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Kim Kee-duk / 金基悳
출생·사망
1934 ~ 2017
대표분야
감독, 편집
데뷔작품
오인의 해병 1961
활동년대
1950, 1960, 1970, 2000, 2010

필모그래피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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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저 하늘에 그 얼굴이 (김기덕, )
정상에 서다 (김기덕, 1979)
영광의 9회말 (김기덕, 1977)
가수왕 (김기덕, 1975)
꽃상여 (김기덕, 1974)
유관순 (김기덕, 1974)
씻김불 (김기덕, 1973)
시거든 떫지나 말지 (김기덕, 1973)
하숙인생 (김기덕, 1973)
헤어져도 사랑만은 (김기덕, 1972)

주요경력

1956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단종애사>, <왕자호동과 낙랑공주> 조감독
1961년 차태진과 극동흥업 창립. <5인의 해병>으로 감독 데뷔. 이때까지 편집 작업도 함
1969년 BFC(야구동호인회) 대표
1973년 영화인협회 감독위원회 부위원장
1978~98년 서울예술전문대학(현 서울예술대) 영화과 교수
1980년 영화검열 심의위원
1984년 1984 대종상 본심심의위원
1986~88년 공연윤리위원회 영화심의위원
1989년 1989 대종상 본심심의위원
1993년 공연윤리위원회 비디오심의위원, 1993 대종상 본심심의위원
1995년~ 대종상 집행위원
1998~2001년 서울예술전문대학 학장
200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2003~05년 부산예술대학 학장

기타정보

영화계 입문배경
1955년 "불사조의 언덕"을 연출한 전창근 감독의 권유로 배우로 출연 예정이었으나 키가 작다는 이유로 인해서 연출부 조감독으로 일하게 된 것이 배경이 되었다.
애착작품 및 사유
1965년 감독한 "남과 북"을 들 수 있고 그 사유는 우리민족이 안고 있는 분단의 아픔을 그린 작품이라서 애착이 감.
영화속 명소
1973년 연출한 "씻김불"을 촬영했던 제주도를 들 수 있다. 제주와 모슬포 중간에 위치한 고산이 자연적인 배경(산, 바다, 돌, 바위)이 석양과 주변의 조화도 아름답다. "씻김불" 촬영시는 open set을 지어서 촬영했다.
추구하는 스타일/배역
'평범한 인간들의 애환'으로 표현될 것같다. 많은 작품을 연출했지만 특정한 주의나 Style보다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희,노,애,락을 통한 평범한 인간군상의 표현으로 정리할 수 있음.
저술내역
▣저서
『한국영화의 당면과제』
『한국대학 영화교육의 문제점』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의 제작과정』, 한국대학영화교수협의회
『소형영화 영상작품 실기 입문』, 해뜸출판사, 1989.
『영화촬영』, J.크리스 말키비츠 저, 김기덕 역, 영화진흥위원회 총서, 집문당, 1999.
『16mm 촬영기재 매뉴얼』

▣논문
「북한영화의 제작기술 현황」, 『통일정책54』, 국토통일원평화통일연구소, 1979. 12.
「북한의 영화제작기술상의 문제점」, 『아세아공론 90』, 한국구게문화협회, 1980. 4.
「휴매니즘 상실한 지루한 극화: 북한문화의 현주소」, 『북한 147』, 북한연구소, 1984. 3.
수상내역(영화)
1962년 제1회 대종상 영화제 : 신인상 (5인의 해병)
수상내역(기타)
2003년 옥관문화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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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34년 서울에서 태어나, 의과대학을 준비하던 중 전쟁이 발발하여 미 공군의 OSI(Office of Special Investigation, 특수수사대)에서 일자리를 얻는다. OSI에서 근무하던 중, 당시 영화 지망생으로 시나리오를 습작하던 이종기를 알게 되며 영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영화 쪽으로 본격적 입문을 하게 된 계기는 전창근 감독 연출, 미공보부 제작의 영화 <불사조의 언덕>(1955)에서 통역장교 역할을 제안 받으면서부터이다. 그러나 미국 측 배우들과의 신장 차이의 문제로 출연대신, 연출부에서 일하며 영화에 입문하게 된다. 이후 전창근 감독과 한형모 감독의 조감독으로 일하며 연출 공부를 하는 한편, 현상, 편집, 녹음 등 기술적인 측면을 익히며 영화 제작 전반에 대해 배운다. 1960년 4.19, 5.16을 거치며 사라진 임화수의 한국연예주식회사로부터 나와, 1961년 한국연예주식회사의 제작본부장이던 차태진을 대표로 하는 극동흥업사를 함께 설립하고, 전무이사 겸 전속 감독으로 활동한다. 그리고 설립된 그 해 <5인의 해병>으로 감독 데뷔한다. 이후 <가정교사>(1963), <맨발의 청춘>(1964), <말띠신부>(1966), <청춘고백>(1968) 등의 청춘물, <남과 북>(1965), <용사는 살아있다>(1965), <124 군부대>(1970) 등의 전쟁물, <오늘은 왕>(1966), <친정어머니>(1966) 등 가족 멜로드라마를 비롯해 <대괴수 용가리>(1967)와 같은 SF 괴수물까지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연출한다. 1977년 <영광의 9회말>을 마지막 연출작으로, 서울예술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후진을 양성한다.

