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편거영 - 감독

by.오승욱(영화감독) 2015-05-13조회 1,678

1969년. 영화 <팔도 사나이>가 개봉된다. 장동휘, 박노식, 독고성, 황해, 허장강, 이대엽, 오지명. 충무로 최고의 액션 배우들이 모두 총 출동한 것이다. 감독은 김효천. 항해사 이력을 가진 마초. 부잣집 아들에 호남 형으로 생긴 이 사나이는 배우가 되고 싶은 꿈을 안고 충무로에 들어왔으나, 시나리오 작가로 인정받아 멜로 영화로 데뷔한 뒤 자신의 본령인 사내들의 주먹세계를 그리는 영화를 만든 것이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는 편거영. 그는 영화잡지의 편집장으로 일하다가 시나리오 작가로 충무로에 입성하여 이만희 감독의 스릴러 범죄영화 <다이알 112를 돌려라>를 비롯하여 1960년대 초 붐을 이룬 스릴러 범죄영화와 전쟁영화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충무로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한 전쟁 영화 <특전대>로 데뷔를 한 감독 겸 시나리오 작가였다. 영화 <팔도사나이>는 조선 사나이들의 신화의 세계, 한국판 웨스턴이었다. 장동휘가 연기한 종로의 주먹 김두한과 대결을 하여 그의 주먹 앞에 무릎을 꿇고 의형제를 맺은 조선 팔도에서 모여든 여덟 명의 사내들이 힘을 합하여 종로에서 일본 깡패들을 몰아낸다는 이야기이다. 영화 속에서 김두한을 연기한 장동휘의 투박하고 무뚝뚝하지만 의리 있는 큰 형 캐릭터와 용팔이 박노식의 좌충우돌 유머러스한 캐릭터는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는데, 선이 굵고 호방하며 투박한 조선 사내들의 주먹과 의리의 세계를 그리는데 자신이 있었던 김효천과 거친 사내들의 이야기를 잘 다루지만, 이야기 속에 유머와 서스펜스를 적절하게 배합하는 편거영이 만나 영화를 매력적으로 만든 것이다. <팔도사나이>는 흥행에 성공했고, 이 공로로 편거영은 팔도사나이의 속편 <돌아온 팔도사나이>를 만든다. 편거영이 만든 속편에서는 김두한이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김두한에게 도전 했다가 한방에 나가떨어졌던 조연, 용팔이 박노식을 주인공으로 삼아 일제 강점기의 종로 뒷골목 깡패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1960년대 말 서울로 영화의 배경을 옮겨와 버린다. 그리하여 1960년대 한국 남성의 고단하고 힘든 삶을 아름답고 슬프게 표현한 명장면이 탄생한다. 그것이 바로 박노식이 사과 두 상자를 짊어지고 아현동 고개를 올라가는 신이다. 동대문 시장에서 지개에 사과 두 상자를 짊어지고 신촌의 서강대까지 배달을 가는 박노식의 얼굴과 겨드랑이에 흐르는 땀. 목에 걸친 수건은 후줄근하게 땀에 젖었고, 걸어도, 걸어도 신촌의 서강대는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편거영 감독은 주먹신화 이야기로 속편을 만들지 않고, 1960년대 말 근대화가 최고의 가치인 시대의 소모되는 남성을 그리는데 주력한다. 한때 주먹세계에서 밥을 먹던 박노식은 개과천선하였다. 사랑하는 아내 사미자와 산동네의 판잣집에서 살면서 집 앞 골목에 화로를 놓고 꽁치를 구워먹으며 가난하지만 사람답게 사는 맛을 알아 버린 것이다. 주먹질로 사람을 패고 피를 봐야만 밥이 나오고, 잠자리가 나오며, 술이 나오는 그런 황폐한 세계와 사미자와 사는 이 세계는 전혀 다른 것이다. 박노식은 사미자와 만든 이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사과 두 상자를 짊어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아현동 고개를 걷고 있는 것이다. 포악했던 과거를 버리고, 굽신굽신 고개를 숙여가며 일거리를 얻어내고, 땀을 뻘뻘 흘리며 육체노동을 하는 60년대 한국의 사내들. 편거영 감독은 한국의 깡패 영화에 그 시대 남성들의 비애를 담아낸 것이다. 편거영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그 시대의 남성들이 단순히 깡패영화인 줄 알고 이 영화를 보았다가 감동을 받고 힘을 얻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이 영화로 박노식은 서민들의 애환을 표현하는 사내 용팔이로 거듭나고, 용팔이는 박노식의 가장 성공적인 캐릭터가 되었으며, 한국 남성 영화 속에서 가장 많은 속편을 만들어낸 캐릭터가 되었다. 편거영 감독은 이후 의미 없는 자기복제의 반복인 팔도 사나이 시리즈로 자신의 영화인생을 마감하지만, <돌아온 팔도사나이>의 아현동 고개 장면으로 기억되어야 하는 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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