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희
Choi Ji-hee / 崔智姬 / 1940  ~  2021
본명
김경자 (Jeon Gyeong-ja)
대표분야
배우
데뷔작품
아름다운 악녀 1957
활동년대
1950, 1960, 1970, 1980, 1990, 200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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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모그래피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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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
노라노 (김성희, 2013)
오빠가 돌아왔다 (노진수, 2010) 어부 아내
[원로영화인 구술인터뷰] 최지희 (, 2000)
풀빛사탕 (김선영, 1999)
잡초들의 봄 (문여송, 1989) 옥경
캐서린의 탈출 (데이비드 로웰 리치,장일호, 1973) 미스 김
늑대들 (김효천, 1973)
사나이 훈장 (최영철, 1973) 미리
쟉크를 채워라 (박노식, 1972) 마담(한국캬바레의 마담)
작별 (전우열, 1972) 오마담

주요경력

1940년 일본 오사카 출생
1946년 부친의 고향인 경남 하동으로 귀국
1954년 극단 활동
1956년 <인걸 홍길동>으로 영화에 처음 출연
1958년 한국 홍콩 합작영화 <애정무한>, <길 잃은 철새> 출연
1960년 필리핀 아시아 국제영화제 한국대표로 참석
1961년 미국 George Town University Institute Language School, New York Neighborhood Paly House Total Art School 수료
1973년 일본 아카사카에 Pub Club "지희네" 개업
1983년 NHK 방송국에 가수 조용필, 영화 <족보> 소개
1985년 한남체인 인수 경영
1986년 미국에서 영화 <They Call Me Bruce> 제작
1987년 서울 프리올림픽쇼 기획제작
1988년 서울 프리올림픽쇼 개최
1990년 스포츠타운 "지희타운" 설립
1998년 일본 TV-ASAHI 와 공동제작 <The Golden Time> 방영

