍련>(2003)과 <4인용 식탁>(2003)도 이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이번 칼럼에서 다룰 김미정 감독의 첫 장편 <궁녀>(2007) 역시 그러한 경향 속에서 나온 영화다.

<궁녀>는 조선시대 궁궐에서 살해당한 한 궁녀의 진실을 추적하는 미스터리 서사, 궁 안의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귀신의 존재를 암시하는 호러 코드, 가부장제 하에서 생존하려는 여성들의 쟁투와 과잉된 모성표현의 멜로드라마 정서가 섞인 흥미로운 장르영화다. 이 영화가 제목으로 삼고 있는 ‘궁녀’는 대중문화에서 왕과의 성적 관계를 통한 여성의 신분상승 서사로, 그리고 때로는 성차별적 신분제 사회에서도 가려지지 않는 출중한 능력과 지력을 갖춘 직업인의 성장서사로 그려져 왔다. ‘궁녀’라는 소재는 요리, 봉제, 의료처럼 전문성을 갖고 있는 직업인으로 다룰 수 있기에 현대 대중문화 콘텐츠로 각색하기에 적절할 뿐 아니라 이성 간 그리고 동성 간의 역동적 관계를 모두 다루기에도 충분한 조건을 갖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리 현대적 각색을 거친다 해도 ‘궁’이라는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체제의 한계를 벗어나기 힘들다. 때문에 이 소재는 늘 시대를 벗어나려는 힘과 시대에 의해 좌절되는 상반되는 힘을 서사화하며 과거와 현재의 교차적 한계를 전경화 한다. 영화 <궁녀> 역시 2000년대 사극 장르에서 여성 서사를 다루는 데 있어 상상적 한계를 돌파함과 동시에 체제의 전환 없이는 벗어나기 힘든 그 한계 내에 재포획 되는 양가적 면모를 보여준다. 이 한계를 재조정하고 재설정하는 상상력에 따라 ‘궁녀’라는 공동체는 매번 다르게 그려진다. 양반도 아니고 기록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여성의 역사를 현대에 상상하고 각색하는 것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젊은 여성의 적극적인 성적 욕망의 표현과 여성 동성애 등 섹슈얼리티의 표현에 있어 시대에 도전한 영화로 평가받으면서도 자살이라는 자기 파괴를 통해서만 궁을 벗어날 수 있는 여성들을 보여준 <내시>(신상옥, 1968)가 1960년대의 상상력이라면, 최근에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MBC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정지인, 송연화, 2021-2022)은 자기 능력을 최대치로 발산하고 인정받기를 열망하는 한편 안전하게 소시민적인 일상을 유지하길 원하는 상반된 여성의 욕망을 반영한 2020년대의 것이다. 영화 <궁녀>는 조선시대에 대한 역사적 상상일 뿐 아니라 2000년대 한국 장르영화의 역량이기도 하다.
 

영화 <궁녀>에서 궁녀들의 공동체는 꽉 닫힌 사회다. 표면적으로는 왕이라는 가부장제와 신분제의 정점에 있는 한 남자에게 종속되어 있고 내명부의 지배를 받지만 궁녀들은 자기들만의 규율과 비밀을 갖고 움직인다. 공동체의 비밀은 ‘자매애적 연대’ 같은 여성들 간의 끈끈한 결속과 감정을 형성하지만 동시에 집단의 이익이나 개인의 생존을 위해 동료를 무자비하게 희생시키기도 한다. 억압적 체제에 속한 공동체에서는 연대와 우정의 감정을 갖게 될지라도 체제 자체를 벗어나거나 무너트리지 않는 이상 그것이 지속되기는 힘들다는 것을 궁녀들의 사회가 보여준다. 이 공동체의 존재조건인 지배적 체제의 힘은 그들의 세계를 새로운 변화나 이질적인 것이 틈입할 수 없는, 꽉 닫힌 세계로 만들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렇다고 궁녀들이 왕족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 <궁녀>는 어떻게 궁궐의 여자들이 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끊임없이 왕과 봉건적 체제를 배신하고 일사분란하게 비밀을 만드는지 보여준다.

