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명동에 밤이 오면 이형표,1964

by.박진형(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2015-06-16조회 5,461
명동에 밤이 오면 스틸

이형표의 1964년 작 <명동에 밤이 오면>은 당대 그 어떤 영화에 비견해도 손색없을 만큼 세련된 솜씨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주인공인 윤마담(최은희)과 그 주변의 입체적인 캐릭터, 안정된 카메라로 포착된 세련된 이미지, 그리고 신파 멜로드라마가 대세이던 시절 담백하면서도 사려 깊은 극 전개와 정교하게 배치된 장면들은 당대 영화들이 반복하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내며 독특한 감수성을 보여준다. 명동 밤거리 빠(bar)의 화려하고 현란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아낸 품격 있는 세트나 윤 마담과 빠걸들이 숨 가쁘게 선보이는 멋진 의상은 작품의 전반적인 완성도를 높일 뿐 아니라 상당한 시각적 즐거움까지 선사한다. 여기에 최은희, 최지희, 강효실 등 당대 최고의 미녀 배우들과 김승호, 이예춘, 주선태, 남궁원 등 초호화 캐스팅까지, 이쯤 되면 1964년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꼽힐 만도 하지만 사실 이 영화가 주는 즐거움 이후에 찾아오는 건 적지 않은 씁쓸함이다. 그건 이 영화가 나루세 미키오의 걸작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1960)의 완벽한 표절작이기 때문이다.

표절의 핵심에 있는 것이 ‘정도’의 문제라면, <명동에 밤이 오면>은 표절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훌쩍 뛰어넘어 아예 필사본마냥 원본을 복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는 장면들의 순서나 대사, 인물의 동선까지 나루세의 원작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어 짝퉁이라는 비아냥에도 대꾸할 말이 없을 정도다. 잘 봐줘야 ‘그나마 잘 베꼈다’는 칭찬 정도. 모르고 좋아했다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실망은 거의 배신감에 가깝다. 사실 이런 당혹감은 1960년대 한국영화 흥행작들이 상당히 자주 제공하는 비극이다. 60년대를 대표하는 청춘영화인 김기덕의 <맨발의 청춘>(1964) 역시 일본 태양족 영화를 대표하는 나카히라 코우의 <진흙투성이의 순정>(1963) 시나리오를 그대로 베낀 영화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심지어 1964년 어느 일간지 기사에서 그해 개봉한 한국영화 136편 가운데 무려 55편의 청춘영화가 일본원작의 표절 혐의를 받고 있다며 개탄했을 정도로 일본원작의 표절은 거의 당대 영화계의 골칫거리이자 관행이었던 것이다. 

물론 일본원작의 노골적인 베끼기는 영화계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였지만, 최근의 연구가 알려주듯 1960년대의 일본문화 열풍은 영화, 음악, 문학에서 TV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한국문화를 강타했다. 한일국교 정상화에 대한 찬반 논쟁이 뜨거웠던 당시 한국사회의 분위기를 떠올린다면 이 소위 ‘일풍’은 흥미로운 구석이 많다. 영화의 경우 일본영화가 전면 개봉금지 되었기 때문에 국내 시장에 완전히 차단되었다는 상황은 표절에 좋은 토양을 제공했으며, 특히 성공이 확인된 원작이 흥행을 보증해준다는 점은 당시 영화제작자들에게 가장 큰 매력이었다. 하지만 일본원작의 표절영화들이 연이어 흥행에 성공한 것은 비단 일본원작 그 자체가 가진 영화적 완성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부산까지 전파가 미쳤던 일본 TV나 「빙점」과 같은 일본 번역문학의 돌풍 등 한국문화 전반에 퍼져있던 일풍은 단순한 ‘일본스러움’을 넘어 서구/근대적 생활양식과 문화적 감수성을 경험할 수 있는 대중적인 채널이었다. 권보드래와 천정환이 적시하듯 일본/일풍은 “국경을 넘는 문화적 현대성의 매개”로 기능했던 셈이다. 

기실 이 문화적 현대성은 1960년대 한국영화를 사로잡았던 지배적인 담론을 구성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영화제작을 경험했거나 미 공보원, 국방부정훈국 경험 등을 바탕으로 5, 60년대 한국영화의 선봉장에 섰던 신상옥, 한형모, 김기영, 이용민, 이형표 등 일군의 감독들은 고전 할리우드 양식에서 아방가르드 영화까지 다양한 양식들을 동시적으로 흡수하고자 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일종의 엘리트주의적인 이 열망은 고전 할리우드 양식과 장르 영화의 추구에서 모더니스트적 자의식까지, ‘신필름’같은 스튜디오 시스템와 확립에서 ‘시네 포엠’같은 아방가르드 영화집단(대표이사에는 유현목, 제작간사에는 이형표의 이름이 올라있다)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상이한 움직임들을 가져왔다. 이런 역동적인 움직임들의 동시성 그 핵심에 문화적 현대성이 있었고 이는 1960년대 한국영화들이 보여주는 어떤 흔적들을 관찰하는 중요한 담론적 맥락을 제공한다.