기타정보

영화계 입문배경
당시는 6.25이후 우리 나라가 매우 가난했던 시절이었고 나 역시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8.15를 맞아 귀국해서 힘들었던 시대였는데 영화에 '영'자도 모르면서 영화일을 시작하게된 것은 힘들고 배고플때 그 일로 밥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배우 일을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 시대에는 누구나 어려운 생활을 했겠지만 내 경우에는 돈이 없어서 학업도 중단해야 했고 또 내가 어떻게 해서라도 벌어야 먹고 살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단지 주위의 권유로 일을 시작했었다.
주요 영화작품
아름다운 악녀(1958,이강천감독)
인걸 홍길동(1958,김일해감독)
돼지꿈(1961,한형모감독)
그 땅의 연인(1963,임권택감독)
김약국의 딸들(1963,유현목감독)
나갈 길이 없다(1964,이한욱감독)
해녀(1964,박영환감독)
마포사는 황부자(1965,이봉래감독)
8240 K.L.O(1966,정진우감독)
네자매(1967,박종호감독)
단벌신사(1968,김기풍감독)
날벼락(1971,이두용감독)
화분(1972,하길종감독)
캐서린의 탈출(1973,장일호감독)
주요기타작품
1970년 낮과 밤 (MBC)
1995년 인간의 땅 (KBS)
1962년 뮤지컬 <포기와 베스>
애착작품 및 사유
애착가는 작품은 역시 첫 작품 '아름다운 악녀'(1957)인데 이 작품은 실질적인 6.25전쟁은 끝났지만 한 소녀가 사회에서 느끼기에 아직도 전쟁중 이라는 이야기로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는 작품으로 모든 게 내 자신과도 같은 이야기라 더 애착가는 작품이며 그밖에도 <말띠 여대생>이나 <김약국집 딸들>도 좋은 작품으로 기억된다.
하고싶은 말
요즘 영화계를 보면 영화를 위해서 나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의 물결이라까 시대의 흐름으로 나왔다가 금방 사라지는 연기자도 많이 보게 되는데 그런 것을 볼 때마다 참 안타까운데 인기나 돈에 치중하지 않고 진정한 연기를 보여 줄 수 있는 그런 후배 연기자들이 많이 나와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영화속 명소
예전에 'NO WAY OUT'이라는 영화를 필리핀과 합작해서 필리핀에서 찍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어려서 그런지 필리핀이 참 좋았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가고싶은 곳은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지구촌에 살고 있고 또 개인이 느끼는 것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어디가 좋다고는 할 수 없고 단지 가장 좋은 곳은 자기가 일하는 곳이 제일 좋은 곳이 아닌가 생각한다.
추구하는 스타일/배역
내가 영화를 했던 시대가 전쟁 직후 가난하고 어렵던 시대였기 때문에 작품들의 성격이 가난하고 비극에 관한 작품들이 많았었다. 그러나 내 생김새가 키도 크고 눈도 큰 현대적이고 서구적인 외모여서 그런 슬프고 비극적인 영화와는 어울리지 않아 주로 활발하고 말괄량이 같은 동적인 역할을 많이 했다. 당시엔 그런 점에 불만도 있었지만 그 시점에서 나를 요구하는 모든 작품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처음 영화일을 할 때가 15살로 사춘기를 영화계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중 속에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러고 싶은게 내 욕심인데 물론 좋은 작품 좋은 배역이 있으면 언제든지 환영이지만 배우로써의 활동보다는 계획하며 노력했던 우리의 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 그런 일들에 힘을 쏟고 싶다. 특히 일본에서는 여러해 살았었고 우리문화를 소개한 경험(가수 조용필씨를 일본 NHK에 방송하게 한 일과 우리영화 '족보'를 NHK에서 방송하게 한일 등)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경험으로 한.일 문화교류와 특히 우리의 문화를 일본에 알리는 일에 노력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 일은 계속 될 것이다.
자기소개 및 취미
취미는 운동하는 것과 직업이 직업이라 그런지 영화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운동을 시작한지는 벌써 10년이 넘었고 영화 보는 것은 지금까지 해왔던 일이고 아주 어릴 때부터 일을 해서 그런지 운동도 그렇지만 생활에 습관화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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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40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해방 이후 여수에 머물다 여순사건(1948)을 겪고, 부모의 고향인 하동으로 옮겨간다. 부산 여자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집안 형편으로 그만두고, 친구를 따라 한국무용을 가르치는 학교로 옮긴다. 그때 마침 부산에 공연을 와있던 극단에 무작정 찾아가 입단하지만, 극단은 대구에서 해체된다. 그러나 그때 마침 대구에서 <산적의 딸>(1957)을 찍고 있던 윤예담 감독의 여동생과 알게 되어 서울로 올라오게 되고, 서울에서 제작자 최남용의 눈에 띄어 김일해 감독의 <인걸 홍길동>(1958)에 캐스팅되고, 이어 이강천 감독의 <아름다운 악녀>(1958)에도 동시에 캐스팅된다. 이 가운데 먼저 개봉한 <아름다운 악녀>에서의 소매치기 연기로 '아프레 걸'의 이미지를 얻는다. 이후 <자매의 화원>(1959)에서 언니의 남자를 빼앗으려는 동생을 연기하고, <내가 낳은 검둥이>(1959), <애모>(1959) 등의 영화에서의 연기로 '야성적이며 이국적인 연기'라는 평을 듣는다(서울신문). 1961년 미국 워싱턴과 뉴욕에 머물며 1년간 영어와 연기 공부를 하고, 1962년 돌아와 <사춘기여 안녕>(1962), <말띠 여대생>(1963) 등 많은 청춘 영화에 출연한다. 청춘영화 이외의 이 시기 대표작으로 <김약국의 딸들>(1963)이 있는데, 여기서 셋째 딸 역할을 맡아 제1회 청룡영화상과 제3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다. 1966년 결혼을 기점으로 은퇴하였다가, 1969년 이혼하며 다시 컴백하는데 이 시기에는 당시 한국영화에서 인기 있던 액션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활약한다. 1970년대 중반 무렵 영화계를 떠나, 일본, 미국 등지에서 사업을 벌이는 한편, 1986년 자니 윤 주연의 영화 를 제작, 1988년에는 '서울 프레올림픽쇼'를 기획, 제작하고, 1998년에는 일본 아사히 TV와 을 공동제작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인다.

