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변인식 - 평론

by.이선주 2012-08-02조회 3,110

“우리는 아직껏 이 땅에 영화는 있었어도 영화예술은 부재했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영화부재’의 책임을 미래의 우리들 스스로에게 묻고자 한다 … ‘새 세대가 만든 새 영화’ 이것은 구각을 깨는 신선한 바람, 즉 무덤같은 권위주의를 향한 예리한 투창이어야 한다. 과연 이 땅에서 단 한번의 ‘누벨바그’나 ‘뉴 시네마’ 운동이 전개된 적이 있었던가?” (‘영상시대’ 동인 선언문 中, 1975.7.18)

‘한국영화의 예술화운동’을 기치로 내건 ‘영상시대’는 다섯 명의 영화감독(김호선, 이원세, 이장호, 하길종, 홍파)과 한 명의 평론가(변인식)로 구성된 30대 소장 영화인들의 동인회였다. 변인식은 일찍이 ‘비평가의 자세’란 “영화제작에 영향을 끼치고 관객들의 감상수준을 높일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영화평단은 자유항인가: 비평의 모랄과 순수성’ <영화예술> 1965년 12월호) 그는 ‘단문(短文)의 인상비평’이나 ‘사이비 논객’ 이 횡행하는 기성평단의 평론을 신랄하게 비평하거나 수작으로 평가되던 작품들에 대해 비판적 글쓰기(‘<안개>는 예술영화인가’, ‘<장군의 수염>과 영화의 본질’ 등)를 함으로써 크고 작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가 참여했던 ‘<화분> 논쟁’(‘영화적 색맹성: 영화 <화분>이 제기한 문제들’)은 당시 큰 이슈가 되었음은 물론, 한국영화비평사의 주요 논쟁을 넘어 이후 『한국논쟁사』 에 실릴 정도였다.

변인식은 청소년기 미군부대 근처에 살면서 봤던 할리우드 영화들과 고교시절 스승의 소개로 프랑스• 이탈리아 명화들을 접한 후 영화광이 되었고, 대학시절 4•19를 경험하면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그는 고려대 국문과 재학중 ‘영상’이라는 동인회를 조직하고 <고대신문>에 영화평을 기고하는 한편, 유현목, 이강천 등의 감독과 이영일 같은 평론가를 초청해 토론회를 벌이기도 했다. 변인식은 이영일이 발행했던 <영화예술>의 신인평론가 추천으로 등단후(‘영화현실과 포토제니: 이탈리안 리얼리즘과 한국영화’ 1965.6, ‘침식당한 사랑의 신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론’ 1965.7) 활발한 활동을 하던중, 1968년 서울신문의 제 1회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에 ‘한국 문예영화의 허점’으로 당선된다. 말하자면 그는 영화산업의 확대와 매체의 증가로 영화평론가에 대한 필요성이 절실했던 한편 비평의 제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1960년대에, 영화전문잡지의 추천과 신춘문예라는 공인된 절차를 두루 거친 첫 번째 평론가였던 셈이다. 변인식은 수십년간 한국영화평단을 함께 이끈 이영일, 김종원 등과는 다소간의 데뷔시차와 이력의 차이가 있다. 이영일, 김종원이 문학에서 출발해 1960년대 이후 <영화예술>,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의 주축멤버로 오랜 파트너십을 보여왔다면, 그는 영화인생 내내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38년간을 재직해왔고, 1960년대부터 비평활동을 시작했지만 1970년대 들어 더욱 주도적인 활동을 펼쳤다는 점이다. 또한 대학내에서 영화 써클을 만들고 서구영화에 매혹되며 비평과 토론회 등을 통해 공론장을 형성했던 씨네필 출신 평론가의 첫세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변인식은 부조리한 한국영화의 현실에 메스를 가하는 글쓰기로 1972년 한국 최초의 본격영화평론집 『영화미의 반란』을 출간한다. 이 책의 서문에서 그는 “한국영화가 반세기의 역사를 지났음에도 단 한번도 영화미학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거나 반역하려는 의지를 엿볼 수 없었다는” 점을 개탄한다. 이는 전세계의 영화들이 ‘새로움’으로 물결치고 있던 1960•70년대에 최악의 현실로 치달아 가고 있던 당시 한국영화계의 상황에 대한 젊은 평론가의 가차없는 성찰이었다. 이 무렵 그는 소장파 대학교수, 평론가, 저널리스트 20명 정도로 구성된 ‘현대영화비평가그룹(1972년 12월)’을 창립하고 회장직을 맡는데, 이는 하길종의 <화분>의 청룡상 심사를 둘러싸고 보수적인 기존 영화평단과 발생했던 갈등으로 인해 뜻을 같이하는 젊은 동조자들과 함께 새로운 영화를 지향하기 위한 것이었다. 변인식은 또한 1970년부터 발족된 ‘소형영화동호회(발기인: 유현목, 하길종, 정일성, 유영길, 변인식, 최일수)’ 활동을 통해 자신이 재직하고 있던 신일고의 영상을 담은 8mm 교육문화영화 두 편을 각본•감독했다(1972). 소형영화동호회를 통해 배출된 영화감독으로는 배창호, 장길수, 신승수 감독 등이 있다.