<궁녀>가 그 시대 장르영화와 차별화되는 지점은 그 배신을 파격적으로 전면화하는 오프닝씬에 압축되어 있다. 한밤 외진 숲의 어둠에 파묻혀 형태도 잘 보이지 않는 한 여자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내고 있다. 그리고 곧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여자는 홀로 출산을 하고 잠시 아이에게 젖을 물리지만 곧 죽게 내버린다. 보통 장르영화의 오프닝에서 이렇게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를 낳은 여자들은 이후 실종되거나 시체로 발견되어 서사를 진행시키는 도구로 사용되곤 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익숙한 장르적 기대를 통쾌하게 배신한다. 자신의 목숨과 직업 모두를 지켜내고 궁녀로 살아가기 위해 아이를 낳고 죽인 여자가 이 영화의 주인공 천령(박진희)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씬에 멀쩡히 등장해 의녀로 활약하는 천령은 ‘정절’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왕족을 배신하고서도 죽지 않고 잘 살아남은 (기록되지 않은) 여자들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그 과정에서 천령의 스승 의녀는 천령이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지혜를 나눠주고 비밀을 지켜준다.
 

그러나 모두 천령처럼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의녀인 천령은 목매달아 죽은 채로 발견된 궁녀 월령(서영희)의 시체를 검안하고 그의 출산 사실을 밝혀내며 죽음에 얽힌 진실을 추적한다. 천령은 자신의 임신사실을 알리자 잔인하게 그녀를 내쳐버린 대비의 처조카 이형익(김남진)을 의심한다. 천령은 월령이 자신과 비슷한 억울한 사정이 있을 것이라 짐작하며 타락한 남자들의 부도덕함과 불공정에 대항하며 금기시된 욕망을 표출했던 동료 궁녀들을 구원하려 한다. 그러나 감찰상궁(김성령)과 월령이 일했던 희빈전 심상궁(김미경)은 천령의 탐색을 방해하며 월령의 죽음을 자살로 덮으려 한다.

혼란스럽게도 피해자 중 한명으로서 가부장제와 신분제에 대항해 진실을 밝혀내려는 탐정 의녀 천령의 정의로운 수사극처럼 보였던 영화는 중반 이후 죽은 월령으로 추정되는 혼령이 개입해 직접 사건을 해결하려 들면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른다. 월령의 사건을 계기로 왕을 비롯한 남자들의 체제에 대항하려던 천령은 월령이 같은 궁녀들에게 배신을 당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목숨을 걸어서라도 정의를 찾고 진실을 밝혀내려던 천령은 다른 궁녀들과 마찬가지로 침묵을 선택한다. 모성이라는 이름하에 월령이 빙의한 것처럼 보이는 희빈(윤세아)은 궁녀들에게 비밀서약을 강제하고 천령도 그에 동조한다. 궁녀들은 서로를 경계하고 질투하면서도 같은 궁녀였던 희빈이 아들이 원자가 될 수 있도록 협력한다. 그렇게 표면적인 ‘여성들의 연대와 결속’은 오히려 자신들을 억압하는 체제를 공고히 하는 모순에 도달한다. 궁녀들이 서로 갈등하고 자기 결정과 욕망을 금기시하게 된 원인은 왕으로 대표되는 가부장제와 신분제이다. 그러나 월령의 혼령은 왕을 죽이거나 그의 몸을 찬탈하지 않고 자신이 속했던 여성 공동체를 지배하는 것에 만족한다.

대담한 오프닝 씬처럼 천령이 현대적 상상력을 통해 과거를 다시 써내려간 캐릭터라면, 어두운 그림자로만 묘사되는 혼령은 특정 인물의 귀신이라기보다는 천령도 벗어나기 힘든 시대적 한계 그 자체를 재현한다. 무력하게 침묵을 선택하고 궁의 문을 나오는 천령의 모습은 체제에 균열을 내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기댄 ‘여성 결속’이 또한 얼마나 퇴행적일 수 있는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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