* 참고문헌
서울신문 1960년 3월 16일 석간 4면
한국영화를 빛낸 스타들5-‘아름다운 악녀’ 최지희, 『신동아』 통권 532호(2004년 1월 1일), 536~552쪽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를 말한다-1950년대 한국영화』, 도서출판 이채, 293~313쪽

[작성: 황미요조]
출처 : 여성영화인사전
최지희(崔智姬)

배우. 1940년 1월 22일 일본 오사카 출생, 본명 김경자(金京子), 경남여고 졸업, 미국 조지타운 대학 유학.

* 반항의 시대가 도래했다. 제임스 딘의 <이유없는 반항>이 58년 단성사에서 개봉되고 곧 최지희의 <아름다운 악녀>(58, 이강천)가 그 뒤를 이었다. 반항과 혼돈과 자유로 점철된 낭만의 시대였던 50년대 말, 영화 <아름다운 악녀>는 아프레게르 10대 소녀의 성 모럴에 대한 감상적인 보고서이다. 이 영화에서 소매치기와 매매춘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며 낡은 가치관에 냉소를 던지는, 반항기 가득한 10대 소녀 은미를 연기한 최지희는 아프레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스타일로 일대 화제를 일으켰다. ( 이 영화를 촬영했던 57년 당시 18세의 도발적인 십대였던 최지희는 특히 하이틴 관객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 하지만 도덕이나 사랑 따위는 신뢰하지 않으며 다만 명동의 거리를 중심없이 떠다니는 자유로운 영혼으로서 은미는 아프레적인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온갖 편견을 집약하고 있는 듯하다. 이 무례하고 당돌한 보헤미안은 이듬해의 <자매의 화원>(59, 신상옥)에서 언니 최은희의 남자를 가로채기도 하는 다시 한번 아프레 형의 깜찍한 여동생으로 분한다. 그녀가 저지르는 잘못은 지극히 비도덕적인 것으로 여겨졌으나 그러면서도 도저히 미워할 수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용서받게 되는 방식은 결국에는 가책을 느끼고 무거운 심정으로 용서를 구하는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욕망을 솔직히 털어놓음으로써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지희의 출현은 짧은 기간이나마 아름다운 사악함을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갈망하는 시대,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아름다움과 죄악을 더 이상 동일시 하지않는 시대가 왔음을 선언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시 <아름다운 악녀>는 이른바 서스펜스, 스릴, 섹스 라는 3S 영화라는 새로운 형식의 영화로 평가 받았다. 그리고 최지희는 이 영화 한편으로 한국의 브리짓 바르도라고 불리게 된다. "대담하고 정열적이고 야심만만하고 야성적인 체취를 발산하는 여배우", "도회적인 감각이 불꽃처럼 튀면서도 때로는 원시림에서 튀어나온듯 황홀함을 느끼게 하는 배우". 저널에서 최지희를 장식하던 미사여구들은 브리짓 바르도의 그것과 비슷했다. 오히려 최지희는 불량기 가득한 욕망 속에 금새 파열되어 치솟을 듯한 능동의 에너지를 간직한 여자였다. 특히 스크린 위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비즈니스 감각을 발휘하면서도 결코 의리를 저버리지않는 여자였다. 그런 기질은 실제로 영화계를 떠난후 국제적인 사업가로 성공한 그의 이력에서도 충분히 엿볼수 있는 것이다.
욕망과 능동의 체현이라 할 수있는 최지희는 <김약국의 딸들>(63, 유현목)에서 완전무결한 사악함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악녀가 된 이래 더 이상 적절한 배역을 얻을 수 없었다. 따라서 66년 그는 결혼과 함께 영화계를 잠시 떠나기로 결심했고 70년 다시 돌아왔을 때 재기작은 저예산 B급 영화 <남대문 출신 용팔이>(설태호)로 낙점 되었다. 이 영화가 크게 성공하면서 그 무렵 지방 극장가를 온통 장악하게 된 '용팔이' 연작 시리즈 그리고 <팔도 가시나이>(70, 편거영) 등 그 아류작까지 포함해 30여편의 영화에서 용팔이를 애 먹이는 드세고 불량스런 애인역을 도맡았으며 자발적으로 감독에게 7년만의 외출에서 마릴린 몬로가 보여줬던 그런 포즈로 찰영해달라고 제안할 정도로 플레어 스커트를 펄럭이며 유혹적으로 발길질하는 성깔있는 여자가 되었다. 반항하는 10대 아프레걸, 그리고 한국의 B.B.로서 시대의 변화를 민감하게 묘사했던 최지희는 73년 폐가처럼 변해버린 영화계를 조용히 떠난다. 우연치고는 묘한 일인데 그 해는 브리짓 바르도가 환멸을 느끼며 은막을 떠난 해이기도 하다. ( 여선정 )


