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월하의 공동묘지 권철휘, 1967

by.박혜은(영화전문에디터, 전 맥스무비 편집장) 2014-01-06조회 5,815
월하의 공동묘지

2013년을 결산하던 중에 영화 관람 행태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영화 관람 2억 회(‘영화 관객 2억 명’보다 ‘영화 관람 2억 회’가 더 정확한 표현이다)라는 대기록은 이제 한국에선 ‘영화 관람’이 일상적 문화생활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더불어 흥행 영화보다 취향 영화를 선호하는 1인 관객, 즉 ‘나 홀로 관객’이 전체 예매 관객의 17%를 차지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기존의 ‘시즌 공식’을 깨는 슬리퍼히트 영화가 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관람 행태 변화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올해 ‘시즌 공식’을 박살 난 최고의 ‘슬리퍼 히트’를 꼽으라면 단연 제임스 완 감독의 <컨저링>이다. 스산한 가을에 조용히 개봉해 상상 이상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컨저링>과 그 뒤를 이어 개봉한 ‘이한치한’ 호러 <인시디어스: 두 번째 집>에 대한 호러 관객의 반응도 기대 이상이다. 

제임스 완 감독의 호러 영화가 가진 재미는 익숙한 클리셰를 비틀고 뒤섞어 이종집합하는 기발한 발상과 그 아이디어를 밀어붙이는 배포에 있다고 본다. 이 모든 것은 ‘공포의 속성’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제대로 기를 못 펴는 최근의 한국 호러 영화들과 비교하면, 특히 아쉬움이 더 커진다. CG 기술과 특수효과가 제아무리 번듯해도, 공포의 속성과 맞닿지 못하면 소용없다. 매끈하되 무섭지 않은 최근의 공포 영화보다 투박하지만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무서웠던 옛 한국 공포 영화가 그리워지는 이유다. 

한국 공포 영화는 ‘소복을 입고 산발한 여인네들의 원맨쇼’라는 오해를 ‘쩍’ 소리 나게 쪼개버린 영화가 있다. 한국 공포 영화의 전통적인 깜짝쇼 레퍼토리에 익숙해졌다고 자만하던 나를 얼어붙게 만든 장면. 도깨비불이 날아다니는 한밤의 공동묘지에서 무덤 하나가 뭉게뭉게 연기로 휩싸이더니, 쩍 하니 갈라지고 시신이 벌떡 일어났다. 압도적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무덤 트라우마를 남겼을 이 작품이 한국 공포 영화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권철휘 감독의 <월하의 공동묘지>(1967)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나중 일이다. 어린 시절에 섬뜩한 잔상을 복기하기 위해 <월하의 공동묘지>를 다시 본다면 뜨악할지도 모른다. 기억 속 무서운 장면들은 예상보다 훨씬 코믹하다. 오히려 상상 이상으로 촘촘한 드라마에 놀라게 된다. 

때는 일제 말기 표독스러운 아내 난주(도금봉)가 전처 명선(강미애)의 어린 아들을 독살하려던 찰나 남편 한수(박노식)가 들이닥친다. 서로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면 부부싸움을 하는 그들의 사연은 이렇다. 명선은 사랑하는 남자를 먹여 살리기 위해 기생이 되었다가 병을 얻고, 그녀의 병간호를 위해 가정부로 들어온 난주는 재산을 가로채고자 의사 태호(허장강)과 짜고 명선을 죽인다. 끝내 한수와 어린 아들마저 없애려다가 무덤을 쪼개고 돌아온 명선의 원혼이 원수를 갚는다는 해피엔딩. 최신 막장 TV 드라마 뺨치는 줄거리를 1960년대 영화에서 만나는 것도 신선하지만, 더 놀라운 건 배포 좋게 섞여 들어간 실험적인 장치들이다. 괴기스러운 몰골의 변사가 등장해 주인공의 사연을 구구절절 읊기도 하고, 자결한 명선의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유서는 산발한 여인들이 ‘창 뮤지컬’로 재연하는 식이다. 보석 같은 ‘퓨전 호러’라 칭하기에 충분하다. 

<월하의 공동묘지>가 탁월함은 ‘과연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에 있다. 자고로 귀신보다 무서운 게 사람이라고 했다. 사실 이 영화의 진짜 공포는 쩍 갈라지는 무덤이나 후반 10분간 공포 영화의 소임을 다하려는 듯 몰아치는 귀신의 깜짝쇼가 아니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갓난아이건, 정을 통한 남자건, 음모의 협조자건 ‘뚝딱 죽여 버리면 그만’이라고 여기는 난주의 서늘한 욕망이다. 특히 난주가 죽인 줄로만 알았던 명선의 어린 아들이 살아나자 아이의 목을 덥석 움켜쥐는 장면은 특수효과나 분장의 도움 없이도 등골이 서늘하다. 원조 ‘호러 퀸’ 故 도금봉 여사(1930~2009)가 아니었으면 상상하기 힘들 공포. 그녀는 한국 공포 영화사에서 가장 독보적인 여배우다. <살인마>(1965)를 시작으로 <목 없는 미녀>(1966) <생명을 판 사나이>(1966), <월하의 공동묘지>와 <이조여인 잔혹사>(1969) <백골령의 마검>(1969) <악마와 미녀>(1969)를 통해 원조 호러퀸에 등극했다. 1960년대에 한국 여배우 중 남자 피를 빠는 흡혈 마녀 역할을 누가 소화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뒤져봐도 대안 없는 선택이다. <월하의 공동묘지>는 한국 공포 영화계에 한을 품은 소복 귀신의 이미지를 정착시킨 첫 작품이자, 배우 도금봉의 육신을 빌어 현대적 의미의 욕망의 화신을 배출한 에로틱 스릴러로 재음미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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