* 참고문헌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한국영화를 말한다-한국영화의 르네상스1』, 도서출판 이채, 2005년, 7~59쪽

[작성: 황미요조]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30년 9월28일 서울 출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감독은 1961년 <5인의 해병>이란 전쟁영화로 데뷔했다. 이후 그는 많게는 한 해에 여덟 편 그리고 적게는 한 두 편씩 20여 년 동안 70여 편에 이르는 작품을 정열적으로 만들었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다음과 같다. 1963년에 <가정교사>,<77번 미스 金>, 1964년에 <천안삼거리>, <맨발의 청춘>, <떠날 때는 말없이>, 1965년에 <남과 북>, <용사는 살아있다>,1966년에 <말띠 신부>,<종점>, 1967년에 <여대생 사장>, <내 멋에 산다>, <대괴수 용가리>,1968년에 <아네모네마담>, <성난 대지>,1969년에 <샹하이 부루스>, <남의 속도 모르고> 등을 만들었다. 1970년대 들어와서도 그의 다작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1971년에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명동 부루스>, 1971년에 <열 아홉 순정>, <카츄샤>, 1972년에 <결혼반지>, <별이 빛나는 밤에>, 1973년에 <하숙인생>, 1974년에 <유관순>, <꽃상여>, 1975년에 <가수왕> 그리고 1977년에 <영광의 9회말>을 만들었다.
그의 대표작은 1964년 작인 <맨발의 靑春>이라는 청춘물이자, 이른바 깡패영화다. 1990년대 후반 들어서 이른바 조폭영화(組織暴力을 다룬 영화)들이 크게 유행했는데, 사실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1960년대에도 깡패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이 심심찮게 만들어졌다. 이 당시만 해도 아직 경제적으로 궁핍(窮乏)했던 때였으므로, 힘없고 가진 것 없는 가출 청소년들이 쉽게 암흑가라는 파멸(破滅)의 길로 빠져들었다. 이 계열의 대표작이 바로 <맨발의 청춘>이었다. 이 작품은 깡패들의 세계를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도 또한 애절한 로맨스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개봉당시 일반관객들의 커다란 관심을 끌었다. 당시 한국 최고의 청춘 스타였던 신성일(申星一)이 비운(悲運)의 깡패인 두수 역을 맡았고, 그와 운명적 사랑에 빠지게 되는 외교관의 딸 요안나 역은 엄앵란(嚴鶯蘭)이 맡아 열연했다. 어느 날 두수는 우연한 기회에 한 여대생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신분의 차이 탓에 장벽에 부딪치게 된다. 그러나 범법자인 깡패와 외교관의 딸이라는 엄청난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애정은 깊어만 간다. 결국 어머니의 강한 반대에 직면한 딸 요안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사랑을 지키려 한다. 한편 두수는 조직의 배신자라는 낙인을 감수하면서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 한다. 여기서 ‘맨발의 청춘’이 의미하는 것은 그야말로 젊음의 순수와 열정만 갖고 세상의 편견을 극복하려는 의지라고 하겠다.
한국현대사(韓國現代史)의 최대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 6.25 동족상잔(同族相殘)은 한국인의 실제 삶뿐만이 영화예술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50년대를 지나 60년대에 들어와서도 6.25의 상흔(傷痕)은 어떤 형태로든지 영화 속에 반영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반공(反共)을 전면에 내세운 전쟁영화들이 많이 제작되었는데, 이 당시에는 전쟁영화라 하면 곧바로 반공영화와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감독의 <남과 북>(1965년)은 제목에서 풍기는 대로 남북분단으로 인해 초래된 가족관계의 파탄(破綻)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전쟁영화다. 그런데 종래의 전쟁영화들이 대부분 이데올로기라든가 전투장면 같은 스펙터클에 치중해 온데 비해서, <남과 북>은 전쟁 자체의 상황보다는 인간의 정황(情況)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의 두 남편이 서로 대치한 형국이랄까? 북한인민군 소좌인 신영균(申榮均)은 남쪽으로 피난해온 아내를 찾아 탈영을 감행하여 국군에 귀순한다. 그런데 그토록 찾았던 아내는 이미 재혼을 한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그녀의 새 남편은 귀순한 부대의 중대장이었다.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귀순까지 했는데, 아내가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었다니 통탄할 일이었다. 그런데 충격은 국군 중대장도 마찬가지였다. 하필 귀순한 인민군 장교가 전남편이었다니 말이다. 결국 중대장은 고민 끝에 아내를 전남편에게 되돌려 주기로 결심한다. 전남편의 목숨을 건 사랑에 감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살아 돌아올 기약을 할 수 없는 특수적전에 자원하는 최후의 수단을 강구한다. 하지만 아내의 배신에 실망한 인민군 장교는 그녀를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쟁의 참화 속에서도 피어나는 사랑의 꽃을 이 영화는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다. 그는 작품의 내용적 측면보다는 스타일을 더 따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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