출연

-58 아름다운 악녀, 애정무정, 인걸 홍길동. -59 가는 봄 오는 봄, 과거를 묻지 마세요, 길잃은 사람들, 내가 낳은 검둥이, 백의천사와 꼽추, 별은 창 넘어로, 비오는 날 오후 3시, 삼일독립운동, 슬픔은 여성에게만, 아름다운 여인, 애모, 애정무한, 여인숙, 자나깨나, 자매의 화원, 젊은 아내, 죄없는 청춘, 청춘배달, 푸른 날개, 한번만 봐주세요, 행복의 조건,
회정. -60 경상도 사나이, 그 이름을 잊으리, 모상, 버림받은 천사, 연애전선, 오형제, 저 언덕을 넘어서, 젊은이의 양지, 정열없는 살인, 피는 살아있다, 햇빛 쏟아지는 벌판. -61 나그네, 돼지꿈, 바람은 사라지고, 별의 고향, 사랑이 지고피던 날, 악인시대, 양산도, 인력거. -62 공포의 여덞시간, 남자는 안팔려, 사춘기여 안녕, 싸우는 사자들. -63 굴비, 그 땅의 연인들, 김약국의 딸들, 나갈 길은 없다, 낙동강 칠백리, 만날 때와 헤어질 때, 며느리의 비밀, 미녀와 도적, 새엄마, 성난 능금, 여자가 질투를 할 때, 오색 무지개, 옹고집, 울며 헤어진 부산항, 이주사, 장미꽃 인생, 청색아파트, 푸른 꿈은 빛나리. -64 국경아닌 국경선, 공작부인, 김희갑의 청춘고백, 나갈 길이 없다, 니가 잘나 일색이냐, 단골손님,
단골지각생, 단장록, 당신만을 위하여, 말띠 여대생, 맨발로 뛰어라, 명동에 밤이 오면, 바람난 고양이들, 밤안개, 새벽의 비상선, 석가모니, 식모, 쌔드무비, 연애할 시간 없다, 오빠, 용서받기 싫다, 이거 됩니까 이거 안됩니다, 총각김치, 평양감사, 학생부부, 해녀, 형부와 새언니, 홀어머니. -65 국제간첩, 마포사는 황부자, 무정의 40계단, 바람아 말하라,
사랑은 무서워,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 산천도 울었다, 삼등사장, 신화를 남긴 해병, 여자가 더 좋아, 여자의 길, 육체의 문, 의형제, 이 여자를 보라, 적자인생, 죽도록 보고싶어, 청춘사업, 태조 이성계, 피어린 구월산, 한많은 석이엄마, 해병특공대. -66 귀신잡는 해병, 만져만 봅시다, 말띠신부, 무명초, 무정가 일번지, 산호의 문, 생명을 판 사나이, 서울머슴아, 심술각하, 악몽, 여자이기 때문에, 위험한 청춘, 적선지대, 친정 어머니, 칠인의 난폭자, 8240 K.L.O, 회전의자. -67 기상천외, 무번지, 애인, 어느 기생 며느리. -68 단벌신사. -69 남자미용사, 잡았네요, 흑진주. -70 남대문출신 용팔이, 남 대 여, 동경사자와 명동호랑이, 동춘, 맨발로 왔다, 맨주먹으로 왔다, 서울이 좋다지만, 역전출신 용팔이, 원한맺힌 삼돌이, 천하일색 말괄량이, 타인의 집, 특공대와 돌아오지 않는 해병, 팔도 가시나이, 한양 건달, 황야의 외팔이. -71 날벼락, 돈에 눌려 죽은 사나이, 운전수 용팔이,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위기일발 용팔이, 종로 444번지, 항구의 왼손잡이, 홍콩서 온 철인 박, 황금독수리, 훼리호를 타라. -72 작별, 쟉크를 채워라, 화분. -73 부부교대, 사나이 훈장, 캐서린의 탈출. -76 청춘을 이야기합시다.

각본

-67 네 자매.

제작

-73 타격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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