1975년 누벨바그와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이상적 모델로 ‘한국영화 예술화’를 내걸었던 ‘영상시대’ 동인들의 활동은 다양한 방면(신인 연출자/연기자/스탭 선발, 관객운동, 순수영화예술동인지 발행 등)에서 ‘새로운 물결’을 갈망하며 한국의 영화문화를 변화시키고자 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변인식에 따르면 1975년에서 78년까지 ‘영상시대’ 기간 동안 동인감독들이 만든 작품 11편중(하길종 <여자를 찾습니다>, <한네의 승천>, 이장호 <그래그래 오늘은 안녕>, <너또한 별이 되어>, 김호선 <여자들만 사는 거리> <겨울여자> 등) 대다수가 대중소설을 영화화했고, 그들이 지향했던 예술영화, 작가영화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변인식이 발행인이었던 계간지 <영상시대>(1977년 여름 창간, 편집위원: 김승옥, 김화영, 안병섭, 최인호, 하길종) 또한 <카이에 뒤 시네마>나 <필름 컬처>를 염두에 두고 한국의 영화문화운동을 꿈꿨지만 2권 발행에 그치는 좌절을 겪었다. 1970년대 ‘영상시대’의 영화운동에 대한 영화사적 평가는 지면을 달리해 논의되어야겠지만 이들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는 당대 한국영화계가 직면했던 ‘새로운 것과 낡은 것’, ‘예술과 산업’, 그리고 ‘세계적인 것과 지역적인 것’ 사이의 딜레마들이 존재하고 있다. 

변인식은 왕성한 필력으로 40여년 동안 두 권의 평론집(『영화미의 반란』 『영화를 향하여 미래를 향하여』) 과 수십 편의 논문을 쓰고, 현대영화비평가그룹 회장, 한국영화평론가협회장, ‘영상시대’ 동인활동과 잡지<영상시대> 발행, <영화평론> 발행, 한국소형영화동호회, 동서영화연구회, 대학강의, 영화제 심사위원 활동 등을 하면서 2000년 신일고등학교의 교감으로 명예 퇴임했다(홍조근정훈장 수상). 제자들에 따르면 교단에서의 변인식은 학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액션 배우이자 영화이야기꾼, 한 마디로 ‘영화에 미친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서구 모던 시네마와 이론들의 강렬한 세례를 받은 변인식의 비평세계가 한국의 대중적 장르영화들을 논하는 데 있어 얼마나 적절한 것이었는지는 다소 생각해 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또한 변인식을 비롯한 ‘영상시대’ 동인들이 제기했던 ‘새로움’의 의의와 한계, ‘한국적 리얼리즘’ 전통과의 단절과 지속의 역사성은 1970년대와 이후 영화(비평)사를 구성하는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영화주의적(씨네필)이고 객관적인 비평을 추구했던 그의 비평을 관류하는 비평가로서의 자의식과 논쟁적 글쓰기, ‘영화미학’에 대한 천착 등은 주제비평과 인상비평이 주류를 이뤄온 한국영화평단에 비평정신이 살아있는 글쓰기로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 글: 이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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