원작의 시나리오를 그대로 옮겨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군더더기 없는 장면연출이나 단순한 선과 악으로 구분되지 않는 다채로운 캐릭터 앙상블 등 <명동에 밤이 오면>이 보여주는 ‘웰메이드’ 영화의 면모는 상당 부분 나루세의 공이다. 신상옥과 신필름에 일대 전기를 마련해 준 한국 최초 컬러 시네마스코프 영화 <성춘향>(1961)의 화면을 유려하게 요리했던 이형표의 장기는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실내 장면 구석구석에서 빛을 발한다. 당대 관객들에게 젊음과 유행, 욕망과 쾌락의 상징과도 같았던 명동. 밤거리를 밝게 비추는 네온사인이 어지럽게 화면을 메우는 오프닝 시퀀스는 극장과 상점이 즐비한 그 화려한 거리를 지나 활력 넘치는 수다와 몸짓으로 가득한 빠로 이어진다. 대부분 실내 좁은 세트에서 촬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감과 앙각을 오가는 다양한 카메라 각도, 트랙쇼트와 클로즈업의 리드미컬한 흐름,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는 윤마담을 역동적으로 포착하는 사각화면(oblique shot)같은 세련된 카메라는 빠라는 제한된 공간을 역동적으로 구성한다(충분히 추측 가능한 이유로, 사실 영화는 계단의 이미지를 피한다). 당대를 대표한 테크니션이자 할리우드를 경유하여 현대성에 사로잡힌 엘리트로서의 이형표의 역량을 제대로 엿볼 수 있는 구석이다. 

나루세의 원작이 드리우고 있는 그늘이 <명동에 밤이 오면>의 감상이나 독해를 상당히 방해하고 있지만, 이형표의 판본은 원작의 처연함과는 어딘가 다른 뉘앙스를 갖고 있다. 가부장제와 고단한 삶의 무게를 이겨내며 꿋꿋이 살아나가는 나루세의 여자들이 일종의 자연주의적인 비애의 정념을 갖고 있다면, 이형표의 여자들은 다가올 미래에 대한 어떤 낙관적인 기대와 자신감으로 시사한다. 이는 (<서울의 지붕 밑>같은 코미디 영화에서 잘 드러나듯이) 이형표의 영화력을 관통하는 어떤 나이브한 낙관주의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대 정치, 경제, 문화를 지배하고 있던 서구적 현대성에 대한 한국사회의 집단적 태도나 감정과도 연관을 맺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중심에 서 있는 존재가 윤 마담을 비롯한 빠걸들이다. 

영화의 가장 매혹적인 이미지는 단연 소파와 즐비한 서양 술병 등 세밀하게 디자인된 세트다. 그리고 이 상품 자본주의의 스펙터클 안에는 첨단 유행의 양복으로 한껏 치장한 채 부유하는 빠걸들이 있다. 그녀들은 가부장 질서의 규율에서 벗어나 왕성한 사회활동과 소비력이라는 근대의 자유를 만끽하는, 당대 최고의 매혹이자 골칫거리이기도 했던 이른바 ‘아프레걸’의 최전방이다. 특히 자동차까지 마련하고 새 옷을 사제끼는 소라(강효실)나 “남자는 필요없어. 돈이 최고야”를 연신 외치는 금자(최지희)는 단지 서구 근대성의 문화적 흔적들을 신체에 각인한 존재로서의 모던 걸을 넘어 적극적인 사회진출과 경제활동을 추구하는 생산자로서의 여성존재를 부각시킨다. 

돈으로 낭만을 구매하는 사장님들과 돈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여성노동자들 사이에서 부유하는 건 바로 윤마담의 존재다. 돌싱녀인 윤마담은 비록 천대받는 마담이지만 나름 기업가로서의 직업윤리를 고수하는 동시에, 여전히 바람직한 남성을 탐색하며 평범한 가정주부로서의 삶을 갈망한다. 전근대적 질서와 현대적 변화 사이에서 길항하는 윤마담은 유행 1번지 명동에서 펼쳐지는 60년대 현대성의 황홀한 만화경 안에서 근대의 딜레마에 협상하는 일종의 균형추이자, 결국 또다시 좌절된 욕망과 체념, 낙관과 희망이 짬뽕된 곤경 만을 떠안은 채 상이한 질서들을 잇고 사라지는 매개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당대 최고의 스타이자 서구적 미인의 대명사였던 최은희는 이 영화의 모든 것을 수렴하는 이미지다. 여성, 신체, 노동, 문화에 대한 당대의 감수성을 체화한 윤 마담과 그 동료들의 모습은 70년대 한국영화의 ‘어둠의 딸’ 호스티스와 사뭇 달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같은 꼴을 가진 바로 그 자신의 암울한 근미래를 예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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