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진과 이상한 기운 아워 바디, 2018

by.조혜영(영화평론가) 2021-04-23조회 6,444

KMDb 칼럼 연재 제안에 ‘한국 여성영화의 정동들’이라는 주제를 떠올린 건 <아워 바디> 때문이었다. <아워 바디>는 어떤 감정이나 의미로 딱 떨어지게 설명하기 어려운 영화다. 처음 봤을 때 인물의 행동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없어 답답함을 느끼게 했던 이 영화는 내게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자꾸 모순되어 보이는 말들을 연이어 덧붙이게 했다. <아워 바디>는 심신의 소진에 대해 말하는 가하면 함께 달리는 움직임 속에서 이상한 기운이 넘쳐나는 몸들을 전면화하고, 관습적인 이성애 섹스를 스크린에 반복 재현해 가시화하면서도 영화 전체는 퀴어한 섹슈얼리티를 관통한다. <아워 바디>는 영화와 관람자인 ‘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사이-공간에서 영향을 미치며 형질전환을 감행한다.

정동(affect)은 “몸과 몸(인간, 비인간, 부분-신체, 그리고 다른 것들)을 지나는 강도들에서 발견되며, 또 신체와 세계들 주위나 사이를 순환하거나 그것들에 달라붙어 있는 울림에서 발견된다. 의식화된 앎 아래나 옆에 있거나 또는 아예 그것과는 전체적으로 다른 내장의 힘들, 즉 정서 너머에 있기를 고집하는 생명력”에 부여하는 이름이다(<정동이론> 14쪽). 이러한 맥락에서 <아워 바디>는 스크린의 정동 개념을 적용하기에 적당한 사례로 보인다.
 
아워바디, 통화하며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는 최희서

대학졸업 후 서른 살이 넘도록 좁은 방에 갇혀 고시에만 매달려온 자영(최희서)은 더 이상 공부도 시험도 볼 수 없는 상태에 처한다.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만 사용되어온 심신은 목표가 사라지자 갈 곳을 잃는다. 그야말로 소진(burn-out)되어 버린 것이다. 여기서 <아워 바디>는 일원론을 주장한다. 소진은 마음과 몸, 내용과 형식을 동시에 소멸시킨다. 어떤 정해진 그릇이 있어 그 안의 내용물이 비워지고 다시 채우면 그만인 것이 아니다. 소진된 자영은 아예 존재의 감각 자체를 잃어버린다. 자신의 존재를 소생시키기 위해 자영은 달리기를 선택한다. 갓 태어난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이 자영은 생동감과 활기로 존재감을 뿜어내는 현주(안지혜)를 따라 달리기 시작한다. 바닥을 딛는 발바닥, 전진하는 다리, 추진력을 얻기 위해 움직이는 팔, 현주를 뒤쫓는 눈, 그리고 현주의 기를 받는 내장감각까지 그렇게 자영의 심신은 하나 둘 다시 생성된다. 영화는 분절된 신체의 클로즈업과 그 부분-신체들을 쫓는 주관적 시점들을 통해 존재 감각이 통일된 전체의 방식이 아니라 부분적이고 파편적으로 생성됨을 표현한다. 그것들은 각기 자기 용도를 처음 발견한 부분-신체들이다. 고시공부가 아닌 다른 용도를 위해 사용되는 몸을 인지하고 이질적인 에너지를 가진 타인과 조우하며 자영도 소진된 심신을 다시 만들어 갈 힘을 얻게 된다.

하지만 <아워 바디>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복잡한 욕망의 문제를 끌어들인다. 자영이 소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무엇일까. 자영의 심신이 단일한 목표만을 위해 사용되었기에, 목표가 사라지면 그에 종속된 심신도 함께 소멸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그 목표마저 자기의 욕망인지 아니면 타자에 의해 주입된 욕망인지도 구분되지 않는다. 엄마와 전 애인은 ‘사람구실’이라는 말로 그녀의 욕망을 가두려 한다. 정규직 혹은 공무원 같은 정해진 궤도를 걷지 않는 이들은 의미를 갖지 못하고 실패로 낙인찍히며 존재의 가치를 끊임없이 의심받는다.
 
아워바디, 노을이 지는 다리 위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얘기하는 최희서와 안지혜

영화는 소진되지 않는 존재로 자영을 변신시키기 위해 급진적으로 방향을 튼다. 갑작스러운 현주의 죽음 이후 자영은 기이한 일을 겪는다. 방바닥에 누워 있는 자영 옆으로 나체인 현주가 눕는다. 균형이 잘 잡힌 현주의 탄탄한 뒷모습이 흡사 외계생물처럼 빛이 난다. 그리고 무언가를 빨아들이는 소리와 함께 현주는 사라진다.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환상적인 방식으로 연출된 이 장면은, 외계인이 지구침공을 위해 지구인의 마음과 신체에 침투해 구분불가능한 이질적인 신체들이 하나의 존재에 공존하게 되는 <신체강탈자의 침입> 같은 SF 호러를 연상시킨다. 자영은 현주를 삼킨 것일까, 현주가 자영을 차지한 것일까? 아니면 둘의 공존인가? 현주는 달리기를 힘들어하는 자영에게 자신의 ‘기(氣)’를 빨아먹으며 따라오라고 말한다. 함께 달리기에서 그녀들은 서로의 에너지와 리듬을 나누고, 신체의 경계가 무너지고 살‘들’이 구분되지 않는 체험을 한다. 마찬가지로 이 장면은 자아와 타자가 구분되지 않는 ‘아워 바디(our body)’가 생성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또는, 관습적인 성기 중심의 이성애 섹스에서 벗어나 생각해 보면, 매우 위험하고도 에로틱한 퀴어한 섹스 장면일 수 있다. 외계인과 지구인의 섹스 장면처럼 말이다. 만약 <아워 바디>에 이성애 섹스 장면들만 가시화 되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퀴어 에로틱한 순간들을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이 된다. 이 순간을 통해 자영은 하나의 존재에 다양한 욕망과 미결정된 (비)의미를 품는 다양체가 된다.

이후 영화 후반부에서 자영은 ‘자기 몸에 도취되지 않는 나이든 남자와 자고 싶다던’ 현주의 은밀한 욕망을 실천한다. 그리고 자신이 바라는 길이 아니라던 인턴과 정규직 되기도 시도해본다. 이렇게 타자의 욕망들을 실험하고 수행하며 욕망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경험하는 과정을 거친다. 동일한 행위라도 수행하는 주체가 달라지면 동일한 의미로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으며, 때때로 자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과 구분불가능하기도 한다. 우리의 삶과 존재는 고정된 약호들 이상이다. 결국 자영은 현주의 질문을 경유해 끌어낸 자기의 성적 욕망을 실천한다. 고급 호텔에서 어떤 의미나 목표도 두지 않고 혼자 자위를 즐기는 자영은 이미 혼자가 아니며 둘 이상이다. 다양체로서의 자영은 고정된 범주와 이분법을 해체하며, ‘아워 바디’로서의 강도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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